< 284화. 가시밭길. (10) >
자타공인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축구 구단인 포츠머스.
그 명성에 걸맞게 평범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특이한 선수들이 많았다.
무식과 힘의 조쉬 킹.
오만과 자신감의 델리 알리.
독설과 침착의 칼빈 필립스.
바른생활 어른, 케빈 도슨.
축구 괴물, 에링 홀란드.
모범생, 데클란 라이스.
악동, 마리오 발로텔리.
동방의 주작, 도봉산.
등등. 요상한 성격을 가진 선수들이 이렇게 한 팀에 모인 게 신기할 정도다.
덕분에 이런 특이한 군상이 잔뜩 모인 포츠머스를 이끄는 소하는 항상 같은 질문을 많이 받았다.
“선수 중에서 가장 독특한 선수는 누구인가요?”
많은 사람은 조쉬 킹이나 마리오 발로텔리를 꼽을 거라 예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소하는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단호한 어조로 늘 한 선수를 꼽았다.
“잭 해리슨이요.”
의외의 인물이 튀어나왔다.
세간에 알려진 잭 해리슨이라면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잭 해리슨.
포츠머스에서 마이클 반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왼발의 전문가.
모하메드 살라의 등장 이후 후보로 떨어졌지만, 프리미어리그의 중위권 팀이라면 확고한 주전을 따낼 실력가.
경기장 안팎으로 프로의식이 철철 넘치는 프로선수의 모범.
실력과 인성,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소하는 그를 떠올릴 때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독한새끼. 아마도 저 자식은 미래에서 날 암살하려고 보낸 살인 기계야….”
간덩이를 배 밖으로 내밀고 다닌다는 그 소하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도 그럴 게, 얼마 전 잭 해리슨의 고발 때문에 벌금을 냈었기 때문이다.
때는, 한참 포츠머스가 엄청난 일정에 허덕이던 연말 연초.
경기와 더불어 개정을 위한 공작 때문에 하루 3~4시간도 자지 못해 피곤이 극에 달한 소하가 늦잠 자고 훈련에 지각했다.
늦은 시간은 단 5분.
선수들도 이해했고 잭 해리슨도 이해했다. 처음에는 말이다.
하지만 소하는 이틀이나 더 지각했고 기어코 잭 해리슨이 나섰다.
“감독님. 지각은 벌금입니다.”
“응…?!”
화들짝 놀라는 소하를 가볍게 무시한 잭 해리슨은 무표정한 얼굴로 평소처럼 딱딱하게 정론을 퍼부었다.
“감독님께서 무척 바쁘시다는 것쯤은 다 압니다. 하지만 구단의 모범이 되셔야 할 분이 자주 지각하신다면 팀의 기강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
“존경하는 감독님께서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그래도 사정을 봐줘야 하지 않겠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건 안 될 말입니다. 하나씩 사정을 봐주다 보면 결국 팀 전체가 문란해질 겁니다.”
“….”
물론 프로의식이 투철한 포츠머스 선수들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반박의 여지가 없는 정론이었다.
심지어 선수도 아닌 팀을 지휘하는 감독의 근무 태만이다.
원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
감독이 자주 지각하면 결국 선수들도 ‘감독도 하는데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하는 잭 해리슨의 고발에 두 손 들고 항복해버렸다.
“미, 미안. 내, 내가 어떻게 할까…?”
“정해진 규칙을 따르시면 됩니다.”
“규칙…?!”
“네. 우리 팀에는 지각에 관한 규정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
“그 규칙에 따라주시면 됩니다.”
“….”
포츠머스의 지각 규정은 다음과 같다.
1회, 경고.
2회, 엄중 경고.
3회, 벌금. (5만 파운드.)
4회, 벌금 및 징계. (벌금은 시가.)
5회 이상, 방출명단 등록 및 주급 삭감.
기타: 지각 횟수는 초기화되지 않음. 이적했다가 돌아와도 누적 유지.
소하가 직접 작성한 굉장히 지독한 규정이었다.
벌금이 5만 파운드라니.
한화로 1억 원에 가까운 폭탄이었다.
즉, 잭 해리슨은 3회나 지각을 했으니 벌금을 내라고 말한 거다.
“아, 알았어….”
“역시 아주 훌륭하고 다른 감독들의 본보기가 될 모범적인 감독님입니다. 다시 한번 존경심이 깊어지는군요.”
“….”
돈 아끼려고 탕비실을 터는 가난뱅이 감독, 소하가 기어코 1억 원짜리 벌금을 냈다.
어쩔 수 없었다.
소하로서는 외통수에 몰렸다.
만약 내지 않는다면 자기가 만든 규칙을 자기가 어기는 파렴치한 인간쓰레기가 되는 것 아닌가!
선수들의 사기에도 좋지 않았고 소하 본이 품고 사는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독한새끼….”
눈물을 머금고 벌금을 낸 소하!
코인을 사들이느라 엄청난 수입에도 불구하고 아득바득 6년간 모은 비상금을 모조리 털어냈다.
그야말로 창자를 끊어내는 고통!
피눈물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지만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역시 감독님이야.”
“존경심이 깊어져.”
“하는 행동은 양아치, 혹은 미치광이지만 알고 보면 프로 그 자체이시지.”
솔선수범해서 규칙을 지키는 소하의 모습에 다른 선수들마저 존경심이 깊어지긴 했다.
그래도 영혼을 잃어버린 듯한 공허한 마음을 숨길 순 없었다.
하여튼, 잭 해리슨은 소하를 비롯한 모두가 두려워하는 군기반장이었다.
하지만 포츠머스의 누구도 그를 싫어하진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은 종종 복장을 터지게 만들 때도 있었지만, 항상 옳았고 힘든 일임을 알았으니까.
옆에서 계속 짖어 준다는 건 생각보다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생긴 그의 별명은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 기계. 가장 독특한 선수라고 입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조쉬 킹과 델리 알리를 필두로 한 악동들은 잭 해리슨을 귀신같이 무서워했다.
이처럼 포츠머스에서 가장 독특한 선수인 잭 해리슨.
중요한 경기에서 모처럼 선발 출장 기회를 잡은 그의 활약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
모든 선수가 그렇듯, 대부분의 선수는 경기전에 자신만의 마인드 컨트롤 방법이 따로 있다.
조쉬 킹이나 아다마 트레오레처럼 미친 듯이 쇠질을 한다거나,
케빈 도슨처럼 부인과 함께 치유계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델리 알리처럼 자신의 스페셜 영상을 보거나,
이미 은퇴한 찰스 말로리가 주점에서 크랜베리 주스를 마시듯이 말이다.
이렇듯 포츠머스의 선수들은 각자의 독특함에 어울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이 있었고, 잭 해리슨 또한 마찬가지였다.
“으음….”
포츠머스시의 한적한 골목에 자리 잡은, 고적한 분위기의 한 개인 카페.
관광객도 별로 찾아오지 않고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요컨대 단골 장사를 하는 평범한 카페다.
그 단골 중에서도 단골인 잭 해리슨은 그날도 커피의 풍미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로봇, 전쟁 기계, 스카이넷 같은 흉흉한 별명을 가진 그였지만, 그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바로 카페에서의 커피 한 잔이었다.
별명과는 전혀 딴판인, 어찌 보면 고상해 보일 정도의 마인드 컨트롤.
수년 전부터 버릇처럼 해왔던 방법은 어느새 삶의 일부분이 된 상태였다.
조용하고 아늑한 음악에 맞춰 커피를 마시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평안해졌던 잭 해리슨이었다.
아쉽게도 오늘만큼은 그 평온이 유지되지 못했다.
“뭐야, 이 시간에도 문을 연 카페가 있잖아? 아저씨! 아아 한 잔 주세요!”
난데없이 카페를 들이닥친 불유쾌한 들뜬 목소리.
좋은 원두를 사용하는 이곳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양키스러운 주문이 울려 퍼졌다.
마치, 미슐랭 별 세 개를 자랑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돼지고기구이 1파운드를 주문한 듯한 불협화음이다.
“…흐음.”
찌릿.
불상같이 자비로웠던 잭 해리슨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우아한 분위기와 좋은 원두를 즐기던 잭 해리슨에게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해서, 고개를 들어 올린 잭 해리슨.
주문은 그렇다 쳐도, ‘정숙’이란 예절에 대해 일장 연설을 토할 준비가 끝났다.
하지만, 차마 그의 입술을 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의 정체는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
“음? 뭐야, 포츠머스의 로봇공학연구소에서 만든 잭 해리슨이 이 시간에 여기에 있네?”
포츠머스의 동료인 존 말로리가 그 주인공이었다.
존 말로리와 잭 해리슨.
포츠머스의 유소년에서 같이 올라온 선수는 아니지만, 입단 동기다.
소하가 부임하기 2년 전, 지금으로부터 8년 전부터 한솥밥을 먹은 질기고 질긴 인연을 자랑하는 사이였다.
그렇다고 친구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느낌이다.
존 말로리야, 두루두루 모두와 친하게 지냈지만, 잭 해리슨은 사람을 대하는 데에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먼저 다가가는 사람은 존 말로리였다.
이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읏차. 자리에 앉아도 되지?”
이미 앉았다.
허락도 없이 자리에 앉은 존 말로리는 능청스럽게 말을 술술 뱉어냈다.
“그나저나 내일 중요한 경기가 있는 친구가 이 시간에 여기서 왜 궁상을 떨고 있어?”
“늘 하던 일입니다. 그리고 남 일 말하듯이 하는데, 당신도 같은 팀 아닙니까?”
“나야, 내일 명단제외니까 그렇지.”
보통 선수였다면 자존심 상해했을 명단제외를 웃으며 이야기하는 존 말로리.
전에는 억지로 밝고 쾌활한 척 연기했다면, 지금은 무척이나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에, 잭 해리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응? 무슨 소문?”
“이번 시즌을 끝으로 포츠머스를 떠나 다른 팀으로 이적하겠다고 감독님이랑 약속했다면서요?”
“아, 그거? 그렇지. 아마 2부리그로 갈 거 같아. 거기서면 포츠머스에서 만년 주전자만 나르던 나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후후.”
“축하드립니다. 진정으로 원하던 걸 찾아내셨군요.”
잭 해리슨은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8년간 고락을 함께 보냈던 동료로서.
혹은 잭 해리슨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타인이자 친구일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하하. 고맙네. 그나저나 참 묘하네. 네 입에서 축하한다는 말도 듣고.”
감정표현이 극히 적었던 잭 해리슨이 진심을 보이자 존 말로리는 부끄러워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얼마간을 괜히 머쓱 거리던 존 말로리는 이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침묵에 빠진 잭 해리슨에게 물었다.
“…그러는 넌?”
“…무슨 말입니까?”
“너도 진짜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우리가 모두 꿈꾸는 꿈 말고도.”
존 말로리의 의문에 잭 해리슨은 모처럼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훗.”
정말 보기 드문 모습이었기에 존 말로리는 화들짝 놀랐다.
지난 8년간 이 로봇이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늘.
이걸 소하에게 말한다면 자다가 개꿈을 꿨냐고 갈궈질 터였다.
‘그나저나…. 별로 어색하진 않네.’
처음 보는 잭 해리슨의 미소였지만, 오히려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웃으니까… 사람 같네.”
“전 원래 사람입니다. 평소에 절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냉혈 로봇.”
“…너무하시는군요.”
“그나저나 왜 웃은 거야?”
존 말로리가 재차 묻자 잭 해리슨은 천천히 절도있게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전 이미 꿈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응…?”
“제가 바란 건 한가지였습니다. 눈에 띄지 않고 절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제 꿈은 완성되었습니다.”
“….”
존 말로리는 금방 잭 해리슨의 말을 이해했다.
잭 해리슨은 보다시피 정말 특이한 인간이다.
감정표현도 적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그 누구라도 무는 인간이다.
당연하게도 보통 이런 인간은 평범한 사람들의 배척을 받길 마련이다.
불편하니까.
어색하니까.
귀찮으니까.
하지만 포츠머스는 달랐다.
그들은 잭 해리슨이란 독특한 인간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자연스럽게 대해줬다.
그들은 잭 해리슨만큼이나 톡톡 튀는 인간들이었기에 그의 이상함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잭 해리슨에겐 포츠머스란, 가족이란 집 이외에도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였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바라던 꿈이었다.
축구를 시작한 것도 평범한 삶 속에선 자신이 머물 곳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8년 지기 친구도 한 명 생기지 않습니까? 그걸로 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큼큼.”
그답지 않게 얼굴을 조금 붉히는 잭 해리슨의 모습에 존 말로리는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친구라.
평상시였다면 앞에서 이런 간질간질한 말을 내뱉는 사내자식의 머리통을 후려쳤을 거다.
하지만 그 상대가 잭 해리슨이었기에 존 말로리는 마음속에 고양감이 가득 찼다.
저 감정표현 없는 인간이 저리도 감정을 내비치다니. 왠지 모르게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자부심마저 생겼다.
“더 이룰 게 없는 저입니다. 그래서 제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언제 감정을 보였냐는 듯, 다시 원래의 차갑고 냉혹한 표정으로 돌아온 잭 해리슨이 앞으로의 목표를 말했다.
“뭔데?”
“제 꿈을 이루게 해준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전 팀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올려놓고야 말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소하에게 벌금을 강요할 때보다도 단호한 잭 해리슨의 맹세에 존 말로리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넌 할 수 있을 거야.”
존 말로리의 목소리에는, 그의 이상하고도 독특한 동료이자 친구에 대한 강한 믿음이 담겨있었다.
이 친구라면 분명, 팀을 위해 기필코 가시밭길을 뚫어낼 거란 믿음이었다.
< 284화. 가시밭길. (10)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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