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화. 가시밭길. (4) >
리오넬 메시가 드디어 공을 잡은 순간. 포츠머스의 선수들은 다 함께 자이로드롭이라도 탄 듯 아랫배가 오싹거렸다.
‘어떤 플레이를 보여줄까?’
오늘 리오넬 메시와 자주 붙게 된 칼빈 필립스는 서둘러 리오넬 메시에게 달라붙었다.
‘다리를 뻗어볼까?’
툭, 툭. 아침체조라도 즐기는듯한 가벼운 드리블 속에서 춤추는 공은 너무나도 쉽게 뺏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경국지색의 미녀가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듯한 장면.
참을성 없는 평범한 어린 선수들이라면 금방이라도 발을 쭉 뻗어 태클을 시도할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하지만 칼빈 필립스는 10대 시절부터 포츠머스에서 엄청난 수의 경기를 뛴 베테랑 선수가 아니던가.
‘참자.’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적당히 다른 선수들의 지원을 올 때까지 견제만 하기로 작정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칼빈 필립스는 유혹을 견뎌내었다.
훌륭한 판단!
무서울 정도의 냉정한 침착성!
왜 칼빈 필립스가 어린 나이부터 잉글랜드의 국가대표에 불려갔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
이었을 텐데.
분명 그랬을 텐데.
“어?!”
칼빈 필립스는 짧은 침음성을 흘렸다.
적당히 거리를 벌리며 지연하는 판단은 좋았으나 상대가 없었다.
말 그대로 칼빈 필립스의 시야에는 목표로 삼았었던 리오넬 메시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어디로 사라진 걸까.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놓쳐버렸다.
생각과 인지가 이어지는 단 찰나의 순간.
방심이라고, 집중력을 잃었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1초의 반의반의 반.
눈 한번 깜빡였을 뿐인데 리오넬 메시라는 위대한 축구의 신은 이미 칼빈 필립스의 왼쪽 측면을 후벼 파고 있었다.
‘미친.’
이를 앙다문 칼빈 필립스는 서둘러 리오넬 메시를 제지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봤지만 늦었다.
낮고, 빠르고, 민첩하며 강했다.
전성기 시절보다 육체적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다는 데도 한줄기 벼락같은 드리블이었다.
이미 옆구리를 내줘버린 칼빈 필립스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리오넬 메시가 칼빈 필립스의 왼쪽으로 파고들며 경기장 중앙으로 들어갑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어느새 옆구리를 베어버렸어요! 따라가 보지만 이미 늦었어요!]
칼빈 필립스를 쉽게 꺾어버린 리오넬 메시는 멈추지 않았다.
왼쪽 수비형 미드필더를 녹였다면 다음 상대는 왼쪽 수비수.
그렇다. 포츠머스의 기둥이자 주장이며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왼발 수비수로 거듭난 케빈 도슨이 다음 상대였다.
이미 중앙으로 더욱 파고들 코스를 막아두고 무게중심을 제대로 잡아둔 상태다.
단단한 암반 위에서 세워진 거대한 석상 같은 자태!
‘중앙은 내주지 않는다.’
중앙만은 막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였다. 리오넬 메시에게 중앙을 내준다는 뜻은 자유자재로 슛 각을 내준다는 뜻.
요컨대, 태풍이 다가오는데 창문을 모조리 열어둔 격이다.
즉, 중앙만 막는다면 슛을 할 각도가 나오지 않았고, 플레이의 방향을 측면으로 강제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
리오넬 메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케빈 도슨이 내민 협상을 받아들이고 측면으로 갈 것인지,
혹은 또다시 마법 같은 플레이로 중앙을 노려볼 것인지.
자신감이 넘치는 선수라면 후자를 선택했을 테고, 합리적인 선수라면 전자를 선택할 거다.
하지만, 리오넬 메시는 자신감도 넘쳤으며 매우 합리적이었고, 특별했다.
‘됐다.’
케빈 도슨은 리오넬 메시가 측면으로 향하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미 측면에서는 앤디 로버트슨이 협공을 하기 위해서 부리나케 뛰어오는 중이다.
이대로 측면에 가둬서 공을 뺏는다면 단순한 촌극에 지나지 않는다.
크로스를 하더라도 오른발로 올리기엔 어려울뿐더러 이미 늦었다. 했다 하더라도 상대에게는 헤더에 능한 선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최적, 최고의 플레이!
그러나 리오넬 메시는 리오넬 메시였다. 케빈 도슨의 협상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지만, 마법 같은 플레이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툭.
빨랐다. 리오넬 메시의 크로스는 케빈 도슨의 예측보다 반 박자 이상 빨랐다.
“?!”
왜일까.
이유를 알 수 없어 얼굴을 찡그린 케빈 도슨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가 계산한 미래는 ‘오른발’로 크로스를 그리는 상황뿐이었기 때문이다.
[리오넬 메시가 빠르게 왼발 아웃프런트 킥으로 크로스를 시도했습니다!]
[포츠머스의 수비수들은 리오넬 메시를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했을 텐데요. 환상적인 플레이입니다!]
-슈욱.
리오넬 메시의 날카로운 왼발 아웃프런트 크로스는 바깥쪽으로 안쪽으로 휘어져 날아들었다.
크로스의 목표는 수비의 틈을 제대로 파고든 루이스 수아레스!
골 결정력은 저 하늘나라로 사라졌지만, 아직 움직임만은 여전히 세계 최고급인 루이스 수아레스의 좋은 움직임이었다.
-팍!
펄쩍 뛰어오른 루이스 수아레스는 기어코 공에 머리를 가져다 댔고,
-텅!
회심의 헤더는 골대를 강하게 때리며 골로 이어지지 않았다.
포츠머스로서는 불행 중 다행!
움직임만은 좋았지만, 골 결정력이 굉장히 아쉬운 루이스 수아레스의 모습을 한 장면에 다 보여준 순간이었다.
“···.”
가슴을 쓸어내리는 포츠머스의 선수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리오넬 메시에게 혼쭐이 난 칼빈 필립스는 문뜩 소하의 말이 떠올랐다.
‘안 되겠다 싶으면 데클란 라이스랑 자리를 바꿔라.’
당시에만 해도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만만했지만 빠르게 생각을 바꿨다.
“야, 자리 바꾸자.”
“알았어.”
순순히 패배를 시인하고 데클란 라이스와 자리를 바꾼 칼빈 필립스!
다른 건 몰라도 수비력만큼은 데클란 라이스가 본인보다 뛰어났기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칼빈 필립스의 장점 중 하나였다.
일류 선수들이라면 모두가 품고 있을 드높은 자존심을 내팽개치는 저 냉철한 침착성과 판단력.
남들에게 쓴소리를 자주 하는 만큼 본인에게도 엄격했기에 칼빈 필립스만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다른 선수들이라면 패배를 시인하고 쉽사리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을 테니까.
혹은, 칼빈 필립스에게 리오넬 메시란 존재가 너무나 두려웠을지도 몰랐다.
‘뭔가···. 뭔가 다르다···.’
아주 잠깐 상대했을 뿐이었지만 리오넬 메시란 선수는 근본부터가 다른 느낌이었다.
칼빈 필립스 또한 ‘초’가 몇 개는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초일류선수이자 엘리트 선수지 않던가.
10대 시절부터 프로 경기에 나서며 20대가 되자마자 잉글랜드 국가대표에 승선한 진짜배기 엘리트다.
저 해변의 무수히 많은 모래처럼 많은 축구 선수 중에서도 한 줌밖에 없는 특별한 선수란 말이다.
그런데, 그런 엘리트 선수인 칼빈 필립스로서도 리오넬 메시에게만은 벽이 느껴졌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서 다시 축구를 해도 넘을 수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는 높디높은 벽!
‘마치···. 축구의 신이 리오넬 메시라는 이름을 쓰면서 뛰는 것만 같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저 모습도 전성기에서 많이 내려온 실력이라던데, 전성기에는 대체 어떤 괴물이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여튼, 속절없이 밀리던 바르셀로나는 단 한 번의 마법으로 분위기를 되찾았다.
지금부터가 진짜 승부의 시작이었다.
***
포츠머스의 더블 볼란치, 그러니까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는 전략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팀의 형태를 유지하고, 색을 잃지 않으며 수비적으로 운영할 방법.”
알다시피 포츠머스는 수비 중심의 축구와 썩 어울리지 않는 팀이다.
그래서 소하는 최대한 본연의 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수비할 방법을 뽑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성공했다.
조금 속도가 느려졌을지라도 포츠머스는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캄 노우에서 제법 우위를 가졌다.
수비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신중하다.’라고 표현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바르셀로나를 상대할 좋은 전략을 가져온 성소하 감독입니다.]
[수비와 공격. 변화와 유지. 이 사이의 절충안을 제대로 마련했습니다. 준비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을 텐데, 역시 성소하 감독이군요.]
장내 해설과 아나운서는 물론이고, 스페인의 축구관계자들도 훌륭한 대응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리오넬 메시를 막기보단 리오넬 메시에게 가는 공을 막는 전략은 많은 팀이 시도했었기에 특별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막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 리그 8강에 올라온 팀이 시도하기엔 과감한 전략임은 부정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여느 팀 못지않게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줬기에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90분 내내 리오넬 메시에게 가는 공을 막을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이 문제였다.
바르셀로나가 어디 오지에 처박혀 있는 시골 촌구석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 아니지 않던가.
리오넬 메시를 제외하고서도 비등비등한 전력을 자랑하는 근본 있는 강팀임을 증명하듯 몇 번은 공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몇 번은 포츠머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날카로운 비수였다.
[골입니다! 골! 리오넬 메시! 이번에는 동료들을 영리하게 이용해 수비진을 허물고, 아론 람스데일을 무너뜨립니다!]
[후반 25분! 리오넬 메시가 멀티 골을 넣습니다! 루이스 수아레스와 좁은 공간을 잘게 잘게 썰어 들어가면서 기어코 골로 마무리 짓네요.]
후반 25분, 2-0.
후반 5분경 엄청난 드리블로 홀로 골을 만들어낸 리오넬 메시가 이번에는 동료들을 적절히 이용해 또다시 골을 만들어냈다.
포츠머스 선수들의 인지를 제대로 속인 골이었다.
이미 한번 마법을 목격한 포츠머스 선수들의 경계심을 이용했다.
자신에게 모든 시선이 쏠리자, 그 시선의 틈을 이용한 리오넬 메시의 플레이메이킹 이었다.
“···후우.”
두 번째 골이 들어가자 소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손을 떨었다.
잘하는 선수인 거는 알았다.
전설적인 선수인 것도 알았고,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선수인 것도 알았다.
그래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리오넬 메시가 전설이라면, 포츠머스 또한 전설로 향하는 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전설인 존재와 전설이 되려는 존재의 힘 차이는 명백했다.
리오넬 메시는 또다시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해주었다.
-삑!
리오넬 메시를 막으려다가 옐로카드 한 장을 적립한 데클란 라이스가 후반 40분경 반칙을 범했다.
다행스럽게도 두 번째 카드는 나오지 않았지만 직접 프리킥을 시도하기엔 너무 좋은 위치다.
페널티 에어리어의 오른쪽 부근.
왼발로 여러 가지 킥을 시도하기에는 굉장히 좋은 자리다.
[키커로 리오넬 메시가 준비합니다.]
[당연한 선택입니다. 오늘 그의 컨디션은 최고거든요.]
장내 해설과 아나운서의 말을 옳았다. 아니, 거의 유능한 예언자의 예언과도 같았다.
-휘리리리릭.
자신감 있게 허공을 가른 리오넬 메시의 프리킥은 아론 람스데일이 뭘 해보기도 전에 골네트에 처박혔으니까.
-철썩.
완벽한 왼발 프리킥이었다.
골키퍼로서는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야신존’으로 빨려 들어가는 우아한 곡선!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은 이상 그 어떤 골키퍼가 와도 막기가 불가능한 프리킥이었다.
이로써 경기는 3-0, 바르셀로나가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씨발.”
부들부들.
조금 전부터 덜덜 떨리던 소하의 손은 이제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떨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포츠머스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
-삑! 삑! 삐-익!
경기가 종료되었다.
포츠머스와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와 포츠머스의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의 결과는 3-0이었다.
홈경기를 치른 바르셀로나의 압도적인 승리!
분명, 잘 싸웠던 포츠머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3-0이었고, 이로써 4강에 진출한 팀은 정해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3골 차이라니.
아무리 2차전이 프래튼 파크, 포츠머스의 홈구장에서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너무 힘들다.
실수로 한 골이라도 헌납한다면, 원정 다득점 규칙 때문에 5골이나 넣어야 4강에 진출한다.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5골이라니?
아니, 애초에 무실점으로 경기를 이어나간다고 해도 최소한 3골을 넣어야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였다.
하지만 경기 직후 기자회견장에 나온 소하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전 리오넬 메시에게 졌습니다. 하지만, 제 선수들은 아직 지지 않았어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모습만은 믿음직스러웠다.
그러나 아무리 희망차게 생각해보아도 승리를 하기에는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렇다. 이제, 포츠머스가 4강전에 진출하기 위해선 기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포츠머스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기적을 써 내린 팀.
한 번 더 기적을 보여줘야만 했다.
< 278화. 가시밭길.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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