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가시밭길. (2) >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 대진표에 축제 분위기 같던 포츠머스시는 순식간에 장례식장으로 변했다.
“후후. 구단 창단 최초의 8강 진출인데, 이 정도면 만족이지.”
“잘했어. 이 정도면.”
“바르셀로나라니···. 그···. 리오넬 메시가 군림하는 팀이잖아?”
“그냥 챔피언스 리그는 여기까지 하고, 리그 우승에 집중하는 게 좋아 보여.”
“바르셀로나 다음은 바이에른 뮌헨이야. 답이 없지.”
1년 내내 왁자지껄 떠들던 포츠머스의 술집들은 자조적인 웃음으로 뒤덮였다.
솔직히 해도 너무했다.
제법 할만한 팀이 있었음에도 유벤투스에 이어 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 뮌헨이라니.
뭐, 포르투가 바이에른 뮌헨을 꺾을지도 몰랐지만 그건 일단 바르셀로나를 넘고 나서 생각해볼 일이다.
그리고 그 바르셀로나에는 그 선수가 아직도 펄펄 날아다니면서 스페인 리그를 폭격하고 있었다.
[리오넬 메시.]
18-19시즌을 기준으로 5개의 ‘발롱도르’를 전시함에 진열한 축구의 신!
17-18시즌까지 바르셀로나에서 637경기, 552골, 213도움이라는 눈을 의심케 하는 기록을 써 내린 축구의 괴물!
33개의 메이저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브라질의 축구황제, 펠레에 가장 근접한 현역 선수!
명실상부한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고 이 선수가 써 내린 역사 앞에서는 포츠머스라는 팀 따위는 길가에 차이는 돌멩이보다 못한 존재였다.
이 사실은 포츠머스의 서포터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았고, 덕분에 자포자기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나저나 너무 하지 않냐? 요즘 우리 팀을 보면 무슨 도장 깨기를 하는 것만 같아.”
포츠머스 항구의 한 술집에서 한 술꾼이 잔을 거세게 내리치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이미 얼굴이 잔뜩 붉어져, 백인인지 홍인인지 구분할 수 없는 동료가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를 내었다.
“뭔, 조쉬 킹이 미적분 하는 소리야?”
쉽게 말해, 무슨 개소리라는 뜻이다.
조쉬 킹이야 포츠머스의 로컬 보이인지라 그의 전설적인 돌대가리는 포츠머스에서 이미 유명해진 지 오래였다.
“아니, 그렇잖아. 야, 커뮤니티 실드에서는 맨체스터 시티랑 붙었잖아?”
“그렇지.”
“그런데 맨체스터 시티가 어떤 팀이야?”
“존나 센 팀이지.”
“보통 센 팀도 아니고 지난 시즌 승점을 100점 가까이 쌓으며 우승한 팀이라고. 그러니까, 프리미어 리그에서 제일 센 팀인 거야.”
확실히, 맨체스터 시티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가장 강한 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 시즌은 조금 주춤거릴진 몰라도 선수단 구성만 보면 단연코 최강의 팀이었다.
“그런데, 슈퍼컵 상대는 또 누구였어?”
“어···. 레알 마드리드이었던가?”
“아니, 우리 팀 최초의 슈퍼컵 우승을 벌써 까먹었냐? 너 그거 알코올성 치매야. 병원이나 가봐라.”
“···새끼, 말하는 거 봐라. 그날 너무 취해서 기억이 잘 안 났을 뿐이라고.”
“어휴. 말을 말자. 일단 중요한 건 레알 마드리드가 어떤 팀이냐는 거야.”
“그야···. 존나 센 팀이지?”
알코올성 치매 환자로 낙인찍힌 술꾼은 다시금 맥주 한 병을 비우며 조금 거친 단어로 사실을 말했다.
레알 마드리드.
이 팀이 강팀이 아니라면 세상 그 어느 팀도 강팀이 아니었다.
그리고 보통 강팀도 아니었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팀을 꼽을 때 항상 거론되는 팀이기도 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리고 유벤투스는 또 어떤 팀이냐?”
“끄윽. 우리가 이긴 팀?”
“아니, 그거 말고. 위상이 어떻냐고. 이 닭대가리야.”
“그야···. 이탈리아에서 제일 샌 팀이지. 근데 맞나? AC밀란이던가?”
“···너 진짜 병원 가봐라. 도대체 언제 적 AC밀란이야. 하여튼, 유벤투스는 이탈리아에서 제일 센 팀이지. 이제 좀 감이 오냐?”
“응? 뭐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에 먼저 말을 꺼낸 술꾼은 가슴을 탕탕 치며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엄청 강한 팀이잖냐!”
“그렇···지?”
“그렇지가 아니야 그런 거야. 그런데 우리 팀은 그런 강팀들만 골라서 만나고 있다고!”
“듣고 보니 그렇네···.”
“심지어 지난 시즌엔 유로파 리그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도 깨부쉈어.”
“이야···. 생각해보니 유럽에서 제일 센 팀만 골라서 두들겨 패고 있네?”
상당히 많이 취한 술꾼은 이제야 친구의 말뜻을 이해하곤 두눈을 동그랗게 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뼛속까지 스며들었던 알코올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를 눈치챈 친구는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 앉아 그새 미지근해진 맥주를 들이켰다.
“무슨 영화의 주인공 같지 않냐?”
“인정한다. 와, 그나저나 이제는 익숙해져서 몰랐는데, 우리 팀은 진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커졌구나···.”
“익숙해져서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뒤를 짚어보면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지.”
계속되는 성공에 잠시 잊고 있었던 팀의 위용이 다시금 떠올랐다.
곱씹어 볼수록 믿기 어려웠고 덕분에 ‘만약’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야···. 만약에, 진짜 만약에 말이야···.”
“뭔데?”
“바르셀로나도 잡고···. 바이에른 뮌헨까지 잡아서 결승전에 간다면···. 또 거기서···. 또···.”
“아···.”
여기까지 가자 둘은 차마 뒷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것은 포츠머스의 암묵적인 규칙이었으니까.
그들이 동시 떠올린 생각은 같았다.
‘만약,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다면 유럽의 모든 강팀을 1년 만에 모조리 꺾은 진정한 챔피언 아닐까?’
상상만 해도 솜털이 쭈뼛쭈뼛 서는 이야기였고 결코 입으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 하하. 수, 술이나 마시자고.”
“그, 그래.”
잠시나마 술이 깬 두 술꾼은 그 기념으로 또다시 술을 들이부었다. 이들의 주정은 주인장이 제발 나가 달라고 짜증을 낼 때까지 이어졌다.
***
걱정스러운 상대와 만나게 된 포츠머스의 선수단은 의외로 굉장히 활기찼다.
“기어코 리오넬 메시의 사인도 받을 때가 찾아왔구나.”
“호날두는 삐져서 유니폼 교환도 해주지 않던데. 메시는 다르겠지?”
“뭔 개소리야. 메시 유니폼은 이미 이 몸의 소유다.”
두려움보다는 리오넬 메시의 유니폼을 두고 치열한 경쟁마저 펼치는 그들이었다.
물론, 굉장히 좋은 태도였다.
적어도 겁은 먹지 않았다는 방증 아니겠는가.
이는 소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허. 똥물도 파도가 있는데,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내 제자들은 스승을 제끼려고 하네?”
리오넬 메시의 유니폼을 가지고 티격태격 싸우는 조쉬 킹과 델리 알리의 등 뒤로 소하의 그림자가 덮쳤다.
“···네?”
기척도 없이 등 뒤에서 목덜미를 끌어안은지라 조쉬 킹과 델리 알리는 사색이 된 얼굴로 되물었고, 소하는 뻔뻔하게 선언했다.
“메시의 유니폼은 이 몸의 것이니라.”
“···.”
“1차전, 홈 유니폼은 내거니까 2차전, 원정 유니폼은 마음대로 해라.”
“···.”
“싫어?”
소하가 싱긋 웃으며 으르렁거리자 조쉬 킹과 델리 알리는 곧바로 꼬랑지를 내렸다.
“저, 전 제가 받아서 감독님에게 선물해드리려고 했죠.”
“어? 너도 그런 생각이었어? 새끼. 역시 넌 내 친구야.”
6년간 우정을 다진 절친 중의 절친답게 죽이 아주 잘 맞는 그들이었다.
무척 마음에 드는 변명이었는지 소하는 크게 웃으며 둘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역시. 내 제자들이야. 너희 둘이라면 리오넬 메시를 뛰어넘을 만하다. 아니지, 이미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은 뛰어넘었어!”
“헤헤헤. 당연하죠!”
“스승이 메시급이니까요!”
“내가 이 맛에 감독질 한다! 하하하!”
그놈이 그놈이었다.
그래도 팀의 9번과 10번, 그리고 팀의 대장이 주눅이 들지 않았다는 점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자고로 지는 전쟁에서도 대장기만 꺾이지 않는다면 일발 역전의 기회는 존재하는 법!
이들의 자신감은 선수단 전체로 퍼질 테고, 바르셀로나와 리오넬 메시에 대한 이름값에 짓눌리지 않을 거다.
“좋아, 그럼 리오넬 메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맨체스터 형제들이나 때려 부수러 가자.”
“넵.”
“옙.”
소하와 제자들은 유유자적하게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훈련장으로 걸어갔다.
다음 경기의 상대는 맨체스터 시티.
그다음 상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형제들을 연달아 상대하는 어려운 일정이었다.
그 후에는 이번 시즌 제법 돌풍을 일으키는 본머스와 FA컵 4강전까지.
가시밭길이 연이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흡사 구름 위를 거닐 듯이 가벼웠다.
***
리버풀에 패배하며 승점 3점 차이까지 따라잡힌 포츠머스는 승리가 절실했다.
하지만 맨체스터 시티는 승리를 확실히 거두기엔 너무나도 어려운 상대였고, 심지어 원정경기였다.
덕분에 굉장히 어려운 경기가 예상되었고 실제로도 힘겨운 경기가 후반 87분까지 이어졌다.
[2-2로 접전을 펼치는 양 팀입니다. 다소 수세에 물린 포츠머스인데요, 이번에도 승점을 따내지 못한다면 우승이 멀어질지도 몰라요.]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연이은 패배를 당하고선 작심하고 준비한 모습입니다. 승리를 따내기엔 정말 어려워 보입니다.]
작심하고 준비했다기엔 아직 2-2 상황이었으나, 확실히 포츠머스는 위험했다.
근 15분간 단 한 번도 중앙선을 넘지 못하고 흠씬 두들겨 맞는 중이었으니까.
이대로라면 언제 골을 헌납해도 이상하지 않았고, 잘 버텨서 비기더라도 우승 경쟁이 더욱더 힘들어졌다.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타개해야만 하는 순간!
그 순간에 의외의 인물이 포츠머스에게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줬다.
-뻥!
코너킥을 공중에서 잡자마자 곧바로 전방을 향해 길게 골킥을 내지른 아론 람스데일 골키퍼가 그 주인공이었다.
-휘리리릭.
강한 전방 회전이 걸린 아론 람스데일의 기습적인 골킥은 중앙선 부근에서 맨체스터 시티의 수비수와 몸을 비비던 조쉬 킹에게 빨려 들어갔다.
“잉?!”
“엇?!”
적당히 몸싸움은 하고 있었지만, 진짜 공이 올 줄 몰랐던 조쉬 킹과 존 스톤스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놀란 감정을 먼저 추스르고 몸을 먼저 움직인 선수는 조쉬 킹이었다.
아니, 감정을 추스르기보다는 그냥 짐승처럼 먼저 몸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휙.
존 스톤스보다 찰나의 시간 먼저 반응한 조쉬 킹은 기어코 등지고 있던 몸을 돌릴 수 있었고,
-툭!
몸을 돌린 조쉬 킹의 드리블을 존 스톤스 혼자 막을 수가 없었다.
[조쉬 킹! 조쉬 킹이 허허벌판 맨체스터 시티의 뒷공간은 표범처럼 질주합니다!]
[에데르송 골키퍼가 위기를 감지하고 튀어나옵니다. 과감한 판단인데요!]
맨체스터 시티의 에데르송 골키퍼의 판단은 훌륭했다.
다만, 조쉬 킹이 너무 빨랐다.
튀어나오는 에데르송 골키퍼를 무지막지한 속도로 그냥 지나쳐버린 조쉬 킹!
이대로 툭, 밀어 넣기만 해도 골이었지만 너무 빠른 자신의 속도를 제어하지 못했고 스텝이 엉켜서 슛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익···!”
이를 앙다문 조쉬 킹은 젖 먹던 힘을 쥐어짜서 허벅지에 힘을 줬고, 기어코 자신의 방향만은 바꾸었다.
그러니까···.
[조쉬 킹이 공과 함께 골대 안으로 다이빙했습니다!]
[고, 골이긴 합니다! 골이에요! 포츠머스가 경기 종료 직전, 조쉬 킹의···. 음···. 환상적인? 골로 역전합니다!]
어찌 됐든 골이었고, 포츠머스가 경기에서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
다만, 조쉬 킹을 비롯한 포츠머스 선수들은 물론, 소하와 스텝마저도 환호하지는 못했다.
너무 부끄러운 골이었으니까.
***
맨체스터 시티를 어찌어찌 잡아낸 포츠머스는 곧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또다시 만나게 되었다.
물론, 그 며칠 사이에 팀의 분위기가 변할 리는 없었으니, 포츠머스의 상대가 될 리는 없었다.
선수단의 실력도 뒤처지는데, 정신력마저도 훨씬 나약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포츠머스를 이긴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공평 아니겠는가?
축구란 언제나 평등함이 기본 전제로 깔린 스포츠였고 운의 여신이 심한 장난질을 하지 않는 이상 불공평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해서, 포츠머스는 또다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3-0, 깔끔한 승리를 거두었다.
“쯧쯧. 선수단 싹 갈아엎어라. 돈 이상한데 쓰지 말고···.”
또다시 패배했음에도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을 바라보며 소하는 혀를 찼다.
“내가 맨유 감독으로 가면 일단 줄빠따부터 뒤지게 돌릴 텐데···. 얘네는 올드스쿨 스타일이 딱 맞아.”
무척이나 대머리 꼰대 같은 소리를 지껄인 소하는 곧바로 관심을 끊고 다음 경기를 바라보았다.
다음 경기는 프리미어 리그 33라운드 본머스와 FA 컵 4강전 울버햄튼과의 경기.
만만한 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상대도 아니다.
때문에, 소하는 캄 노우에서 열릴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에 모든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턱을 매만지는 소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 276화. 가시밭길.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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