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세 개. (5) >
골이란 언제나 소중하다.
일단 넣기만 하면 무조건 이득이라는 점이 축구라는 스포츠의 백미!
하지만, 포츠머스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말로는 이기자고는 했지만, ‘무승부’가 최선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거 완전···. 벌집을 건드린 꼴이 될 텐데. 버틸 수 있으려나?’
이기면 좋다.
근데, 이길 수 있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현 포츠머스의 척추는 두 동강이 나버린 상태다. 이를 이어주기 위해 니콜로 바렐라와 델리 알리는 평소보다 밑으로 내려와 사라진 허리를 대신했다.
일단 공격력은 매우 약해진 상황이다.
말 그대로 JEM라인만 공격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수비가 강하냐면 또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니콜로 바렐라와 델리 알리는 수비도 하는 선수지 수비를 ‘잘’ 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에 더해 모두가 알다시피 마이클 반즈는 패스와 킥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수.
요컨대, 유벤투스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퍼붓는다면 막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알레그리 감독은 공격 전술에 재능이 없는 감독. 하지만, 가진 자원은 라인만 올려줘도 알아서 다 하는 선수들이지···.”
마리오 만주키치?
이미 수년 전부터 최고급 공격수로서 명성을 떨친 선수다.
엄청난 활동량과 강력한 육체 능력, 그리고 헤더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수준이다.
파올로 디발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공격수의 밑에서만 잘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의 앞에는 최고급 공격수가 둘이나 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더욱 말이 필요 없는 선수다. 전성기의 황혼에 걸쳐진 이 전설적인 선수는 이미 이탈리아 리그를 폭격한 상태다.
이 셋은 아무리 공격적으로 무능한 감독이라도 대형만 공격적으로 지원해준다면 날카로운 창으로 변할 선수들이다.
그런데 마침, 정말 불운하게 홈에서 원정팀에게 선제골을 헌납했다.
이렇게 경기가 요동치면 아무리 수비적인 알레그리 감독이라도 공격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공격을 막을 자신이 없다.”
소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경기장을 주시했다. 확실히, 실점 전과 비교해 유벤투스의 수비진은 3m 정도 더욱 올라왔다.
수비진이 올라왔다는 이야기는 팀의 무게 중심이 앞으로 이동했다는 뜻.
즉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된다는 전조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전략이 깨졌어. 골이 화가 되는 날도 오네.’
대전략이 깨졌다.
단순히 한 경기가 아닌 챔피언스 리그 16강의 1차전과 2차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많은 경기들의 리듬이 깨졌다.
그냥 무난하게 흘러갔다면 무승부는 확실했을 텐데. 무승부만 달성했다면 2차전에는 주전들이 모두 돌아오고 홈에서 경기를 치르기 때문에 승리가 확실했다.
암만 이탈리아의 황제 유벤투스라도 전력으로 맞붙는다면 이길 자신이 있었던 소하였다.
하지만 이제 소하가 그리던 큰 그림에는 검은 먹물이 뿌려졌다. 이제는 또 다른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상황이 들이닥쳤다.
만약 이 경기를 지게 된다면 홈에서의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흐음. 어떻게 해야 할까.”
소하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길이 그려졌다가 지워지길 반복했다.
***
마이클 반즈의 환상적인 프리킥 골 이후, 잠잠했던 경기는 요동쳤다.
물론, 잠잠한 호수에 파문을 만드는 쪽은 한 골 헌납한 유벤투스였다.
-툭!
미랄렘 퍄니치의 멋들어진 패스가 마리오 만주키치의 머리로 향했다.
중앙선 부근에서 왼쪽 넓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유성 같은 패스!
아쉽게도 살짝 높아 만주키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위협적인 장면으로까진 연결되진 않았다.
그러나 만약이란 가정을 붙인다면 정말로 위험했기에 포츠머스를 응원하는 모든 이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허, 참. 공을 잡았으면 큰일이 날뻔했습니다. 아직 아슈라프 하키미가 돌아오지 못했으니까요.”
가슴을 쓸어내린 포츠머스의 잭 밀러 수석코치는 경기장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만약 공을 머리로 건드리거나 소유했다면 매우 자유로운 상황을 맞이했을 터.
압박이 없다면 언제나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줄 선수였기에 천만다행이었다.
이는 소하도 마찬가지였는지 콧잔등을 긁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패스가 예리하네요. 보통 짧은 패스로 경기를 조립하는 역할을 맡는 선순데···. 긴 패스도 매우 위협적이에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나저나 미랄렘 퍄니치라는 선수는 참으로 비슷하네요.”
“네? 누구랑 비슷한데요?”
소하가 묻자 밀러는 말없이 경기장에서 가장 한산한 선수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 저 태평한 낚시꾼 자식 말이죠?”
“네. 맞습니다. 외모는 전혀 다르지만 플레이 스타일은 매우 흡사하네요.”
밀러가 제법 지적인 표정을 짓자 소하는 피식 웃으며 칭찬했다.
“진짜 감독하셔도 되겠는데요?”
“제발 그 소리 좀 하시지 마십시오. 저도 감독님 떠나면 그대로 옷을 벗을 테니까요. 그나저나 우리 반즈 녀석도 저 정도만 컸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쉬워하는 밀러.
한때 포츠머스의 기둥이었던 마이클 반즈가 이제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만 같아 씁쓸했다.
하지만 소하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글쎄요.”
“네? 혹시 감독님께서는 마이클 반즈와 저 미랄렘 퍄니치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게 또 뭔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의 밀러였다.
당연한 반응이다.
미랄렘 퍄니치라면 이미 수년 전부터 최고는 아니었지만, 최상위 선수로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런 그가 이제는 완전히 주전에서 밀려버린 후보선수, 마이클 반즈와 동급일지도 모른다는 반응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흐음. 글쎄요.”
“···그냥 제 말에 반박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신 거죠?!”
“설마요. 하여튼, 더 두고 보죠.”
“큼큼. 요즘 총기가 떨어지신 거···.”
헛기침하며 작게 읊조린 밀러였지만 소하의 귀를 피해갈 순 없었다.
“뭐라고요?!”
“큼큼. 아무것도 아닙니다.”
“흥. 자 봐봐요. 이제···.”
고리눈을 뜬 소하가 밀러를 다그치려고 하자, 마침 경기장이 들썩였다.
-툭!
다시금 공을 잡은 미랄렘 퍄니치가 이번에는 파올로 디발라에게 전진패스를 찔러 넣어줬다.
아주 끝내주게 잘생긴 아르헨티나의 슈퍼스타는 공을 잡는 척하다가 재치 있게 뒷발로 공을 다시금 미랄렘 퍄니치에게 보냈다.
덕분에 미랄렘 퍄니치는 순간적으로 압박이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이 상황에서 축구 지능이 매우 뛰어나고 킥 능력이 좋은 그의 선택은 뻔했다.
-팡!
강하지는 않으나 매우 정확한 땅볼 중거리 슛을 내지른 미랄렘 퍄니치!
굉장히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케빈 도슨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는 슛 코스였다.
이 때문에 포츠머스의 골키퍼, 아론 람스데일은 반응이 늦어버렸고 그대로 골망을 갈랐다.
[1:1입니다! 미랄렘 퍄니치가 멋진 중거리 슛을 성공시킵니다!]
[정말 영리한 슛이었습니다. 그의 킥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는 장면이었어요!]
유벤투스의 홈구장, 알리안츠 스타디움이 뒤흔들렸다.
아직은 원정 골을 헌납한 동점이었기에 더 달려나가야 했지만 말이다.
“···감독님, 뭐라고요?”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을 흘겨보는 밀러에게 소하는 모처럼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
전반전이 종료되었다.
전반전의 결과는 1:1 동률!
참으로 의외의 경기였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가 6명이나 뛰는 경기였음에도 정작 골을 넣은 선수들은 한 시즌에 한 골을 넣을까 말까 하는 3선 선수들이라니.
각 팀이 가진 공격수들의 이름값에 비해서는 상당히 싱거운 경기였다.
하지만, 후반전은 이야기가 달랐다.
휴식 시간을 맞이해 조금 더 체계적인 공격 전술을 들고 온 유벤투스가 기어코 역전 골을 만들어냈다.
[골입니다! 후반 14분. 드디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골이 터졌습니다!]
[미랄렘 퍄니치의 멋진 코너킥을 그대로 헤더로 연결했습니다!]
“호우우우우우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웃옷을 까버리며 특유의 셀레브레이션을 선보였다.
사실은 ‘SIUuuuuuu’였지만, 아무튼 소하에게는 ‘호우’로 들렸고, 심기를 뒤틀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부들부들.
하필이면 싫어하는 선수에게 역전 골을 얻어맞다니. 분노가 뇌수로 침입해 자율신경계를 망가뜨리며 온몸을 떨게 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1:2의 점수.
어차피 홈에서 무조건 이길 작정이었던 소하에게는 원정 골 덕분에 무승부와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이를 알고 있는 유벤투스는 더더욱 공격의 고삐를 당겼고 허리가 불안했던 포츠머스는 휘청이기 시작했다.
“위험하군요. 한 골 차이 승리는 별로 맛이 없을 테니, 더더욱 골을 노리겠군요.”
밀러의 정확한 분석이 이어졌고 이는 소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겠죠.”
“그럼 뭐가 수를 써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감독님께서는 이럴 때 보통 ‘에라 모르겠다! 우리도 달려들어!’ 하고 외치시지 않습니까.”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소하는 슬쩍 어깨를 늘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래도 그동안의 행패 때문에 이미지가 너무 망가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밀러의 장난 섞인 말은 멈추지 않았다.
“요즘 확실히 총기가 떨어지신 거 아닙니까? 감독님이 낮게 봤던 미랄렘 퍄니치마저도 훨훨 날고 있다고요!”
“시끄러워요. 잘 보세요. 10분 뒤에는 상황이 달라질 테니까요.”
“···흐음. 그렇습니까?”
영 미덥지 않다는 표정을 짓는 밀러였지만, 그동안 증명을 무한으로 해왔던 소하였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멋진 침투로 멀티 골을 달성합니다!]
[디발라의 화려한 연계플레이가 좋았어요. 이제 경기는 3-1, 포츠머스가 크게 흔들립니다!]
후반, 23분.
공격을 멈추지 않던 유벤투스가 또다시 득점을 만들어내며 두 골 차이로 달아났다.
한 골 차이와 두 골 차이.
원정 골을 넣었다고 하더라도,
홈에서 무조건 이길 거라고 자신하더라도 이제는 무언가 해야만 했다.
“···감독님?”
다급해진 밀러가 소하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소하는 태산같이 꿋꿋했다.
“이제 1분 후면 상황이 바뀐다니까요? 우리는 거친 비바람이 몰아쳐도 단단한 거목처럼 버티면 돼요.”
“···?!”
호날두에게 두 골이나 먹힌 덕분에 드디어 정신을 놓았나 보다.
밀러는 이제 웃음기를 쫙 빼고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았다. 경기는 어느덧 소하가 예견한 후반 25분을 넘어 30분에 가까워졌다.
그때, 놀랍게도 소하의 말처럼 유벤투스의 공격은 점점 무뎌지고 포츠머스 쪽으로 기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에 상당히 놀란 밀러가 다시금 소하의 어깨를 흔들며 재차 물었다.
“무슨 제갈공명이십니까? 남동풍이 불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다를 바 없으세요!”
“···삼국지를 읽으셨군요. 훌륭합니다.”
“재밌더라고요···. 잠깐, 아니지. 지금 이런 농담을 할 때가 아닙니다!”
하기야, 나관중이야말로 희대의 소설가 아니던가. 코쟁이인 밀러로서도 나관중의 필력에는 버틸 수 없었나 보다.
삼국지를 무척 좋아하는 소하는 밀러를 대견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두 골이나 앞서있으니 알레그리 감독의 성향상 위험을 질 이유가 없으니까요. 자연스럽게 내려앉고 우리가 주도권을 가질 테죠.”
“그럼 한 골 더 먹힐 거라고 예측하신 겁니까? 아니, 그러면 애초에 실점을 막았어야죠!”
“···그건 나도 몰랐는데···. 하여튼, 제가 예상했던 건 실점이 아니에요···.”
다시금 머릿속에 ‘호우’가 떠올랐는지 잔뜩 풀이 죽은 소하는 유벤투스의 한 선수를 힘없게 가리켰다.
“응? 미랄렘 퍄니치요? 저 선수가 왜요? 너무 잘해서 영입하시게요?”
“···오늘따라 말이 거치시네요···. 갱년기이신가···. 하여튼, 솔직히 말하자면 저 선수, 공짜로 줘도 안 써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이탈리아 리그의 최상위 선수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랄렘 퍄니치를 줘도 쓰지 않는다니.
확실히, 오늘 아침에 먹은 피자가 상한 게 분명했다.
밀러가 아침부터 밀가루는 좋지 않다고 그렇게 말렸건만.
“지금 뭐라고···?”
“들으신 거 그대로라고요. 미랄렘 퍄니치란 선수는 우리 팀 후보에도 들어오지 못해요.”
“···.”
“왜냐고요? 이미 상위호환인 선수가 우리 팀의 후보거든요.”
다시금 기운을 차린 소하는 눈빛을 번뜩이며 3-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무척이나 여유로운 한 선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마침, 그 선수 마이클 반즈가 공을 잡았다.
< 269화. 세 개. (5)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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