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세 개. (4) >
이번 시즌 포츠머스의 선수단은,
[GK- 페트르 체흐, 아론 람스데일.
LB-앤디 로버트슨. 로빈 고젠스.
RB-매튜 다이스. 아슈라프 하키미. 아다마 트라오레.
CB-케빈 도슨. 아담 웹스터. 후벵 디아스. 리산드로 마르티네스.
MF-커너 러셀, 델리 알리, 마이클 반즈, 칼빈 필립스, 데클렌 라이스, 니콜로 바렐라, 유리 틸레만스. 도봉산.
LW-조쉬 킹, 알랑 생막시맹.
RW-모하메드 살라, 잭 해리슨
ST-에링 홀란드, 마리오 발로텔리, 존 말로리.]
총 26명이었다.
이 중에서 대륙 간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선수는 단 25명뿐.
즉, 한 명의 선수는 명단제외를 당했다는 이야기였고, 그 주인공은 커너 러셀이었다.
“제법 어려운 결정이었지.”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탑승한 소하는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누군가를 쳐내야 한다는 건,
그것도 아끼는 사람을 쳐내야 하는 건 언제나 불유쾌했다.
하지만, 감독인 이상 이런 결정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이제는 제법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일단 명단제외 후보는 3명이었다.
존 말로리.
커너 러셀.
마이클 반즈.
셋 다 원년 선수이며 6년이나 함께한 베테랑들이다.
이 때문에 더욱 어려운 결정이었고 그래서 더욱 빠르게 커너 러셀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이클 반즈와 존 말로리는 ‘스타일’상 대체자가 없었지만 커너 러셀은 많았기 때문이었다.
마이클 반즈는 조건을 많이 타긴 했지만 날카로운 패스와 킥 능력은 팀 내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는 선수였고,
존 말로리는 특유의 뛰어난 축구 지능 덕분에 교체 선수로 쏠쏠한 활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비전문인 커너 러셀은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같은 역할의 데클렌 라이스, 칼빈 필립스는 커너 러셀보다 수비를 잘할뿐더러 다른 능력은 비교조차 어려울 정도로 뛰어났다.
그야말로 완벽한 상위호환!
지난 시즌, FA 컵 결승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지만 명백한 상위호환이 둘이나 있는 선수를 안고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최악의 판단이 되었다.
상위호환이라고 여기던 두 선수가 난데없는 부상으로 빠져버리자 미드필더진에 엄청난 구멍이 뚫려버렸다.
그것도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유벤투스를 앞에 두고!
“마귀 같은 새끼들···.”
비행기가 이륙하며 느껴지는 중력의 힘을 음미하는 소하의 표정은 흉신악살이 따로 없었다.
미드필더, 그것도 포츠머스의 전술상 척추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의 부재는 큰 위협이었다.
생각해보라.
리버풀의 파비뉴가 없을 때 경기력을.
한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사용하는 전술에서 훌륭한 수비형 미드필더의 존재는 값어치를 매길 수 없다.
포백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며,
빌드업에 지대한 역할을 맡을뿐더러,
때때로 공격에 가담하는 그들의 역할은 현대적인 공격축구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데클란 라이스와 칼빈 필립스라는 훌륭한 선수를 둘이나 보유한 포츠머스가 강한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 선수들이 없어졌다.
쉽게 말해 아무리 강한 포츠머스라도 허리가 부러지면 위풍당당하게 돌격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하위 호환 격으로 그들의 자리를 메꿔줄 커너 러셀마저도 소하의 손으로 직접 명단제외 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
“낚시꾼 녀석···.”
소하는 슬쩍 고개를 틀어 반대쪽 창가에서 다리를 쭉 뻗고 낚시 잡지를 읽는 마이클 반즈를 흘겨보았다.
“하아암. 이번 휴가 때는 인도양으로 원양 낚시를 가볼까···.”
세상 편안한 느긋함으로 4개월이나 남은 휴가 계획을 짜는 마이클 반즈의 태연한 자태!
소하에게는 그저 복장 터질 일이었다.
이번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에도 저리도 편안하다니.
신경줄이 다시없을 만큼 두꺼운 건지, 아예 생각이 없는 건지 구분이 어렵다.
“···후우.”
애꿎은 한숨만 내뱉는 소하.
그렇다. 소하는 다른 방향성을 잡는 대신 그를 기용하기로 해버렸다.
물론 아예 다른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케빈 도슨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올리던가, 혹은 3백을 사용하거나 하는 방법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케빈 도슨을 위로 올린다면 필연적으로 왼발잡이인 리산드로 마르티네스가 후벵 디아스와 호흡을 맞춰야 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리산드로 마르티네스는 입단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풋내기. 다른 수비수와 호흡을 맞춰 경기를 뛰어본 적도 없다.
같은 팀이었기에 처음 호흡을 맞춘다 해도 엉망진창은 아니겠지만, 상대가 만만치 않다.
유벤투스란 거함을 상대로는 그럭저럭한 정도가 아니라 완벽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3백은 어떨까?
이것은 더욱 좋지 않았다.
“자고로 3백은 수비진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두 명의 중앙 미드필더가 중요하다.”
3백도 여러 변주가 있었지만, 포츠머스의 3백은 보통 두 명의 미드필더를 기용했다.
2명의 미드필더가 3명이 했던 일을 얼추 해줘야 한다는 이야기.
즉, 공격과 수비 모두 잘하는 미드필더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둘을 모조리 잃었지.”
전술적 카드를 완전히 빼앗긴 소하였다. 3백에 필수적으로 한 명은 들어가야 할 선수 두 명이 모조리 빠지다니.
결국 정답은 마이클 반즈 밖에 없다는 선고였다.
하지만 마이클 반즈는 본인의 능력을 완전히 뽐내기 위해서는 조건을 많이 요구하는 선수.
괜히 소하가 한숨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쟤도 어련히 잘해줄 테고···.’
마이클 반즈에게 보내던 압박 섞인 눈빛을 멈추는 소하. 6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사라진 과거에선 이탈리아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던 낚시꾼을 믿어보기로 작심했다.
***
18-19시즌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 포츠머스와 유벤투스의 경기 진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포츠머스는,
[GK: 아론 람스데일.
LB: 앤디 로버트슨.
CB: 케빈 도슨.
CB: 후벵 디아스.
RB: 아슈라프 하키미.
DM: 마이클 반즈.
MC: 니콜로 바렐라.
MC: 델리 알리.
LW: 조쉬 킹.
ST: 에링 홀란드.
RW: 모하메드 살라.]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를 빼고선 오랜만에 짱짱한 주전들이 총출동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니콜로 바렐라보다는 도봉산이 주전에 더 합당했지만, 선발 출장 횟수 차이는 고작 2경기 차이라 주전이라 봐도 좋았다.
이에 맞서는 유벤투스는 이탈리아에 새로운 왕조를 세운 구단답게 화려한 명단을 선보였다.
[GK: 보이치에흐 슈체스니.
LB: 알렉스 산드루.
CB: 조르조 키엘리니.
CB: 레오나르도 보누치.
RB: 주앙 칸셀루.
DM: 엠레 잔.
MC: 미랄렘 퍄니치.
MC: 블레즈 마투이디.
AMC: 파울로 디발라.
ST: 마리오 만주키치.
ST: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미드필더 라인이 조금 아쉬웠지만, 수비진과 공격진은 정말 대단하다.
산드루-키엘리니-보누치-칸셀루로 이어지는 4백 라인은 유럽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주키치-디발라-호날두로 이어지는 공격진도 강력하기 그지없는 위용이다.
괜히 리그에서 7년 연속으로 우승한 팀이 아니었고, 곧 8년 연속우승을 달성하는 팀이 아니었다.
암만 포츠머스의 이름값이 높다고 해도, 아직은 더욱 무거워 보이는 이름값!
다른 선수들도 선수들이었지만, 챔피언스 리그에 한해서는 ‘신’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이름은 절로 부담감을 느끼게 했다.
물론, 소하는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히려 잘만 났다고 칼을 갈았다.
“흥. 미래에 있을 상암동의 치욕을 이 세상에서 나만 알고 있지···. 가정교육을 못 받아서 그래.”
소하는 개인적으로 호날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실력이야 더할 나위 없었지만, 한국인들에게 선물했던 치욕은 한국 사람임을 자부하는 소하에게 크나큰 감점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훗날, 한국 축구팬들은 호날두의 고향인 ‘마데이라 제도’를 세계에서 가정교육이 가장 열악한 지역으로 여길 정도였다.
“아직 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분명 할 인간이니까 곱게 단죄를 받거라···.”
스산하게 중얼거리는 소하.
이내 선수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똑똑히 전했다.
“박살을 내고 와라. 틀딱들의 시대는 끝났고 창창한 너희들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라고!”
평균나이가 상당히 많은 유벤투스를 평균 나이가 상당히 어린 포츠머스가 꺾어버리라는 명령이었다.
“좋아요! 윗방 노인네들은 슬슬 후배들을 위해 길을 터줘야죠!”
“당연하죠. 근데 틀딱이 뭐에요? 한국어 같은데···.”
“난 알아. 틀니 딱딱, 이라고 한국에서 나이 많은 사람들 비꼬는 단어야.”
“···넌 어떻게 아냐? 곱하기도 모르면서. 하여튼 종종 흥분하시면 한국어를 섞어 쓰셔서 난감하다니까···.”
많은 동료가 빠졌지만, 평상시와 다름없는 포츠머스의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곧 경기는 시작되었다.
***
-삑!
드디어 울린 시작의 호루라기 소리.
경기 초반의 양상은 많은 전문가와 팬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아주 느렸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챔피언스 리그의 ‘원정 다득점’ 원칙이라는 규칙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유벤투스를 이끄는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감독의 성향 때문이다.
훗날 사라지는 원정 다득점이란 규칙은 홈에서 수비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홈에서 실점한다는 뜻은 상대 팀이 원정 골을 얻게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원정 골이 홈에서 넣은 골보다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홈에서 1-1로 비기고 원정에서 0-0으로 비겼다면, 원정 골을 넣은 상대 팀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서로 비슷한 수준의 팀끼리 맞붙는 챔피언스 리그의 토너먼트에서 이 정도의 유리함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뭐···. 규칙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거지. 옛날에는 원정 경기가 진짜 힘들었으니까.”
지금도 제법 힘들긴 하지만, 20~30년 전에는 비교조차 어려웠기에 생긴 규칙이다.
이러한 원정 다득점 원칙이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감독과 만났다.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감독이라 하면, ‘수비는 확실하게, 빌드업과 공격은 알아서.’라는 이탈리아산 감독!
짧게 말해 수비 지향적인 감독이다.
수비적으로 나서야 하는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의 홈경기에서 수비 지향적인 감독이 선택할 전술의 방향성은 굳이 머리를 굴려보지 않아도 충분히 보였다.
더군다나 공격적이기로 유명했던 포츠머스마저 상황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포츠머스가 명성에 비해 느리게 경기를 가져가는군요. 좀처럼 보기 드문 안정적인 운영입니다.]
[1.5선까지 올라가던 중앙 미드필더들이 올라가질 않네요. 오늘 모처럼 챔피언스 리그에 얼굴을 내비친 마이클 반즈를 호위하는 일에 더 집중합니다!]
열정적인 유벤투스 홈구장의 열기에 포츠머스 선수들이 주눅이 든 건 아니다.
그저, 전술대로 움직였을 뿐.
“우리도 기둥뿌리가 뽑혔는데 무리할 필요는 없지. 무승부로 가자고.”
원정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하고 홈경기를 시작하면 상당히 위험하다.
만약, 홈경기에서 실점하기라도 한다면 무조건 승리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소하는 간단하게 생각했다.
“홈에서 이기면 되잖아? 팀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지.”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하기야, 포츠머스의 홈구장 승률은 80%가 넘어간다.
무승부 또한 승률에 포함되지 않으니 정말 억 소리가 나오는 대단한 전적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경기장의 상황이 곧 바뀌었다.
유벤투스가 갑자기 공격적으로 나서서 한 골을 넣은 걸까?
아니다. 알레그리 감독 또한 무승부를 원하고 있었기에 현 상황에 만족하고 있었다.
훌륭한 짜임새로 포츠머스의 강력한 3 톱을 잘 억제하는 중이니 바꿀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변화의 시작은 포츠머스였다.
-삑!
날카롭게 울려 퍼진 호루라기 소리.
반칙을 알리는 소리였고 반칙을 얻어낸 선수는 포츠머스의 니콜로 바렐라였다.
[원래 뛰던 이탈리아에 와서 그런지 펄펄 날아다니는 니콜로 바렐라였습니다.]
[뒤에서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위험할뻔했습니다. 옐로카드가 아깝지 않은 파울이었어요.]
니콜로 바렐라가 얻어낸 27M 거리에서의 프리킥 기회.
키커는 당연히도 마이클 반즈였다.
“흐음. 어떻게 할까.”
마이클 반즈는 경기가 가진 무게 따윈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27m란 거리는 직접 프리킥으로 골을 노리기엔 너무나도 멀다.
하지만, 마이클 반즈의 왼발이라면, 그의 발끝이 평소보다 더욱 날카롭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마침 오늘은 그의 날이었다.
-팡!
속이 시원할 정도로 깔끔한, 마치 발레의 한 동작 같은 우아한 자세로 멋들어진 킥을 성공시킨 마이클 반즈.
그의 뿌려낸 날카로운 프리킥은 수비벽을 살짝 측면으로 스쳐 지나가 그대로 골망에 틀어박혔다.
[골입니다! 골! 전반 38분. 마이클 반즈의 챔피언스 리그 데뷔골이 터져 나왔습니다.]
[와···. 정말 멋진 프리킥이었습니다. 슈체스니 골키퍼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해설과 아나운서의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고, 의외의 전개에 얼이 빠졌던 소하의 정신을 일깨워줬다.
“···어···. 예상 밖의 전개인데···.”
찜찜함을 감추지 못하는 소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골이 독이 될지 실이 될지 아직 판단하지 못한 그였다.
< 268화. 세 개.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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