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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천재 감독-264화 (264/306)

< 264화. 선수의 가치. (4) >

조쉬 킹과 델리 알리는 소하의 요청대로 에이전트를 대동하지 않고 소하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계약 문제에 관해서 에이전트를 배제하는 경우는 좀처럼 존재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에이전트들은 그들을 극구 말렸다.

“이봐, 킹. 너희 보스가 무서운 사람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고.”

“솔직히 말해서, 이제 너의 보스가 아니게 될지도 모르잖아? 계약 문제는 나 같은 프로가 필요하다고.”

부정할 여지가 없는 조언이었다.

이런 대규모 계약일수록 에이전트의 힘은 절실히 필요했고, 제의를 숨긴 일에 대해서 우위를 차지하고 협상을 풀어나갈 수 있었기에 비전문가인 선수들만 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조쉬 킹과 델리 알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헤이. 너의 뜻은 알겠어. 하지만, 나와 감독님은 그렇게 계산적으로만 움직이는 사이가 아니야.”

“넌 모르겠지만, 감독님은 ‘선수’로서 나의 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고. 감독이니, 스승이니 하는 그런 얄팍한 관계가 아니야. 피로 이어진 가족이라고!”

에이전트들은 몰랐다.

소하와 두 선수 간의 인연이 얼마나 깊고 질긴지에 대해서.

6년이란 길고 긴 시간.

프로리그의 가장 밑바닥부터 고락을 함께 나누었던 그들의 인연은 쉽게 여길 무언가가 아니었다.

망해버린 구단의 한 이름이 없는 유망주는 프리미어 리그가 자랑하는 최고의 선수가 됐으며,

잠깐 반짝였다가 사그라지는 미래를 가졌던 유망주는 태양을 향해 계속해서 전진하는 중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의 동화 같은 세월.

사람들은 잘 모를 거다.

시골 촌뜨기가 전설의 용사로 우뚝 서는 모습에만 열광할 뿐.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는지는 절대 모를 거다.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깊은 법이었고 그 그림자 속에서 빛을 향해 함께 힘을 합친 자들의 유대관계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에이전트들은 다시금 만류했다.

“아니, 그래도···.”

“사람 속만큼 무서운 게 없다고···.”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직업의 직업정신을 발휘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냉담한 시선이었다.

“자꾸 그러면, 계약 끝냅니다?”

“사람 속 무서운 거 보여드려요?”

소하에게 배운 무자비한 협박이 이어졌고, 에이전트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인연의 한 부분···. 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거다.

***

단단한 암반 같았지만, 사실, 조쉬 킹과 델리 알리는 마음속 한편에는 작은 불안감이 존재하긴 했다.

‘강짜를 놓으시면 조금 실망할지도···.’

‘일단 우리에게 비밀로 하셨으니까···.’

질긴 인연에 금이 간 것은 아니다.

인연이 질기고 질겼기에 충분히 배신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서 작은 불안감을 느꼈을 뿐.

다른 걸 다 떠나서 믿었던 사람이 믿음을 져버리는 것만큼 가슴이 아픈 일은 없었기에 조금 두려운 그들이었다.

하지만, 조쉬 킹과 델리 알리가 감독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소하는 그 불안감을 일시에 날려버렸다.

“자, 어서 와서 앉아라. 지금부터 너희들이 이적을 했을 시에 얻게 되는 무궁무진한 이득에 관해서 설명해 줄 테니.”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 패턴에, 조쉬 킹과 델리 알리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얼떨떨하게 자리에 앉았다.

“일단, 킹이부터 설명을 해주마.”

그 어느 때보다 유쾌하고, 밝은 표정으로 소하의 설명은 이어졌다.

레알 마드리드로 갔을 시의 얻게 되는 경제적 이득, 명성은 물론이었고,

레알 마드리드의 전술까지 설명하며 조쉬 킹이 맡게 될 역할까지 줄줄이 읊었다.

또한, 레알 마드리드의 다른 선수들의 특징까지 짚어주며 어느 방식으로 플레이해야 자연스럽게 녹아들지도 아낌없이 조언해주었다.

그리고 이게 다가 아니다.

스페인의 문화와 음식, 언어 같은 적응에 필수적인 도움까지 서슴없이 가르쳤다.

“뭐, 이래저래 말이 많았지만, 네가 포츠머스에서 하던 모습을, 그러니까, 너의 오리진을 잃지 않는다면 넌 실패하지 않을 거야. 아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뒤를 잇는 레알 마드리드의 아이콘이 될 수도 있겠지. 아니, 넌 분명히 그렇게 될 거야.”

“···.”

소하의 강력한 확신이 어린 일장 연설이 끝났지만 조쉬 킹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소하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아니다. 절대, 결단코 아니다.

그저, 조쉬 킹은 소하가 자신에게 떠나라고 하는 것만 같아 충격을 받았을 뿐이었다.

소하의 애정이 어린 조언은 조쉬 킹에게는 그저 이별을 고하는 작별 인사로밖에 들리지 않았단 이야기였다.

“가, 감독님···. 저, 전···.”

조금 울먹이며 조쉬 킹이 입을 열었지만 소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막았다.

“잠시만. 일단 델리 알리에게도 해줘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검지를 내저으며 조쉬 킹에게 눈길을 떼는 소하. 마치, 이미 정을 뗀 듯한 모습이었고 조금은 차가워 보이기도 했다.

대상을 조쉬 킹에서 델리 알리로 바꾼 소하는 여지없이 그 누구보다 친절한 조언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얻게 될 명성과 부는 물론이었고, 전술에 대해서도 아주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알다시피 바르셀로나는 ‘티키타카’라는 매우 훌륭한 축구를 오리진으로 삼은 팀이다. 이론상으로 흠잡을 것이 없어. 하지만 팀 전체가, 그것도 각기 정점을 찍은 슈퍼스타들이 하나가 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므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선수가 많다.”

티키타카에 대해 언급한 소하는 곧이어 어떻게 하면 델리 알리가 적응할 수 있을지 ‘펩 과르디올라’처럼 이야기해줬다.

이적을 떠나서라도, 선수로서 매우 큰 자양분이 될 소중한 조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따스한 미소와 함께 조언을 내려주었고, 몇 가지 덧붙였다.

“특히나, ‘리오넬 메시’라는 위대한, 펠레와 비견될 전설적인 선수와 함께 운동장을 누빌 수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을 좋은 기회야. 그에게서는 나로서는 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다.”

물론, 천재 중에서도 천재인 리오넬 메시에게 무언갈 얻어갈 선수는 극히 적다.

애초에 범인이 천재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소하는 확신했다.

“너라면, 델리 알리 너라면, 리오넬 메시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선수임을 내가 보증한다.”

“···.”

“넌 이번 기회에 내가 상정했던 선수, 그 이상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아는 델리 알리는 그런 선수다. 내 영혼을 걸고 보장하마.”

“···가, 감독님···.”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소하의 단정에 델리 알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가에 물기를 머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과 아쉬움, 그리고 소하에 대한 ‘고마움’이 공존하며 멈추지 않는 진동을 만들어냈다.

“너희의 ‘스승’으로서 할 말은 이게 끝이다. 단언컨대 너희들은 이번 이적으로 성공할 거고 위대한 선수로 남을 거라고 확신한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소하의 털털한 태도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확신에 잠시간 델리 알리와 조쉬 킹은 입을 열지 못했다.

“···.”

“···.”

황량한 사막 같은 공기가 그들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조금은 마음을 추스른 조쉬 킹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감독님께서는 저희를 놓아줄 생각이신가요? 정말로요?”

조쉬 킹은 목소리로 눈물을 흘렸고 이는 델리 알리도 마찬가지였다.

“도,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가요? 이제 우리가 필요 없어지신 건가요?”

이적 여부를 떠나 자신들을 쉽게 버리려는 소하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그들이었다.

그리고 소하는 그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지 차가운 목소리로 답을 해줬다.

“‘포츠머스의 감독’으로서 생각해보자면 나쁘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포츠머스를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두기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다.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이기도 하지.”

“···.”

“또한, 이미 너희들의 대체자는 내 머릿속에 정리해둔 상태다. 잠시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는 않아. 오히려 더욱 강해질 거다.”

이건 거의 축객 명령이었다.

이적시킬 거니 알아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때문에, 조쉬 킹과 델리 알리의 마음속에는 슬픔보다는 분노라는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너무나도 냉정한 시장 논리를, 그것도 가족이라고 여겼던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 눈이 뒤집힐만했다.

그렇게 분노는 계속해서 차올랐고 이제는 ‘될 대로 돼라’라며 이적하겠다는 외침이 목구멍까지 치켜 올라왔다.

사실, 이적해도 그들로서는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모든 것은 소하가 직접 설명해주었고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선언보다는 소하가 한 발짝 빨랐다.

좀전의 편안하며 냉혹하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채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 소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성소하’라는 개인으로서는 너희들이 남아줬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겠어. 말했듯이, 한 선수의 스승으로서, 한 구단의 책임자로서는 너희들을 이적시키는 게 맞아.”

“···.”

6년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소하의 목소리에 조쉬 킹과 델리 알리는 홀린 듯이 분노가 사그라져갔다.

“솔직히···. 그냥 오직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어. 어떻게든,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고 사랑하며, 인생의 전부인 포츠머스를 최고의 자리로 올려둘 생각밖에 없었다.”

“···.”

“처음에 너희들은 그냥, 내 꿈을 위한 부품이었을 뿐이야. 마치, RPG 게임에서 좋은 장비 같은 느낌이었을 뿐이지. 게임 좋아하니까 알잖아? 더 좋은 장비가 나오면 갈아치우면 그만이었지.”

그랬다. 소하는 그저 선수들을 장기 말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었다.

필요하면 잘 쓰고, 필요 없으면 그냥 버려도 되는 그런 소모품.

그러나, 6년이란 시간은, 그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이젠 모르겠다. 아니, 이젠 아니야. 한낱 풋내기에서 한계를 모르고 성장하며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며 따라주던 너희들의 모습은 내 꿈을 변질시켰다.”

꿈은 변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사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포기했던 어린 시절의 꿈은 타락했다.

그러나 소하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느샌가, 내 꿈은 그냥 포츠머스의 성공이 아닌, 너희들과 ‘함께’하는 포츠머스의 성공으로 변했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말이지.”

소하는 어느샌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꿈을 꾸게 된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샌가 같은 꿈을 꾸는 수많은 인연으로 인해서.

그렇기에 소하는 감독이 아닌, 포츠머스의 책임자도 아닌, 성소하라는 꿈을 좇는 한 인간으로서 부탁했다.

“너희들의 가치는 내 꿈의 가치와 같다. 그러니 남아줬으면 좋겠다. 너희를 위해서도 아니고, 포츠머스를 위해서도 아니야. 그저 나를 위해서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조로운 목소리로 독백을 마치는 소하. 수천억 원의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의 가치란 그에게 있어서 그저 꿈의 가치였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소하다운 욕심이 가득한 바람이기도 했다. 다른 환경은 모두 던져둔 채 자기만족만을 위한 끝을 모르는 그득한 욕심!

“큼큼. 하여튼, 말이 좀 길어졌군. 요점은 이거다. 쉽게 말해 너희들이 선택하면 된다는 거다. 말했잖아? 너희들이 없어져도 우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그러니까 원하는 바를 선택하도록. 어떤 선택이든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소하는 제자들에게 속마음을 드러냈다는 게 내심 부끄러운지 작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얼굴에 작은 홍조가 드리워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애써 숨기기 위해 소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는 일일 뿐.

조쉬 킹과 델리 알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소하는 진심으로 그들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길 바라면 그만이었다.

“···.”

“···.”

소하의 부탁을 들은 선수들의 표정은 참으로 묘했다.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쉽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소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지금 당장 결정하긴 힘들겠지. 그럼 나중에 따로 개인적으로 연락해주길 바란다. 너무 늦으면 곤란하니 일주일···.”

원만한 협상과 팀의 분위기를 위해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주려던 소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침, 마음의 결정을 내린 조쉬 킹이 거의 우는 것과 다름없는 목소리로 외쳤기 때문이다.

“나, 나도요!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요!”

“응?”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어요! 레알 마드리드로 가면 가장 빠르게 세계 최고에 근접하겠죠. 근데, 전! 포츠머스에서 세계 최고가 되고 싶은 거라고요! 감독님과 포츠머스와 함께 말이에요!”

비명과 같은 조쉬 킹의 외침에 이어 다소 침착한 델리 알리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흥. 감독님, 전에도 말했지만, 전 최고의 팀에서 최고가 되는 것보다는 약한 팀을 최고로 만드는 최고가 되고 싶거든요? 욕심이 가득하다고요? 맞아요. 감독님의 욕심과 비슷할 정도로 말이죠.”

조쉬 킹과 델리 알리의 대답에 소하는 차마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곧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 얼핏 이해가 갔다.

‘내가 녀석들에게 영향을 받았듯이, 녀석들도 마찬가지였구나···.’

선수들은 돈과 명성을 최우선으로 친다. 조쉬 킹과 델리 알리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6년간 이어진 질긴 인연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었다.

인연이란 일방통행이 아니었으니까.

소하는 그저, 선수의 가치만 생각했을 뿐. 선수가 품은 가치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을 뿐이었다.

‘허공에 삽질하던 건 나였구나.’

허탈한 웃음을 짓는 소하.

유달리 힘이 없던 미소는 어느샌가 따스한 미소로 바뀌었다. 선수들도 이에 호응하듯 부드러우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맞이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존폐의 갈림길에 섰던 포츠머스가 세계의 정복을 눈앞에 둔 강력한 팀이 된 이유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 264화. 선수의 가치.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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