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화. 혁명은 선동으로부터. (4) >
처음 만나는 두 거인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제법 쾌활했던 분위기는 ‘본론’으로 들어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
“···.”
뒷공작이 들통났음에도 놀랍도록 침착한 소하의 썩은 미소.
그와 비견될 정도로 침착한 윌리엄 왕자의 여유 있는 미소.
이 둘이 합쳐지며 답답한 기류를 만들어낼 때쯤, 이윽고 소하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후룩, 차를 한 모금 내 삼키며 소하가 꺼내듯 카드는 ‘모르쇠’ 작전이었다.
그간 여론조작을 할 땐 항상 VPN을 사용했기 때문에 IP 추적은 불가능하다.
즉, 이번 공격은 ‘넘겨짚기’라는 것이 소하의 판단이었다.
넘겨짚기, 혹은, 찔러보기.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을 때 돌직구를 던져 상대의 반응으로 심증을 확신하는 전략이다.
그동안 주도면밀했다고 자부하는 소하로서는 이 수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소하의 판단은 얼추 비슷하게 들어맞았다.
“흐음. 제 예상이 틀렸나 보군요.”
빙글 웃는 윌리엄 왕자는 예상이 틀렸음에도 그리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꽤 그럴싸한 추리였는데요. 일단 아이디부터 SSH1314이지 않습니까? 성소하, 13-14. 감독님의 이름과 부임한 시즌을 합친 절묘한 아이디였어요.”
“제 개인 팬인가 보죠. 뭐.”
소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윌리엄 왕자의 추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런가 보군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유능한 사람입니다. 포츠머스가 잘나갈 때 비판적인 글을 써서 먼저 화제를 모으다니요. 대단한 선견지명입니다.”
“···.”
“원래 사람에게 가장 잘 통하는 무기는 동정심입니다. 자신이 비판했던 사람의 말이 옳다면 당연히 동정심을 가지겠죠. 덕분에 ‘매우 놀라운’ 선견지명으로 썼던 비판은 순식간에 최고의 화젯거리가 됐어요.”
“···.”
“어찌나 큰 화제였는지, 현실의 그림자에 불과하던 인터넷이 현실을 움직이게 했어요.”
“참으로 흥미로운 ‘소설’이네요.”
소하는 소설을 강조해서 ‘그만하자’라고 운을 뗐지만, 윌리엄 왕자는 그냥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진짜 재밌는 부분은 지금부터입니다.”
“···.”
“SSH1314는 현실을 움직였음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아, 물론, 현실에서 현실을 움직일 만한 동료와 힘을 합쳤다는 점도 그냥 간과하면 안 되겠지요.”
“···.”
“하여튼, 그는 순식간에 여론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바꾸었어요. 놀라운 일이지만, 놀라운 예측력을 가진 사람에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요. 덕분에 혼자서는 불가능했던 일을 수많은 국민의 지지에 힘입어 가능한 한 일로 바꾸었습니다. 어때요? 정말 뛰어난 사람이지 않습니까?”
“마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대단한 능력을 갖춘 친구네요. 어떻게든 찾아내서 밥이라도 사줘야겠는데요?”
소하는 이번에도 끝까지 잡아뗐고 드디어 윌리엄 왕자의 이야기도 끝이 났다.
그러나 그들의 전쟁마저 끝이 난 건 아니었다.
-부릅.
-찌릿.
둘 다 모두 세상 누구보다 온화한 얼굴인데, 눈빛만큼은 매섭기 짝이 없다.
그렇게 억겁 같은 몇 분이 흐르고 나서야 윌리엄 왕자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하. 물론, 어디까지나 제 머릿속의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전 그저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성소하 감독님 말고 또 있을까 싶었거든요. 게다가. 이번 사건에서 가장 이득을 많이 본 사람도 성소하 감독님이지 않습니까?”
“전 그저 물이 들어와서 노를 저었을 뿐입니다. 참으로 운이 좋았죠.”
“그런가 봅니다. 하기야, 만약, 정말 만약에 말입니다···.”
잠시 말을 늘인 윌리엄 왕자는 눈빛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천만분의 1의 확률로 성소하 감독님이 제 소설의 주인공이었다면, 정말 무시무시한 일일 겁니다.”
“어째서죠?”
“자기 힘으로 경기 결과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절대적인 능력을 갖춘 감독이란 뜻이니까요.”
윌리엄 왕자는 말을 꺼내면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자기 마음대로 경기 결과를 정하는 감독이라면 이미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인간의 규격을 넘어선, 신화나 전설에서나 나올 초월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 존재는 소설 속에서만 존재해야 했다. 질서를 위해서라도.
물론, 소하는 자기 일이 아니었기에 모처럼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아쉽군요.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전승 우승을 노려봤을 텐데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는 소하.
비기거나 간신히 이기는 정도야 할만하지만 완전히 이기는 것만큼은 정말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비기기로 작정한 로코모티프 경기는 져버렸다. 그것도 홈에서.
축구공은 둥글었고, 아무리 회귀라는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다 해도 경기 결과를 마음껏 조종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 사건도 그저 운이 좋았을 뿐.
상당히 위험한 외줄 타기였다.
연패를 줄줄이 끊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긴, 그렇군요. 감독님이 그런 능력을 갖췄다면, 굳이 ‘혁명’을 외치시진 않았겠죠.”
여전히 심증을 거두지 않았다는 기색이 다분한 윌리엄 왕자였지만, 시간이 제법 흘렀기에 곧바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이제 협상을 시작해보도록 합시다. 우리 FA에서는 교체명단 9인까지는 수용할 생각이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요구 조건은 세 가지다.
리그컵 축소화.
교체 카드 5장.
교체명단 9명.
리그컵은 아예 폐지하자고 주장했고, 교체 카드와 교체명단은 기존의 3장과 7명에서 2개씩 늘리기를 바랐다.
물론, 세 가지 요구사항 중에서 한 가지만 얻기 위해 이런 노고를 치를 순 없는 노릇!
소하는 당연하게도 고개를 내저었다.
“세 가지 전부 다 들어주시죠.”
“교체명단 9명.”
“세 가지 전부다.”
“9명.”
“세 가지.”
“9명.”
“교체 카드 9장.”
“9···. 아니, 갑자기 무슨 짓이십니까?”
리듬감 있게 서로의 태도를 고수하던 둘이었건만. 소하가 갑자기 뚝 떨어지는 변화구를 던지자 윌리엄 왕자가 크게 당황했다.
“아. 아쉽다. 성공할 뻔했는데.”
“···교체 카드 9장은···. 무슨, 축구를 농구로 바꿀 속셈이십니까?”
“꽤 재밌을 거 같지 않나요?”
소하가 장난스럽게 웃자, 윌리엄 왕자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긴 할 거 같지만, 축구가 축구가 아니게 될 거 같군요. 휴우. 좋습니다. 교체명단 9명에 교체 카드 5장으로 합시다. 다만 교체 카드는 전반전엔 3장, 그대로고 후반전에 2장 추가되는 걸로 하죠.”
“좋네요. 그럼 이참에 그냥 세 가지 전부 다 들어주시죠?”
“리그컵 폐지는 절대 안 됩니다.”
“정말요?”
“네.”
이번에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듯 윌리엄 왕자는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리그컵 폐지는 너무나도 급진적이다. 게다가 리그컵은 하부리그의 구단들에 상당히 큰 재정적 이득을 줬기 때문에 없애는 것도 소하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슬쩍 원하는 방향을 찔러 넣어보기 딱 좋을 때였다.
“그럼 폐지 말고 축소로 가죠.”
“···축소···. 말입니까?”
“네. 여기 제가 마련한 구상안이거든요? 한번 봐보시죠.”
이때다 싶어 소하는 재빨리 미리 준비해둔 축소안을 꺼내 들었다.
“···노림수가 있으셨군요.”
“현명한 사람은 한 우물만 파지 않는 법이죠.”
“뭐···. 찝찝하긴 하지만 한번 보기만은 해보겠습니다.”
뭔가 당한 기분에 얼떨떨했지만, 윌리엄 왕자는 소하가 건넨 축소안을 읽어보았다.
“···흐음. 괜찮군요.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하는 팀을 8강부터 집어넣는 방식이라니. 참신한데요?”
“제법 신경 좀 써봤습니다.”
소하가 준비한 축소안은 나름 그럴듯했다.
먼저, 3라운드, 그러니까 32강부터 시작하는 챔피언스 리그 참가팀들을 아예 두 단계 건너뛴 8강부터 시작하도록 조정해놨다.
“열심히 올라와서 끝판왕을 만나는 느낌의 변화죠.”
“이렇게 된다면 상위 팀들이 리그컵을 우승하기 너무 쉽지 않습니까?”
“원래도 상위 팀이 꾸준히 우승했어요. 똑같습니다.”
“그건 그렇죠···.”
07-08시즌부터 17-18시즌까지 10년 동안 강팀이 리그컵에서 우승하지 못한 시즌은 단 두 번밖에 없다.
10-11시즌의 버밍엄.
12-13시즌의 스완시.
암만 상위권 팀들이 유망주를 기용한다 해도 결국 리그컵의 왕좌는 상위권 팀이 차지했다.
결국 변하는 건 거의 없다는 이야기.
“그리고 유로파 리그 참가팀들도 한 라운드 위부터 시작하도록 조정해놨어요. 이렇게 된다면 하부리그 팀들의 경기 수가 많아지겠죠? 리그컵의 존재 의미에도 영향이 없습니다.”
“···.”
“어차피 하부리그 팀들이야, 강팀하고 붙는다고 해도 코흘리개 유망주들이나 보고 가지 않습니까? 별로 문젯거리가 될 거는 없다고 봅니다.”
“덤으로 1차전, 2차전으로 나뉜 준결승전을 단판 승부로 바꾸셨군요.”
“상식적으로 이상하지 않나요? 근본의 FA 컵도 단판 승으로 가잖아요.”
“흐음. 합리적이군요.”
윌리엄 왕자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처럼 매우 합리적인 축소안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규모 축소가 아닌, 상위권 팀들에게만 축소되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폐지만은 결단코 막아야 할 리그컵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도 충분할 만큼의 합리적인 제안!
덕분에 윌리엄 왕자의 마음은 수락에 상당히 기울어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속마음과는 다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아쉽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거절에 소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재빨리 반문했다.
“왜요?”
“저희가 너무 많이 내주지 않습니까? 이건 협상이 아니라 항복입니다.”
“···전쟁에서 졌으면 당연히 항복하는 게 순서 아닙니까?”
“글쎄요. 제대로 붙으면 지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만···.”
“···이잉.”
소하는 윌리엄 왕자의 얼굴 앞에서 입술을 비틀며 이를 갈았다.
왜냐하면 사실이었으니까.
그냥 이대로 FA가 모르쇠로 일관하면 언젠간 잠잠해질 일이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모 영화에 이런 대사도 있지 않던가.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라는 굉장히 불유쾌한 대사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기분 나쁜 말이긴 했지만, 놀랍게도 만국 공통이었다.
심지어, 수천 년의 인류 역사에서 꾸준히 사용되던 전통적인 방법이란 이야기다.
소하로서도 지금 활활 타오르는 이 불꽃을 영원히 유지할 자신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후후. 역시 영민하신 분입니다. 이렇게 대화가 편한 분도 몇 없으실 겁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하지만 저희도 얻어가는 게 있다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질 겁니다.”
“네?”
“저희의 요구 조건을 수락하시면 리그컵 축소안도 받아들이겠단 이야기입니다.”
배를 줄 테니 감을 내놓으란 소리였다.
소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은 들어보기로 작정했다.
“일단 들어나 보죠. 노파심에 말하는 거지만 수락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제 순결을 원한다고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일은 세계가 멸망해도 없을 겁니다···.”
다리를 꼬며 요염한 척하는 소하의 자태에 두통이 밀려온 윌리엄 왕자는 미간을 짚으며 요구사항을 밝혔다.
“포츠머스 이후, 다음 감독직은 무조건 잉글랜드 국가대표의 감독으로 해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저희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
예상외의 조건에 소하는 문득 며칠 전 대한민국 축구협회에서 온 전화가 떠올랐다.
주절주절 찬양하는 말이 절반 이상인 대화였지만, 요컨대, ‘국가대표 감독직은 무조건 대한민국을 가장 먼저 해달라’였다.
덤으로, ‘절대 잉글랜드 국가대표부터 먼저 맡으면 안 된다. 이건 민족 정서 어쩌고···. 군대까지 다녀온 애국심 저쩌고···.’ 라는 뜻도 담겨있었다.
‘흐음. 뭔가 두 국가 간의 경쟁심이 생겼나 보군. 날 두고선 말이야. 쯧쯧.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음모에 관해선 눈치 빠르기로 전 세계에서 세 손가락에 든다고 자부하는 소하는 단박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렇다면 대답은 쉬웠다.
이미 대한민국 축구협회에도 한 번 했던 말이었기에 더더욱 쉬웠다.
“좋습니다. 다음 감독직은 무조건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하죠.”
흔쾌히 수락하는 소하!
대한민국 축구협회에도 똑같이, ‘좋습니다. 다음 감독직은 무조건 대한민국 감독직으로 하죠.’라고 대답했었기에 훗날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다음 감독직은 없을 거니까···. 난 포츠머스에서 은퇴할 건데? 하하하.’
거짓말은 아니지 않은가.
그냥, 다음 감독직이 없을 뿐이었다.
물론, 이런 소하의 음흉한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던 윌리엄 왕자는 흔쾌히 수락했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도록 하죠. 아, 물론, 안건은 모두 프리미어 팀들의 투표로 결정될 겁니다. 별로 영향은 없겠지만요.”
어차피 이미 과반이 찬성이다.
투표란 결국 겉치레일 뿐.
이미 협상은 끝났고 소하의 혁명은 성공했다.
교체 카드 5장과 교체명단 9명.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새로운 규칙이다.
하지만 리그컵 축소는 소하가 만든 새로운 혁신이었고, 혁명이었다.
이전 세계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길!
항상 조심스럽게 미래를 개척하던 소하로서는 정말 파격적인 행보였다.
‘후우. 이제 끝났군. 과연, 어떤 여파가 생길지···. 걱정이 조금 되지만 뭐, 어련히 잘되겠지.’
협상을 마치고 떠나는 윌리엄 왕자의 등을 바라보는 소하.
그의 걱정은 예상외로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260화. 혁명은 선동으로부터.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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