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혁명은 선동으로부터. (3) >
묵묵부답으로 사태를 관망하던 FA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 포츠머스가 프리미어 리그에서 첼시와 웨스트햄을 각각, 2-1, 3-1로 잡아내며 3연승을 이어나가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사건이 발생한 뒤 2주 가까이 지나서야 움직이다니. 참으로 무거운 엉덩이다.
하여튼,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FA와 소하의 관계는 조금 미묘했다.
평소 FA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아서 징계도 몇 번 받았던 소하가 아니던가.
당연히 FA에서는 곱게 볼 리는 없었지만, 또 무조건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딱히 별다르게 없다.
FA는 이미 소하에게 한번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모 4부리그 감독의 기지로 조기에 막아낸 대규모 승부조작 사건!]
[망신을 당할뻔했던 FA, 사전에 사건을 조기 종결지으며 평판이 좋아졌다.]
[발 빠른 FA의 후속 조치. 위기를 기회로 바꾼 가장 완벽한 사례.]
머나먼 과거, 소하의 기지로 대규모 승부조작 사건을 사전에 방지했고,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상당한 이득을 봤던 FA였다.
덤으로 소하는 감사패까지 받았으며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알현하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얻게 되었었다.
덕분에 모처럼 소집된 FA의 최고 임원 회의에서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아니, 이건 말도 되지 않는 요구입니다.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 상식을 파괴하는 조건을 들이밀었어요!”
반대파의 대표자이자, FA의 사무총장인 알렉스 혼은 침을 튀기며 격렬히 반대했다.
그런데도 마음속의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았는지, 그는 계속해서 강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국민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 겁니다! 테러란 말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테러와는 협상하지 않는 것이 국제법상 관례입니다!”
가도 너무 멀리 갔다.
암만 소하가 선동질을 했다 해도, 테러라니. 심지어 알렉스 혼 사무총장은 사건을 조종한 인물이 소하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잠시 진정하십시오. 사무총장님. 테러라니요. 너무 과한 반응이십니다. 성소하 감독과 다른 감독들이 누굴 해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공석인 의장 자리를 대행 중인 의장 직무대행, 피터 맥코믹은 격앙된 분위기를 한차례 환기했다.
그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중도.
의장 직무대행이라는 직책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견해다.
“맞습니다. 테러라니요. 제가 보기엔 성소하 감독의 이번 요구는 매우 합당합니다.”
최고 경영자, 마크 불링엄은 말에서도 증명했듯 찬성파였다.
소하의 주장에서 상당한 돈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교체 카드 숫자가 늘어나면 어린 선수들에게도 기회를 더 줄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뛰어난 선수들을 더욱 데려와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골칫덩어리인 리그컵에서 강팀들이 해방된다면 대륙대항전에서 더욱 좋은 성적을 거둘 확률이 는다.
그렇게 된다면 프리미어 리그의 이름값은 더욱 올라갈 테고, 최상위 리그의 활약은 하부리그에도 상당한 도움을 줄 터. 경영자인 그의 처지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합당하다니요! 우리가 만들어낸 스포츠, 축구에서는 그런 규칙 따위는 없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와 지금도 매우 다르지 않습니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우리도 점점 변해야지요.”
“흥. 그렇다면 우리보다 40년이나 뒤늦게 발족한 UEFA가 꺼낸 이야기를 우리가 뒤따라가야 한단 말입니까? 자존심이 달린 문제에요! 종주국으로서!”
“아직 UEFA 쪽에서도 논의 중인 내용이에요. 우리가 먼저 시작한다면 주도권을 가져온다는 이야기죠.”
회의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다람쥐가 굴리는 쳇바퀴처럼.
상식적으로 볼 때 반대파의 논지가 이상할 수도 있었으나, 그냥 무시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반대파가 주장하는 것은 이래저래 사족이 많아도 ‘권위’에 대한 이야기다.
권위, 보통 사람들에게는 슬쩍 보기만 해도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묵직한 단어.
자유와 혁신의 시대인 21세기에는 더더욱 소름 돋는 단어지만 아예 쓸모없는 무언가는 아니었다.
“권위란 질서를 지키기 위한 방패에요! 감독들이 난데없이 밀약해서 요구한 사항을 그냥 들어준다면 우리의 권위가 흔들려요! 권위가 흔들리면 당연히 질서가 흐트러진단 말입니다.”
한번 권위가 흔들린 협회는 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가뜩이나 엄청난 자본의 힘으로 강한 힘을 가진 프리미어 리그 팀들이 협회를 쥐락펴락한다면 잉글랜드 축구계는 혼돈에 빠질 터. 알렉스 혼 사무총장은 이를 우려한 것이다.
지금이야 감독들의 요구가 합리적이라곤 하지만, 언제나 합리적일 순 없지 않은가.
상위권 팀들만 유리한, 예를 들어 훗날 축구계를 뒤흔들 ‘슈퍼 리그’ 같은 상황에서 협회가 주도권을 가지지 못했다면 큰 사달이 났을 거다.
즉, 권위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힘!
FA로서는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힘이기도 했기에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사항은 절대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는 사항입니다. 우리의 권위가 흔들릴만한 일이 아니에요.”
“아니요. 우리에게 어떠한 언질도 없이 곧바로 기자회견장에서 선전포고를 한 건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그건 가정일뿐입니다.”
몇 시간이고 계속되는 회의였지만 찬성파와 반대파의 견해 차이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이에 참다못한 알렉스 혼 사무총장은 더더욱 강경하게 해결책을 내놨다.
“그냥, 성소하 감독에게 중징계를 내리고 끝내면 될 일입니다! 그 천덕꾸러기 원숭이 같은 작자를 무시하면 끝날 겁니다!”
“방금 발언은 위험합니다. 사무총장님. 아시아계 혼혈에 대한 인종차별로 들릴지도 몰라요.”
의장 직무대행, 피터 맥코믹이 서늘한 눈빛을 보내며 경고했다.
시종일관 중립자로서 회의를 조율했지만, 선을 넘는 발언에는 일말의 자비조차 없었다.
“큼큼. 그, 인종차별이 아니라 원숭이같이 마구 날뛴다는 뜻입니다. 소, 솔직히 말해서 어지간한 백인보다 훨씬 잘생긴 감독 아닙니까? 인종차별이라뇨. 오해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알렉스 혼은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FA는 인종차별을 극도로 혐오하는 단체였으며 알렉스 혼 또한 인종차별을 혐오하는 인물이었기에 단순한 단어 선택 실수였다.
“흠···. 알겠습니다. 하지만, 성소하 감독을 그냥 찍어 누르는 일도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크흠. 그건 그렇지요.”
알렉스 혼은 실수 때문인지 조금 저자세로 나왔다. 사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소하는 FA가 권위의 검으로 찍어누를 만큼 호락호락한 존재도 아니었고, 뒤에는 대중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구단주 리처드 맥닐은 성소하 감독의 의지는 자신의 의지인 점을 밝혔습니다. 구단주를 이용해 압박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흥. 그 돈만 많은 평민 말입니까?”
굉장히 무례한 발언이었지만 의외로 이번에는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아직도 계급이 남아있는 나라였으니까. 법적으로는 유명무실하고 그저 장식이라고 할 뿐이지만 현실은 그러지 않았다.
Upper Class.
Middle Class.
Working Class.
법적으로는 무의미하지만, 현실에는 사용하는 단어와 발음도 다를 만큼의 차이를 보여주는 계층이다.
심지어 저 세 가지의 계층에서도 또다시 계층이 나뉘는 현대판 중세가 바로 잉글랜드다.
그리고, 이 회의장에 모인 모두가 최상위 계층, Upper Class에 속한 인물임은 당연했다.
잉글랜드의 자랑, 축구를 관장하는 협회의 최고 임원들이었으니까. Working Class로써 감히 오르지도 못할 장소였다.
“흠···. 논지가 조금 옆으로 빗겨나갔군요. 하여튼, 리처드 맥닐의 계급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리처드 맥닐은 평민으로 시작해 최상류층까지 다다른 인물 아닙니까? 대중은 그를 좋아해요. 성소하 감독처럼 말이죠. 그래서 그냥 무시할 순 없어요.”
“그렇다면 요구를 들어주시겠다는 겁니까? 그건 안 됩니다!”
잠시 이야기가 다른 길로 샜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지지부진.
도저히 돌파구를 찾지 못했고 그동안 어째서 FA가 꼰대들의 집합소라는 악명을 얻었는지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지리멸렬한 회의는 뒤늦게 참가한 한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대단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모두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군요. 제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성소하 감독과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거 같군요.”
“···!! 회, 회장님.”
“아, 알겠습니다···.”
FA의 회장이자 케임브리지 공,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의 등장은 이번 사건이 끝에 다다랐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
포르투와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 위해 부산스럽던 포츠머스의 클럽하우스.
가뜩이나 포르투갈 원정 때문에 바빴지만 지금의 상황이 비교조차 어려울 정도로 바쁜 일이 발생했다.
“네?! FA의 회, 회장님이 방문하신다고요?!”
“자, 잠깐 FA의 회장이라면 케임브리지 공작 아니야?!”
“그러니까···. 왕자?!”
“비, 비상이다. 가, 감독님 아니, 구단주님에게 연락해야···!!”
FA의 회장이자, 케임브리지의 공작이며, 현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손자인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가 방문한다는 연락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워했다.
그야말로 비상 상태!
리그 도중에 FA의 회장이 감독을 만나기 위해 직접 행차하는 사건은 사상 초유였기에 포츠머스의 프런트는 혼비백산했다.
“흠···. 끽해야 사무총장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회장이라니···. 예상외의 결과인걸···.”
소식을 접한 소하는 모처럼 당황했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의 등장이라니.
그로 말하자면 수년 뒤는 영국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올라서는 왕족이지 않던가! 왕위에 가장 가까운 남자였다.
심지어 잉글랜드 인들이 지극히 사랑했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아들인지라 잉글랜드 국민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는 왕족이었다.
이런 거물의 등장에는 대범하기로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소하마저도 당황하지 않기가 힘들었다.
“일단 상황은 극단적으로 나뉘겠군. 압박을 받아서 포기하거나 혹은, 주도권을 넘겨주고 원하는 바를 얻던가.”
높으신, 그것도 가장 높으신 분의 행차는 상황을 따른 결과를 두 가지로 압축시켰다.
이래저래 슬슬 경기에 집중해야 하는 소하로서는 다가온 결말이 반가웠다.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계속 질질 끌리다 보면 집중력이 떨어져 시즌을 망칠지도 몰랐다.
그리고, 잠시 뒤.
밖이 소란스러워졌고 곧이어 소하의 집무실에는 TV에서만 보던 그 얼굴이 등장했다.
“반갑습니다. 성소하 감독님.”
유전적 탈모만 없었다면 굉장히 훈훈한 외모를 자랑했을 왕자의 등장에 소하도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맞이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소하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아마, 윌리엄 왕자는 소하의 감독 사무실에서 가장 친절한 응대를 받은 사람일 거다.
그는 선수들이나 다른 프런트의 직원들이 이곳을 마굴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여튼, 자리에 앉은 윌리엄 왕자는 싱긋 웃으며 서두를 꺼냈다.
“먼저 갑작스럽게 방문한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뭘요. 저도 왕족보고 좋은데요.”
“하하. 듣던 대로 자유분방한 분이시군요. 다행입니다. 저도 시작은 사적인 용무 때문이거든요.”
“네···? 사적이요?”
사적이라는 말에 소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윌리엄 왕자를 흘겨보았다.
딱히 접점도 없는 인간이 사적인 용무가 있자니. 뭔가 찝찝했다.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소하는 엉덩이에 힘을 꽉 준 채 슬쩍 거리를 뒀고, 이에 윌리엄 왕자는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정말, 할머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엉뚱한 분이군요. 이상한 오해는 사절하겠습니다. 하핫.”
“할머니···요?”
“네. 종종 만나시지 않습니까?”
“종종 같은 게 아니라 매우 드물게,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정도라고 해두죠.”
“그래도 만나시긴 하지 않습니까? 세간에 알려지면 꽤 놀랄 일일 겁니다. 보통, 평범한 신분이 만나기는 쉽지 않으신 분이니까요.”
“···그야 그렇죠.”
소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긍정했다.
윌리엄 왕자의 할머니,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아주 드물게 초대받긴 했으니까.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하기도 뭐한 관계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2년 전이었고, 초대받아서 열심히 차를 우린 기억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소하로서는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를 아주 싫어했기에 썩 좋은 추억은 아니었지만, 여왕 폐하는 아니었나 보다.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하시더군요. 조만간 또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나요? 하긴···. 초대한 손님한테 차를 부탁하셨으니 재밌긴 하셨겠군요.”
“흠, 그럼 다행이군요. 이번에는 제가 손님이니 마음 편하게 차를 대접받을 수 있겠습니다.”
“···.”
소하는 목젖까지 올라온 ‘차가 목적이었냐!’라는 외침을 꿀꺽 삼치고 썩은 미소를 지었다.
“하, 하하. 싸구려 찻잎밖에 없어서 귀한 왕족의 입맛에 맞으실진 모르겠지만···.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의외로 입맛이 저렴한 편입니다.”
“···.”
군대까지 갔다 온 양반이라 능글맞기가 여간내기가 아니다.
하여튼, 소하는 입술을 삐쭉이며 능수능란하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차를 한잔 빠르게 대접했고 윌리엄 왕자는 크게 만족했다.
“와. 정말 대단하시군요. 저도 제법 차에 진심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경지를 체험했습니다.”
“그냥 취미입니다.”
“이 정도가 취미라면 본업인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얼마나 대단한지 감히 짐작조차 어렵군요.”
“···.”
자꾸만 비행기를 태워주자 불안해진 소하였지만, 윌리엄 왕자는 느긋하게, 진심을 담아 차를 음미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죠. 제가 보기엔 감독님에게 진짜 어울리는 직업은 따로 있는 거 같습니다.”
“흐음···. 뭡니까?”
다시 한번 차를 입안에서 즐긴 윌리엄 왕자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혁명가가 어울릴 거 같군요. 참으로 훌륭한 실력이었습니다.”
“···?!”
“이제, 사적인 일을 끝냈으니 공적인 일로 넘어가죠. 뭐라고 해야 하나···. SSH1314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
싱긋 웃는 윌리엄 왕자를 바라보는 소하의 미소에 걸린 썩은 미소는 더할 나위 없이 짙어졌다.
< 259화. 혁명은 선동으로부터.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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