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253화 (253/306)

< 253화. 시작. (3) >

포츠머스가 리그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강팀, 아스널.

아르센 벵거라는 뛰어난 감독의 장기집권 아래 프리미어 리그의 터줏대감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다진 팀이다.

하지만, 18-19시즌은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공고했던 탑이 극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속보! 아르센 벵거 감독 은퇴!]

[아스널, 그 자체인 아르센 벵거 감독이 아스널을 떠난다!]

[충격! 아스널의 아버지가 사라지다.]

[감독직에서 은퇴하는 아르센 벵거!]

아스널 그 자체였던 아르센 벵거 감독이 감독직 은퇴를 선언했다.

프리미어 리그를 비롯한 축구계 전체가 놀란 대사건이었다.

-어? 마, 만우절이지?

-잠깐, 왜···. 왜요!

-꿈일 거야. 꿈. 그것도 정말 최악의 악몽 말이야···.

특히나, 아스널 서포터들은 현실을 부정하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아르센 벵거 감독은 친절하게도 기자회견을 열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고심 및 클럽과의 논의를 계속해온 끝에, 저는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는 수많은 시간 동안 이 팀에서 일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데 대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헌신을 다하여, 성실하게 이 팀을 감독했습니다.

이 팀을 이처럼 특별하게 만들어 준 선수들, 스태프들, 디렉터들, 그리고 팬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이 팀이 더욱 성공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팬들이 팀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기를 바랍니다.

아스널을 사랑하시는 여러분, 팀의 가치를 지켜주세요. 영원한 사랑과 지지를 담아서.”

2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함께한,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로 이보다도 훌륭한 말이 어디 있을까.

그날 전 세계 모든 아스널 서포터들이 눈물을 흘렸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아르센 벵거 감독과 사적인 친분이 있는 소하도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오장원의 별이 지는구나···.”

뇌세포를 파괴한다며 술을 굉장히 멀리하던 소하마저도 그날은 우울하게 한잔 꺾었다.

그만큼 아르센 벵거는 소하가 위르겐 클롭, 펩 과르디올라와 함께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을 떠나서 말이다.

“미래를 보고 혁명을 하는 건 쉽다. 하지만 미래를 예측하고 혁명을 하는 건 지극히 어렵지.”

22년 전.

아르센 벵거 감독이 잉글랜드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는 정말 개판이었다.

술을 미친 듯이 마시며 식단관리의 시작도 모르던 선수단.

축구인지 미식축구인지 모를 뻥축구 일변도의 무식한 전술 스타일.

선수의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 주먹구구식 훈련.

이 모든 것이 아르센 벵거 감독이 등장하기 전의 잉글랜드 축구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 일본에서 팀을 맡던 키만 멀대같이 큰 프랑스인은 오자마자 혁명을 일으켰지···.”

아르센 벵거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혁명을 시작했다.

술을 금지했으며,

식이요법을 도입했고,

본격적인 식단관리의 시작과 함께

뻥축구만 하던 리그에 패싱 플레이가 무엇인지 보여주며 축구의 판도를 바꿨다.

이외에도 수많은 ‘혁신’을 일으키며 프리미어 리그가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리그로 성장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오죽했으면, 가장 큰 경쟁자였던 전설적인 감독, 알렉스 퍼거슨 감독도 아르센 벵거의 혁신을 누구보다 열심히 받아들였을 정도!

그야말로, 위대한 감독이자 위대한 혁명가였다.

즉, 소하에게 전술적인 스승은 펩 과르디올라와 위르겐 클롭 감독이었다면, 선수단 운영에 있어선 아르센 벵거 감독이란 뜻이다.

그러니 같은 혁명가이고, 나름대로 스승이라고 여기던 감독의 은퇴는 소하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바뀌기 전의 미래보다는 훨씬 좋게 퇴장하셨네. 불행 중 다행인가.”

과거의 미래에서는 성적 부진으로 ‘사임’했었다.

하지만, 소하가 개입하며 15-16시즌, 준우승하던 시즌을 우승으로 마무리했고 사임은 ‘은퇴’로 변했다.

사임과 은퇴.

같은 두 글자지만 차원이 다른 뜻을 가진 단어들이다.

이래저래 아르센 벵거 감독을 존경하는 소하로서는 좋은 변화였고, 또 경각심을 가질만한 일이기도 했다.

“미래를 바꾸어도 큰 줄기는 변하지 않는다···일까? 적어도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소하는 그간 미래를 아주 조심히 다뤘다. 알고 있는 미래가 있어도 그냥 내버려 둘 때도 있었고, 축구계 밖의 미래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적극적인 미래 변경에는 후폭풍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리버풀에서 모하메드 살라를 훔쳐 왔더니 앙투안 그리즈만이 가버렸지. 원래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리버풀을 부숴버리겠다고 선수 좀 빼 왔더니 더욱더 강해져 버렸다.

나중에야 모하메드 살라와 앙투안 그리즈만이 비슷한 평가를 받았지만, 당시만 해도 위상이 다른 선수였다.

심지어 이번 세계의 그리즈만은 바르셀로나로 가서 망하는 미래가 사라졌는지, 더 뛰어난 선수로 진화했다.

덕분에 지난 시즌 프리미어 리그의 득점왕에 올랐다. 무려 32골을 넣으면서!

“기준이 없어, 기준이. 자기 멋대로 바뀌니···. 조심할 수밖에 없지.”

어차피 대업의 완성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변덕이 심한 미래를 들쑤시기보다는 몸을 사리면서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좋았다.

하여튼, 위대한 감독, 아르센 벵거가 사라진 아스널에게 큰 위기가 왔다는 점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후임으로 들어온 감독은 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 소하에게 호되게 혼난 ‘우나이 에메리’ 감독이었다.

아직 ‘빅클럽’을 지휘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르는 감독이었고,

아르센 벵거 감독보다 훨씬 떨어지는 감독임에는 부정할 이유가 없다.

“요컨대, 아스널이란 이름값에 비해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상대라는 거지.”

내일을 기다리는 소하의 입가에는 어느덧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아스널의 홈구장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포츠머스와 아스널의 프리미어 리그 6라운드가 시작됐다.

선공은 포츠머스.

비록 4일 전, 챔피언스 리그를 치웠지만 모든 전력을 동원하며 초반부터 기세를 잡았다.

“확실히, 아스널이 예전만큼 강한 맛은 없네요. 감독님.”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밀러가 소하에게 속삭였다.

전분 18분까지 점유율을 압도적으로 올리며 몰아붙이는 팀의 모습에 기분이 좋은 듯 표정이 굉장히 밝다.

“그렇죠. 22년 동안 팀, 그 자체였던 사람이 없어졌으니까요.”

“하. 22년이라니. 정말 기네요. 감독님께서 이제 몇 년 차셨죠? 5년이던가?”

“···실망이네요. 6년 차거든요. 정확히는 5년 2개월 16일 지났어요. 오늘이 9월 22일이니까요.”

소하가 입술을 구기며 실망했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자 밀러는 허둥지둥 팔을 흔들었다.

“그···. 뭐냐, 감독님께서 워낙 동안이셔서 제가 잠깐 착각했습니다! 누가 보면 5개월 차인 줄 알겠어요!”

아부 중에서도 하책으로 치는 ‘동안’의 계책이 밀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중년의 사모님이 아니고서야 별로 통하지도 않을 얄팍한 아부로 소하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다니. 수행이 부족해 보인다. 혹은, 그만큼 당황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소하는,

“···.”

히죽, 히죽.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에 애써 힘을 줘봤지만 만족했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뭐, 아무리 얄팍한 아부라도 상대가 만족했다면 그만이긴 했다. 또는 맞춤 전술이었을지도 모른다. 저 에메리 감독처럼 말이다.

“···큼큼. 요즘 아부가 제법 느셨네요. 혹은 안목이라고 할까나···. 하여튼, 이번 경기는 큰 변수는 없을 거예요. 에메리 감독은 자신의 색이 옅은 감독이니까요. 상대의 전술에 맞춤전술을 쓰는 감독이라 주도적이지 못하죠.”

“흐흐···. 아부라니요. 제 입은 명확한 사실만 말합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쉽게 치를 경기였으면 챔피언스 리그에서 뛴 선수들을 좀 쉬게 해줄 걸 그랬나 봅니다.”

“에이. 아스널이 그 정도로 약해지지는 않았어요. 감독이 바뀌어서 흔들린다고 해도 기본적인 체급이 높은 팀이에요.”

“그건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는 밀러.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하지 않던가. 암만 아르센 벵거를 잃었어도 아스널의 선수들은 그의 의지를 잇기 위해 노력할 터. 방심은 금물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밀러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짐짓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을 늘였다.

“갑자기 왜 장마철, 비 맞은 개처럼 쭈그려 들었어요? 말해보세요.”

소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고 하자, 밀러가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감독님께서도 언젠간 떠나시겠죠···?”

그렇다. 밀러는 언젠가 떠날 소하의 모습을 상상하고선 풀이 죽은 것이었다.

22년 동안 한 팀을 지휘한 아르센 벵거의 은퇴는 소하와 포츠머스의 이별을 떠올리게 했나 보다.

“흐음. 뭐, 언젠간 그렇겠죠.”

사뭇 진지한 밀러의 어조와는 달리, 소하는 꽤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시즌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꿈을 이룰 테고, 그 후에는 저도 다른 꿈을 꾸어야 하지 않겠어요?”

“다른 꿈이요? 무슨···? 혹시 5대 리그에서 모두 트레블을 하는···?! 혹은 월드컵 우승?!”

밀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4부리그에서 썩던 포츠머스를 최고의 자리로 만든 후의 꿈이라니.

도무지 얼마나 큰 꿈인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소하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뚱하게 대꾸했다.

“뭔 소리예요. 누가 그런 스트레스성 탈모로 대머리가 될 꿈을 꾸어요. 지금도 힘들어서 죽겠구만.”

하기야, 한 팀을 맡아 최고의 자리로 올리는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런데 5대 리그 정복이라니.

덤으로 월드컵 우승이라니!

일단 리그 우승도 아닌 트레블이다.

희대의 천재도 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소하로서도 감히 해낼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소하는 포츠머스의 감독 말고는 감독일 자체를 썩 좋아하지 않는 남자!

누가 칼을 들고 협박해도 그런 꿈은 품지 않을 인간이었다.

물론, 월드컵 우승의 난이도도 비슷했기에 소하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럼 무슨 꿈이십니까?”

이쯤 되자, 밀러는 소하의 다음 꿈을 묻지 않을 수 없었고, 소하도 흔쾌히 밀러의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제법 어려운 일이에요. 토끼 같은 마누라랑 여우 같은 딸내미와 함께 평생 오순도순 놀고먹으면서 사는 거죠.”

“···반대 아닙니까? 여우 같은 아내랑 토끼 같은 딸이겠죠.”

“전 토끼 같은 마누라가 좋거든요. 개인 취향 좀 인정해 주시죠?”

“그, 그럼요. 하여튼, 그 뭐냐···. 참으로 어려운 꿈이군요. 암요. 어렵고 말고요.”

20년 차 유부남인 밀러는 소하의 다음 꿈에 대한 어려움을 대번에 이해했다.

행복한 가정이라.

정말로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밀러도 저런 꿈을 꾸었지만, 현실은 장비 같은 마누라와 여포 같은 아들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물이 나왔다.

2천 년 전, 중국 땅에서 태어났다면 한나라의 군벌 정도는 가능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2018년이었다.

“앗···. 잠깐. 그럼 혹시, 이번 시즌에 꿈을 이루신다면 은퇴하실 생각이십니까?!”

버럭 소리치는 밀러.

잠시나마 진행 중인 경기에 관한 생각도 잊을 만큼 굉장히 놀랐다.

꿈을 이루고 나서는 바로 다음 꿈을 꿀 테고 이것은 감독직 은퇴라는 엄청난 사건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소하 또한 이번만은 아리송한 미소를 지으며 밀러의 의문을 해결해주지 않았다.

“글쎄요. 그런 사소한 일은 나중에 신경 쓰시고 경기에 집중이나 하시죠.”

“사, 사소한 일이라니요! 감독···.”

“어?! 홀붕아! 좋은 기회다! 마무리 지어! 끝내버려!”

마침, 요즘 패스에 눈을 제대로 뜬 델리 알리가 멋들어진 패스를 선보였고, 에링 홀란드가 멋진 침투로 받아내었다.

-철썩!

에링 홀란드는 1:1 기회를 놓칠 만큼 만만한 선수는 아니었다.

그대로 골을 만들어내며 이번 시즌 9번째 골을 달성했다.

[골입니다! 골! 에링 홀란드가, 전반 24분 포츠머스가 빠르게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경기 내내 밀집 수비로 일관하던 아스널이었는데요, 이제 힘들어지겠군요. 이래저래 포츠머스의 상승세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렁찬 장내 해설과 아나운서의 외침,

“우오오오오!”

괴수 같은 에링 홀란드의 포효,

“홀란드! 홀란드!”

“가자! 우승을 향해서!”

“포츠머스! 포츠머스!”

멋진 골에 날뛰는 서포터들의 함성,

“그거지!! 좋아, 이 기세로 계속 가는 거다. 얘들아! 에메리 감독한테 프리미어 리그가 어떤 곳인지 가르쳐주자고!”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독려하는 소하의 외침에도 지금의 밀러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후우. 무슨 생각이신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밀러.

소하가 사라진 포츠머스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기에,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잘했다. 얘들아. 이대로 계속 가자.”

애써 경기에 집중하며 선수들에게 연거푸 칭찬하는 밀러의 얼굴엔 어느덧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고, 이는 포츠머스가 2-0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 253화. 시작.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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