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슈퍼컵. (3) >
18-19시즌 UEFA 슈퍼컵.
카림 벤제마의 전반 10분경 터뜨린 선제골로 레알 마드리드가 앞선 채 어느덧 후반 70분이 지났다.
포츠머스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격을 펼쳤지만, 레알 마드리드라는 철옹성을 뚫어내지 못했고 경기는 종반으로 치달았다.
[점점 다급해지는 포츠머스입니다!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를 뚫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정말 단단하네요. 도저히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포츠머스의 폼이 그리 나쁘지 않은데도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말처럼 포츠머스의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할 수 있는 플레이는 모조리 다 해봐도 레알 마드리드는 요지부동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극단적인 수비 전술이란 본디, 약한 팀이 강한 팀을 상대하기 위한 대표적인 방법.
즉,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팀이 더욱 강한 상대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만큼 효율적이라는 말이다.
괜히 과거의 주제 무리뉴 감독이 엄청난 성적을 낸 것이 아니었다.
그런 효율적인 축구를 강팀이, 그것도 세계 최고의 팀이 사용하자 숨이 턱 막힐 수밖에 없었다.
[남은 시간은 18분. 포츠머스가 과연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벽을 뚫을 수 있을까요?!]
[지금처럼 한다면 불가능할 겁니다. 특별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특별한 대책!
정확한 무언가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어필하는 마법의 단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는 감독의 처지로서는 정말 짜증스러운 단어였지만 필요성에 대해선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감독님. 교체를 지시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밀러 또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조언을 건넸지만 소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네? 이대로 계속 가시겠다는 이야기입니까?”
“네.”
“어, 어째서요?”
밀러의 당연한 반문에 소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특별한 대책이 없었는데, 생겼어요.”
“네?”
“말 그대로예요. 저도 10초 전까지는 특별한 대책을 짜내고 있었지만, 이제 필요 없게 되었어요. 정말 재수가 좋았죠.”
“도대체 어떤···?”
소하는 대답 대신 경기장의 한 선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물론, 그 선수는 당연하게도 델리 알리였다.
“알리요? 오늘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는데요?”
“그렇죠. 아니, 그랬었죠. 하지만 조금 전 플레이는 수준이 달랐어요.”
“그랬···나요?”
밀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 델리 알리의 플레이라면, 높은 공을 깔끔하게 받아내 짧은 횡패스를 건넸을 뿐이었거늘.
‘수준이 달랐다’라고 평가하기엔 조금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단순한 플레이였다.
적어도 밀러의 눈에는 말이다.
하지만, 소하는 손가락을 까닥이며 밀러의 의문을 분쇄했다.
“그럼요. 마치, 물이 흐르는듯한 부드러운 동작이었잖아요.”
“···전 좀 전과는 별다른 차이를 못 느끼겠습니다만···. 아니, 애초에 그런 게 보이십니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내 새끼들인데 한눈에 알아봐야죠. 밀러 아저씨는 벌써 노안이 오셨나 보네요. 혹은 사랑이 식었거나···. 너무 슬프네요.”
“···사, 사랑이 식다뇨. 정말 너무 하십니다! 제가 가진 포츠머스의 사랑은···. 어휴. 됐습니다. 됐어. 그나저나, 감독님의 말이 맞다고 친다면 그동안 델리 알리의 각성을 기다리신 겁니까?”
밀러의 이어지는 질문에 소하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전 지나가는 한 경기라면 몰라도 우승컵이 달린 경기를 한 선수 때문에 버리지 않아요.”
“하기야···. 감독님이 우승컵을 버리실 분은 아니죠. 그나저나 참 잘되었군요.”
어느덧 소하의 말을 이해한 밀러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고 소하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더욱 썩은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혼자 섀도복싱을 하던 중에도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비등한 경기력을 보여줬던 녀석이에요. 그런데 이제 알을 깼으니···. 분명 경기장에 태풍이 불 거예요.”
소하는 자신감 있게 미래를 예측했고, 말을 덧붙였다.
“변화를 줄 필요는 없어요. 지금이 딱 좋거든요. 동료들의 리듬, 레알 마드리드의 리듬을 70분 동안 온몸으로 학습했으니까요.”
그리고 소하의 믿음을 델리 알리는 곧바로 증명했다.
***
‘호흡이 달라졌다.’
델리 알리의 각성을 소하만큼이나 빠르게 파악한 건 포츠머스의 선수들이 아닌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이었다.
미묘하게 빨라진 판단과 플레이는 막기 정말 버거웠고,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에게 크나큰 위험으로 다가왔다.
-힐끗.
무언으로 눈빛을 이용해 대화를 나누는 루카 모드리치와 카세미루.
‘10번이 위험하다.’
‘내가 전담마크를 하겠다.’
‘알겠다. 나도 네 커버를 하지.’
‘좋다. 경기장에서 지워버리겠다.’
세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카세미루가 자리에서 벗어나 델리 알리를 전담으로 맡았고,
그가 이동하며 빈 곳을 몇 단 뒤, 세계 최고의 선수가 받는 상인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루카 모드리치가 커버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세계 최고의 선수 중 두 명이 델리 알리를 막는 것과 다름없었다.
[델리 알리에게 엄청난 압박이 가해집니다. 숨도 쉬지 못하겠는데요?]
[약간 재빨라진 모습이었는데, 레알 마드리드에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나 봅니다. 참, 굉장히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장면. 델리 알리와 포츠머스, 그리고 잉글랜드의 축구팬이라면 가슴이 벅차오를 광경이었다.
세계 최고가, 그것도 두 명이!
고작 22세의 어린 선수에게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정말로 쉽사리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은 걱정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델리 알리가 버틸 수 있을까?’
두 명의 세계 최고가 손을 마주 잡은 협공에 버틸 선수가 어디 있으리.
같은 세계 최고의 선수도 고전을 피하지 못할 게 뻔한데, 델리 알리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델리 알리는, 지금의 델리 알리는 차원이 다른 선수였다.
자신이 만들어낸 공포를 이겨낸 그의 자신감은 미친 듯이 흘러나와 실력을 한 차원 높일 정도였다.
‘난 뭐든지 할 수 있다.’
신이라면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전지전능함을 느끼는 델리 알리는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카세미루의 질긴 압박을 너무나도 쉽게 풀어냈다.
“···?!”
두 눈이 튀어나올 만큼 부릅뜨며 깜짝 놀라는 카세미루!
모든 방법을 동원해봐도 거세게 흐르는 폭포처럼 빠져나가는 델리 알리를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놀라운 장면입니다! 델리 알리가 다른 선수도 아니고, 카세미루를 완벽히 제압하고 있습니다!]
[포츠머스의 공격이 점점 거세집니다! 전담 마크가 실패했으면 당연히 벌어지는 일이지요!]
동료들에게 치명적인 패스를 찔러주기도 하며,
때로는 혼자 종횡무진 페널티에어리어를 농간하며 슛을 만들어내는 델리 알리!
후반 70분부터 80분까지.
그의 퍼포먼스는 어나더 레벨이었다.
‘안 되겠다. 혼자서는 무리다.’
‘나도 붙어줄까?’
‘아니. 여기서 더 공간을 내주면 위험하다. 지역방어로 아예 벽을 쌓아 올리자.’
‘좋아.’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은 영리했다.
마크를 한 명 더 붙였다가 실패하면 엄청난 위험을 초래했을 테니까.
차라리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지나가지 못할 촘촘하고 높디높은 벽을 쌓기로 작정한 그들의 판단은 정말로 훌륭했다.
[다시금 두 줄 수비로 들어가는 레알 마드리드! 정말 대단한 철옹성이 따로 없습니다.]
[바람 한 줄기도 지나가지 못할 견고한 벽입니다. 패스할 공간도, 슛할 공간도 보이지 않는데요.]
다시금 펼쳐진 지상 최강의 벽!
장내 해설과 아나운서의 외침처럼 너무나도 견고했고 도저히 뚫을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델리 알리에게는 예외였다.
‘보인다.’
길이 보였다.
아니, 상대의 진형이 전부 다 보였다.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모두 머릿속에 그려졌다.
흡사,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듯한 감각!
이것이야말로 전설적인 미드필더들이 공유하는 시야였다.
차비 에르난데스.
샤비 알론소.
안드레아 피를로.
지네딘 지단.
메수트 외질.
등등. 패스와 시야, 창조성이 극한에 오른 선수들만이 본다는 그 풍경이었다.
-씨익.
한껏 오만한 미소를 짓는 델리 알리.
그는 한 줌의 두려움 없이 오른쪽 전방을 향해 공을 찍어 찼다.
-툭.
강한 회전 걸린 채, 조금 힘없게 날아가는 델리 알리의 로빙 패스.
겉모습만은 거대한 강철 벽을 향해 돌진하는 참새 같다.
그리고 조금 길었다.
[델리 알리의 터무니 없는 패스입니다! 힘도 약하고 너무 길어요.]
[모하메드 살라가 공을 받기 위해 뛰어 보고는 있지만, 글쎄요. 살라 선수가 빠르긴 하지만, 총알은 아니거든요.]
모하메드 살라는 빠르다.
하지만 공은 더 빨랐고, 델리 알 리가 쏘아 올린 패스의 낙하지점은 골라인 근처였다.
일반적이었다면 골라인을 건드리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릴 이상한 패스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의 델리 알리는 일반적인 패스를 날릴 선수가 아니었다.
소하의 말처럼 동료들의 움직임을 모두 피부로 흡수한 델리 알리에게는 그리 넘기 어려운 벽은 아니란 말이다.
-휘리리릭!
모하메드 살라보다 한참 먼저 지면에 착지한 델리 알리의 패스!
그대로 앞으로 튕겨 나가며 골라인을 벗어날 것만 같았거늘.
누가 염력이라도 썼는지 앞이 아닌 뒤로 튕겨 나갔다.
[어?! 이, 이게 뭡니까! 공이 뒤로 튀어나옵니다!]
[데, 델리 알리의 마법 같은 패스입니다. 아니, 마법 같은 게 아니라 마법입니다! 이건 마법이죠!]
정말 보고도 믿기지 않을 엄청난 패스였다.
사람의 발로, 공이 뒤로 흐를만한 역회전을 주다니.
패스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기술이었고, 공을 잡기 전력으로 달리던 모하메드 살라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패스였다.
‘와우.’
굳이 포복을 조절하지 않아도 정확히 왼발에 안착한 델리 알리의 패스에 모하메드 살라는 소름이 끼쳤다.
어찌나 소름이 끼쳤는지, 팔에는 닭살이 올록볼록 솟아올랐을 정도다.
‘패스의 기술도 기술이지만, 내가 달리는 속도까지 완벽히 계산했구나···!’
이 멋진 패스를 한 이가 자신의 동료라는 뿌듯한 사실에 모하메드 살라는 승부욕까지 활활 타올랐다.
‘나도 질 순 없지. 급에 어울리는 동료라는 걸 증명해주겠어.’
자신 또한 엄청난 플레이를 보여주는 동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수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모하메드 살라!
그의 집중력은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워졌다.
집중력이 한계까지 오른 모하메드 살라의 눈에는 반대쪽에서 좋은 자리를 잡은 조쉬 킹이 보였다.
‘믿는다.’
정말 좁은 공간.
모하메드 살라는 놀라울 정도로 세심하게 볼을 다루며 조쉬 킹을 향해 강한 크로스를 올렸다.
몸은 이미 경기장 밖으로 나갔지만, 공만은 경기장 안에 아슬아슬 걸친 상황에서의 크로스!
그 크로스는 수비와 골키퍼의 사이를 예리하게 베며 지나갔다. 공이 날아간 자리, 그 끝에는 조쉬 킹의 반들반들한 머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호!”
서부 고릴라 같은 포효를 내지르는 조쉬 킹은 강력한 헤더 슛을 선보였고,
-철썩.
공은 티보 쿠르트와 골키퍼가 반응하기도 전에 총알 같은 속도로 골망을 갈랐다.
[골입니다! 골! 포츠머스가 후반 82분! 드디어 동점 골을 넣으며 경기를 원점으로 돌립니다!]
[정말 예술, 아니, 마법 같은 플레이의 연속이었습니다! 대단해요! 이게 포츠머스입니다! 이게 포츠머스에요!]
드디어 터진 포츠머스의 동점 골!
힘든 상황에서 나온 소중한 골이었지만 골 셀레브레이션 따위는 없었다.
“빨리 한 골 더!”
티보 쿠르트아 골키퍼를 밀치고 골대 안의 공을 빼앗아 든 조쉬 킹!
동료들을 독려하며 공을 들고 서둘러 중앙선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소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예뻐 보이는 행동이었다.
“바로 그거지! 셀레브레이션 했으면 크게 혼내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빨리 정비해! 바로 시작해서 바로 골을 넣는다!”
크게 칭찬하는 소하!
이것이야말로 소하가 바라던 팀이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8분.
포츠머스나 레알 마드리드에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 249화. 슈퍼컵.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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