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일단, 하나. (1) >
스티븐 데커가 첼시로 떠나고 얼마 뒤.
아직 어수선한 구단 안팎의 분위기에 휩쓸려 썩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작은 술집에 모였다.
포츠머스 FC의 클럽하우스 근처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술집.
규모에 어울리게 손님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의 이름값만은 한 사람당 백 명분은 된다.
에밀리아 존슨.
니엘 비숍.
잭 밀러.
나단 필립스.
새롭게 떠오르는 ‘신성’ 포츠머스의 주역들이 대부분 모인, 놀라운 광경!
스포츠 홍보계의 거성,
재무 관리의 달인,
전설의 오른팔이자 살림꾼,
세계 최고의 축구 너튜버.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겉모습만은 일에 찌든 회사원들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겉모습만 평범한 회사원은 아니었다. 받아 가는 연봉도 어마어마한 사람들이었지만 싸구려 맥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자신들도 일반인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사람임을 과시한다.
그렇게 한참을 평범한 회사원들의 흔한 회식을 즐기던 포츠머스의 주역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리 썩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결국 조금 눈치를 보던 에밀리아 존슨이 작은 취기의 힘을 빌려 포문을 연다.
“후우. 감독님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신 걸까요?”
감독님이란 당연히도 소하였고, 그런 선택이란 스티븐 데커의 이야기였다.
이번 사건에 대한 사정을 모조리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좀체 이해가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어째서 진실을 숨긴 걸까.
그녀가 보기엔 이건 잔혹하면서도 동시에 조금은 답답한 선택이었다.
“재무적으로 보자면 32세의 나이가 많은, 그것도 계약 기간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선수를 1,000만 파운드라는 상당한 이적료로 넘긴 훌륭한 거래였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재무 이사 니엘 비숍이 에밀리아 존슨의 물음을 냉큼 받았다.
스티븐 데커가 포츠머스에 입단한 건 7년 전. 소하가 부임하기 2년 전이다.
당시 이적료는 80만 파운드.
이적료 측면으로만 보자면 열 배가 넘는 이득을 본 거래다.
20대 중후반의 나이도 아니고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선수를 이런 가격에 판매할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다.
“너무 냉혹하고 차가운 숫자들의 이야기네요···.”
문과인 에밀리아 존슨은 차가운 숫자놀음에 질린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사정이 어떻든 남은 숫자들을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금 싸구려 맥주로 빠지는 니엘 비숍. 돈을 관리하는 그로서는 숫자 말고 다른 이야기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뭐···.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이건 선례가 될 겁니다.”
“선례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는 에밀리아 존슨.
30살에 가까워졌음에도 상당히 귀여운 모습에, 니엘 비숍은 조카에게 보내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적당히 나이가 많은 선수는 적당한 가격에 원하는 곳으로 보내준다는 선례입니다.”
“아하, 그러니까 감독님께서 이적에 대해 너무 보수적이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는 거겠죠?”
“맞아요. 이적에 대해 너무 엄하게 대한다면 선수들의 불만이 터질지도 모르니까요. 감독님께서는 철권통치를 하면서도 융통성을 보여준다는 선례를 남긴 겁니다.”
“···.”
에밀리아 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그리 편안하지는 않다.
결국 니엘 비숍의 이야기는 스티븐 데커의 개인적인 사정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대국적인 논리였기 때문이다.
“큼큼. 저도 한마디 해도 될까요?”
이때, 몰골이 반쯤 미라와 다를 바 없는 나단 필립스가 끼어들었다.
“그럼요. 축구계 최고의 예언가님의 고견은 언제나 환영이랍니다.”
“가, 감사합니다.”
다정한 에밀리아 존슨의 미소에 잠깐 얼굴을 붉힌 고독한 중년, 나단 필립스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니엘 비숍 이사님께서 사례를 언급하셔서 떠오른 겁니다만···. 감독님께서는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 선을 그은 거라고 봅니다.”
“개인적인 사정이요?”
“네. 물론, 데커의 사정은 무척 딱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가치일 뿐이에요.”
“무슨···?”
“예를 들어보자면, 만약 조쉬 킹이 정말로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보십니다. 이것 또한 개인적인 사정이에요.”
“네? 하지만,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긴 거랑은 같은 선으로 이야기하기 힘들지 않나요?”
그냥 다른 팀으로 가고 싶다는 것과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과는 분명히 달랐기에 에밀리아 존슨은 의구심을 표했다.
하지만 맥주로 목을 조금 축인 나단 필립스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조쉬 킹이 정말 레알 마드리드로 가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릴 정도라면요? 평생의 꿈을 짓밟는 행위가 될 수도 있어요.”
“···.”
“어찌 보면 스티븐 데커의 집안 사정보다도 훨씬 심각한 일이 될 수도 있지요. 그럼, 또, ‘이 선수는 너무 사정이 딱하니까 보내줍니다.’라고 해야 할지도 몰라요.”
“아···.”
“네.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이란 결국 보는 시각에 따라 무게가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에, 애초에 ‘개인적인 사정’을 사전에 배제한 겁니다. 개개인의 사정을 모두 들어주면 팀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순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조금 풀이 죽은 에밀리아 존슨.
나단 필립스의 이야기를 들으니, 거대한 구단을 운영하는 소하의 고뇌가 얼마나 심할지 절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큼큼. 하여튼, 감독님께서는 그냥, 니엘 비숍 이사님께서 언급하신 ‘적당한 선수를 좋은 가격에 넘겼다.’라는 사실만 남기신 거라고 봐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논리였지만 거대한 구단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감성보다는 이성을 앞세워야만 했다.
하지만, 잠자코 맥주를 퍼마시던 잭 밀러, 수석코치에게는 전혀 공감되지 않았나 보다.
-쾅!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밀러는 얼큰하게 취한 덕분에 비비 꼬인 혀로 불만을 토로한다.
“여러분들은···. 끅. 모두 틀렸어! 한 명도···. 가, 감독님의 마음을 몰라아!”
“···.”
“···.”
“···.”
말투에서 알코올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밀러의 외침에 할 말을 잃은 다른 일행들.
물론, 그러든지 말든지 밀러의 입은 멈출 기색이 없다.
“가, 감독님은 말이에요오. 결구욱! 선수의 선택을 존중해줬다! 이거란 말이에요오.”
“···서, 선택이요?”
“네! 선택말이에요오. 감독님의 와이프가 되실 분이 이걸 몰라주시다니이. 전 눠무 섭섭해요오.”
“···헤헤.”
히죽, 히죽.
영어인지 아랍어인지 구분이 어려웠지만, 용케 ‘와이프’라는 단어를 알아듣고 발갛게 볼을 붉히는 에밀리아 존슨이었다.
본의 아니게 에밀리아 존슨에게 엄청난 점수를 따낸 밀러의 술주정은 멈추지 않았다.
“감독님께서는···. 부운명히 사정을 밝히자고 하셨어요오.”
“그렇다고 듣긴 했어요.”
“하아지만···. 데커는 절대 반대했다는 거 아니겠어요오. 그리고 감독님은 그 친구의 선택을 존중···. 끅. 해줬다는 겁니다요오.”
밀러의 외침에 에밀리아 존슨을 비롯한 다른 일행들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랬다. 그들은 잠시 잊고 있었다.
한없이 냉정할 때도 있지만, 자기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한 남자가 소하라는 사실을 말이다.
스티븐 데커의 선택은 멍청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자기만족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선택으로 스티븐 데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적어도 소하에게는 말이다.
“···그렇군요. 결국 뭐가 옳은지 그른지는 모두가 다르게 느낄 거예요.”
“그래서 감독님은 선수가 가장 원한 방식을 고른 겁니다.”
“결국 그 누구보다 차가워 보였지만, 한없이 따뜻한 선택이었군요···.”
이제야 소하의 선택에 대해서 이해하기 시작한 에밀리아 존슨과 일행들.
다시 술잔을 주고받는 그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
작지만 조금은 거칠었던 비바람이 지나간 포츠머스 FC.
이적시장이 반쯤 지난, 8월 초.
포츠머스는 조금 이르게 시즌 시작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8월 5일.
다른 팀보다 일주일 정도 일찍 시즌을 시작하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프리미어 리그 우승팀과 FA 컵 우승팀이 맞붙는 작은 이벤트!
바로, ‘FA 커뮤니티 실드’였다.
방식은 단판 승.
연장전 없이 바로 승부차기로 들어가는,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이벤트 경기였다.
프리시즌 같은 느낌이랄까.
가치가 그리 높지 않은 경기였지만, 대회에 임하는 두 팀은 조금 달랐다.
먼저, 17-18시즌의 우승팀이자 디펜딩 챔피언인 맨체스터 시티부터 의욕을 활활 태웠다.
“모든 우승컵은 같은 가치를 지녔습니다. 그리고, 난 우리의 적 포츠머스의 선봉을 꺾는다면 이보다 더 좋은 시즌의 시작은 없을 겁니다.”
매끈하고 잘생긴 민머리를 과시하며 투지를 불태우는 펩 과르디올라 감독!
상대 전적이 썩 좋지 않은 포츠머스를 꺾어버리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강력한 경쟁자를 꺾고 작은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면, 이보다 더 좋은 출발은 없을 터!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언제나 좋은 시작은 중요한 법이었다.
물론, 소하가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역시나 펩 과르디올라 감독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감독이에요. 전 또 설렁설렁 뛸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소하 또한 평소처럼 당차게 반격을 시작했다.
“제대로 맞붙어서 확실히 부숴버린 다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승에 도전할 겁니다.”
거침없이 우승을 입에 담는 소하!
수년 전의 포츠머스였다면 ‘뭔 개소리’냐고 했겠지만, 6년 차에 접어든 포츠머스에는 꽤 어울렸다.
실제로도 많은 전문가는 포츠머스의 우승확률을 상당히 높게 바라보고 있었다.
-포츠머스의 우승은 꿈이 아닌 현실이다. 수년 동안 키워왔던 유망주들은 어엿한 전성기로 들어섰고, 새로 영입한 선수들 또한 재능을 폭발시켰다.
먼저 드디어 유망주의 딱지를 뗀 선수들의 발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
조쉬 킹.
델리 알리.
칼빈 필립스.
앤디 로버트슨.
소하가 부임하자마자 키워왔던 포츠머스의 코어 선수들이다.
언제까지나 십 대일 줄 만 알았건만. 어느새 이들은 벌써 22세, 23세, 24세에 접어들며 유망주 딱지를 떼버렸다.
나이로만 보자면 거의 전성기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은 벌써 2년 전부터 프리미어 리그에서 실력을 뽐냈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두각을 보였다는 점!
세계를 놀라게 한 유망주들이 본격적으로 전성기에 들었다는 사실은 다른 팀들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또한, 5년이 넘게 키워왔던 핵심 선수들이 만개할 나이에 접어든 것도 부족해, 또 다른 괴물들이 득실거린다.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괴물이란, 두 명의 선수였다.
데클란 라이스.
에링 홀란드.
아직 십 대인, 19세의 두 선수는 ‘괴물’이란 평가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즐비한 포츠머스와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이미 상위권을 차지했을 정도!
성장의 한계가 보이지 않는 괴물들이 더더욱 힘을 키웠으니, 우승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케빈 도슨을 위시한 전성기의 최고조에 오른 선수들 또한 어린 선수들을 제대로 이끌어 줄 거다.
케빈 도슨.
모하메드 살라.
마리오 발로텔리.
도봉산.
이들의 나이는 이미 최고점을 찍은 상태. 더 올라갈 경지가 없을 만큼 재능의 한계를 꽉꽉 채웠다.
앞서 언급한 어린 선수들에게 절대로 밀리지 않는 실력에 더불어, 엄청난 경험까지 갖춘 이들의 절정기는 포츠머스를 한층 흉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포츠머스의 강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니콜로 바렐라, 유리 틸레만스, 후벵 디아스, 알랑 생막시맹! 뒤늦게 합류한 최고급 유망주들도 성장 중이다. 그것도 폭발적으로.
-로빈 고젠스, 아담 웹스터, 커너 러셀, 마이클 반즈, 잭 해리슨, 존 말로리! 훌륭한 백업 선수들까지 갖췄다. 포츠머스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6년 동안 피와 땀이 드디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제, 개고생의 결실을 볼 때가 왔다.”
결연한 눈빛으로 필승 다짐하는 소하.
축구 역사에 영원히 회자 될, 전설적인 시즌의 시작이었다.
< 245화. 일단, 하나. (1) > 끝
ⓒ 블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