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화. 선물. >
소하는 구단 측에서 힘써준 전세기를 타고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조금 사치스러운 귀국이었지만, 인기가 워낙 대단해 더는 대중교통을 사용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훗. 이 몸의 인기란. 너무 잘나도 문제랄까. 그렇달까. 하하핫.”
“···.”
엄청나게 재수 없는 소하의 잘난 척에 이번에도 같이 대한민국의 땅을 밟은 에밀리아 존슨이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이번에 대한민국에 방문한 이유는 별거 없었다.
소하의 어머니가 소하에게 ‘집밥을 먹고 싶다면 데려와라’라는 엄포를 놓았다는 뒷사정이 있었다.
하여튼, 에밀리아 존슨은 자화자찬을 남발하던 소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기어코 입을 열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같은 예절 주입을 하려는 것일까?
하긴 너무 건방지긴 했다.
“맞아요! 감독님은 인기가 없으실 수 없죠. 능력 있지, 잘생겼지, 자상하지! 드디어 세상이 알아봐 준 거예요.”
역시나. 후버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두꺼운 콩깍지는 오히려 더욱 부추기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었다.
“하하하! 역시 에밀리아 양은 참 괜찮은 사람이란 말이에요. 보는 눈이 있어! 수석 스카우트로 전직하실래요?”
“호호호. 그럴까요?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절로 자신감이 생기는데요?”
“제 눈은 확실해요. 당장 우리 수석 스카우트님에게 사표 쓰라고 해야겠는데요? 후후후.”
“아이, 참.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하죠. 전 지금 직책도 마음에 드니까 이번에는 참아주세요. 호호호.”
근묵자흑이라고, 소하에게 아주 제대로 물들어버린 에밀리아 존슨의 모습이었다.
혹은, 원래 비슷한 부류라 잘 어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원래 끼리끼리 논다고 했으니까.
“자, 그럼 한 달 동안 뭘 하고 놀까요.”
소하는 어느덧 본가가 시야에 들어오자 매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열심히 놀기로 단단히 작심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방송이니 인맥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쉬지도 못해서 더더욱 몸이 달아올랐다.
“이번에도 기자들이 집 앞에 몰려있는 건 아니겠죠?”
에밀리아 존슨은 무척 들뜬 소하의 모습을 다정스럽게 바라보며 은근한 우려를 내뱉었다.
사실, 작년에도 엄청난 인파 때문에 상당히 고생하지 않았던가. 더불어 이웃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쳐 마음이 여건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소하는 이런 에밀리아 존슨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쾌활함을 버리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도 집 앞에 얼쩡거리면 제일 작은 방송사에서 월드컵 해설을 한다고 했거든요.”
검지를 쭉 뻗으며 의기양양한 소하!
이건 월드컵을 앞둔 방송사들에게 대단한 협박이었다.
칼 들고 공갈 협박하는 수준의 강짜였다.
“호오. 묘안이로군요.”
“월드컵 장사하려고 잔뜩 기대했을 텐데, 시청률이 결딴나면 모가지가 날아갈 테니까요.”
“그럼 이번에도 해설을 맡지 않으실 건가요?”
2014년 월드컵에서도 소하는 여러 방송사의 제의를 거절한 적이 있었다.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망한 포츠머스를 단박에 승격시켰을 때라 상당한 명성을 구가했던 시절이다.
“흐음···. 글쎄요. 일단 이야기는 해보자고 했어요.”
솔직히 정말 하기 싫었다.
내년에는 피 터지는 우승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재충전의 시간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소하는 자기 자신을 광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스포츠란 엔터테인먼트였으니까.
즉, 삼시세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온몸에 명품을 둘둘 두르고 다니는 생활은 오락을 즐겨주는 대중들의 덕이란 말이다.
입에 풀칠하게 해준 은인들의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이 이토록 원하는데 나서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죠. 정말 귀찮지만요. 그래도 프로라면 어쩔 수 없어요.”
“와···. 역시, 감독님다운 프로의식이세요. 보고 배워야겠어요.”
“그렇죠? 우리 선수들도 날 멘토로 삼아서···.”
또다시 시작되려는 소하의 자화자찬!
하지만 무척 다행스럽게도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뭐야. 저것들은.”
집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불청객들의 모습은 소하의 자화자찬을 막을 만큼 불유쾌한 장면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꼭지가 돌게 하는구만. 오냐, 오늘 날 잡자.”
이를 바득바득 갈며 차에서 뛰어내리는 소하. 에밀리아 존슨과 운전기사가 말려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너희 뭐야. 기자냐? 내가 분명히···.”
소하는 다짜고짜 삿대질을 날리며 불청객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오늘 단단히 장을 보겠다는 결연하고도 광포한 의지가 넘친다.
“단언컨대 옷 벗게···. 응?”
하지만, 활화산 같은 기세는 잠시였을 뿐. 잔뜩 일그러졌던 소하의 표정은 순식간에 상당히 누그러졌다.
“잉, 국장님들 아니세요?”
소하가 아는 체를 하자,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 다섯은 츄르를 목격한 고양이처럼 달려들었다.
“어이구야. 이제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짐은 어디 있습니까?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죠.”
“방금 사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입니다. 날도 더운데 일단 목 좀 축이세요.”
“오늘도 잘 생기셨습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밖에서 기다렸는지, 땀을 줄줄 흘리는 중년들은 얼굴을 구기며 소하를 환대했다.
“···.”
그 모습에, 소하는 조금 현기증이 났다.
솔직히 아이돌그룹이라도 이 더위에 달려들면 저리 가라고 할 텐데, 중년 아저씨들에게 둘러싸이다니.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제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는 방송국의 스포츠 국장들이라 해도!
“저, 저희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기자들은 출입 금지였지만, 국장은 아니지 않았습니까!”
“하하. 우리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신용은 생명이지요.”
소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조금 찔린 국장들이 먼저 선수를 쳤다.
“···어휴. 들어오세요.”
깊은 한숨을 내뱉는 소하. 한여름, 땡볕에 몇 시간을 죽치고 기다린 사람들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머리만 지끈지끈 아파졌다.
‘뭐···. 약속을 어긴 건 아니니까.’
포기한 소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장섰다. 왜 왔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어차피 저 사람들이 온 이유는 듣지 않아도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소하의 어머니가 손님들에게 음료를 권하자 소하는 재빨리 낚아챘다.
“아니요. 이분들 금방 가실 거예요.”
“···그, 그렇구나.”
소하는 어머니의 제안을 자기가 거절하고선 한 사람을 유심히 바라봤다.
“일단, 어?! 잠깐. 이쪽 분은 KBC에서 나온 분 같은데···.”
소하는 예리한 눈매로 가장 왼쪽에 숨어있듯 조심스럽게 앉은 중년을 노려봤다.
“···그, 그게.”
당황하는 KBC 스포츠 국장, 정태수.
미약한 희망을 품고 소하를 찾았지만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나 보다.
“4년 전에 벌어졌던 일은 기억하시죠?”
“···무, 무슨 말씀하시는지···.”
정태수는 일단 얼버무렸지만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4년 전, 포츠머스를 3부리그로 승격시킨 소하에게 KBC의 기자가 매우 무례한 질문을 했었다.
그리고 4년이란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소하는 그날의 일을 단 1초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 그랬었죠. ‘KBC의 조윤환 기자입니다. 검은 머리 외국인 전형으로 국민건강보험을 악용했다는 비판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말이에요.”
대사 한 글자 틀리지 않고 정확했다.
거의 녹음해놨다가 틀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정확도!
“···.”
“그 기자 이름도 아직 기억해요. 조윤환이었죠? 승진했던데? 그리고 끝이 아니었죠. 저에 대해서 좋지 않은 기사를 주르륵 냈잖아요.”
“···그, 그건 오해가···.”
“전 그때 결심했죠. KBC의 제안은 그 어떤 것이라도 모조리 거절하겠다고요.”
소하는 표독스럽게 정태수를 노려봤다.
원한이 지워지기는커녕 훨씬 더 커진 모습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인이 되고 나서도 KBC 방송에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은 소하다.
“그 사건은 제가 진심으로···.”
“아니요. 그쪽 하고는 어떠한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조심히 돌아가시길.”
벌떡 일어나 정태수의 신발을 신발장에서 꺼내주는 소하의 모습에는 단호함이 넘실거렸다.
그리고 정태수는 그 단호함에 감히 대꾸 하나 하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했다.
‘···씁. 눈 밖에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대범한 사람이라는데, 저렇게 옹졸한 면도 있군. 조심해야겠어.’
‘와.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이를 지켜보던 다른 국장들은 절로 오금이 저렸다.
“자, 그럼, 일 이야기를 빨리해볼까요? 전 정말 쉬고 싶거든요.”
언제 화냈냐는 듯 방긋 웃는 소하의 돌변하는 얼굴에 국장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큼큼. 머, 먼저 저희 MBS에서는 이야기에 앞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호오. 선물이라?”
첫 번째 타자는 MBS의 스포츠 국장, 김병갑이었다.
그는 반쯤 광이 난 이마를 연신 훔치며 슬쩍 준비한 물건을 소하에게 건넸다.
“제가 알기로는, 감독님께서 아직도 10년 가까이 된 국산 중형차를 타고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명차죠. 고장이 안 나!”
“···큼큼. 과, 관리를 잘하셨나 보군요. 하지만 기계란 언젠가는 바꿔줘야 합니다. 영구기관이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죠.”
“그래서 저희는 새로운 차를 준비했습니다.”
부스럭.
김병갑이 건넨 선물을 자동차의 열쇠였다. 그것도 말이 앞발을 들고 힘차게 서 있는 문양이 달린!
이를 본 소하는 말 문양을 다정스럽게 매만지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호오···.”
“감독님의 영험한 자태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녀석입니다.”
“그건 그렇죠.”
“···.”
아부를 너무나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기름칠한 김병갑의 입에 본드가 묻었다.
“뭐, 나쁘지 않네요. 성의가 느껴져요. 뭐랄까, 대화를 시작하려는 자세가 확실하다고 할까요? 조금 감동일지도?”
“하하. 그럼 저리로 가서 계약서를···.”
“어허. 다른 분들도 오셨는데, 그냥 돌려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요?”
“···.”
또다시 김병갑의 입에는 본드가 칠해졌다. 조금 전에 4년 전의 일로 원한을 품고 사람 하나를 냉정하게 내쫓아버린 사람이 맞나 싶다.
이것은 사태를 관망하던 다른 국장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당연하죠! 저도 빈손으로 온 게 아닙니다! 자동차 따위!”
“하하, 겉만 화려할 뿐인 선물은 지겨우시지 않습니까? 마음이 따뜻해지는 저희의 선물도 받으셔야죠.”
“전 계약은 괜찮습니다. 그냥 순수하게 선물을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감독님이야, 우리나라의 국보 아닙니까!”
치열한 생존경쟁!
혹은 너저분한 뒷거래일지도 몰랐지만,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요즘 귀국만 하시면 관심을 너무 끌어서 번거로우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저는 휴가 때마다 조용하게 지내시라고, 강원도에 별장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앞으로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여유롭게 쉬시면 됩니다.”
“···전 깡촌 싫은데요.”
“···.”
MBS가 열심히 준비한 선물을 단 한방에 침몰당하였다.
‘강원도라니. 거기서 뭐 하라고. 재미없게. 감자나 캐라고?’
매우 편협한 시선!
강원도 사람들에게 욕을 한 사발 먹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지만, 소하는 그냥 시골은 싫었다.
“큼큼. 이번엔 제 차례군요.”
이어서 다음 타자는 요즘 3사 방송국을 위협하는 TBM이었다.
“저희는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풍요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정신적인 풍요라···. 확실히, 어떨 땐 물질적인 풍요보다 중요할 때도 있죠.”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저희는 감독님의 정신적 풍요를 위해 무료로 ‘자서전’을 제작해드리겠습니다.”
“···자서전이랑 정신적 풍요랑 무슨 상관인데요?”
앞 글자가 ㅈ으로 시작한다는 점 말고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자서전이란 명예입니다. 명예는 정식적으로 엄청난 풍요를 선물하죠.”
“···그런 거 같기도 하네요.”
“그래서 저희는 전액 무료로 자서전을 제작해드릴뿐더러 수입도 모조리 드릴 예정입니다.”
소하의 자서전이라.
100% 베스트셀러가 될 테고, 엄청난 인세가 주머니를 가득 채워줄 거다.
제법 괜찮은 거래!
하지만, 소하는 영 탐탁지 않다.
“저 글쓰기 싫은데요.”
“···그, 뭐냐 감독님의 인생 이야기를 해주시면 작가가 알아서 써줄 겁니다.”
“말하기도 귀찮은데요.”
“···.”
놀라운 귀찮음으로 TBM의 제안도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그럼, 이제 남은 사람은 SBC의 스포츠 국장, 주승윤. 이 사람마저 실패한다면 MBS의 승리였다.
“큼큼. 이것 참. 다른 분들이 워낙에 대단한 선물을 가지고 오셔서 조금 부끄럽네요.”
“뭘요. 가치가 중요합니까. 정성이 중요한 거죠.”
“역시···!!”
“근데, 가치가 정성을 표현하는 수단 아닐까요?”
“···.”
소하의 변덕에 제대로 얻어맞은 주승윤은 조심스럽게 종이 한 장을 소하에게 건넸다.
혹시, 말로만 듣던 백지 수표일까?
하지만, 아쉽게도 백지와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흑색이었고, 심지어 야성미 넘치는 중년 남자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이게 뭐예요.”
“곧 열릴 너훈아 콘서트의 특별석 표입니다. 돈다발을 준비해도 구하지 못하는 희귀한 물건이죠.”
“···.”
주승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잘난 체를 했지만 소하의 표정은 죽음의 사신같이 얼어붙었다.
‘아니, 지금 이팔청춘인 나에게 트로트나 들으러 가라는 거야? 이거 지금 시비 거는 거지? 걸스시대의 표를 줘도 한참 부족한 판국에 말이야.’
아주 단단히 뿔이 났다.
이 때문에 소하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단호한 거절이 튀어나왔다.
아니, 튀어나오려고 했다.
-찌릿.
고성을 내뱉으려는 소하의 뒤통수로 강렬한 전류가 내리꽂혔다.
“?!”
왠지 모를 강렬한 의지에 소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에는 매서운 눈으로 소하를 노려보는 그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
그리고 소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너훈아 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호적에서 영원히 사라질 거라는 확실한 미래를 말이다.
“큼큼. 저,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이네요. 최, 최고예요. 그, 그럼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후후. 역시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습니다. 감독님.”
의기양양한 주승윤. 이 남자야말로 이 자리에서 어떻게 해야 승리할 수 있는지 제대로 꿴 사람이었다.
< 241화. 선물.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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