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떠나는 사람들. >
포츠머스를 떠난 건 찰스 말로리 뿐만이 아니었다. 원년 구성원 중 하나인 한 선수도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소하를 찾아왔다.
“감독님. 저도 은퇴를 해야겠습니다.”
“네? 뭐라고요?”
감독사무실에서 휴가에 가져갈 물건을 챙기느라 바쁘던 소하는 어찌나 놀랐던지 존댓말까지 써버렸다.
“은퇴하겠습니다.”
“?!”
소하는 가방에 넣으려면 이달의 감독상 트로피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은퇴를 입에 담은 프레디 스톤을 바라봤다.
“아니, 왜?”
무척 당황한 소하.
도무지 잠잠하던 녀석이 갑자기 왜 은퇴하겠다고 나서는지 모를 일이었다.
‘출장 시간에 불만이 생겨서 그런가?’
확실히, 그럴싸한 이유이긴 하다.
이번 시즌 프레디 스톤의 선발 출장 횟수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체 출장도 12회였을 뿐.
1년 내내 뛴 시간이 채, 2시간조차 되지 않는다.
2시간은 120분.
즉, 간신히 나와도 10분 정도도 뛰지 못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 출전 시간이라면 불만을 품고 어떻게든 팀을 나가기 위해 눈물의 발광쇼를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출전 시간이 부족했다면, 이적하겠다고 생떼 부리지, 은퇴하겠다고 하지는 않는데.’
소하의 추론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출전 시간이 문제면 팀을 바꾸면 그만일 뿐. 선수 생활을 아예 끝내려고 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축구 선수를 하지 않아도 먹고살 만한 수입이 생겼다는 거야!’
프레디 스톤은 만 30세도 되지 않은 펄펄한 전성기 나이다. 요컨대, 한창 벌어들일 시간이란 말이다.
10년에서 15년 정도 바짝 벌어서 평생 먹고 살아야 하는 직업이 바로 축구 선수인데, 한창 벌 나이에 은퇴한다?
그것도 프리미어 리그에서 간간이 얼굴을 내비치는 최상위권 축구 선수가?
아무리 봐도 냄새가 풍겼다.
구리구리한 돈다발의 퀴퀴한 냄새가!
“혹시···. 복권이라도 당첨됐니?”
“···.”
소하가 눈을 샐쭉하게 뜨며 앙칼지게 물어보자 프레디 스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도대체 은퇴에서 복권까지 어디서 어떻게 이어진 사고회로인 건지 모를 일이었다.
“감독님···. 복권이라뇨. 전 운이라는 불분명한 확률에 돈이라는 귀중한 자원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그럼 왜? 뭐, 커밍아웃이라도 하려고? 괜찮아. 난 나만 노리지 않으면 의외로 받아줄지도 모를 만큼 관대한 사람이야. 아, 물론 샤워실은 출입 금지겠지만.”
“···도대체 절 그동안 어떻게 보신 겁니까! 너무하십니다!”
몸을 바들바들 떠는 프레디 스톤.
이야기가 갑자기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갔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그럼 이유가 뭔데. 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질 않아서 그래. 설마 출전 시간이 적어서 그래?”
“아닙니다. 저같이 재능 없는 놈이 프리미어 리그에 데뷔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전 만족합니다. 그리고 그게 불만이었으면 이적을 했겠죠.”
“그럼?”
“전···.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응?”
소하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하고 싶은 일이라니!
물론,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 더 선수 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요즘은 백세시대가 아니던가.
조금 늦게 시작해도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새 출발에는 항상 넉넉한 돈이 필요하다. 준비 기간은 물론이고 쫄딱 망했을 때의 보험으로서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리고 현재 프레디 스톤의 ‘주급’은 한화로 2,000만 원이 조금 넘는다.
보너스까지 합치면 3,000만 원 선!
세금을 떼도 한 달에 1억에 가까운 막대한 수입을 자랑하는 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세상천지를 뒤져봐도 한 달에 ‘1억’을 벌 수 있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수입을 포기하고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며 은퇴하겠다는 말에 쉽게 공감할 순 없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뭔데.”
“그게···.”
소하의 날카로운 질문에 프레디 스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말하기 어렵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소하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자, 결국 프레디 스톤은 백기를 들어 올렸다.
“후우. 말해 드릴게요. 사실, 전 전문 코인 투자자가 되고 싶어요.”
“···?!”
프레디 스톤의 폭탄선언에 소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구겨졌다.
“아니, 바, 방금 운에 돈을 걸지 않는다느니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내뱉지 않았었냐?”
분명 그랬다.
꽤 그럴싸한 말이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소하였다.
하지만, 프레디 스톤의 소하의 딴지에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코인은 운이 아닙니다! 과학과 경제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의 기축통화죠!”
“···.”
“몇몇 사람들은 코인을 도박이라고 하지만 전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주식 보고 도박이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그, 그러냐···.”
소하는 비지땀을 좔좔 흘렸다.
코인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지라 뭐라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소하가 아는 코인이란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가치를 가지게 되어 야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확천금의 기회를 줬다는 사실 뿐!
‘심지어···. 이쪽 세계의 코인 판은 매우 조용한데. 뭘 보고 저러는 거야?’
현 시간은 2018년 5월의 마지막 주.
원래의 세계였다면 이미 코인 가격이 미쳐 날뛰었다가 반감기를 가지며 조금 떨어지던 시간이다.
하지만 이 세계의 코인은 5년 전, 200달러에서 고작 두 배 오른 400달러 선이다.
5년 동안 2배의 수입이라.
금값 오르는 속도와 큰 차이가 없었다.
원래 보여줬던 수십 배의 이득에 비해서는 조족지혈에 불과한 성장!
이런 상황에서 월급 1억을 버리고 제대로 코인판에 뛰어들겠다니.
프레디 스톤의 결단은 소하로서도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스톤아···. 네 결정은 존중해. 근데 조금 늦게 시작해도 되잖니? 너희 말로 시드 좀 더 불리고 하자.”
“아닙니다. 지금부터 시작해야지 큰돈을 거머쥘 수 있을 거예요.”
“···뭐 좋은 소식이라도 있니?”
소하는 슬쩍 곁눈질하며 은근히 프레디 스톤을 떠보았다.
난색을 보이긴 했지만 소하도 코인에 물린 금액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2013년도부터 2018년까지.
벌어들인 수입의 90% 이상을 코인에 때려 넣은 처지라 귀가 쫑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좋은 소식이라도 있다면 구단이 매각되기 전에 먼저 인수해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너무 구단을 키워버려 인수할 수 없어진 소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프레디 스톤은 이런 소하의 기대를 산산이 조각내버렸다.
“아니요! 그냥 감입니다!”
“···.”
“하여튼 부탁드립니다.”
“···.”
잔뜩 실망한 소하는 코를 긁적이며 계산기를 두들겨보고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라···.”
“가, 감사합니다!”
활짝 웃는 프레디 스톤에 비해 소하의 표정은 찝찝하기만 하다.
솔직히 프레디 스톤은 계속 잡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10개에 달하는 멀티 포지션.
저렴한 주급.
성실한 태도.
출전 시간에 대한 불만, 제로.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밥값이 그리 아깝지 않은 실력.
잉글랜드 홈 그로운 충족.
이 여섯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훌륭한 백업선수가 바로 프레디 스톤이었다.
그야말로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귀하디귀한 인재라는 이야기다.
‘조금이라도 축구를 안다면 이런 선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거야. 그래도···.’
선수가 저리도 원하는데, 그것도 5년은 개똥밭에서 구른 제자가 저리도 요구하는데 냉혹하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물론 강력하게 거절한다면 프레디 스톤의 성격상 단념하긴 할 거다.
그래도 소하는 그렇게 프레디 스톤과의 인연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뭐, 요긴한 선수긴 하지만 그렇다고 없으면 망하는 선수도 아니니까. 나중에 코인 판에서 제대로 성공하면 조언이나 받지 뭐.’
극한의 사심이었다.
이미 백억을 훨씬 넘는 엄청난 금액을 코인판에 물린 처지라 프레디 스톤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기까지 이르렀다.
“기자회견은 따로 이야기해서 준비해둘 테니까, 동료들한테 인사나 해라.”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밝게 웃으며 자리를 떠나는 프레디 스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소하는 진심으로 그의 성공을 기원했다.
***
벌써 떠나버린 선수가 두 명이나 생긴 포츠머스. 아쉽게도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휴가를 가기 전에 소하가 직접 한 선수에게 이별을 권유했다.
“주호야···. 미안하다.”
2년 계약을 마친 방주호와 더는 재계약하지 않기로 결정한 소하였다.
“···아닙니다. 감독님 덕분에 커리어에 우승컵을 잔뜩 추가했는걸요.”
다행스럽게도 방주호는 방출 통보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밝았다.
그의 말처럼 2년 동안 우승컵을 상당히 많이 추가했기 때문이다.
아예 우승컵이 없는 선수는 아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FA 컵 우승컵과 유로파 리그의 우승컵이 가진 가치는, 다른 우승컵과 비교조차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아마 포츠머스에 입단하지 않았다면 꿈에서도 꾸지 못할 위대한 우승컵들이었으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일단 너도 네 에이전트도 알아보겠지만 나도 다른 구단을 열심히 알아봐 줄게.”
“오! 그건 정말 감사한 일이네요.”
방주호는 얼굴에 화색을 띄웠다.
소하가 직접 추천해 준다니.
확실한 입학 추천서이기 때문에 취업 걱정은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더군다나 포츠머스의 생활 덕분에 2018년 월드컵의 최종 선수에도 뽑혔기 때문에 이래저래 나쁘지 않은 2년이었다.
“그럼, 월드컵 16강 꼭 진출해라!”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래. 똥 싸지는 말고. 너도 엄연한 내 제자니까.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란 이야기야.”
“당연하죠.”
소하의 자신감 넘치는 자화자찬에 방주호는 진득하니 미소를 지었다.
출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소하의 지도로 확연히 기량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단지 같은 포지션의 앤디 로버트슨과 로빈 고젠스가 너무나 잘했을 뿐이었다.
저 둘은 이미 스코틀랜드와 독일의 국가대표였고, 주전인 앤디 로버트슨은 세계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선수!
방주호가 아무리 기량이 향상됐다 하더라도 주전 자리를 따내기엔 불가능했다.
‘휴우. 더 잡고 있을 순 있지만, 쟤를 위해서라도 경기에 뛸 수 있는 팀으로 보내주는 게 맞지.’
뛰고 싶지만, 뛸 수 없는 선수를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도 절대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저나, 감독님도 러시아로 오시나요? 많은 사람이 기대하던데요.”
“글쎄. 거기 춥잖아.”
뚱한 소하의 반응과는 반대로, 이미 상당한 제안을 받은 상태다.
아니,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였다.
이유는 하나.
러시아에서 열리는 2018년 월드컵에서의 행보가 문제였다.
특히 대한민국의 지상파 3사에서는 어떻게든 소하를 해설로 모시기 위해 돈다발을 왕창 들고 와서 사정하고 있다.
당연한 제안이었다.
소하라고 한다면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감독!
심지어 대중적인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미 연예인들의 연예인이자 공인들의 공인인 남자가 바로 소하였다.
이런 소하를 객원 해설로 모실 수만 있다면 시청률 싸움 따위는 의미가 없어질 터. 방송사들의 치열한 섭외 싸움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감독님이시라면 쓸만한 선수를 보기 위해서라도 방문하셔야 하지 않나요?”
“뭐···. 딱히 보지 않아도 이 몸의 머릿속에는 방대한 데이터가 있거든.”
“···.”
“솔직히 집에서 에어컨 빵빵 틀고 치킨이나 뜯으면서 보는 게 더 재밌을 거 같은데.”
“그···. 그건 그렇죠.”
방주호는 소하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평범한 서포터들이야 직관이 훨씬 즐겁겠지만, 이쪽은 축구가 직업이지 않던가.
일 년 내내 축구에 치여 살았는데 굳이 휴가 기간에 추운 러시아까지 가서 고생할 이유는 없었다.
“난 휴식이 필요해···. 그냥 푹 쉬고 싶어. 내 꿈이 뭔지 알아?”
“···트, 트레블 아니십니까?”
“아니야. 그것도 꿈이긴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지. 내 마지막 목표는 한 달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는 거야. 그리고 언젠간 꼭 이룰 목표이기도 하지.”
“···.”
방구석 폐인이 장래 희망인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을 바라보는 방주호. 당연하게도 표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소하가 바람대로 이번에야말로 휴식을 취할 수 있을지는 그 아무도 몰랐고, 그렇게 그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 240화. 떠나는 사람들.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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