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239화 (239/306)

< 239화. 크랜베리 주스. >

포츠머스의 유로파 리그 우승!

이 놀라운 업적은 유럽은 물론, 전 세계의 축구판을 뒤흔들 만큼 대단한 업적이었다.

[5년 전엔 4부리그에서 해체 예정이던 팀, 5년 후엔 유로파 리그의 챔피언. 도대체 포츠머스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영세구단의 기적. 이것은 한없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이다.]

[우리는 성소하의 시대에 살고 있다!]

[3관을 달성한 성소하 감독과 포츠머스. 그들의 질주는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놀라운 성과! 축구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위업을 달성했다.]

[질주하는 포츠머스. 다음 시즌에는 진정한 ‘트레블’을 목표로 잡았다.]

놀라운 3관이었지만, 아쉽게도 진정한 ‘트레블’은 아니었다.

축구계에서 통용되는 트레블이란,

국내 리그 우승.

국내 최상위 컵대회 우승.

대륙 최상위 클럽 대항전 우승.

이라는 무지막지한 난이도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포츠머스가 이번 시즌에 달성한 우승은,

국내 최상위 컵대회 우승.

국내 컵대회 우승.

대륙 클럽 대항전 우승.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즉, FA 컵 우승 말고는 트레블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포츠머스였다.

물론, 트레블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도 절대 아쉬운 시즌은 아니었다.

이 정도 성과를 거두는 팀 자체가 유럽 축구의 역사 속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119년의 역사 동안 ‘약팀’이란 이름표를 단 한 번도 떼지 못했던 포츠머스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일!

자연스럽게 기적을 보여준 소하는 새로운 신으로 떠올랐다.

-성소하 감독은 신이야! 성소하 감독은 신이야!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축구의 신! 포츠머스의 신!

-현시대, 잉글랜드 국적으로서는 최고의 감독!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자리를 비워라!

-모처럼 제대로 된 감독이 나왔어. 뭐? 독일이 감독 명가라고? 우리 잉글랜드도 걸출한 감독을 배출했다고.

포츠머스의 서포터들은 물론이요, 잉글랜드의 축구팬들마저도 소하의 이름을 외치며 찬양했다.

소하야 물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인이라고 여기긴 했다.

하지만 엄연히 잉글랜드 국적을 가진 잉글랜드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사람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도 모처럼 21세기에 들어서 제대로 된 감독을 배출했다!

독일과 경쟁심을 가진 잉글랜드로서는 항상 감독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졌거늘. 소하의 부상은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준 격이었다.

“···난 독일에서 더 많이 배웠는데···.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독일이 키웠다고···.”

예상치 못한 잉글랜드인들의 열광에 소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사실 한국에서 제대한 후에는 줄곧 UEFA 라이선스를 따기 위해 독일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실무는 잉글랜드에서 시작하긴 했지만 잉글랜드가 키웠다고 말하기엔 조금 낯부끄럽긴 했다.

“뭐, 좋아하는데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지. 내버려 두면 금방 잠잠해질 테고.”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소하.

하지만, 그는 이때만 해도 몰랐다.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늘 벌어지는 이 잉글랜드인들의 설레발이 수천 킬로미터 밖의 나라와의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될 줄 말이다.

***

유로파 리그를 우승한 포츠머스의 금의환향은 포츠머스시를 들썩이게 했다.

어찌나 열광적이었던지, 우승 행진에는 무려 15만 명이 몰려들었다.

15만 명!

엄청난 숫자다.

포츠머스시의 인구는 2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

즉, 포츠머스에 거주하는 시민의 대부분이 모조리 몰려나왔다는 이야기였다.

“와아아아아아!”

“조쉬 킹! 조쉬 킹!”

“우리가 챔피언이다!”

“성소하! 성소하!”

“찰스 말로리! 찰스 말로리!”

“우리에겐 모 살라가 있지! 우리에겐 모 살라가 있지!”

한 명도 빠짐없이 푸른색 옷을 입고 나와 열광하는 포츠머스의 시민들!

이 모습은 마치, 포츠머스의 앞바다가 범람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대단한 파도였다.

“이예에에에에!”

축제 차량의 선두에서 유로파 리그 우승컵을 들고 발광하는 조쉬 킹!

“우오오오오!”

그가 우승컵을 번쩍 들 때마다 포츠머스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심지어 우승컵이 하나도 아니다.

“이번에는 FA컵 우승컵이다! 우랴아아아아압!”

유로파 리그 우승컵을 내려놓고 FA 컵 우승컵을 들어 올리자 또다시 포츠머스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게다가 이게 끝이냐? 아니다.

하나 더 남아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리그컵 우승컵이다! 음하하하핫!”

리그컵 우승컵마저 들어 올리자 포츠머스는 미친 듯이 뒤흔들렸다.

정말 보고도 믿기지 않은 일이다.

“미쳤어···. 미쳤다고. 우승 행진을 한다는 사실 자체도 믿기지 않은데, 3개 대회의 합동식이라니. 진짜 꿈이라고 해도 여한이 없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니다.

무려 세 개다. 세 개!

한 번의 우승 행진도 언제 했는지 기억도 잘나지 않는데, 동시에 세 개를 진행하니 정신이 나갈 만도 했다.

“감독님. 감독님도 앞에 나서서 우승컵 한번 들어오려 주시죠!”

“맞아요. 가운데에 숨으셔서 뭐 하시는 거예요. 평소답지 않게요.”

“같이 우승컵 들고 탭댄스나 출까요?”

선수들은 오늘따라 나대지 않고 얌전히 선수들 사이에 파묻힌 소하를 끌어내렸다.

“···흐음.”

영광스러운 자리였거늘.

소하의 표정은 마치 독이 잔뜩 오른 복어처럼 뚱하기 짝이 없다.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들어!”

버럭!

외치며 박차고 앞으로 나서는 소하! 조쉬 킹이 건넨 우승컵을 낚아채듯 손에 쥐고선 단상 앞에 선다.

그러자, 서포터들은 정말, 부활한 신이라도 영접한 듯 세상이 떠나갈 듯 소리친다.

“드디어 앞으로 나왔다!”

“신이시여!”

“오오오오! 잘생겼다!”

“성소하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성소하! 성소하! 성소하!”

아마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행차해도 이 정도 반응은 나오지 않을 거다.

다 죽어가는 노인마저도 벌떡 일어날 만큼의 찬양!

하지만 소하의 표정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뭐가 그리 불만일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었다.

“큼큼.”

드디어 단상 위에 올라선 소하.

참으로 껄렁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왼손에 대충 트로피를 쥔 모습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우승컵이 아니라 요강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대충 든 모습!

“조용.”

소하는 슬쩍 집게손가락을 쭉 펴고선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록 페스티벌은 애들 장난 같던 불꽃을 뿜던 장내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과연 어떤 소감을 말해줄까.’

‘기대된다. 저 또라이가 뭘 할지.’

두근두근.

소하를 바라보는 눈빛들에는 무한한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고 소하는 이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이런 건! 그냥 농어촌 전형 우승컵일 뿐! 다음 시즌에는 진짜 우승컵인 빅이어에 맥주를 담아서 원샷하겠다! 그러니까 적당히 기뻐하시라고!”

리그컵 우승컵을 대충 바닥에 던져버리고 오른손을 번쩍 치켜드는 소하!

그렇다.

고작 이 정도 트로피에 세상이 떠갈 듯 즐거워하는 서포터들의 모습이 불만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숨이 넘어갈 듯 기뻐하면 다음 시즌에는 어떻게 버티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소하에게는 말이다.

“···.”

물론, 반응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사람들은 소하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 비, 빅이어라고?”

“그러니까···. 빅이어라면···.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컵을 지칭하는 단어일 텐데.”

“미친.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겠다는 말이잖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드디어 깨달음을 얻은 포츠머스의 시민들.

가슴속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흘러넘쳤다.

119년의 기나긴 역사 동안 수많은 감독이 포츠머스를 거쳐 갔지만,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을 입에 담는 감독은 없었거늘.

서포터들은 드디어 제대로 된 주인이 포츠머스의 왕좌에 앉았다는 사실에 눈물마저 흘러나왔다.

“우오오오오오!”

“그래! 가자!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너흰 할 수 있다! 우린 할 수 있다!”

15만 명의 인파가 한낱 한 시에 울부짖는 장엄한 광경이 연출되었고, 이날은 포츠머스의 역사에 전설로 남았다.

***

복과 화는 같은 문으로 들어온다는 말이 있듯이 포츠머스에게 복만 흘러넘친 것은 아니었다.

“은퇴하겠습니다.”

본격적인 휴가에 앞서 포츠머스의 전설, 찰스 말로리가 은퇴를 선언했다.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기자회견장에 나선 그는, 15년 내내 그래왔듯 무덤덤하게 영원한 휴가를 입에 담았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었습니다. 10살부터 시작한 기나긴 축구 인생에서 15년이란 긴 세월을 포츠머스에 몸담을 수 있어서 정말로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최고로 행복한 선수였음은 확실합니다. 그동안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눈물 한 방울 정도는 흘릴 만도 했건만.

찰스 말로리는 마지막까지 15년 동안 팀을 이끌어왔던 무뚝뚝한 모습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서포터들과 동료, 구단의 직원들은 눈물을 금치 못했다.

“제기랄. 넌 최고의 선수였어.”

“당신은 포츠머스의 전설이라고.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우리가 감사하지. 4부리그로 강등당해도 팀을 위해 남아주는 선수는 너밖에 없다고.”

“위대한 선수였어. 팀이 가장 힘들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선수야.”

“1년만 더 뛰어주면 안 돼?”

모두가 아쉬워했다.

그는 누구보다 무뚝뚝했고, 누구보다 까칠한 사람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낭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세상천지에 그 누가!

그것도 제법 유망하다고 여겨졌던 프리미어 리그의 유망주가!

팀이 4부리그로 강등되고,

임금체납도 당했으며,

팀이 해체의 위기까지 몰렸는데도,

의리를 지키며 꿋꿋이 팀을 위해 헌신하겠냔 말이다.

저 하늘의 별처럼 많은 축구선수 중에서도 이런 선수는 절대 없을 거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고생했다.”

소하는 따로 먼저 찾아와 은퇴를 의사를 밝힌 찰스 말로리에게 많은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사실, 유로파 리그 선발은 그가 퇴장할 무대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기기 위함이었을 뿐.

다른 의도는 먼지 한 톨만큼도 없었다.

‘노장이라 해도 타고난 운동능력과 특유의 근면함은 중요한 무대에서 매우 큰 효과를 줄 거다.’

소하의 판단은 이랬고, 여실히 들어맞았다. 지쳐서 비틀거림에도 세계 최고의 공격수들을 막아내는 모습은, 유형무형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으니까.

심지어 한 골 넣었다.

그것도 결승 골을!

승리하기 위한 승부수였고 최고의 효과를 가져왔지만, 은퇴까지 가져올지는 정말 몰랐다.

‘젠장. 솔직한 마음으로선 내년까지는 뛰어줬으면 좋겠는데.’

다음 시즌은 정말 중요하다.

진정한 트레블을 이루기 위한 진짜배기 도전이 시작된다.

대충 미래의 견적을 짜보아도 가시밭길의 연속일 터. 찰스 말로리 같은 우직한 리더가 선수단에 남아있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다.

하지만 소하는 남아달라고 하지 못했다. 수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맞추셨던, 저 험상궂은 얼굴에 처음 보는 평온이 깃들었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고맙다.”

찰스 말로리는 소하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싱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붙잡았다면 흔들렸을 텐데.

그럴까 봐 자기 자신의 의지를 존중해주는 소하가 정말로 고마웠다.

“뭘. 내가 고맙지.”

소화 또한 진심으로 고마웠다.

비록 악연으로 시작한 인연이었지만 그가 순순히 뒤를 따라와 주지 않았다면 정말 힘든 길을 걸었을 터.

아니, 다 떠나서 많이 고생한 팀의 전설에게는 언제나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뭘 할 거냐? 너도 말콤처럼 코치로 들어올래? 애들 기강이나 잡아주면 되는데. 뒷짐 지고 빠따나 휘두르라고.”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슬쩍 찔러보는 소하였지만, 찰스 말로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부정한다.

“···후후. 미안하지만 그냥 푹 놀 거다. 축구 같은 건 이젠 질려.”

“그러냐. 그럼 그래라.”

“그래도 그리 멀리 가지는 않을 거다. 꼭 ‘우리’의 꿈을 이루어다오.”

찰스 말로리는 ‘우리’라는 단어를 강조했고 소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 우리의 꿈은 꼭 이룰 거다. 걱정하지 말고 안방에서 다리 쭉 펴고 지켜보고 있으라고.”

“믿는다.”

싱긋 웃으며 서로의 손을 마주 잡는 소하와 찰스 말로리.

비록 이별을 맞이했지만, 그들이 함께 꾸는 꿈은 언제나 그들을 이어줄 터였다.

***

찰스 말로리는 은퇴 발표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뒤, 늘 찾던 술집으로 향했다.

“다를 건 없군.”

습관처럼 시작된 발걸음이었고 전과 별로 다른 느낌은 없었다.

축구선수에서 평범한 일반인이 되었지만, 세상은 늘 그대로였다.

“괜히 무서워했나.”

선수 생활을 그만두면 세상이 무너질 줄만 알았다. 알고 있는 세상이 그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똑같았고 늘 가던 술집도 그 자리에 똑같이 그를 반겨주었다.

이쯤 되자 조금 더 일찍 평온을 찾을 걸 그랬냐는 후회까지 들 정도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은퇴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후줄근한 술집에는 몇몇 동네 사람들과 반백의 주인장이 틀에 박힌 듯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를 반겼다.

“왔군. 뭘 드시겠나?”

주인장이자 바텐더는 찰스 말로리가 늘 앉던 자리에 앉자 무덤덤하게 물었다.

분명 은퇴 기사가 포츠머스시를 넘어 전국을 쩌렁쩌렁하게 울렸음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만 같다.

“···흐음.”

잠시 고민하는 찰스 말로리.

선수라는 짐짝도 내던졌는데, 자신의 친구처럼 독한 술이나 한잔해볼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고민을 마친 그의 결정은 늘 똑같았다.

“크랜베리 주스.”

“···.”

반백의 주인장은 찰스 말로리의 주문에 모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며 모처럼 입을 연다.

“똑같은 주문이군. 은퇴를 했으면서도 말이야. 내가 보기엔 자네는 크랜베리 주스를 좋아해. 세상 그 누구보다.”

이에, 찰스 말로리는 정말 환한 미소와 함께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전 정말 크랜베리 주스가 좋습니다. 몸을 위해서라는 건 다 변명이었어요.”

“내 그럴 줄 알았지. 15년 전, 처음 봤을 때부터 말이야.”

1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인연을 다진, 눈치 빠른 주인과 진상 손님은 모처럼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239화. 크랜베리 주스.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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