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FA컵 결승전. (2) >
17-18시즌, 잉글랜드 축구계의 마지막 경기, FA컵 결승전.
선공은 포츠머스였다.
-뻥!
잠시 후방에서 몸을 풀려는 듯 천천히 공을 돌리던 포츠머스는 이내 순식간에 톱기어로 올렸다.
그 선봉장은 포츠머스의 자랑스러운 10번이자 잉글랜드 국가대표이며 ‘팀 그로운’ 선수인 델리 알리였다.
기동력이 느린 세스크 파브레가스와 실패한 영입생, 티에무에 바카요코의 압박을 훌륭한 압박으로 벗겨내고 그대로 왼쪽 측면으로 공을 보냈다.
그리고 왼쪽 측면에는 각성한 조쉬 킹이 빅터 모지스와 경합 중이었다.
“헤이, 네가 요즘 오른쪽에서 제법 날린다고 ‘모른쪽’이라면서?”
조쉬 킹은 치열한 자리다툼을 벌이며 슬쩍 말문을 열었다.
“···.”
당연하게도 빅터 모지스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워낙에 중요한 경기였기에 상대 선수와 잡담을 나눌 여력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조쉬 킹은 모지스보다 훨씬 여유로운지 쉬지 않고 입을 놀린다.
“그런데 말이야···. 암만 잘한다고 해도 너희 팀은 문자 한 통으로 팀에서 잘라낸다며?”
“···.”
“정말 살벌한 직장이야. 그런 곳에서 도대체 왜 일을 하는 거야? 자존심도 없냐?”
“···.”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도발!
어지간한 돌대가리가 아닌 이상 이런 도발에 넘어올 선수는 없을 거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빅터 모지스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더욱 다리에 힘을 줄 뿐이었다.
‘으음. 별로 통하진 않네.’
도발이 실패했음에도 조쉬 킹은 여우 눈을 뜨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을 뿐.
그리 실망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감독님이 계속 슬슬 긁으라고 하셨으니까. 계속해봐야지.’
역시나. 어울리지 않는 갑작스러운 조쉬 킹의 트래시 토크는 소하의 명령이었다.
-어차피 처음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네가 경기장에서 슬슬 우위를 보인다면 결국 흔들릴 거다.
어지간히 다혈질이 아닌 이상에야, 프로 선수들이 값싼 도발에 넘어가 중요한 경기를 망치는 일이 없다.
하지만, ‘문자사건’은 이번 시즌 첼시를 말아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의 대사건!
요컨대, 첼시 선수들의 역린이란 뜻이었다.
게다가 역린을 슬슬 건드리는 하루살이가 경기장에서도 자신을 압도한다? 단단했던 평정심이 깨질 가능성이 컸다.
‘일단 힘으로 찍어눌러 줘야겠다!’
조쉬 킹은 재빨리 입을 다물고 제대로 근육을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
“우랴압!”
요상한 기합을 내지르는 조쉬 킹이 제대로 힘을 뿜어내자 빅터 모지스는 그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
눈을 동그랗게 뜨며 크게 당황하는 빅터 모지스!
아프리카인 특유의 단단한 신체 능력을 자부했건만. 쉽게 자리를 뺏기자 매우 놀랐다.
‘이, 이 자식은 단순히 힘만 센 게 아니잖아? 뭐지?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그냥 힘으로만 눌린 것도 아니라 경합하는 기술 자체가 뛰어났다.
교묘하게 팔을 들어 어깨를 누르는 솜씨는 전문 수비수 못지않을 정도!
-착.
자리도 빼앗고 경합에서도 이긴 조쉬 킹.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델리 알리의 패스를 소유했다.
-촤악!
공을 소유하자마자 조쉬 킹은 ‘왼발’을 이용해 빨랫줄 같은 크로스를 시도!
한쪽 팔로 달라붙은 빅터 모지스를 제압하며 시도한 크로스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르고 날카롭다.
아니, 그전에 주로 사용하는 발이 아닌 왼발로 이 정도 킥을 선보이는 모습 자체가 충격과 공포였다.
[조쉬 킹이 저렇게 왼발을 잘 사용하는 선수였나요? 놀랍네요.]
[몇 번 왼발로 기가 막힌 플레이를 보여줬던 전적이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그저 성장이 멈추질 않는 괴물이에요!]
장내 해설과 아나운서.
그리고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축구 관계자들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어찌 알까.
왼발을 사용하기 위해 오른발에는 축구화를 신지 않고 훈련한 조쉬 킹의 피와 땀과 눈물을.
그들이 어찌 알까.
모진 훈련을 하는 조쉬 킹의 옆에서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세심하게 코치해 주던 소하의 열정을.
대부분의 세상일이 그렇듯, 화려한 겉모습의 뒤에는 그 이상의 노력이 자리를 잡은 법이었다.
그저, 보이지 않았을 뿐.
-슈와악.
검은 뱀처럼 허공을 유영한 조쉬 킹의 크로스. 그 경로에는 에링 홀란드의 머리가 있었다.
-틱.
슬쩍 방향만 바꿔주는 에링 홀란드의 감각적인 헤더!
-텅!
아쉽게도 오른쪽 상단 골대를 맹렬하게 강타하며 골 아웃이 되고 말았다.
“좋은 크로스였어!”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며 환하게 웃는 에링 홀란드. 분명, 무척이나 상냥한 웃음이었지만 얼굴이 얼굴인지라 상당히 살벌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정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칭찬을 하지 않기가 힘들었다.
[조쉬 킹의 멋진 플레이도 돋보였지만, 에링 홀란드도 대단하네요. 첼시 수비진들을 힘으로 눌러버리고 뛰어올랐어요.]
[미친 선수입니다. 엄청나게 빠른 선수인데 포스트 플레이에도 능합니다. 진정한 무결점 스트라이커가 탄생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고작 18세의 선수에게는 과해 보이는 칭찬이 쏟아졌다.
18세.
이상한 한국식 나이로는 19세.
아직 한국에서는 급식을 먹고 다닐 나이였지만 홀란드는 이미 수년 뒤, 차기 발롱도르 후보라고 불리는 중이다.
너무 빠르지 않냐는 의문도 들겠지만, 원래의 세계에서도 에링 홀란드는 17~18시즌에 노르웨이 리그를 폭격했다.
유로파 리그에서도 5경기 4골 1도움이라는, 경기마다 하나의 공격포인트를 올린 미친 선수였단 말이다.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정상을 향하던 에링 홀란드.
그런 그가 로켓 추진체와 다를 바 없는 소하를 수년 전에 만났다.
쉽게 말해, 보통을 훨씬 초월하는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대단한 재능들입니다! 첼시 FC! 더더욱 경계심을 갖출 필요가 있어요!]
[이제 겨우 십 대 후반과 이십 대 초반인 선수들이에요. 포츠머스의 장래가 밝습니다!]
경기 초반, 아직 골이 터지지 않은 경기였지만, 포츠머스의 장래는 하염없이 밝았다.
***
조쉬 킹, 에링 홀란드.
두 명의 빛내는 재능들에 힘입어 주도권을 포츠머스가 꽉 쥐어 잡은 채 경기가 진행되었다.
엄청난 포츠머스의 기세!
성난 해일 같은 모습이라 첼시라는 작은 돛단배는 그대로 휩쓸려 침몰할 것만 같다.
하지만, 첼시는 그냥저냥 한 돛단배 수준의 팀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최신식 선박이었다.
“와아아아! 아자르! 아자르!”
그리고, 에덴 아자르라는 월드 클래스는 첼시라는 거대한 강철 배의 일등 항해사였다.
조금 전, 포츠머스의 선수 셋을 베어내고 슛까지 연결한 미친 플레이에 웸블리 스타디움을 찾은 첼시 서포터들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심지어 이런 엄청난 일을 홀로 해냈으면서도 별거 아니라는 듯 그저 어깨만 으쓱거렸을 뿐.
정말 첼시, 그 자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대단한 선수였다.
[조쉬 킹과 에링 홀란드가 대단한 재능을 갖췄지만, 에덴 아자르는 이미 그들의 머리 위에 군림한 선수란 말이죠!]
[그렇습니다! 포츠머스의 재능들이 가진 잠재성을 모두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아자르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조쉬 킹, 에링 홀란드.
현재의 실력도 뛰어나고 가진 잠재성은 차기 발롱도르 후보급으로 불러도 과언이 아닌 선수들이다.
하지만 에덴 아자르는 이미 발롱도르에 근접한 선수다.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활약이 미미해 발롱도르 최종 3인 후보에는 들지 못했지만, 명실상부한 현시대의 EPL 킹!
잘라 말해, 조쉬 킹과 에링 홀란드가 가진 잠재성을 최대한 쥐어짜야 간신히 따라잡을 엄청난 수준의 선수였다.
“이러면 좋지 않은데.”
잠잠했던 에덴 아자르가 날뛰기 시작하자 소하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생겼다.
17-18시즌에는 부상 때문에 부진하긴 했지만 명실상부한 첼시의 에이스였고, 그가 살아난다면 당연히 첼시 또한 살아났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포츠머스가 상당히 우세하던 경기를 순식간에 첼시가 따라잡으며 백중세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는 첼시가 근소 우위를 점하며 포츠머스를 강하게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에이스의 선전으로 첼시는 강해졌다. 그런데, 에이스는 첼시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지.”
첼시에 에이스가 있었다면 당연히 포츠머스에도 에이스가 존재했다.
첼시의 아자르.
그가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며 왕좌를 넘게 받는 바로 그 선수!
바로, 모하메드 살라였다.
7번, 조쉬 킹이 암만 잘한다고 해도.
9번, 에링 홀란드가 역대급 축구 괴물로 불린다고 해도.
10번, 델리 알리가 잉글랜드 최고의 미드필더가 될 재목이라 불린다고 해도.
13번, 도봉산이 이정재와 함께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라고 불린다고 해도.
현재 포츠머스의 에이스는 11번, 모하메드 살라임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첼시의 왼쪽 풀백, 마르코스 알론소에게 단단히 붙들려 메인 처지였지만, 그가 살아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질 터.
밀리기 시작했음에도 소하는 모하메드가 살라가 무언가를 해줄 거라 굳게 믿으면서 어떠한 움직임도 가져가지 않았다.
곧.
모하메드 살라는 소하의 믿음에 곧바로 부응하며 ‘EPL 왕’의 자리를 탐내기 시작했다.
-툭, 툭.
요즘 들어 찰떡궁합을 과시하는 아슈라프 하키미와 2:1 패스를 주고받는 모하메드 살라!
아슈라프 하키미가 영리하게도 마지막 패스는 마르코스 알론소와 속도 경합을 하라며 길게 뿌려줬다.
모하메드 살라와 마르코스 알론소.
빠르기로 정평이 난 선수와 느리기로 정평이 난 선수다.
속도 싸움은 애초에 싸움조차 성립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차이가 나는 선수란 말이다.
[아! 모하메드 살라가 드디어 뛰기 시작합니다!]
[정말 빨라요. 순간 짜임새 높은 협력플레이에 순간, 뒷공간을 내준 마르코스 알론소가 크게 당황하는군요!]
마르코스 알론소는 이제 끝.
그렇다면 이제 남은 상대는 실질적으로 왼쪽 풀백 임무를 수행하는 왼쪽 스토퍼, 안토니오 뤼디거밖에 남지 않았다.
AS로마에서 잠시나마 한솥밥을 먹은 동료끼리의 일대일 승부!
‘일단 살라를 멈추게 한다.’
안토니오 뤼디거는 예전의 동료였던 만큼 모하메드 살라의 장단점을 너무나도 잘 아는 선수였다.
그도 상당히 빠른 선수였지만 굳이 속도 싸움을 하기보다는 속도를 죽이기 위한 움직임을 선택했다.
실로 영리한 플레이다.
괜히 훗날에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주춤. 주춤.
교묘하게 공간을 좁히자, 안토니오 뤼디거의 의도대로 살라는 다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스슥, 슥.
잔발을 휘두르며 안토니오 뤼디거를 흔들려 보려는 모하메드 살라.
하지만, 안토니오 뤼디거는 경기장과 하나가 된 듯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휙.
거대한 방패 같은 안토니오 뤼디거의 태세에 모하메드 살라는 포기한 듯 몸을 돌렸다.
오른쪽 사이드 라인을 송곳처럼 파고들며 오버랩하는 아슈라프 하키미에게 공을 돌리려는 모습이다.
‘어림없다.’
안토니오 뤼디거는 아슈라프 하키미에게 패스하려는 모하메드 살라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슈라프 하키미라면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오른쪽 풀백이지 않던가.
괜히 좋은 위치에서 날카로운 크로스를 시도하게 내버려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꾸우욱!
강하게 모하메드 살라의 등을 압박하며 균형을 무너뜨리려는 안토니오 뤼디거.
일반적으로 보자면 나쁘지 않은, 사실 상당히 좋은 선택이었지만, 아쉽게도 안토니오 뤼디거의 판단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안토니오 뤼디거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2년 전에 같이 뛰었던 모하메드 살라의 모습이 근거였기 때문!
‘어? 뭐야? 왜 버티는 거지?’
모하메드 살라는 그리 힘이 강한 선수가 아니었을 텐데.
분명, 이 정도 힘이면 균형을 잃고 공을 놓쳤을 텐데.
선수분석을 했음에도 자기도 모르게 2년 전의 살라로 판단한 뤼디거의 머릿속에는 의구심이 가득 찼다.
2년.
그리 길다고 하지 못할 시간.
하지만, 누구에게는 몇 차원 위의 선수가 될 시간이기도 했고, 그건 살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휘릭.
안토니오 뤼디거의 의구심이 사라지기도 전에 살라는 그의 힘을 이용해 빙글 돌았다.
엄청난 하체 힘과 뛰어난 신체 균형이 없다면 감히 시도도 못 할 엄청난 턴!
-툭.
모하메드 살라는 자기 힘을 못 이겨 앞으로 꼬꾸라지는 안토니오 뤼디거를 뒤로 한 채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다.
정석이라면 중앙으로 향하는 컷백.
하지만, 살라의 선택은 조금 긴, 왼쪽 측면에서 쇄도하는 조쉬 킹이었다.
“우랴아압!”
아직도 어색한 괴성과,
-쾅!
익숙한 폭발음.
-철썩!
반가운 출렁임!
모하메드 살라는 보지 않고도 골이 들어갔음을 직감했고, 정확했다.
“우오오오오오!”
FA 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은 조쉬 킹!
고릴라 같은 포효와 함께 모하메드 살라에게 달려갔다.
“역시 파라오! 제대로 봤네!”
“에이스의 품격이랄까.”
“뭐래. 내가 에이스지. 그래서, 님 몇 골?”
“···.”
팀 내 최다 득점자가 치사하게 득점 수로 들이밀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린 모하메드 살라였다.
이래저래 참으로 포츠머스다운 뒤풀이였다.
하여튼, 전반 35분, 드디어 첫 골을 넣으며 앞서나가기 시작하는 포츠머스. FA컵의 우승컵이 반쯤 손아귀에 쥐며 또 다른 신화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 232화. FA컵 결승전.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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