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리그컵 결승. (2) >
유로파 리그 32강에서 매우 좋은 대진을 얻어낸 포츠머스. 모처럼의 행운이었지만, 아직 행운이 끝난 건 아니었다.
[포츠머스의 리그컵 상대는 브리스톨 시티 FC입니다!]
기적적으로 8강을 뚫고 포츠머스와 만나게 된 팀은 다름 아닌 브리스톨 시티 FC였다.
귀여운 팀 엠블럼이 눈에 띄는 ‘챔피언십 리그’에 속한 팀!
즉, 2부리그 팀이었다.
“봐봐! 운은 과학이라고!”
소하가 무척 행복해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찌나 들떴는지 모처럼 오전 훈련을 ‘자유 훈련’으로 변경해줄 정도였다.
“···와. 나 시즌 중에 고강도 체력 훈련을 빼먹는 건 처음인 거 같아···.”
“이, 이래도 되나? 어색해.”
“이건 루틴이 아니라서···. 난 그냥 혼자서 빡빡하게 해야겠다. 어차피 자유니까.”
모처럼 여유 있는 아침 시간을 받았건만. 이미 소하의 강한 훈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으로 변해버렸기에, 결국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을 보내기로 작정한 선수들이었다.
하여튼, 포츠머스는 드디어 운이 트인 덕분에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가능성을 크게 올렸고, 발걸음이 가벼워진 덕분에 박싱 데이 일정과 1월 1일의 4경기를 2승 2무로 마무리하며 2018년을 맞이했다.
***
2018년 1월.
햇수로만 보자면, 2013년에 포츠머스에 부임한 소하가 드디어 5년째를 맞이한 해이다.
5년. 짧다고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중학교 2학년생이 대학생으로 변하는 긴 시간.
혹은, 해체의 위기의 4부리그 팀이 프리미어 리그에서 위풍당당하게 존재감을 뿜어낼 만큼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또는, 28세의 어린 초짜 감독이 곧 공식경기 200경기를 달성할 시간이기도 했다.
“길고도 길었군···.”
1월 2일.
이틀간의 짧은 휴가로 텅텅 비어버린 클럽하우스를 홀로 찾은 소하는 묘한 감상에 젖었다.
원래 그리 감상적이지 않은 남자이긴 했지만, 뭐랄까.
그냥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지난 과거들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
인종차별, 승부조작, 버스 테러라는 평범한 인간들은 경험하기 힘든 일까지 포함한 다사다난한 나날이었다.
나쁜 일도 많았고, 좋은 일도 많았다. 그것도 셀 수 없을 만큼.
하지만, 소하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고 의심하지 않았다.
“뭐···. 의문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긴 하지.”
구단주와 브라이언의 관계?
맥닐 가문의 비밀?
이런 건 소하의 관심 사항 밖이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일이다.
소하가 의문을 가진 일은 오직, 그날의 그 술집에서 그 여자가 무슨 존재였냐는 거였다.
“머글 운운하는 거 보니까 마법사? 그런 건가. 그렇다 쳐도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은 너무 사기 아닌가. 그리고 왜 하필 나야?”
남들은 트럭에 치여 회귀하건만.
이쪽은 분명히 과거로 돌려보낸 존재가 있어 찝찝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자고로 어떤 존재든, 아무 이유 없이 베풀며 살진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소하는 그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진 건 아니다.
그저, 언젠가 다시 한번 만난다면 꼭 한마디만 전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고맙다고.”
마법사, 마녀일지도 몰랐고.
천사, 혹은 악마일지도 몰랐고.
또는 신일지도 몰랐지만,
그냥 다시 한번 꿈을 이어나갈 수 있게 도와준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을 뿐인 소하였다.
***
1월이라 하면 새해의 시작이지만 축구팬들에게는 겨울 이적 시장이 열리는 달이다.
이적 시장만큼 축구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이벤트는 극히 드물었고, 포츠머스 또한 이 열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포츠머스의 델리 알리. 세계 최고의 구단, 레알 마드리드의 관심을 한 몸에!]
[크-카-모, 토니 크로스, 카세미루, 루카 모드리치의 장기적인 대체자로 낙점받은 델리 알리!]
[잔여 계약 기간은 4년. 영입은 절대로 쉽지 않을 것.]
먼저, 포츠머스의 자랑스러운 10번, 델리 알리가 이적설에 휘말렸다.
델리 알리.
5년 전, 지금은 헐값이지만, 당시에는 구단의 기둥이 흔들릴 만큼 거금인 100만 파운드로 데려온 선수다.
소하가 처음으로 이적료를 주고 데려왔던 선수이기도 했기에, 여러모로 상징적인 선수!
바뀌기 전의 미래에서도 17-18시즌까지는 엄청난 선수로 명성이 높았고,
바뀐 현재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대단한 주가를 자랑하는 중이다.
오히려, 원래대로라면 다음 시즌부터 쭉 내리막길을 걷는 미래보다 훨씬 더 주목받았다. 이유는 바뀐 플레이 스타일 때문인데,
과거에는 2선과 1.5선에서 박스로 침투하는 움직임을 가져가는 선수였다면, 지금은 3선이나 2선에서 공을 운반하며 경기를 만들어 주는 선수로 변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공격포인트 생산 면에서는 조금 떨어질지라도 영향력 면에서는 비교가 불가했다.
덤으로 5년간 이루어진 소하의 철저한 기본기 훈련 때문에 ‘무결점’ 미드필더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축구 센스에 세계 정상급 기본기가 합쳐져 만들어낸 쾌거였다.
-알리는 안 되는데.
-···1억 파운드를 줘도 알리는 안 돼.
-설마 팔지는 않겠지?
-그냥 레알이 떠보는 거 아니야?
-응~ 계약 기간 4년이나 남았어.
팀 그로운을 충족했으며 100% 확실하게 월드클래스로 성장할 팀의 10번에게 이적설이 터지자 서포터들은 불안에 떨었다.
델리 알리가 충성심이 높긴 했지만, 상대가 보통 상대가 아니다.
세상 그 어떤 선수도 그 ‘레알 마드리드’의 유혹에는 버텨낼 재간이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알았다.
“···지단, 이 대머리 자식!”
소하는 스페인 언론에서 터진 이적설을 접하자마자 거칠게 이를 갈았다.
애초에 넘길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어떠한 접촉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다음 여름 이적시장에 영입하기 위해 슬슬 밑 작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지.”
알리와의 계약 기간은 4년이나 남았다.
이 길고 긴 계약 기간을 이적료로만 깨버리려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필요했다.
게다가, 보통 선수도 아니고, 고작 21세의 나이로 파리 생제르맹, 바이에른 뮌헨, AS 로마라는 명문 팀들의 중원을 휘저은 선수다.
아무리 가격을 낮게 잡아도 1억 파운드 미만은 대화조차 시작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건 선수가 계약 기간을 지키고자 할 때의 상황일 뿐이다.
만약, 흔히 말하는 ‘불만’이 뜬다면?
다른 선수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포츠머스가 한 발짝 양보할 수밖에 없다.
즉, 이번 레알 마드리드의 움직임은 절대적인 강팀들만 할 수 있는 ‘선수 흔들기’라는 이야기였다.
“바르셀로나가 자주 사용하는 치졸한 수법이지···. DNA 운운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대머리는 이래서 안 돼.”
소하는 저 멀리 있을 전설적인 선수이자 감독인 지단 감독을 씹으며 서둘러 델리 알리를 감독 사무실로 불렀다.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간 분명히 영입할 거라는 움직임이었기에 미리 약을 쳐두기 위한 행동이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아직 겉멋의 겉 자도 들지 않은 앳된 얼굴의 델리 알리가 곧 얼굴을 내비쳤다.
옆머리와 뒷머리를 짧게 친, ‘근본 머리’를 흡족하게 바라보며 소하는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 레알 가고 싶냐?”
“···.”
돌직구도 이런 돌직구가 또 있진 않을 거다. 아마, 세상천지에 다짜고짜 불러서 이렇게 물어보는 감독은 없으리라.
“레알이요? 레알 마드리드 말씀하시는 거죠?”
“당연하지. 그럼 레알 소시에다드겠냐.”
“거긴 머리에 매그넘 들이밀어도 안 가죠.”
“그야 그렇지. 하여튼 빨리 말해봐.”
레알 소시에다드 서포터들이 이 대화를 들었다면 혈압이 터졌을 거다.
암만 포츠머스가 성장했다고 해도 소시에다드가 무시당할 구단은 아니었으니까.
단지 소하와 알리의 야망이 너무나도 컸을 뿐이었다.
“흠···. 마드리드라. 별로요.”
보통 선수였다면 레알 마드리드라면 사족을 쓰지 못했지만, 델리 알리는 상당히 무덤덤했다.
“왜?”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라 모처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에, 델리 알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답한다.
“전 아직 ICC에서의 패배를 잊지 않았거든요. 기필코 제 손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크-카-모를 꺾고 말겠어요. 그전에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하다니···. 그건 패배를 인정한 채 싸움에 진 개처럼 고개 숙이고 합류하는 거잖아요. 그런 짓을 어떻게 해요? 쪽팔리게. 차라리 불알을 떼고 말지.”
“!!??!!”
델리 알리의 복수심이 흘러넘치는 눈빛에 소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넌! 오늘부터 주장 단이다! 케빈 도슨, 잭 해리슨에 이어서 제3주장을 맡도록!”
소하의 마음을 120% 만족시키는 완벽한 대답이었기에 포상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 정말요!?”
“그래. 넌 이제 삼인자야! 하지만 내가 약속하마. 넌 곧 내 왼팔이 될 거다.”
“최, 최고네요. 이거 조쉬 킹이나 다른 선수들에게 자랑해도 되나요?”
“당연하지. 개기는 놈 있으면 말만 해. 숙청해줄 테니까.”
“추, 충성을 다할게요.”
“그래. 그래.”
설득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역으로 충성맹세를 받는 기묘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평범과는 동떨어진 기묘한 개인 면담은 저 멀리, 스페인에서 델리 알리의 영입을 노리던 지단 감독의 꿈을 순식간에 짓밟아 버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
포츠머스의 이적설은 델리 알리가 끝이 아니었다. 그저 시작이었을 뿐.
[케빈 도슨, 첼시에서 눈독 들이다.]
[에링 홀란드, 맨체스터 시티의 영입 1순위.]
[모하메드 살라, 역대 최고 이적료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향할까?]
[조쉬 킹. 바르셀로나의 구애!]
[아스널, 포츠머스의 칼빈 필립스를 장기적인 핵심 선수로 원한다.]
핵심 선수에게 모조리 관심이 떠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16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 증명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통하는 실력인데,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통한다?
돈다발을 들고 몰려들 수밖에 없다.
물론, 여름 이적 시장이 아닌 겨울 이적 시장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반년 뒤를 위한 여론몰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의 사전 준비는 6개월 뒤에 열릴 여름 이적 시장에서의 전초전이었기 때문에 소하는 골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싹 다 재계약해버릴 수도 없고···.”
하려면 할 수는 있었다.
다만, 잦은 재계약은 팀의 평균적인 연봉을 급격하게 상승시킬 터.
건강한 재정을 원하는 소하로서는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남은 건 우승컵밖에 없지. 우승컵을 잔뜩 들어야 팀에 말뚝을 박을 테니까.”
하지만 리그컵 우승만으로는 조금 많이 부족하다. 어떤 팀은 리그컵 우승컵이라도 들고 싶어 했지만, 선수들을 잡아두기에 확실한 카드는 절대 아니다.
“유로파 리그 우승컵을 목표로 삼기도 좀 그렇고···.”
일단 목표는 ‘올라갈 수 있을 만큼’이지만 우승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애초에 대륙 간 대회는 경험도 부족할뿐더러 변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렇다면 익숙한 놈들을 상대로 확실히 동기부여가 될만한 우승컵이 필요하다는 건데···.”
슬쩍.
소하는 턱을 매만지며 다음 일정표를 흘겨보았다.
마침, 다음 상대는 FA 컵 3라운드, 노리치 시티와의 홈경기다.
“···.”
눈을 샐쭉하게 뜨는 소하. FA 컵을 바라보며 날름날름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참으로 흉측하다.
“FA 컵이라···.”
FA컵.
1871년도부터 시작된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대회다.
잉글랜드 내에서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
오죽했으면, 과거의 잉글랜드 인들은 챔피언스 리그보다 FA 컵을 더 위로 치기도 했다.
아니, 애초에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에 참가조차 하지 않았다.
‘우린 FA 컵이 있는데 뭐하러 듣도 보도 못한 대회에 나가?’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만큼, 잉글랜드의 FA 컵은 위상이 남달랐다.
현재도 다른 리그의 컵대회보다 반에서 한 티어 정도 높은 위상을 자랑한다.
“FA 우승컵이라면 딱 맞긴 하지.”
리그컵과 FA 컵.
국내 컵대회를 모조리 석권한다면 선수들의 동기부여는 하늘 높은 줄 모를 만큼 치솟아 오를 거다.
“하지만 여기에도 전력을 다하면 리그는 어렵다.”
이미 제법 망한 17-18시즌의 리그 레이스였지만 더욱 망할 거다.
“그래도 이 길밖에 없군.”
정말 힘든 길이었지만, 언제나 살아남기 위한 길은 험한 법이었다.
< 225화. 리그컵 결승.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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