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리그컵 결승. (1) >
토너먼트는 굉장히 어려운 길이다.
프리미어리그를 제패하는 펩 과르디올라의 맨체스터 시티가 괜히 토너먼트에서 좋지 않은 성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21-22시즌까지 리그 우승을 밥을 먹듯이 할지라도, FA 컵 우승은 단 두 번, 챔피언스 리그는 역사상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토너먼트는 실력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무언가 중에서는 경험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때문에 소하의 포츠머스는 토너먼트로 진로를 잡았고, 때마침 첫 번째 시험대가 바로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리그컵 5라운드.
혹은, 리그컵 8강.
12월 20일에 잡힌 본머스와의 리그컵 8강 경기는 포츠머스에게 상당히 의미가 큰 경기였다.
경기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리그컵 우승’이란 값을 매기기 힘든 가치를 얻기 위한 전초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의 전달사항을 전하겠다. 모처럼 토너먼트 준결승전에 진출할 기회다. 다들 필승을 준비하고 있도록.”
사우스햄튼을 짓뭉개버리고 우울함에서 벗어난 소하는 아침 훈련을 시작할 때마다 선수들에게 세뇌를 시작했다.
심지어 아침 훈련뿐만 아니라 모두가 모이는 자리마다 자동응답기처럼 계속해서 주입했다.
“좋은 점심시간이다. 잘 먹고 리그컵 8강에서 승리해서 준결승전에 진출하도록 하자. 먹고 리그컵 우승컵으로 싸라 이 말이야.”
“···.”
고된 오전 훈련을 끝내고 맞이하는 행복한 점심 식사 시간부터,
“차 맛있니? 그 차는 다, 네가 리그컵에서 미쳐 날뛰어서 우승컵을 가져오길 바라며 주는 거야. 아, 물론, 부담을 느끼라는 말은 절대 아니야.”
“···.”
“그렇다고 그냥 흘려들어도 된다고 말한 건 아닐지도 몰라.”
“···네?”
“그냥 그렇다고.”
“···.”
쉬지 않고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는 개인 면담 시간은 물론이었으며,
“다들 열심히 오후, 개인 훈련에 열심히 임하고 있구나. 다 리그컵 8강전에서 승리하고 우승컵을 따내기 위한 땀이라고 생각할게.”
“···.”
팀 훈련을 마무리하고 시작하는 개인 훈련 시간에도 얼굴을 들이밀며 끊임없이 세뇌했다.
덕분에 선수들은 이제는 자다가도 리그컵의 우승컵을 드는 꿈을 꿀 정도였다.
이젠 이미 리그컵의 우승이 커리어에 기록된 착각까지 들었다.
“···이겨야 해···.”
“이기지 않으면···. 큰일이 나···.”
“묘한 압박감이다···.”
“챔피언스 리그 6차전에도 이러지 않으시지 않았던 거 같은데···.”
“리그컵에 이렇게 집착을 보이는 감독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어···.”
덜덜덜덜.
선수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그냥 평소처럼 막무가내로 소리치며 무조건 이기고 오라고 했으면 이 정도로 무섭진 않았을 거다.
지금처럼 세상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은은한 압박을 가하자 도저히 버티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흉측한 악귀가 되려고 저러는 것인지. 정말 쉬이 짐작하기도 무섭고 어려운 선수들이었다.
“8강전은 무조건 이긴다···!”
결국, 선수들은 눈을 부릅뜨며 필승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쳤다.
눈에 살짝 광기가 어릴 정도로 세뇌당했다.
하지만 어디까지 이 승리의 의욕은 리그컵에 한정된 것이었을 뿐.
리그컵 전에 치르는 프리미어리그 16라운드, 브라이턴과의 경기에서 져 버리며 망신을 톡톡히 당해버렸다.
“···.”
산만한 움직임이었다. 뭔가 경기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 느낌. 다음에 있을 리그컵에 너무 마음이 가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소하는 예상외의 패배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 리그컵의 우승컵을 위해서 그런 거라고 믿겠다. 그렇지? 그럴 거야. 그렇지 않으면···.”
뒷말을 줄이는 소하의 얼굴에는 짙은 음영이 내리깔렸다.
***
본머스 AFC.
리그컵 8강전의 상대이자, ‘에디 하우’라는 젊고 재능있는 감독이 이끄는 중하위권에 속한 팀이다.
치열한 ‘사우스 코스트 더비’ 때문에 조금 간과된 부분이지만, 이 팀의 연고지인 본머스도 남쪽 해안에 자리를 잡은 도시다.
요컨대, 사우스햄튼과 포츠머스와 함께 삼각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구단이란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사우스햄튼과 더 가까운 덕에 포츠머스보다는 사우스햄튼을 증오하는 편이었다.
이래저래 사우스햄튼은 서쪽에서는 본머스가, 동쪽에서는 포츠머스가 싫어하는 남부 해안의 악역이었다.
두 팀보다 훨씬 먼저 뛰어난 유소년 시스템으로 잘 나간 터라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은 결과였다.
하여튼, 리그컵 8강전을 맞이하는 본머스의 동기부여는 가벼이 여길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이번에 서열정리 제대로 하자.”
“사우스햄튼을 이긴 포츠머스를 컵대회에서 탈락시킨다면 우리가 남부 해안에서 제일 샌 거지.”
“맞아. 완벽한 삼단논법이다. 혹시 케임브리지에 다니니?”
기적의 삼단논법으로 무장한 본머스는 어떻게든 포츠머스를 꺾고 싶어 했다.
여기에 더해서 리그컵의 포상인 ‘유로파 리그 진출’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우승하면 유로파 리그 진출이라고. 제발 이기자.”
“유럽대항전 진출이라니. 우리 같은 영세구단은 꿈도 못 꾸는 일이지.”
“유로파 리그에 진출하면 재정적으로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선수 수급에도 좋은 영향일 테고.”
본머스에게 리그컵 우승의 포상은 너무나도 황홀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유로파 리그가 가져다주는 이익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포츠머스가 이상한 편이었다.
실질적인 위상은 비슷했으나 내실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기에 나타난 온도 차이였다.
포츠머스는 굳이 유로파 리그에 나가지 않더라도 수입이 대단했으며,
뛰어난 선수들도 워낙 팀이 잘 나가는 터라 이적에 주저함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 첫 시즌에 챔피언스 진출이라는 사기적인 업적 때문에 관심도는 더욱 벌어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본머스는 동기부여가 무척 잘되었으며 에디 하우 감독 또한 승리를 무척이나 바랐다.
“내 주가를 올릴 기회군.”
팀의 승리와 발전도 문제였지만, 개인의 사심도 상당히 들어있었다.
에디 하우라면, 젊고 재능있는 감독으로 한참 주가를 올렸던 감독!
그런 그에게 소하라는 더 젊고 더 재능있는 감독의 등장은 썩 달갑지만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상대 전적이 열세였기에, 제대로 우열을 가리고 싶은 에디 하우 감독이었다.
[프래튼 파크에서 이제 곧 리그컵 5라운드가 시작됩니다.]
[과연 어느 팀이 승리할까요!]
해서, 시작된 리그컵 8강.
양 팀 모두 승리가 절실했기에 치열한 경기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의외로 경기는 싱거운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포츠머스의 4-0 대승!]
[이게, 브라이턴전에서 엉망이던 팀이 맞나요? 너무 잘하네요.]
간절함과 의지의 무게가 같다면 더 강한 놈이 이기는 법!
포츠머스는 챔피언스 리그를 경험하며 이미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에 오른 뒤였다.
사우스햄튼의 강세 때문에 서로 손잡고 같이 뒷담화를 하던 쭈구리 시절의 포츠머스가 아니란 말이다.
[말 그대로 그냥 체급 차이였습니다. 양 팀이 가진 힘의 차이가 너무나도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허, 참. 헛웃음이 나오네요. 본머스도 지난 5년 동안 정말 엄청난 발전을 이룬 팀입니다. 그런데, 포츠머스에 비하자면 제자리걸음처럼 보였습니다.]
꽤 충격적인 결과였다.
본머스도 특별히 못 한 부분이 없이 경기를 잘 풀어나갔건만.
잘했음에도 천천히 질식사당하자 해설과 아나운서의 헛웃음을 유발했다.
분명, 본머스도 5년의 세월 동안 크나큰 발전을 이룬 팀이었다.
포츠머스처럼 재정난으로 퇴출 위기도 겪었으며, 마찬가지로 하부리그에서 빌빌거렸지만, 기어코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해 3년이나 살아남은 자부심을 가진 팀이었다.
그런데도 순수한 실력으로 이 정도 차이가 나자 포츠머스의 시간은 더 빠르게 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포츠머스는 정말 축구 역사에 새로운 기록으로 영원히 남겠군요. 그들이 다다를 마지막이 어떨지 정말 궁금해진 하루였습니다.]
아나운서의 마지막 말은 경기를 보며 포츠머스에게 관심의 눈길을 주던 모든 축구팬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발언이었다.
***
리그컵 준결승전에 진출한 포츠머스.
이번에는 ‘박싱 데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싱 데이.
원래는 성탄절 다음 날인 12월 26일을 기리는 말이다.
이 때문인지, 축구에 미친 잉글랜드에서는 12월 26일에는 무조건 축구 경기를 치르는 요상한 전통이 자리 잡게 되었다.
즉, 박싱 데이가 빡빡한 일정인 게 아니라, 박싱 데이 때문에 연말의 일정이 빡빡하다는 말이다.
게다가 살짝 맛이 간 잉글랜드 인들은 1월 1일에도 ‘신년 특집’이라는 명분으로 축구 경기를 또 잡아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덕분에 프리미어리그는 12월 마지막 주부터 1월 1일까지는 3~4경기씩 치르는 강행군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축구에 미친 놈들이야. 기념한다고 축구하고, 다 같이 쉬니까 또 축구하고···. 축구는 별로 잘하지 못하는데, 축구는 정말 좋아한다니까.”
소하는 7일 동안 3경기나 잡혀있는 일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포츠머스가 박싱 데이 동안 치르는 경기는,
프리미어리그 17라운드, 번리.
프리미어리그 18라운드, 팰리스.
프리미어리그 19라운드, 에버튼.
이렇게 3경기나 되었다.
그리 어려운 상대들은 아닌지라 제법 일정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겠다.
“뭐, 어려웠어도 지금은 아웃 오브 안중이지. 안 그래요?”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관심이 없다는 말이시죠? 당연하죠.”
소하의 오른팔 밀러가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대답했다.
솔직히 지금 밀러의 표정은 왜 소하가 때아닌 일정표 점검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됐고, 빨리 TV나 켭시다. 감독님. 유로파 리그 토너먼트 추첨이 있잖아요.”
“···성격이 급하시네요. 배달 음식은 주문해두시고 보채는 거겠죠?”
“이미 세팅이 다 끝나서 제가 모시러 온 겁니다.”
“그럼 어서 가죠.”
누구보다 빠르고 냉정하게 바라보던 일정표에서부터 시선을 거둔 소하. 곧바로 걷는 건지, 달리는 건지 모를 속도로 식당으로 향했다.
“오! 오셨네요.”
“빨리 오세요.”
“이제 막 시작했어요.”
소하와 밀러가 등장하자 맨날 모이던 회원들이 음식을 차려둔 채 환영했다.
이미 추첨 방송을 다 같이 보는 모임은 포츠머스에 새롭게 생긴 정통인지라 너무나도 신속하고 자연스러운 대처였다.
“자, 그럼 한번 볼까요?”
소하는 유달리 밝은 목소리로 떠들었다. 왠지 모르게 이번 조 추첨에는 자신이 있다는 기세가 엿보인다.
“오, 꿈자리가 좋으셨나 봐요?”
에밀리아 존슨이 소하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귀신같이 파악하고 물었다.
이에, 보통 사람 같았다면 대충 장단을 맞춰줬겠지만 소하는 보통 사람도 아니었고 여심에 관해서는 애송이 중에서도 애송이지 않은가.
정상적인 대답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아니요. 전 꿈같은 걸 꿔본 적이 없어서. 한번 꾸고 싶다.”
“···그래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신 거 같은데요?”
약간 섭섭할지도 모르는 소하의 대답에도 에밀리아 존슨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고, 애초에 콩깍지가 너무 두꺼워 이런 모습도 좋아하는 그녀였으니까. 사랑의 힘이란 여러 의미로 무서운 법이었다.
“그야, 계속 운이 좋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는 운이 좋을 거라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자신감이죠. 통계학이랄까. 후후.”
“···.”
그 에밀리아 존슨마저도 미소를 잃어버릴 만큼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소하의 자신감이었다.
아마, 통계학의 거장 조지 박스가 소하의 말을 들었다면 자서전으로 머리통을 후려갈겼을 거다.
하지만, 놀랍게도 소하의 말은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맞아요. 맨날 운이 없을 순 없잖아요.”
“진짜. 그리고 감독님이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잖아요. 운은 파도와 같다고. 이번에는 저도 느낌이 좋아요.”
“4년이 넘게 운이 안 좋았는데 이번에는 우리 손을 들어주겠죠.”
그간 너무나도 운이 좋지 않았기에 생긴 억하심정의 발로였다.
이번에도 좋지 않은 대진을 받는다면 단체로 화병이 나서 응급실로 실려 갈지도 몰랐다.
이 정도면 거의 바람이 아닌 광기!
그리고, 이 광기가 행운의 여신에게 대단한 압박감을 줬는지 모처럼 포츠머스의 쪽으로 행운이 닿았다.
[포츠머스의 32강 상대는, FC 아스타나입니다!]
FC 아스타나!
이름조차 생소한 이 팀이 속한 나라는 무려 카자흐스탄이었다.
“이예에에에에! 됐다!”
“바로 이거지!”
“이게 과학이다! 이게 통계학이다!”
추첨과 동시에 난리가 났다.
모두 테이블에 올라 탭댄스를 추며 모처럼 들어온 행운에 찬사를 불렀다.
오직 한 사람, 조쉬 킹만이 어수룩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을 뿐!
“응? 카자흐스탄이 어디야? 아프리카 아니었나?”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내 카자흐스탄에 대해서 검색해보는 조쉬 킹이었다.
< 224화. 리그컵 결승. (1) > 끝
ⓒ 블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