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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천재 감독-221화 (221/306)

< 221화. 그 남자의 우울. (4) >

후반전이 시작됐다.

전반전의 점수는 당연하게도 0-0.

상당히 지루한 45분이었다.

포츠머스 경기의 역사를 뒤집어도 찾아보기 힘든 ‘노잼’ 경기였다.

이 때문에, 후반전의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자, 프래튼 파크를 찾은 관중들은 모두 한 가지 생각을 품었다.

-후반전도 지루하겠지.

매우 예상하기 쉬운 경기의 양상이었다. 포츠머스는 비기기만 해도 매우 만족이었고, 파리도 굳이 무리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으니까.

암만 1차전의 복수를 원한다고 해도 챔피언스 리그 16강 진출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우나이 에메리 감독은 물론이고 파리 생제르맹의 선수들도 마음속으로 AS로마를 응원하며 경기에 임할 거다.

그리고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후반전이 5분가량 지난 지금도 양 팀은 소녀처럼 수줍게 공을 주고받고 있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고요한 경기군요.”

생소한 경기의 양상에 밀러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언제나 재미있는 축구를 보여주던 처지라 경기장을 찾은 서포터들에게 조금 미안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죠.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가 달린 경기니까요. 아마 서포터들도 이해해 줄걸요?”

“그런 거 같긴 합니다만···. 이대로 계속 진행될까요?”

“그건···. 저도 모르죠. 다 바이에른 뮌헨의 손아귀에 달렸죠.”

소하는 매우 쉽게 대답했다.

포츠머스와 파리 생제르맹의 경기는 소하의 손을 떠난 지 오래다.

고스트 축구왕 같은 느낌일까.

저 멀리, 이탈리아에서 펼쳐지는 경기에 양상에 맞춰나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바이에른 뮌헨이 후반 10분 내로 따라붙는 골을 넣으면 우리도 바빠···.”

웅성. 웅성. 웅성.

갑자기 시끌벅적해진 관중들의 분위기에 소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프래튼 파크에 이변이라도 일어난 걸까.

아쉽게도 프래튼 파크는 아직 바둑보다 지루한 경기가 이어지는 중이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가, 감독님. 바, 바이에른 뮌헨의 토마스 뮐러가 한 골 넣었답니다.”

“제기랄. 말 꺼내기도 무섭네.”

밀러가 답을 당황하며 답을 가져오자 소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겨우 후반전은 7분가량 지났을 뿐이야. 추가 시간까지 생각한다면 40분···. 40분이면 기세가 오른 바이에른 뮌헨이 역전하기엔 차고 넘친다.’

축구 경기의 기세나 흐름은 그저 단순히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분이 아니다.

강팀이든 약팀이든, 경기중에는 꼭 한 번 이상 찾아오는 기회였다.

그리고 이 기회를 많이 잡고 잘 살리는 팀이 강팀이었고. 지금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바이에른 뮌헨 강팀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

그렇다면 대비를 해야만 한다.

마침, 교외의 한적한 공원처럼 적적하던 프래튼 파크도 슬며시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아, 파리 생제르맹의 선수들이 조금 전보다 더 전진패스와 드리블을 시도하는군요.]

[물론, 그리 적극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조금 전보다는 눈에 띄긴 하군요.]

오묘하고 애매하지만, 확실히 조금 공격적으로 돌변한 파리 생제르맹!

이에, 소하는 도끼눈을 뜨고 우나이 에메리 감독을 흘겨봤다.

“···.”

“···.”

또다시 때마침 공교롭게도 눈이 마주친 두 축구계의 거장들.

서로 눈짓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이러기에요? 우리 동맹이었잖아?’

‘보험입니다. 보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험은 개뿔. 이건 협정 위반이에요.’

‘어···. 협정을 맺은 증거가 있습니까?’

‘···.’

‘···큼큼.’

대충 이런 무언의 대화를 나눈 소하는 곧바로 배신자를 응징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좋아, 우리를 건드린다면 어떻게 되는지 주의를 시킬 필요는 있겠군.”

“···네?”

내막을 모르는 밀러가 멍청하게 되물었지만 소하는 눈길도 주지 않고선 주저 없이 실행에 옮겼다.

“얘들아. 플랜C다!”

플랜C!

분기탱천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초기 전술보다 조금만 더 공격적인 모습으로 임하는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적당히 스텝만 밟으며 피격을 피했다면, 지금은 잽 정도는 날리려는 전술이었다.

“요컨대 무력시위란 이야기지.”

북한의 국지적 도발이 있을 때마다 군에서 진돗개 경보가 발령하듯이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진돗개 셋’이었다.

하여튼, 바이에른 뮌헨의 골에 프래튼 파크에서 펼쳐지던 때아닌 바둑은 끝이 났다.

제법 축구 경기답게 슛도 하며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기 시작하는 양 팀!

하지만, 아직 맛이 싱겁기는 매한가지다. 후추나 고춧가루 같은 향신료를 뿌려준다면 더욱 맛이 나는 경기가 될 거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은 일류 주방장임이 분명했다.

“감독님! 로베르토 레반도프스키의 동점 골이 터졌답니다!”

후반 30분.

밀러가 대경실색해서 소하에게 보고했다. 사실 이미 소하도 일이 틀어졌음을 눈치챘다.

순식간에 프래튼 파크를 찾은 관중들이 들썩였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동점이라고?

-아직 15분이나 남았는데?

-우리도 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불안한데.

-경기가 타오를 조짐이 보이는데.

적당한 향신료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밍밍했던 누룽지탕을 마라탕으로 변신시켜버릴 정도의 향신료였다.

[파리 생제르맹이 마침 선수들 교체합니다. 티아고 모따를 빼고 앙헬 디마리아를 투입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네이마르를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음바페를 반대쪽 측면인 왼쪽으로 배치하겠다는 거죠!]

매우 공격적인 교체였다.

수비형 미드필더를 빼고 오른쪽 윙포워드를 넣다니. 이건 국지도발 수준이 아니라 선전포고였다.

“이런 썅! 선전포고랑 미사일 폭격을 동시에 하네! 상도덕 없는 거 봐봐.”

소하는 버럭 소리 지르며 분개했다.

이건 명백한 국지도발을 알리는 ‘진돗개 하나’도 모자랐다.

지금 당장 전군에 데프콘을 발령해야만 했다.

“데프콘 2···. 아니, 데프콘 1을 발령한다. 이제 전쟁이야!”

군필자답게 데프콘 운운하며 곧바로 대응하는 소하. 4-1-4-1 대형에서 4-3-3 대형으로 맞받아치며 매우 공격적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가, 감독님. 그냥 계속 템포를 느리게 가져가면 되지 않습니까?”

밀러는 소하의 과격한 대응에 우려를 표했다. 어차피 무승부만 거두어도 되는데 너무 과민한 거 아니냐는 뜻이다.

물론, 소하의 생각은 달랐다.

“파리 생제르맹은 체력을 아꼈잖아요. 게다가 이제 프래튼 파크에 대한 적응도 끝냈어요. 적응도 끝났고, 체력도 쌩쌩한 파리 생제르맹의 공격을 익숙지 않은 점유율 축구로 막으라고요?”

“···.그, 그렇군요.”

“애초에 우리의 전략도 공을 질질 끌다가 후반에는 몰아쳐서 변수를 차단하는 거였잖아요.”

“그, 그랬었죠.”

소하와 우나이 에메리 감독의 대전략은 일맥상통했다.

우나이 에메리 감독도 천천히 체력을 아끼며 바이에른 뮌헨과 AS로마의 경기 양상에 따라 속도를 조정하려는 움직임이었으니까.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매우 대성공이었다.

너무 조심스럽지 않냐는 비판이 무색하게도 전력을 다해 공격을 마칠 준비가 끝났다.

만약 경기 초반부터 달렸다면, 지금처럼 필요할 때는 이미 선수들의 체력이 동이 났을 거다.

“15분. 15분만 버텨라. 얘들아.”

남은 시간은 15분. 소하는 선수들과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열심히 뛰고 있을 AS로마의 수비진들에게 빌고 또 빌었다.

***

-와아아!

-아깝다!

-조금만 왼쪽이었으면!

포츠머스의 서포터들이 탄식을 내질렀다. 모하메드 살라의 슛이 아쉽게 빗나갔다는 아쉬움에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아, 저기 가운데로 주지.

-케빈 도슨이라고? 잘하네. 다음 여름 이적시장에서 노려보자.

-괜찮아. 괜찮아. 또 이렇게 만들어보면 돼.

먼 길을 떠나온 파리 생제르맹의 서포터들도 주먹을 불끈 쥐며 아쉬워했다.

제법 잘 페널티 박스 안으로 치고 들어갔지만, 케빈 도슨의 영리한 수비에 가로막혀 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츠머스! 포츠머스!

-파리! 파리!

활활 타오르는 양팀응원자들의 모습!

전반전, 장례식 분위기 같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매우 열정적인 10분을 보내는 중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5분.

아직 바이에른 뮌헨의 역전 골이나, AS로마의 다시 앞서가는 골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프래튼 파크는 달아오를 만큼 달아올라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흐랴!”

“흡!”

“또 이겨줄게!”

“복수해준다!”

선수들도 긴 시간을 얌전하게 보냈던 반동 때문인지 굉장히 열정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야야! 거기선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좋습니다. 조금 더 침착하게!”

양 팀의 감독들마저도 단 한시도 쉬지 않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불난 집에 기름을 계속해서 투입한다.

그야말로 제대로 타올랐다.

하지만 이토록 활활 타오르는 경기에서 오직 한 사람, 한 선수만이 분위기와 조금 떨어져 있었다.

‘으으.’

빠른 경기에 비해서 조금 둔해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 조쉬 킹. 경기가 늘어질 때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본격적으로 들어가자 눈에 확연히 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사람의 몸은 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극한으로 우울한 상태에서 빠른 경기를 따라잡기는 너무나도 힘든 법이었다.

‘그, 그래도 해야 해.’

그런데도 조쉬 킹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많이 모자라고 어리숙한 ‘인간’이지만, 훌륭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조쉬 킹이라 하면 머리보단 몸이 먼저 움직이던 선수.

늘 하던 것처럼 머리를 비우고 본능에 몸을 맡기며 어찌어찌 0.8인분 정도는 충분히 보여준다.

조쉬 킹의 0.8인분.

이미 굉장히 뛰어난 선수로 성장했기에 기회를 쟁취하기엔 매우 충분한 실력이다.

-툭.

본능적으로 실행한 침투.

기다렸다는 듯이 발밑에 떨어지는 델리 알리의 멋진 전방 패스.

라인을 끌어올린 파리 생제르맹의 라인을 완전히 깨부수며 확실한 기회를 잡았다.

[기회입니다! 조쉬 킹과 델리 알리가 멋진 합작품을 만들어냈어요!]

[포츠머스가 자랑하는 공격 루트입니다. 저 둘의 호흡은 유럽에서도 최정상일 겁니다!]

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추었으며, 실제로도 둘도 없는 친구인 조쉬 킹과 델리 알리.

그들의 유대관계는 한 명의 컨디션이 좋지 않더라도 경기장에서 한방을 보여줄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앞으로 뛰자.’

완벽한 기회를 잡은 덕분에 본능에 맡겨놨던 이성이 돌아온 조쉬 킹. 매우 당혹스럽지만, 아직 미세하게 남은 본능을 따라 골대를 향해 전속력으로 드리블하기 시작했다.

[조쉬 킹이 뜁니다! 정말 빨라요. 파리 생제르맹의 치아구 시우바와 마르퀴뇨스, 두 브라질 중앙수비수들이 따라가질 못하고 있어요!]

[놀라운 광경입니다.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 브라질 선수들도 준족으로 유명한 선수들인데 말이죠!]

장내 아나운서와 해설의 말처럼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치아구 시우바와 마르퀴뇨스는 수비수임에도 상당히 빠른 선수로 유명했거늘. 그런 그들이 입술을 깨물고 전력으로 달려도 거리가 더욱 벌어지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제 남은 건 파리 생제르맹의 골키퍼, 케빈 트라프 밖에 없습니다.]

[완벽한 기회이에요! 과연!]

해설대로, 조쉬 킹의 눈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양팔을 쭉 뻗은 케빈 트라프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러자, 멀쩡하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이 정도 스프린트 따위는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숨이 가빠오는지 조쉬 킹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꿈뻑.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떠보는 조쉬 킹.

그랬더니 이번에는 케빈 트라프가 바이에른 뮌헨의 마누엘 노이어 골키퍼로 보인다.

꿈뻑. 꿈뻑.

미친 건가 싶어 다시금 눈을 세차게 깜박이자, 이제야 케빈 트라프가 제대로 보인다.

단순히 착시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둘의 거리는 코앞까지 가까워졌던 것이었다.

이제, 슛하던지 오른쪽에서 쇄도 중인 에링 홀란드에게 패스를 하던지 정해야 한다.

‘슛이다.’

너무 빨랐던 탓일까. 에링 홀란드는 너무 뒤에 있다. 패스를 건넨다면 차단당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조쉬 킹은 자신을 휘감은 무겁고 음침한 기운을 골이라면 해결해 줄 거란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강하게? 약하게?’

슛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뒤는 돌아보지 않고 때렸었다.

아니, 애초에 평소에는 슛하고 나서 슛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조쉬 킹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슛을 할지에 대한 고민은 너무나도 생소한 고민이었다.

‘또, 강하게 차면···?’

강하게 찼다가 경기를 말아먹은 일이 무서운 속도로 그의 머리를 잠식했다.

그리고 때마침, 장내 해설과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골을 넣는다면 16강 진출이 확정입니다! 중요한 찰나입니다!]

[포츠머스의 꿈이 결정될 순간이에요!]

‘포츠머스의 꿈.’

평소에는 절대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잘 들리는지 모를 일이다.

“으아아아아!”

덮쳐오는 두려움과 압박감을 이겨내려는 듯 맹수 같은 포효를 내지르는 조쉬 킹!

-뻥!

그는 그렇게 프래튼 파크를 뒤흔드는 포효와 함께 슛을 내질렀다.

< 221화. 그 남자의 우울.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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