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그 남자의 우울. (3) >
12월 7일.
챔피언스 리그, B조의 길고 길었던 대장정이 마무리되는 날.
드디어 최후의 결전이 당일로 찾아왔단 말이다.
B조에 속한 4개의 팀은 최후의 결전에 앞서 서로 다른 상황에 부닥쳐있었다.
먼저, 1위, 포츠머스는,
-무승부만 거두어도 16강! 토너먼트 진출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굳건히 조1위를 유지하며 16강 진출에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100명의 전문가 중 90명이 넘는 사람들이 포츠머스의 진출을 점칠 정도였다.
그리고 2위, 파리 생제르맹은,
-자력 진출을 위해서는 무조건 승리가 필요하다.
-1차전의 굴욕을 갚아 주겠다.
포츠머스와 승점 8점으로 같지만, 승자승 원칙에 따라 2위로 밀려났다.
바이에른 뮌헨과 AS 로마의 경기 결과에 따라 비기거나 져도 16강에 진출할 수 있지만, 소위 ‘안전빵’으로 진출하려면 무조건 이겨야 했다.
덤으로 포츠머스에 대한 복수심까지 철철 흘러넘쳐, 누구보다 승리를 원했다.
3위인 바이에른 뮌헨.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이기면 끝.
별다른 특이점은 없다.
그저 무조건, 한 골이든 두 골이든 몇 골이든 상관없이 그냥 이기면 올라간다.
하지만, 원정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기란 원래 어려운 법.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4위인 AS 로마.
-16강 탈락 확정.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유로파 리그라도 진출해야 한다.
탈락이 확정된 AS 로마가 쉽게 경기를 내어주지는 않을 예정이다.
바이에른 뮌헨에 승리한다면 무려 3위를 달성하게 되고, 이것은 즉, 유로파 리그 토너먼트에 진출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래저래 재정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AS 로마가 코 묻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유로파 리그 진출을 굉장히 원한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요약하자면, 포츠머스는 제법 여유가 있었고, 나머지 세 팀은 무조건 이겨야 하는 상황이다.
과연, 어느 팀이 역사에 손꼽을 지옥의 조에서 살아남을지 축구계의 모든 이목이 12월 7일에 쏠렸다.
***
“공을 질질 끌어라. 여차하면 푸르디푸른 우리 집의 잔디를 마음껏 피부로 느껴도 된다.”
소하는 경기 시작에 앞서 선수들에게 ‘약한 침대 축구’를 명했다.
물론, 이란 국가대표팀처럼 바람만 불어도 드러누워 엄마를 찾으란 소리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적당한 충격이 있을 때 넘어지란 말이야. 그리고 최대한 볼 점유율에 신경 쓰는 걸 잊지 말고.”
솔직히 소하의 축구 철학과는 억만 광년 떨어진 지침이었다.
포츠머스는 언제나 최단 시간에 공을 전방으로 보내 슛으로 연결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고, 무승부만 거두어도 되는 상황 아니던가.
조쉬 킹만 멀쩡했다면 ‘조쉬 킹-에링 홀란드-모하메드 살라’ 라인으로 적극적으로 파리 생제르맹을 억제했겠지만, 그저 가정일 뿐이다.
꿈을 위해 ‘신념’ 한번 꺾어주는 융통성을 발휘한 소하였다.
“뭐···. 잘못된 신념은 아집이니까. 이번 경기는 어떻게든 무난히 넘어가야 한다.”
그리 어려운 임무도 아니다.
그냥 ‘홈’에서 ‘무승부’만 거두어도 16강 진출이다.
무리할 필요도 없었고, 할 능력도 없었으며, 해서도 안 됐다.
해서, 포츠머스는 꽤 무게중심을 뒤로 물린 대형을 가지고 왔다.
[GK-페트르 체흐.
LB-앤디 로버트슨.
CB-케빈 도슨.
CB-찰스 말로리.
RB-매튜 다이스.
DM-칼빈 필립스.
LM-조쉬 킹.
MC-데클렌 라이스.
MC-델리 알리.
RM-모하메드 살라.
ST-에링 홀란드.]
기존에 사용하던 4-1-2-3, 혹은 4-3-3에서 4-1-4-1로 양쪽 윙포워드를 내렸다.
어디까지나 표기상은 미드필더였지만, 미드필더보다는 반 칸 위, 기존의 포워드보다는 반 칸 아래로 조정한 오묘한 자리다.
이것은 평상시보다 조금 더 점유에 치중하겠다는 소하의 의지 표명이었다.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파리 생제르맹의 우나이 에메리 감독은 포츠머스의 선발 명단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소하의 전략이 얼추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부상과 조쉬 킹의 좋지 못한 모습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승리가 필요한 우나이 에메리 감독에게는 정말 호재 중에서도 호재였다.
소하와 사전 전술 대결에서 승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우나이 에메리 감독!
그렇다면, 포츠머스를 깨부술 매우 공격적인 전술을 가져올 확률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우나이 에메리 감독은 그렇게 단순한 감독도 아니었고, 그리 만만한 감독도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현시대에서는 ‘매우’ 뛰어난 감독이었다.
세비야 FC에서 이룬 유로파 리그 3연패라는 위업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업적이 아니었으니까.
2중, 3중으로 전략을 준비했고, 그렇게 해서 나온 선발 명단은 다소 평이했다.
일단 겉보기에는 말이다.
[GK-케빈 트라프.
LB-레뱅 퀴르자와.
CB-마르퀴뇨스.
CB-치아구 시우바.
RB-다니 알베스.
DM-티아고 모따.
MC-마르코 베라티.
MC-지오바니 로셀소.
LW-네이마르.
RW-킬리앙 음바페.
ST-에딘손 카바니.]
옆집 초등학생, 철수라도 예상하기 쉬운 명단으로 6차전을 맞이했다.
그래도, 부상하나 없고, 쉬운 리그인 덕분에 모두 체력적으로 펄펄한 상태다.
이래저래 포츠머스보다는 훨씬 좋은 선수단임에는 부정할 여지가 없다.
“전반 초반은 우리도 천천히 합니다.”
우나이 에메리 감독은 공격보다는 중도는 택했다.
꽤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초장부터 힘을 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포츠머스는 우리의 체력을 빼려고 할 텐데, 거기에 장단을 맞춰줄 필요는 없다.”
초반부터 공격하느라 힘을 쭉 빼버리면 시시각각 바뀔 상황에 유연하기 대처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바이에른 뮌헨과 AS 로마의 경기 진행에 따라 팀의 형태를 유연하게 바꾸기 위한 책략이었다.
게다가, 우나이 에메리 감독은 원래 빠른 템포의 공격축구를 구사하지 않는 감독이기 했다.
수비가 우선이고, 공격은 뒷순위인, 단단한 경기를 좋아하는 감독이다.
다만, 공격적인 스타 플레이어가 넘치는 파리 생제르맹에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하여튼, 경기 시작부터 감독들 간의 치열한 지략싸움이 벌어지는 챔피언스 리그 B조의 마지막 경기.
-삑!
이제 막, 시작의 호루라기 소리가 프래튼 파크와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동시에 울려 퍼졌다.
***
경기 초반은 양 팀의 감독들이 원하던 그림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얼른 보면 조금 지루한 양상이었지만, 경기의 무게 때문인지 지켜보는 이들은 긴장감이 흘러넘친다.
“···파리 생제르맹이 꽤 조심스럽게 접근하는군요. 감독님.”
밀러가 원했던 그림으로 경기가 진행되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적당히 간 좀 보겠다는 거죠. 괜히 나대다가 한 대 얻어맞으면 진짜 결딴날 테니까요.”
이겨야 하는데 선제골을 실점한다?
그대로 침몰한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저 깊은 심해를 향해서 말이다.
“아마 당분간은 계속 이런 고착상태를 유지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다면 조금 더 파리 생제르맹의 공격진들을 조심해야겠군요. 역습만 조심하면 우리로서는 괜찮은 상황이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런 의미로 다시 한번 애들한테 주의를 환기해야겠네요.”
소하는 밀러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인 뒤 버럭 소리친다.
“역습을 조심하라! 내가 할 일보다는 상대가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라!”
벼락같은 노호성!
중계방송에도 들릴 만큼 커다란 음성에 선수들도 조금 더 조심스럽게 경기를 운영하기 시작한다.
“좋아. 잘하고 있어.”
선수들의 즉각적인 반응에 흡족하다는 미소를 짓는 소하. 진지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심유하게 주시한다.
그리고 경기는 덕분에 더더욱 지루하게 이어진다. 평상시에 비하자면 매우 느린 속도의 경기다.
오직 같은 속도를 뽐내는 것은 시간이었을 뿐.
째깍.
째깍. 째깍.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전반 30분이 되었다.
양 팀의 슈팅 숫자는 3:2.
유효 슛은 없다.
점유율은 포츠머스가 57%로 근소하게 앞서나가며 천천히 경기를 주도하는 중이다.
“슬슬 파리가 조금 앞으로 나올 시간이 된 거 같은데···.”
어차피 이대로 나간다면 포츠머스로서는 대환영이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골을 넣어야 하는 처지는 파리 생제르맹이었고 계속 이런 경기를 유지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마침, 경기장에 이변이 생겼다.
프래튼 파크에서 벌어진 이변은 아니었다.
같은 시각, 저 멀리 2,000KM 밖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AS 로마의 경기가 펼쳐지는 중인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이변이 터졌다.
“감독님! 바이에른 뮌헨과 AS 로마의 경기에서 골이 터졌다고 합니다!”
“네? 어디가 넣는데요?”
“AS 로마가 넣었다고 합니다! 에딘 제코가 멋진 헤더 선제골을 넣었다고요!”
소하의 부탁으로 포츠머스의 경기보다는 로마의 경기를 지켜보던 밀러가 얼굴에 웃음꽃을 만개하며 희소식을 전했다.
“그렇지! 에딘 제코! 거친 동유럽에서 자란 상남자 중에서도 상남자!”
밀러가 가져온 희소식에 소하도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AS 로마가 바이에른 뮌헨을 이겨준다면 져도 16강 진출이기 때문이다.
“좋아, 거의 다 됐어.”
16강이 슬쩍 어른거린다.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라니.
4년 6개월 전만 해도 그냥 막연한 먼지 같은 꿈이었거늘. 이제는 생생한 두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게다가 희소식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에딘 제코의 선제골 소식이 들리고 나서 4분 뒤. 또다시 낭보가 터졌다.
“으아아아! 감독님! 스테판 엘샤라위가 23M 거리에서 직각으로 휘어지는 감아차기로 원더골을 뽑아냈답니다!”
“뭐, 뭐라고요?! 으아아아!”
소하와 밀러는 환호하며 껴안으려다가 아직 경기중인 탓에 눈치가 보여, 두 손을 꽉 마주 잡았다.
AS 로마의 분투!
이것은 포츠머스와 파리 생제르맹이 이 경기와는 관계없이 16강 진출을 확정 지을 확률을 극적으로 높여줬다.
슬쩍.
소하는 애써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저 멀리, 우나이 에메리 감독을 훔쳐봤다.
“···.”
마침 우나이 에메리 감독과 눈이 마주쳤고, 눈이 마주친 두 감독은 동시에 작은 썩은 미소를 지었다.
-히죽.
많은 의미가 내포된 미소였다.
굳이 설명하자면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밀고 당기다가 이대로 같이 손잡고 16강에 진출하자는 뜻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파리 생제르맹은 득실 차로 밀려서 2위로 진출하겠지만 말이다.
“후후. 아저씨. 저 방금 우나이 에메리 감독과 무언의 평화협정을 맺었거든요?”
“네? 그게 뭔 자다가 조쉬 킹이 옥스퍼드에 합격했다는 소립니까?”
“···하여튼 그런 게 있어요.”
“···수상한데요. 이대로 비기면 조 2위잖아요. 1위로 진출해야 토너먼트 대진을 유리하게 받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하지만, 우리랑 득실 차가 3점이나 나요. 그냥 올라가는 상황에서 3점 이상을 넣으려고 무리를 할까요?”
“그건 아니죠.”
밀러는 즉각 이해했다.
포츠머스와 파리의 득실 차는 3.
즉 3골은 넣어야 동률이 된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다.
득실까지 같으면 다득점을 보기 때문에, 1차전에 6골이나 때려 넣은 포츠머스가 우위다.
“무조건 4골을 넣어야 하는데···. 우리가 4골을 허용할 만큼 멍청이가 아니거든요.”
“그렇죠. 시간도 어느덧 전반전이 끝나가고요. 그럼 45분 동안 라인을 끌어올려 4골을 넣어야 하는데···. 어렵죠.”
포츠머스를 상대로,
프래큰 파크에서,
4골 이상을?
이걸 달성한 구단은 지난 4년 6개월 동안 토트넘밖에 없다.
요컨대, 괜히 무리하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AS 로마가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게 훨씬 쉽고 확실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한 가지밖에 없네요.”
“뭐, 선수들의 방심을 억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단단히 훈육하겠습니다!”
밀러가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상당히 믿음직한 수석코치의 관록이 보인다.
하지만 소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엥?”
멍청하게 되묻는 밀러.
이 상황에서 방심 말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린 지금부터 교황청을 향해 기도를 올려야 할 시간이에요.”
몸을 돌려 저 멀리 이탈리아를 향해 기도를 바치는 소하. 그 모습에 밀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님. 그쪽은 서쪽입니다···.”
소하의 놀라울 정도의 나쁜 방향감각이 그저 한심한 밀러였다.
< 220화. 그 남자의 우울.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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