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그 남자의 우울. (1) >
“으아아아아!”
“해냈다! 해냈어!”
“후라!”
“진짜 힘든 경기였다.”
“16강 가자!”
파리 생제르맹과 AS 로마의 B조 5차전이 끝나고, 파리 생제르맹의 선수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파리 생제르맹! 정말 힘든 경기를 정말 기적을 일으켜 승리합니다!]
[이로서 16강에 이르는 길을 스스로 열었어요!]
전반전에만 0-2으로 밀리던 경기를 후반전에만 3골을 몰아넣으며 3-2로 역전한 파리 생제르맹!
선수들은 물론이고 서포터들도 울부짖을 만큼 대단한 경기를 선보였다.
“결국 6차전이 엄청 중요해졌네.”
“최악의 상황에는 3팀 승점 동률이 나오겠어···.”
다만 이 승리로 굉장히 복잡해진 16강 진출팀에 대해서는 절로 머리를 쥐어짤 수밖에 없어졌다.
[1위. 포츠머스 FC. 8점.
2위. 파리 생제르맹 FC. 8점.
3위. FC 바이에른 뮌헨. 6점.
4위. AS 로마. 4점.]
파리 생제르맹의 승리로 1위는 포츠머스가 차지하게 되었다.
승점은 포츠머스와 파리가 같지만, 승자승 원칙으로 포츠머스가 1위를 차지한 상황.
6차전에서 파리와 포츠머스가 무승부를 거두고 바이에른 뮌헨이 AS 로마를 이긴다면 세팀이 모두 승점 9점이 된다.
게다가 16강 탈락이 확정된 AS 로마가 마지막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에서 동기부여가 힘들다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한 일.
즉, 삼자 동률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아졌다는 이야기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되나요? 포츠머스와 파리 간의 상대 전적은 포츠머스가 우위고, 포츠머스와 바이에른 뮌헨과의 상대 전적은 바이에른 뮌헨이 위이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게 된 궁금증이었다.
더욱 계산을 어렵게 하는 요소는, 파리와 바이에른 뮌헨의 상대 전적은 2무로 똑같다는 점!
굉장히 난해한 상황이었다.
“이럴 땐 맞대결 승점을 봐야 합니다.”
“맞대결 승점이라면···?”
“먼저 포츠머스는 파리 생제르맹과 1승 1무로 승점 4점. 여기에 바이에른 뮌헨과 1무 1패로 승점 1점입니다. 합쳐서 5점이죠.”
“네.”
“그리고 파리는 포츠머스와 1무 1패, 바이에른 뮌헨과 2무로 승점 3점입니다. 바이에른 뮌헨은 포츠머스와 1승 1무, 파리와 2무죠. 합쳐서 6점입니다. 즉, 1위는 6점을 달성한 바이에른 뮌헨이, 2위는 승점 5점인 포츠머스가 차지하게 된다는 겁니다.”
괜히 챔피언스 리그의 조별리그 규정이 자세한 것이 아니었다.
삼자 동률!
이런 상황은 꽤 자주 나왔고, 대표적으로는 13-14시즌의 F조, 아스널, 도르트문트, 나폴리도 맞대결 승점으로 희비가 엇갈린 전적이 있었다.
“즉, 동률이 된다면 파리 생제르맹은 망한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기려고 할 거다.”
소하는 쉽게 예상했다.
얼핏 보면 포츠머스와 파리가 무승부작전으로 나올지도 몰랐지만, 뜯어보면 전혀 아니란 말이었다.
파리 생제르맹으로서는 괜히 바이에른 뮌헨이 지거나 비기길 기도하면서 무승부를 노린다면 큰 사고가 날지도 몰랐다.
자력 진출을 위해서라면 일단은 이기고 봐야 한다.
게다가 파리 생제르맹은 스타 출신이 많은 만큼 자존심이 강했다.
1차전에서 포츠머스에게 당한 참패를 복수하기 위해 이를 단단히 갈기에 이르렀다.
“그날의 굴욕···. 제대로 갚아주마.”
“다 떠나서 명예 회복이 우선이다.”
“박살을 내주마.”
부득부득 이를 갈며 다가올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기다리는 파리 생제르맹의 스타 선수들.
이런 상황에서 포츠머스는 최소한 무승부만 거두어도 16강 진출이었기에, 모두가 소하의 머릿속에 눈과 귀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
세간이 연이어 쉬지 않고 챔피언스 리그 B조의 미래에 대해서 떠들 때쯤.
12월 7일에 시작될 운명의 최종전보다는 과거의 경기에 사로잡힌 한 남자가 포츠머스에 있었다.
“···.”
늘 밝고 쾌활하던 모습은 저 멀리 화성에 던져두고 수심에 젖은 남자!
바로, 조쉬 킹이었다.
-아! 조쉬 킹의 페널티킥 실축으로 포츠머스가 승리를 놓쳐버립니다!
-10초만 더 버텼으면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을 텐데요!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그 날의 해설은 조쉬 킹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광하는 조쉬 킹.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이 전쟁을 끝내러 왔다’라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떠올릴 때마다 모든 걸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이 밀려오는 그였다.
“야야. 괜찮다니까.”
“어차피 골도 네가 거의 다 만든 거였잖아. 신경 쓰지 마.”
“경기하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거지.”
평상시에는 그토록 짓궂은 동료들이었거늘. 이번만큼은 너 나 할 거 없이 조쉬 킹을 위로해줬다.
솔직히 누구나 다 조쉬 킹같은 실수를 하지 않던가. 심지어 기적적인 승리를 꿈꿀 수 있었던 이유도 조쉬 킹 덕분이었다.
하지만, 조쉬 킹은 이러한 동료들의 위로에도 쉽사리 얼굴을 풀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제각기 다른 법이었으니까.
같은 일이라도 누구에게는 사소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갈 일이기도 하지 않던가.
조쉬 킹에게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는 압도적으로 후자에 속했다.
“···안 되겠다. 우리로서는.”
“가자. 해결사에게.”
“결국 치트를 써야겠네.”
자신들의 위로가 조쉬 킹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자 몇몇 선수들은 큰마음을 먹고 옹기종기 모여 클럽하우스의 한 사무실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포츠머스의 클럽하우스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곳!
포츠머스의 선수들이라면 가장 꺼리는 장소!
포츠머스 FC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그곳의 주인이 계단이 싫다며 1층에 자리 잡은 그 장소!
바로, 감독 사무실이었다.
-꿀꺽.
마른침을 내 삼키는 선수들.
솔직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독 사무실에 스스로 찾아갈 거라는 상상은 먼지 한 톨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마왕, 그것도 피와 살점을 즐기는 흉포한 대마왕이 서식하는 장소에 그 누가 머리를 들이밀고 싶겠는가.
“후우···. 그래도 킹을 어떻게든 해야 하니까.”
너무나도 무섭고 흉측한 장소였지만 동료를 위해서라면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선수들이었다.
다르게 보면, 소하의 사무실을 찾을 만큼 킹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똑똑.
떨리는 손으로 감독 사무실의 문에 노크한 선수는 칼빈 필립스였다.
소하가 필요하다고 가장 먼저 입에 담은 덕분에 졸지에 팔자에도 없던 용사파티의 리더가 된 그였다.
“들어오세요.”
비서가 퇴근한 시간이라 이윽고 소하의 내방 허락이 떨어졌고, 꽤 밝아 보이는 목소리에 칼빈 필립스와 일당들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하지만,
“뭐야? 너희가 여길 왜 찾아와?”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온 모습에 소하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자 절로 오금이 굳어버렸다.
“어···. 저···. 그게···.”
“이 새끼들이 드디어 단체로 항명을?!”
제대로 말을 떼지 못하자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고리눈을 뜨는 소하!
이대로 가다간 본전도 찾지 못할 거라는 위기감에 칼빈 필립스는 간신히 말문을 뗀다.
“조, 조쉬 킹 때문에요!”
짧은 말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용기가 들어있는지, 칼빈 필립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모를 거다.
그리고 그 용기는 바로 합당한 보상을 가져왔다.
“오호. 킹 때문이라고? 일단 얘들아, 앉자. 차라도 한 잔씩 줄까?”
흉신악살이 따로 없는 도깨비의 형상에서 온화한 천사의 모습으로 순식간에 바뀐 소하는 천천히 냉장고 문을 열어 냉차를 꺼내었다.
***
-호로록.
-후루룩.
-쪼르륵.
선수들이 찾아온 지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소하의 감독 사무실에는 차를 마시고 따르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묘한 긴장감에 소하를 제외한 모두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지만, 소하의 대단한 차공력 덕분에 차는 끊임없이 마셔댄다.
“···얘들아···. 혹시, 킹이 핑계를 대고 내 차를 동강 내려고 온 거니?”
매일 우려먹기 귀찮아 페트병에 잔뜩 우려둔 냉차가 동이 나자 소하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 아니에요. 먼저, 말씀하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번에도 칼빈 필립스가 대표로 나서서 변명했다.
“아니지. 너희가 찾아왔으니 너희가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니?”
“···그, 그렇죠.”
반박이 존재할 수 없는 소하의 정론에 칼빈 필립스는 찻잔을 내려두고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다.
“킹이가 이상해요.”
조쉬 킹이 이상하다.
정말 큰 문제의 냄새가 났지만 소하는 대수롭지 않은 듯 시큰둥하게 되묻는다.
“걘 원래 이상하잖아?”
“···그, 그게 아니라···.”
“알아. 나도.”
“네?!”
“농담한 거라고. 걔 바이에른 뮌헨 경기 이후로 좀 맛이 갔잖아.”
선수들이 눈치챈 이변을 소하가 모를 리가 있겠나. 이미 옛 저녁에 파악한 상태였다.
“내가 아무리 무승부에 만족한다고 하더라도 페널티킥을 놓친 녀석에게 소리 한번 안 지르고 넘어간 게 이상하지 않았니?”
“···그, 그렇죠.”
칼빈 필립스를 비롯한 선수들은 소하의 질문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소하가 어떤 인간인가.
평상시 같았으면 사돈의 팔촌까지 끌고 와 온갖 욕을 다했을 거다.
“그렇다면, 이미 킹이 이상해질 거 같아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신 거였나요?”
“당연하지. 평상시 같았으면 진짜···. 후···. 말을 말자.”
소하는 목덜미를 거칠게 주무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 쌍···.’까지 목구멍에서 튀어나왔지만 조쉬 킹의 시커멓게 죽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던 그때를 말이다.
‘어지간해서는 선수 눈치는 보지 않지만 그건 좀 심했지.’
조쉬 킹은 흑인 혼혈이다.
진짜배기 아프리카 사람처럼 엄청 새까맣지는 않지만, 아무튼 흑인이란 말이다.
그런 그가 더욱 까맣게 변한 모습은 튀어나오던 욕이 절로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놈과 15년···이 아니라, 5년 가까이 봐왔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더라고. 이 몸으로서도 뭐라 하지 못할 만큼 말이야···.”
소하가 당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칼빈 필립스는 이때다 싶어 열렬히 호응한다.
“맞아요. 라커룸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계속 얼굴이 썩어있었어요. 그리고 벌써 3일이나 지났는데도 그대로라 저희가 찾아온 거예요.”
동료들이 진단한 조쉬 킹의 상태는 간단하게 한 줄로 요약되었다.
‘웨이트도 하지 않는다.’였다.
알다시피 조쉬 킹은 아다마 트라오레와 더불어 알아주는 근력운동 중독자이다.
삼시 세끼 밥보다 근력운동과 그 후에 마시는 단백질 보충제를 세상 최고의 진미로 여기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근력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정말로 큰일 났다는 거다.
하지만 의외로 소하는 칼빈 필립스의 열렬한 진단에도 불구하고 겨울잠이 덜 깬 독두꺼비처럼 볼을 부풀리며 느긋하게 되묻는다.
“그거랑 너희가 날 찾아온 거랑 뭔 상관인데?”
“···네?”
잠시 뇌가 정지된 칼빈 필립스. 하지만 그는 머리가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곧장 머리를 굴려 소하가 원하는 해답을 내놓는다.
“그야···.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감독님밖에 없으니까요!”
보통 대답이 아니었다.
100%. 아니, 200% 이상을 만족시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해답이었다.
“!!”
저, 소하의 부릅뜬 두 눈을 보라. 좀 전까지 나태한 곰 같던 모습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화사하게 반짝반짝 빛이 난다.
“후, 훌륭한 대답이었다. 역시 넌 내가 가장 아끼는 녀석이야. 칭찬을 골백번 해도 아깝지 않아···.”
칼빈 필립스의 머리를 쓰다듬는 소하의 손길은 자애의 여신의 손길이 따로 없을 정도!
어찌나 부드럽던지 애 취급을 당해 기분이 나쁠법한 칼빈 필립스의 표정이 풀려버리기까지 했다.
“훌륭한 제자가 더욱 훌륭한 스승에게 부탁하는데 1억% 만족시켜줘야겠지. 걱정하지 말아라. 이미 계획을 다 세워뒀으니까.”
사실 이미 계획은 다 세워뒀다.
어차피 하는 일이긴 했지만, 이렇게 입에 발린 소리라도 들어야 남는 게 있지 않겠냐는 짓궂은 장난이었을 뿐이었다.
“역시! 믿고 있었어요. 감독님은 언제나 계획이 있으시군요.”
“그럼.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말고 다음 경기랑 훈련에 집중하도록.”
“넵!”
소하가 걱정하지 말라면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포츠머스의 진리 아니던가.
선수들은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꾸벅 인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잠깐.”
잠시 선수들을 멈춰 세운 소하.
순간, 불안감에 휩싸인 선수들을 무시하며 계속 궁금하던 점을 묻는다.
“아니···.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필립스는 그렇다 쳐도, 나머지는 왜 온 거냐? 말은 필립스 혼자 다 했는데. 그냥 차만 마시고 가네?”
뜨끔!
칼빈 필립스의 등 뒤에 숨어있던 델리 알리, 존 말로리, 앤디 로버트슨, 아다마 트라오레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딱히 내놓을 변명이 없었고, 이들이 선택할 길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맛있는 저녁 드시길 바랍니다!”
“항상 건강 챙기십시오!”
“집에 일이 생겼다네요.”
후다닥.
다시 한번 직각 인사를 넙죽 날리고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맞다. 도주였다.
“···그,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소하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지자 칼빈 필립스도 은근슬쩍 사라졌고, 어느새 감독 사무실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남았다.
“···.”
선수들이 사라진 방향을 묵묵히 바라보는 소하.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뒤틀린 미소가 걸려있다.
“···삼십육계, 주위상계를 사용하다니···. 그래, 줄행랑을 썼다, 이거지···? 찻값은 언젠간 톡톡히 받아내 주마.”
비어버린 찻병을 바라보며 스산하게 읊조리는 소하였다.
< 218화. 그 남자의 우울. (1) > 끝
ⓒ 블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