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17-18시즌 챔피언스 리그. (15) >
소하의 전술 지시는 선수마다 각기 달랐다.
당연한 일이다.
한 학급의 학생이 모두 같은 성격과 지능, 개성을 가진 것이 아니듯이, 축구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소하는, 예를 들어 머리가 좋은 선수들인 칼빈 필립스나 케빈 도슨 같은 선수들에게는 굉장히 세세한 전술 지시를 내렸다.
-압박범위는 5m 이내, 약발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니까 어깨를 조금만 움직여줘도 진로를 제어할 수 있다.
-서전트 점프를 0.5초 정도 늦게 뛰어도 괜찮다. 그 시간에 조금 더 좋은 자리를 선점해도 좋아. 네 신장이 4.3cm 정도 크니까.
-삼각 패스를 할 때는 항상 각도를 신경 써라. 30도에서 50도 사이가 좋아. 물론 상대 선수의 위치에 따라 유동적이다.
-네가 전진 드리블을 시도할 때 고려할 사항은 총 네 가지다. 먼저 하나는···.
등등. 초 단위, cm 단위, 각도까지 고려해서 정말 자세한 지시를 내렸다.
괜히 괴짜 중의 괴짜임에도 선수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는 몸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머리가 나쁜 조쉬 킹이나 아다마 트라오레 같은 선수들에게는 눈높이를 상당히 낮추었다.
-녀석을 죽여!
-뭉개버려!
-넌 폭주 기관차야! 앞으로 달려라!
-이 지역은 너의 나와바리야. 이곳을 탐내는 다른 조직원들을 그냥 내버려 둘 셈이야?
-돌격해라!
등등. 지시인지 고대의 야만인 부족장의 돌격 명령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효과는 아무튼 좋았다.
마치 S대 법학과를 나온 엘리트와 초졸 깡패를 오가는 소하의 모습.
이 변화무쌍한 눈높이 조절이야말로 개성 넘치는 선수단을 하나의 팀으로 만든 소하의 능력이었다.
하여튼, 이번 경기에서 소하가 조쉬 킹에게 내린 지시 또한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조쉬 킹은 많은 걸 머릿속에 때려 넣는다고 흡수하는 인간이 아니지 않던가.
그냥 하던 대로 하길 간절히 바라며 두 가지 주문만을 했다.
-상대 중앙수비수를 제압해라!
-슛이랑 드리블을 ‘아주 많이’ 해서 골을 넣어라!
매우 간단한 두 가지 명령!
고작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지시로 제대로 된 움직임을 하겠냐는 의문이 들지만, 놀랍게도 평소에는 한 가지뿐이었다.
조쉬 킹을 찬양하는 팬들에게는 정말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다.
하여튼, 평소보다 두 배의 달하는 주문을 받은 조쉬 킹.
무리가 아닐까 싶었지만, 전반 16분 만에 완벽히 임무에 성공했고 경기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는 주범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
행운의 골!
두 뛰어난 감독의 지략을 비웃는듯한 신의 장난질에 잠잠했던 경기는 들썩이기 시작했다.
먼저, 바이에른 뮌헨의 유프 하이켄스 감독은 ‘정도’를 밀고 나가던 평정심이 깨졌다.
‘···이건 좋지 않다.’
전반전 이른 실점.
그것도 어처구니없는 불운의 실점.
이것은 분명히 선수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칠 거다.
아무리 ‘강자의 품격’을 지닌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들이라도 조급해질 수밖에 없단 이야기였다.
‘게다가 우리는 지면 안 된다.’
이번 골로 현재 챔피언스 리그 B조의 상황은,
[1위. 포츠머스 FC. 10점.
2위. FC 바이에른 뮌헨. 5점.
3위. 파리 생제르맹 FC. 5점.
4위. AS 로마. 4점.]
이렇게 변해버렸다.
만약, 내일 있을 파리 생제르맹과 AS 로마의 경기에서 파리가 이긴다면 순식간에 16강 진출에 적신호가 들어온다.
심지어 파리는 비기기만 해도 승점 1점을 앞서나가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가 져버리면 포츠머스는 16강 진출을 확정 짓는다. 즉, 2위를 두고 우리와 파리가 경쟁하는 꼴인데···.’
양 팀의 상대 전적은 2전 2무.
승점이 같더라도 득실 차는 파리 생제르맹이 앞서는 상황이다.
‘좋지 않다. 그리고 선수들도 모두 알고 있을 터. 마음이 급해지겠지.’
준비한 전술은 평정심이었거늘.
전술을 이행하는 선수들이 평정심을 잃는다면 그냥 망한 전술이다.
그만큼 너무나도 빠른 실점은 정말 큰 문제였다.
물론,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역전할 기회가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은 포츠머스에게도 같이 주어진다.
즉, 포츠머스가 한 골을 더 넣고 2-0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1-0과 2-0.
그저 숫자로는 한 골 차이였지만 그 간격은 지구와 북극성의 거리만큼의 차이가 있는 점수 차이다.
1광년은 9,460,730,472,580.8km 아니던가!
그만큼 한 골 차이와 두 골의 차이는 다가오는 거리가 달랐다.
‘···결정을 해야 한다.’
인내심을 발휘할지, 불을 붙일지 엄청난 고민을 거듭하는 유프 하이켄스 감독.
그런 그의 눈에 마음이 조급해져 엉망진창으로 공격을 시도하는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들이 들어왔고, 이후의 결정은 쉬운 일이었다.
***
유프 하이켄스 감독과 바이에른 뮌헨에게 큰 고민을 안겨준 행운의 골.
이것은 그저, 바이에른 뮌헨에만 큰 고민거리를 던져준 것은 아니었다.
‘음···. 고민되는데?’
소하에게도 유프 하이켄스 감독만큼의 고민을 선사했다.
당연히, 방향성은 정반대였다.
유프 하이켄스 감독은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였다면,
소하에게는 이야기의 끝을 완성할 문제였다.
‘여기서 이기면 16강 진출 확정이다!’
승점 10점으로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 진출 확정!
정말 치명적이면서도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정말 욕심난다.’
만약 이긴다면.
정말 만약에 이겨버린다면.
승점 10점으로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의 결과에 상관없이 무조건 16강 진출이다.
심지어 저 하늘의 짓궂은 신은 16강에 올라가라며 등을 떠밀기까지 한 상황이지 않은가.
소하가 아니라, 부처님이 와도 욕심이 무럭무럭 자랄 수밖에 없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이길 수 없다]라는 상수가 이리도 쉽게 깨질 줄이야.’
그 누구도 예상하기 불가능했던 기회가 찾아왔다.
‘게다가 기존의 계획을 계속 밀고 나가기엔 애매해졌다.’
소하의 원래 계획은 이랬다.
선수비 후역습으로 일관하며 바이에른 뮌헨의 체력을 쪽쪽 빨아먹은 뒤,
벤치에서 대기 중인 모하메드 살라, 아다마 트라오레, 에링 홀란드라는 세 명의 돌격대장을 한낮 한시에 모두 투입해 한 골을 따내는 전략이었다.
세 선수 모두 피지컬과 속도는 세계 최정상급이었기에 충분히 통할만 한 꿍꿍이다.
하지만, 행운의 골은 기존의 계획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예상보다 훨씬 빠른 타이밍에 기어를 올리겠지. 그리고 아쉽게도 우리 팀은 그걸 버텨낼 재간이 없다.’
소하의 객관적이고 매우 확실한 평가였다.
포츠머스의 수비 실력은 딱, ‘바이에른 뮌헨이 적당히 공격하는 수준을 적당히 막는 정도’였으니까.
이런 어정쩡한 실력을 가진 상황에서, 바이에른 뮌헨이 체력이 떨어지기도 전에 기어를 확 올려서 맹렬히 공격한다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이 불 보듯 뻔히 보였다.
애초에 생생한 바이에른 뮌헨의 맹렬한 공격을 무조건 막을 수 있다고 자신할 팀은 전 세계를 뒤져봐도 아예 없지 않은가.
이래저래 이대로 기존의 계획을 밀고 나가기엔 위험부담 또한 컸다.
‘이건, 그래, 기호지세다.’
기호지세!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탄 격!
이미 미친 듯이 질주하는 호랑이의 무등에서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탄다면···. 한 번쯤 탭댄스를 추고 싶긴 했어.’
본의 아니게 호랑이의 등에 타버린 소하. 결국 오래 전부터 바라왔던 탭댄스를 추기로 하는 순간이었다.
***
양 팀의 전술적인 변화는 행운의 골 이후, 10여 분 뒤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말이다.
[포츠머스가 대형을 바꿉니다. 3백에서 4백으로 전환하는군요. 무슨 생각일까요?]
[마침 바이에른 뮌헨도 빠르게 리베리를 빼주며 킹슬리 코망을 넣는군요.]
바이에른 뮌헨의 변화는 평범한 축구팬이라도 쉽게 이해가 갔다.
이래저래 손발이 맞지 않으며 답답한 경기력을 쇄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츠머스의 변화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파장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뭐지? 미친 거야? 그냥 한 골을 지키면 이기는 상황에서 공격하려고?
-허 참. 축구를 30년이 넘게 봤는데 이건 새롭네.
-무슨 생각일까? 정말 한 번쯤 성소하 감독의 뇌를 파헤쳐보고 싶어.
-운이 좋게 얻어걸린 골에 자신감이 폭발한 걸까?
-기왕 앞선 상황에서 욕심을 부리는 거 같은데.
감독이 보는 풍경과 일반인들이 보는 풍경의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하여튼, 양 팀의 동시다발적인 변화는 싱거운 볶음밥에 타바스코소스를 뿌린 격이었고 경기는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어정쩡하고 어설프게 공격과 수비를 하던 팀들이 손에 익은 무기를 쥐고 공격 일변도로 나섰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반 27분.
공간의 연주자, 토마스 뮐러가 2차전의 골처럼 킹슬리 코망의 크로스를 멋진 헤더로 연결했다.
-텅!
페트르 체흐의 손끝에 걸리며 골포스트를 강타하며 기회가 날아갔다.
그리고 이것은 폭발적인 교향곡의 전주였다.
전반, 29분.
투톱에서 원톱으로 역할이 바뀐 마리오 발로텔리가 21m 거리에서 강렬한 프리킥을 시도.
-휘익!
상단 포스트바를 손가락 한 마디 차이로 스쳐 지나가는 멋진 프리킥을 선보였다.
이어서, 전반 32분.
로베르토 레반도프스키가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신체 컨트롤로 좋지 않은 로빙패스를 완벽하게 받아내는 데 성공.
그대로 예리한 슈팅으로 만들어냈다.
-팡!
톱스핀이 걸려 뚝 떨어지는 센스있는 로베르토 레반도프스키의 슛!
“읏차!”
아쉽게도 방향이 페트르 체흐의 정면이었고 쉽게 잡아냈다.
-휙!
그리고 이어지는 페트르 체흐의 빠른 던지기!
길쭉한 팔을 제대로 이용해서 앞으로 튀어 나가던 조쉬 킹의 앞으로 공을 배달해줬다.
[와! 페트르 체흐가 저런 던지기 능력을 보여주다니요. 좀처럼 보기 드문 모습입니다.]
[공 던지기의 달인, 마누엘 노이어 골키퍼가 속 좀 쓰리겠는데요? 멋진 패스에요!]
압도적인 선방 능력 말고는 스위퍼 키퍼로서 낙제점이던 페트르 체흐가 저런 던지기를 선보이다니.
아무래도 오늘의 포츠머스는 되는 날인가보다.
“아저씨, 나이스!”
순식간에 중앙선 너머로 날아간 공은 조쉬 킹이 날름 받아먹었고, 곧장 드리블을 시도했다.
목표는 마누엘 노이어 골키퍼가 지키는 바이에른 뮌헨의 골대!
옆에서 빠른 주력을 가진 수비수, 제롬 보아텡이 치켜들었지만, 제대로 속도가 붙은 조쉬 킹을 따라잡기엔 무리였다.
“젠장!”
엄청난 조쉬 킹의 돌격에 마누엘 노이어 골키퍼는 거친 욕설과 함께 앞으로 튀어나왔다.
아예 슛하지도 못하게 하려는 차징!
그러나, 조쉬 킹은 본능적으로 마누엘 노이어의 판단을 한발 앞질렀다.
-뻐어엉!
한 번 더 치고 들어갈 타이밍에 터진 강력한 중거리 슛이 조쉬 킹의 왼발에서 뿜어져 나왔다.
“??!!”
매우 당황하는 마누엘 노이어 골키퍼.
조쉬 킹의 왼발이라니.
이것은 마누엘 노이어의 데이터에는 없는 상황이었다.
오른발 의존도가 매우 높은 선수가 갑자기 반 박자 빠르게 왼발로 슛한다는 예측은 노이어가 아니라 노이어 할아버지가 와도 무리였다.
-터어어엉!
그대로 골망을 찢어발길 기세였던 조쉬 킹의 슛.
하지만 매우 아쉽게도 왼쪽 골포스트 바를 강타하며 골킥으로 변해버렸다.
반 박자를 빠르게 가져가기 위한 왼발이었지만 역시나. 숙련도가 너무 낮았고, 덕분에 슛의 궤적이 살짝 틀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정말, 소하와 포츠머스로서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경기에 불이 붙었습니다! 포츠머스와 바이에른 뮌헨, 바이에른 뮌헨과 포츠머스. 드디어 그들이 소문난 잔치에 먹거리를 왕창 가져다주는군요!]
[서로 슛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10분 전만 해도 지루한 경기를 하던 팀들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장내 해설과 아나운서의 말처럼 같은 경기와 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경기의 양상이 바뀌었다.
당연하게도 팬들도 들썩이며 좋아한다. 뭐가 됐든 화끈한 축구는 재미있는 법이지 않던가!
그리고 들썩이는 건 해설과 팬들뿐만이 아니었다.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오냐. 그동안 수비축구 하느라 욕구불만이었는데, 한번 풀어보자.”
양 팀의 선수들도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바이에른 뮌헨은 모처럼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투지를 불태웠고,
포츠머스는 그동안 수비축구 때문에 몸에 감아두었던 쇠사슬을 풀어헤치며 날뛰었다.
아주 제대로 붙을 준비가 끝난 양 팀의 모습!
진심이었는지, 양 팀은 이후로도 6번의 슈팅을 서로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삑! 삑!
어느새 울리는 전반전의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 선수들은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후반전을 준비하기 위해 라커룸으로 향했다.
< 216화. 17-18시즌 챔피언스 리그. (15)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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