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17-18시즌 챔피언스 리그. (13) >
“본좌는 기분이 좋지 않다. 그것도 아주 말이다.”
다음 날, 포츠머스의 아침 훈련.
소하는 약간의 숙취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근엄하게 선수들에게 통보를 날렸다.
“···?!”
“보우좌우?”
“뭔진 몰라도 일단 다물자.”
“흡. 숨 참는다.”
“일단 몸을 사려야 해.”
출근하자마자 귓가를 간지럽히는 살인 예고에 몸을 사리는 선수들.
소하가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직접 입 밖으로 ‘기분이 좋지 않다’라고 내뱉은 건 처음이지 않은가.
절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했다.
“···.”
살기 위해 딴청을 피우는 선수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소하. 살짝 부어오른 눈덩이가 아주 제대로 독이 오른 독두꺼비를 연상시킨다.
“큼큼. 너희들도 알다시피, 바이에른 뮌헨과 파리 생제르맹이 비겼다. 모르는 멍청이가 없을 거라 굳게 믿을게.”
역시나.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너무나도 뻔했다.
어제, 2-2 무승부로 마무리 지은 바이에른 뮌헨과 파리 생제르맹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 4차전이 문제였다.
“역시···.”
“저럴 줄 알았지.”
“그런데 왜? 비겼으면 좋은 거 아닌가?”
“뭔가 큰 그림을 보신 거겠지.”
소하의 퉁명스러운 말에 선수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이해를 완료한 선수.
이해를 완료하지 못한 선수.
제법 영특한 선수들이 많은 포츠머스인지라 전자의 비율이 높았지만, 후자도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후자의 대표주자는 당연하게도 AS로마전의 영웅, 조쉬 킹이다.
사실, 없었다면 오히려 아쉬울 판.
다만, 무식한 모습에 비해 호기심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저기요! 감독님. 도대체 왜 비겨서 좋지 않으신 거죠? 비긴 덕분에 우리는 승점 2점 차이로 앞서나간다고요! 수학에 약하신가? 혹시 문과?”
호기심 맹수의 발돋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궁금한 점을 돌직구로 물어봤다.
상당한 도발성 발언까지 섞인 급발진.
동료들의 한숨을 절로 불러일으켰다.
“···.”
“하아.”
“그냥 죽어···.”
기름, 아니, 흑색화약을 온몸에 뿌리고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간 격에 선수들은 절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와 동시에 더욱 좁아진 소하의 미간은 폭풍전야를 연상케 한다.
“흐음···.”
어떻게 이 작고 무식한 미어캣을 잡아먹을지 고민하는 사자 같은 소하의 미간 주름.
금방이라도 조쉬 킹을 물어뜯을 기세였지만, 실상은 매우 달랐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해? 2천 자가 넘는 텍스트를 풀어서 설명하기엔 귀찮고···.’
그저 귀찮았다.
경우의 수를 구구절절 읊는 건 시간 낭비 아니던가. 더군다나 지금은 수년 만에 마신 알코올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
그래서인지 소하는 쉬운 길을 선택했다.
“아무튼 좋지 않다.”
“알겠슴다!”
정말 성의 없고 단순무식한 답변과 그를 뛰어넘는 호쾌한 납득이 하모니를 이루었다.
소하야 그렇다 치더라도 질문을 던진 조쉬 킹은 이런 성의 없는 대답에 진심으로 이해한 눈치다.
왜 질문을 던진 건지 모를 정도의 반응.
뭐, 좋게 보자면 그만큼 소하의 대한 믿음이 크다고 볼 수도 있겠다.
“크음. 하여튼, 우리는 이제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가 매우 중요해졌다.”
조쉬 킹에게 눈길을 거둔 소하가 목덜미를 주무르며 천천히 선포했다.
바이에른 뮌헨!
이 단어가 소하의 입에서 나오자 선수들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최강. 진짜 잘하더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솔직히 두렵다.’
‘백번 싸우면 한 번은 이길 수 있을까?’
‘어려운 경기가 될 거야.’
모처럼 선수들에게 두려움이란 감정이 일렁였다.
한 달 전, 챔피언스 리그 조별 2차전.
2-1로 아쉽게 패배했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강력함을 온몸으로 느낀 포츠머스였다.
체력적으로 수세에 몰렸던 상황이었지만, 컨디션은 유달리 좋아 가진 실력 이상을 보여줬었고 더군다나 홈이었다.
포츠머스의 홈구장 프래튼 파크.
한 시즌에 이곳에서는 채 다섯 번도 패배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홈 버프’를 받는 포츠머스가 아니던가.
최고의 컨디션.
압도적인 홈 버프.
이 두 가지에 소하의 뛰어난 지략까지 버무렸음에도 져버렸던 상대가 바이에른 뮌헨이다.
자연스럽게 두꺼운 벽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선수들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쉽게 가려고 했었다. 뮌헨은 강하니까.”
소하는 두려운 기색이 역력한 선수들에게 공감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5차전을 버리고 리그에 집중한 뒤에 6차전에 모든 것을 걸려고 했지.”
바이에른 뮌헨과의 원정경기를 던져버리고 내실을 다지려고 했던 기존의 계획.
하지만, 파리 생제르맹과 바이에른 뮌헨이 비겨버리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우리는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에서 최소한 ‘무승부’를 거두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
입석 포함 75,024석,
모든 자리 좌석화, 70,000석의 초거대 축구 경기장이다.
경기장 외벽의 색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전 세계 유일한 경기장이기도 하며 원정팀의 무덤이기도 하다.
7만여 명의 압도적인 서포터들의 응원을 받는 바이에른 뮌헨이라니.
생각만 해도 강하다.
여기에 전설적인 명장, 유프 하이켄스의 지도력까지 버무려진다면 ‘최강’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승부를 거둬야 한다니.
누가 봐도 어려운 상황이다.
“안다 알아. 무승부도 거두기 힘들겠지.”
선수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자 소하도 혼내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불가능 가능으로 만드는 마법사로서 유명한 소하에게도 무척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할 일은 해야만 했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저 밖에서 우리들의 월급을 주는 팬들을 위해서라도. 아니, 최소한 우리의 꿈을 위해서라도 말이지. 그리고 우리가 불가능한 일을 하루 이틀 도전하는 것도 아니잖냐. 인상 펴라.”
하긴, 포츠머스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포츠머스가 프리미어 리그에서 이름을 날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 아니던가!
더군다나 4차전까지 끝난 챔피언스 리그에서 조 1위를 수성하는 모습도 상상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감독님. 저 또한 감독님의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라도 성공할 잠재성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바이에른 뮌헨은 ‘정신력’으로 이기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상대입니다.”
주장인 케빈 도슨이 나서며 선수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이미 두려움을 이겨내고 다음 행동을 현실적으로 머릿속에 그리는 모습이다.
“제가 아는 감독님께서는 정신력 하나만으로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외람되지만, 어떤 방법을 고려하고 계시는지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소하를 가장 존경하는 케빈 도슨답게 소하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정신력은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술과 체력의 조미료일 뿐이지 않은가.
소하는 언제나 계획을 설립하고 그 뒤에 선수들의 사기를 다루는 감독이었다.
“역시 주장이다. 그래. 난 다 계획이 있다. 그리고 너희들도 앞으로 20일 전까지 이 계획에 동참해줘야 한다.”
케빈 도슨을 크게 치하하는 소하.
자기 생각을 잘 알아줬다는 기쁨이 담겨있었다.
그나저나 계획이라니.
챔피언스 리그 B조의 5차전은 앞으로 18일 뒤, 11월 20일이다.
3주에 가까운 긴 시간.
이 시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선수들의 궁금증이 증폭된다.
‘뭘까? 역시 감독님이야. 언제나 계획을 세웠어.’
‘믿고 따르면 기적을 만들지도?’
‘유프 하인켄스 감독이 오줌을 지릴 만한 기발한 전략이겠지?’
‘리그를 버리고 집중한 계획이라니. 아직 자세한 내용을 듣지도 않았는데 자신감이 생겨.’
‘역시 우리에게는 감독님이란 최후의 무기가 남아있었지.’
절로 솟아오르는 자신감!
어떠한 난관이 닥치더라도 소하라는 뛰어난 선장이 있었기에 선수들이 항해를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덕분에 선수들은 자기도 모르게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소하의 세 치 혀에 온 신경을 집중했고, 이내 소하는 계획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우리는 오늘부터 수비축구를 연습한다! 최강의 창에서 최강의 방패가 돼보자 이거야! 자자, 버스 두 대 구매하러 가보자!”
“···.”
“···.”
또다시 터진 소하의 폭탄선언!
정말, 불안감밖에 찾아볼 수 없는 계획이었다.
***
알리안츠 아레나로 여정을 떠나기 전의 포츠머스는 두 가지 큰 경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프리미어 리그 11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원정경기.
프리미어 리그 12라운드, 첼시 FC와의 홈경기.
모두 4자리밖에 없는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두고 경쟁하는 빅6에 속한 강팀들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포츠머스의 행보에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았다.
[포츠머스는 고민이 많을 겁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바이에른으로 이어지는 3연전을 어떻게 준비할지요.]
[챔피언스 리그에서, 일단은 조 1위입니다. 리그에 집중하고 바이에른 뮌헨전을 버리는 선택을 하지 않을까요?]
[한 시즌은 깁니다. 따라서 경우의 수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 시즌에도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하기 위해서면 리그에 집중하는 것이 맞죠.]
[그렇다고 바이에른 뮌헨전을 그냥 포기하기에는 매우 아쉽습니다. 잘만하면 구단 최초의 16강 진출을 노려볼 수 있는 상황 아닙니까?]
[경기 수가 빡빡하지는 않기에 선발의 배분을 잘한다면 모두 챙길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얻는다는 행위는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도 떠안는 겁니다. 성소하 감독은 선택을 잘해야 해요.]
20일 동안 4경기.
5일에 한 번꼴인 경기 숫자는 지옥 같았던 9월에 비해선 여유 있다.
다만 상대하는 팀들의 면면이 문제였다.
11월 1일, AS로마.
11월 6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1월 17일, 첼시 FC.
11월 20일 바이에른 뮌헨.
이탈리아, 잉글랜드, 독일의 강호들을 모조리 상대하는 기막힌 일정이다.
“뭔 씨발, 유럽 리그의 강팀 탐방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일정 수준···.”
절로 소하의 입에서 험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게다가, 6일과 17일 사이의 10일이란 시간은 휴식기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문에 A매치 기간이 또 잡혔지···.”
9월에도, 10월에도 있었던 국가대표 A매치가 11월에도 포츠머스의 주전들을 대거 징집하는 사달을 만들어냈다.
이래저래 선수단 운영에도 비상등이 켜진 상황!
물론, 소하는 이미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한 뒤였다.
[아! 이게 뭡니까! 포츠머스가 5백을 가지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올드 트래포트에 방문했습니다.]
[수, 수비축구를 하려는 생각인가요? 포츠머스가 수비라니. 너,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소하의 깜짝쇼에 자지러지는 장내 해설과 아나운서.
종종 사용하던 3백이었지만, 선발명단만 봐도 확연히 달랐다.
일단, 3백은 두 가지로 나뉜다.
공격적이거나,
수비적이거나.
그리고 양 윙백을 윙처럼 끌어올리는 공격적인 3백은 그리 어색한 전술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양 윙백에 수비적인 선수들 두고 라인마저 내려앉는 전술은 소하의 포츠머스가 길고 긴 기간동안 처음 선보이는 모습이었다.
[무, 무슨 생각일까요? 성소하 감독?]
[그, 글쎄요. 일단 두고 보죠.]
사상 최초의 수비 전술을 도입한 포츠머스.
소설이었더라면 ‘먼치킨’을 내세우며 수비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며 역습 한두 방으로 승리를 거두었겠지만, 아쉽게도 여긴 현실이었다.
-삑! 삑! 삑!
[경기 종료! 2-0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오랜만에 포츠머스에게 승리를 거둡니다!]
[솔직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잘했다기엔, 포츠머스가 너무 못했어요. 수비축구의 기본이 없었습니다.]
공격도, 수비도 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며 그대로 침몰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몸무게 130kg을 자랑하는 드웨인 존슨이 스키니진을 입은 격이지 않은가.
사람이 체형에 맞는 옷을 입듯, 포츠머스에는 수비축구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하지만, 소하는 멈추지 않았다.
A매치 기간이 끝나고 이어진 첼시 FC와의 경기에서도 수비 전술을 가져왔고 세상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성소하 감독이 무슨 생각일까요?]
[글쎄요···. 워낙에 특이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인지라···.]
전문가들도 이런데, 서포터들은 오죽하겠는가. 단단히 뿔이 났다.
한 달 전에는 이상한 선발명단을 내보내 경기에서 졌고, 이번에는 수비축구라는 이상한 짓을 하니 복장이 터질 만도 하다.
-성소하 토토하냐?
-승부조작인가?
-30대에 노망은 좀 빠르지 않나?
소하를 지지하던 서포터들도 ‘이건 좀···.’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이럴 때야말로 수비축구로 성과를 보였으면 좋았겠지만, 첼시 FC는 띄엄띄엄한 팀이 아니었다.
-삑! 삑! 삑!
[경기가 끝났습니다! 첼시 FC의 1-0 신승. 진땀 승부였습니다.]
[포츠머스는 조금 이상하네요. 수비는 조금 됐지만, 공격은 엉망이었습니다.]
1-0으로 져버렸다.
그것도 홈에서!
당연히 서포터들과 전문가들은 맹렬히 비난했고 이것은 소하의 귀까지 흘러들어왔다.
“흐음.”
진지한 표정의 소하.
강력한 비판에 심적 부담감을 느낀 걸까?
“오! 발전했군! 이제 수비는 되네! 잘했어! 아주 많이 잘했어!”
그럴 리가.
그저, 2-0으로 졌다가 1-0으로 지는, 작지만 조금은 발전한 모습에 크게 기뻐할 뿐이었다.
< 214화. 17-18시즌 챔피언스 리그. (1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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