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17-18시즌 챔피언스 리그. (11) >
포츠머스의 17-18시즌의 시작은 그간 시즌과는 사뭇 달랐다.
먼저, 16-17시즌은 도전자의 처지에서 리그를 맞이했다면,
17-18시즌은 방어자의 처지에서 리그를 맞이했다.
무엇을 방어하냐 한다면, 당연히도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이다.
챔피언스 리그.
20개의 팀 중에서 4팀만 나갈 수 있는 비좁은 등용문.
종종 유로파 리그에서 우승하고 5팀이 나가기도 했지만, 어지간해서는 4팀이었다.
그리고 이 4자리를 두고 벌이는 경쟁의 승리자는 대부분, 소위 빅6이라고 불리는 거대 클럽들이 독식했다.
기름 자본, 맨체스터 시티.
근본을 완성한, 첼시.
무패우승, 아스널.
과거의 붉은 제국, 리버풀.
붉은 악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신흥강호, 토트넘.
이 6개의 초거대구단이 피가 터지는 혈전을 벌이며 나눠 가졌다.
종종 레스터 시티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같은 명문구단들이 슬쩍 경쟁에 발을 담그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주 드문 일일 뿐.
우승팀을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는 4팀을 예측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이런 판도에서 우리 팀의 챔피언스 진출은 나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다.”
소하로서도 포츠머스의 프리미어 리그 첫 시즌에서의 챔피언스 진출은 상정 외의 결과였다.
[생존이 목표입니다.]
라는, 소하의 기자회견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단 말이다.
하여튼, 놀라운 기적은 소하가 원래 세웠던 계획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다.
프리미어 리그 1년 차에, 생존.
프리미어 리그 2년 차에, 중위권.
프리미어 리그 3년 차에 우승.
단계적으로 밟아 나가려던 계획이 산으로 가버렸다.
“3년 차에 딱 프리미어 리그에 몰방해서 우승컵을 강탈하려고 했는데, 제대로 망했어.”
빅6가 대륙대회까지 병행하면서 틈을 보일 때! 그때를 노려 프리미어 리그에 전력을 다해 우승컵을 가져오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너무 과하면 독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첫 시즌에 달성한 챔피언스 리그 진출은 난도를 너무 올려놨다.
“힘숨찐 코스프레를 해야 했었는데···.”
소하의 원래 작전은 ‘슬라임’ 작전이었다.
슬라임.
수많은 판타지 세계에서 나오는 일개 잡몹!
동글동글한 외모에 말캉말캉한 이미지를 가진 약한 몬스터다.
만약 RPG 게임에서 슬라임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생각할 시간도 가지지 않은 채 바로 무기를 빼 들고 머리통을 반으로 쪼개려 들 거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일 정도의 최약체!
원래 어떤 존재든 약해 보이는 상대에게는 빈틈을 노출한 채 잡아먹으려고 눈에 불을 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 슬라임이 레벨 99의 전설적인 슬라임이라면?
반쯤 빼 들었던 무기를 조심스럽게 집어넣고 어떻게 살아나갈지 고민하며 뒷걸음을 칠 거다.
포츠머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작고 나약한 슬라임 행세를 하며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려고 했건만.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며 레벨이 높은, 그것도 아주 높은 마왕군 간부급 슬라임이란 사실을 밝혀버렸다.
당연히 기존의 빅6는 물론이고, 포츠머스를 제외한 모든 팀이 경계하는 팀으로 1년 만에 올라섰다.
여기에 더해서 방어자의 입장까지 더해지자 참으로 난감한 소하였다.
“쉽게 생각해서 ‘하나는 포기하면’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니거든.”
매 경기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건 등산과도 같았다.
포츠머스는 힘들지만 계속 오르막길을 걷던 팀 아니던가.
예상치 못한 내리막길을 맞이하면 쭉 내려갈지도 몰랐다.
올라가기는 힘들지만, 내려가는 건 너무나도 쉬웠으니까.
재충전의 기회일지도 몰랐지만, 사람의 의욕이란 계산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원래, 계속 올라가는 등산로보다 오르막 내리막이 섞인 등산로가 더 힘든 법! 여기서 내려갈 순 없다.
“해서,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유지해야 하는데···.”
어떻게든 챔피언스 리그의 진출권을 확보해야 했지만, 리그의 상황은 썩 좋지 않다.
4승 4무 2패.
승점 16점, 리그 6위로서 제법 좋아 보였지만, 이건 가짜 성적이었다.
강팀이라고는 토트넘과 리버풀밖에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전반기의 9경기는 맨체스터 시티, 아스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4개 팀을 모조리 상대하는 일정이 기다리는 중이다.
“챔피언스 리그와 더불어 강팀들과의 연속적인 경기···. 어렵군. 어려워.”
방어자가 아니라 슬라임이었다면 한결 편한 경기였을 텐데.
놀라운 기적이 악재로 돌아와 골머리를 싸매는 소하였다.
***
지옥의 조, 17-18시즌 챔피언스 리그 B조의 상황은 더더욱 혼돈으로 치달았다.
4차전을 앞둔 B조의 상황은 혼란스러우면서도 균형을 절묘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1위. 포츠머스 FC. 1승 1무 1패. 4pt. 4점.
2위. 파리 생제르맹 FC. 1승 1무 1패. 1pt. 4점.
3위. FC 바이에른 뮌헨. 1승 1무 1패. 0pt. 4점.
4위. AS 로마. 1승 1무 1패. -5pt. 4점.]
균형 잡힌 혼돈이랄까.
모두가 1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오로지 골 득실 차이로 순위가 나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오늘까지만 통하는 이야기였다.
드디어 조별리그가 후반기로 들어서며, 골 득실 차이가 아닌, 승자승 원칙이 적용될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물론, 승자승이니 골 득실이니 복잡한 계산한 오직 한 가지만 달성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바로, 승리.
승리만 해낸다면 유일신인 ‘승점’을 앞서나가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소하도 모처럼 민주적인 선발명단 대신 철두철미한 선발명단을 준비해 왔다.
[GK: 아론 람스데일.
LB: 앤디 로버트슨.
CB: 케빈 도슨.
CB: 데클란 라이스.
RB: 매튜 다이스.
DMC: 칼빈 필립스.
MC: 스티븐 데커.
MC: 델리 알리.
LW: 조쉬 킹.
ST: 에링 홀란드.
RW: 모하메드 살라.]
전형적인 포츠머스의 베스트 11과는 조금 달랐지만, 형태는 비슷했다.
그저 몇몇 선수들의 부상을 합리적으로 대처했을 뿐이었다.
물론, 데클란 라이스의 중앙수비수 기용은 노림수이긴 했다.
이미 AS 로마와의 3차전에서 에딘 제코를 잘 막았던 데클렌 라이스에게 또 한 번 기대를 건 소하였다.
큰 고민 없이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강한 명단을 구성한 소하.
이에 반해 AS 로마의 에우세비오 디 프란체스코 감독은 프래튼 파크를 방문하며 상당한 고민에 시달렸다.
“성소하 감독이 어떤 기발한 전략을 준비해 올까···?”
문제는 3차전이었다.
조쉬 킹의 오른쪽 윙백이라는 비상식적인 전략에 크게 휘둘렸던 에우세비오 디 프란체스코 감독!
너무나도 호되게 당했기에 고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3차전에서 조쉬 킹에게 완전히 박살이 났던, ‘스테판 엘샤라위’는 조쉬 킹의 J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무, 무서운 놈이었어. 내가 무엇을 하든 압도적인 신체 능력으로 모조리 분쇄했지···. 그리고 이게 다가 아니야···. 90분 내내 13km를 넘게 측면을 오갔는데도 공만 잡으면 어느샌가 옆에 붙더라고···.”
왁스로 빳빳이 세운 닭 볏 머리 스타일이 축 늘어질 만큼 시달린 스테판 엘샤라위였다.
16시즌부터 18시즌까지의 엘샤라위는 정말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선수였거늘. 조쉬 킹의 괴물 같은 실력에 벽을 단단히 느껴버린 상황이었다.
“분명, 성소하 감독은 승리를 원할 거다. 즉, 다시 한번 조쉬 킹을 스테판 엘샤라위와 같은 라인에 배치할 가능성이 높다.”
에우세비오 디 프란체스코 감독은 깊이 있는 분석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래저래 모하메드 살라가 떠난 지금, 측면을 뚫어줄 AS 로마의 선수는 오직 스테판 엘샤라위뿐이다.
즉, 에이스라는 이야기.
그리고 에이스가 막히면 어지간해서는 승리를 쟁취하기 어려웠다.
“그럼, 라인을 바꿔야겠군.”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었다.
-조쉬 킹이 윙백이든 포워드든 오른쪽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스테판 엘샤라위를 기존의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옮긴다.-
라는, 물 흐르는 듯한 사고였다.
역발 윙어를 정발 윙어로 바꾸면 팀의 공격 전술을 대폭 수정해야겠지만, 그래도 이게 더 쉬운 길로 보였다.
그만큼 조쉬 킹의 측면 공략은 너무나도 매서웠으니까.
해서, 나온 AS 로마의 선발명단은,
[GK: 알리송 베커.
LB: 알렉산다르 콜라로프.
CB: 코스타스 마놀라스
CB: 페데리코 파지오.
RB: 알렉산드로 플로렌치.
DMC: 다니엘레 데로시.
MC: 라쟈 나잉골란.
MC: 케빈 스투르만.
LW: 디에고 페로티.
ST: 에딘 제코.
RW: 스테판 엘샤라위.]
스테판 엘샤라위-젠기즈 윈데르 조합이 아닌, 디에코 페로티-스테판 엘샤라위 조합을 꺼내 들었다.
조쉬 킹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
이었건만.
매우 아쉽게도 변칙이 아닌 정도를 택한 소하의 선택에 또다시 만나버렸다.
“···che cazzo!”
기어코 에우세비오 디 프란체스코 감독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한국어로 매우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남성의 음경 같은 상황이 되었다는 욕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건만.
아무 생각 없던 소하의 정직함에 박살이 나버린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스테판 엘샤라위를 되돌려 두기도 힘들었다.
일단, 부분 전술을 완전히 바꿔야 했으며,
결정적으로 젠기즈 윈데르는 아예 오른쪽에서 플레이하지 못하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후우. 어쩔 수 없지.”
낙담하는 에우세비오 디 프란체스코 감독. 비록, 스테판 엘샤라위가 잡아먹혔지만 다른 선수들을 믿어보기로 작심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AS 로마의 선수단은 매우 강하지 않던가.
팀의 전설인 데 로시부터 이미 월드클래스 급이라는 골키퍼, 알리송 베커까지.
나무랄 곳이 없는 진용이었다.
비록 조금 꼬였다 치더라도 객관적인 전력은 명백히 AS 로마가 근소 우위!
힘든 원정 경기겠지만, 체급으로 찍어누른다면 승리할 가능성이 큰 AS 로마였다.
***
-삑!
포츠머스의 홈구장 프래튼 파크에서 열리는 챔피언스 리그 4차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공은 포츠머스.
A매치 기간이 제법 길었던지라 선수들은 일단 몸을 풀기 위해 경기 속도를 느리게 가져간다.
-툭, 툭, 툭.
치명적인 패스보다는 안전하고 정확한 패스로 점차 점유율을 높여간다.
이번 경기의 중요성과 양 팀의 공격적인 스타일에 비해선 제법 조용한 경기지만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지난 경기가 많이 때리면 이기는 격투기였다면, 이번에는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느낌이다.
물론, 모두가 다 묘한 긴장감을 품고 경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포츠머스의 왼쪽,
AS 로마의 오른쪽.
이곳에서 다시금 이어진 묘한 인연이 경기장의 분위기를 바꿀지도 몰랐다.
“오. 안녕? 한 달 만에 만났네?”
상대편이지만 스테판 엘샤라위를 매우 반가워하는 조쉬 킹.
어찌나 반가웠던지 자기 자리를 벗어나 엘샤라위에게 다가간 그였다.
“···.”
와락! 얼굴을 구기며 경기를 일으키는 스테판 엘샤라위. 피하려고 노력했는데 또 제대로 만나버린 상황에 골이 울린다.
“너, 원래 왼쪽 윙포워드 아니야? 왜 오른쪽으로 옮겼을까?”
“···.”
“서, 설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스테판 엘샤라위에 태도에도 불구하고 조쉬 킹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며 결론에 도달했다.
“한 달 전에 나에게 왕창 깨진 복수를 하려고 일부러 자리를 바꾸었구나?!”
“···?!”
생각지도 못한 뜨거운 결론에 스테판 엘샤라위의 두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물론, 그러든지 말든지, 경기가 한창인 상황에서도 조쉬 킹의 주둥이는 멈추지 않았다.
“와. 너, 보기보다 파이팅이 있었구나. 지난번에는 너무 나약해서 조금 무시했는데, 사과할게.”
“그, 그게 아니···.”
“진검승부에서 패배를 당한 복수를 위해 자리까지 바꾸다니. 내 취향이야. 우리 감독님도 좋아할걸?”
“아니, 잠깐, 내 말 좀···.”
“좋아! 그 뜨거운 마음에 보답하지 않으면 사나이가 아니지. 킹 가문의 수치가 될 순 없다!”
“??!!”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서 상대해줄게. 솔직히 지난번에는 이탈리아도 처음이었고, 포지션도 어색했거든. 기대하라고!”
“아, 아니. 자, 잠깐!”
스테판 엘샤라위의 간절한 비명!
손을 휘저으며 격하게 부정하려 했지만, 이미 조쉬 킹은 소하의 살기 어린 눈길을 받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뒤였다.
“···뭐야···. 저 새끼···.”
부들부들, 몸을 떠는 스테판 엘샤라위.
지난번의 모습이 전력이 아니었단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맴돌며 그를 공포에 떨게 했다.
< 212화. 17-18시즌 챔피언스 리그. (11)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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