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17-18시즌 챔피언스 리그. (8) >
지옥의 조, 챔피언스 리그 B조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1위. 포츠머스. 1승 1패. 4pt. 3점.
2위. 파리. 1승 1패. 1pt. 3점.
3위. 바이에른. 1승 1패. 0pt. 3점.
4위. 로마. 1승 1패. -5pt. 3점.]
모두가 승점 3점을 차지한 기묘한 상황이었다. 오직 순위를 나누는 요소는 골 득실 차이였을 뿐.
아직 동률 팀 간 승자승 승점이 나오지 않았기에 나온 결과였다.
그야말로 ‘역사상 최고의 지옥의 조’라는 명성에 걸맞은 혼돈.
이토록 제대로 난장판이 된 이유는 바로, 포츠머스에게 대패를 당한 파리 생제르맹이 AS로마를 홈으로 불러 6-0으로 박살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포츠머스에게 당한 울분을 엄한 이탈리아의 AS로마에 제대로 풀어버린 격이었다.
이 때문에 포츠머스로서는 더욱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
좋지 않은 팀 분위기의 포츠머스.
대패를 만회하기 위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AS로마.
둘의 차이는 3차전 직전의 리그 경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포츠머스는 5-0으로 대패했고,
AS로마는 3-0으로 대승했다.
이것은 확연한 차이였다.
패배를 극복하지 못한 포츠머스와 패배를 단숨에 이겨낸 AS로마.
아직 경험을 쌓는 신생팀과 단맛 쓴맛 전부 맛본 명문 팀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의 대부분은 AS로마의 승리를 점쳤다.
[상태가 좋지 않은 포츠머스는 원정경기에서 AS로마를 이길 수 없을 것.]
[포츠머스는 1,500KM의 장거리 이동을 처음 경험해봤다. 가뜩이나 체력적으로 문제가 보이는 포츠머스 에게는 크나큰 악재로 보인다.]
[첫 번째 챔피언스 리그에서 매우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포츠머스지만 한계가 보인다.]
[‘나쁜’ 포츠머스와 ‘좋은’ AS로마. 누가 승리할지는 유치원생도 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다시금 참사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눈치 빠른 기자들은 유달리 강한 부정이 섞인 기사를 마구 쏟아냈다.
하기야, 포츠머스를 욕할 기회가 좀처럼 쉽게 오는 일이던가?
그저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
어차피 기자들이란 잘할 땐 과하게 칭찬하며 못할 때는 ‘억까’를 하는 존재들이라지만 그냥 넘기기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맞아···. 모처럼 우리 팀이 흔들렸어.
-아쉽지만 좋은 경험으로 남겨야겠지. 이번 챔피언스 리그는.
-리그도 2연패를 당하면서 중위권으로 떨어졌어. 힘들겠는데.
-여기까지만 해도 잘한 거였지.
-난 욕할 수 없다.
서포터들마저도 비관적인 분위기에 휩쓸려버렸다.
서포터라 함은 자고로 12번째 선수라고 하지 않던가. 경기장 밖의 아군까지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경기 전날, 기자회견장에 등장한 소하의 모습에 또다시 난리가 났다.
혹시 소하마저도 죽상을 짓고 기자들 앞에 섰기 때문일까?
설마.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방긋 웃으면서 모습을 드러내며 세간을 놀라게 했다.
심지어 어찌나 좋아 보이던지, 얼굴에는 개기름이 좔좔 흐른다.
마치, 못된 장난을 훌륭하게 성공시킨 악동이었다.
“좋은 저녁이네요. 이탈리안 파스타 너무 맛있어요. 나중에는 꼭 이탈리아에서 살고 싶어요.”
“···.”
“···.”
어떻게 소하를 괴롭힐까 단단히 준비했던 이탈리아의 기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 감독님께서 표정이 밝아 보여 다행입니다. 무언가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준비했던 악성 질문 대신 자연스럽게 소하의 페이스에 이끌려 평범한 질문을 던져버렸다.
이에, 소하는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한, 지중해의 푸르름이 느껴지는 미소와 함께 화답한다.
“그럼요. 아시다시피 감독이란 직업은 무척 고되지 않습니까? 이런 직업에 종사하면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내다니. 전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그, 그러셨군요···.”
의도한 건지 하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악명’으로는 잉글랜드보다 한 수 위라는 이탈리아 기자들의 입을 봉인시킨 소하.
이어지는 ‘평범한’ 질문에도 웃음꽃과 눈웃음을 잃지 않으며 화사한 기자회견을 이어나간다.
이탈리아 기자의 눈에는 소하의 머리에 꽃이 피어나 나풀거리는 환상이 보일 지경!
소하와 함께 참석한 포츠머스의 관계자들 또한 눈을 휘둥그레 뜨며 불안해한다.
‘뭐지? 어제저녁부터 이상하던데.’
‘드디어 미치신 건가?’
‘이탈리안 푸드가 속에서 받지 않았던 건가? 아닌데···. 엄청 잘 드시던데. 먹방하러 이탈리아 온줄···.’
‘불안하다···. 불안해···.’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치시려고···.’
이탈리아 측 기자단보다 훨씬 불안에 떨며 식은땀을 줄줄 흘린다.
보통 소하가 꽃밭을 피울 때면 뒷날에는 대단한 사고를 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보통 꽃밭도 아닌 왕실 정원의 경지 아니던가.
최악의 참사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기자회견장을 박차고 나가는 건 애교였을 뿐이고 단상 위에 올라가 봉산탈춤을 출지도 모르는 상황!
이렇듯 긴장감이 줄줄 흘러넘칠 때.
기어코 본격적인 이탈리아 기자단들의 첫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감독님의 팀은 요즘 굉장히 엉망입니다. 따라서, 이번 챔피언스 리그 3차전에서도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한데요. 선발진을 어떻게 구상하실 예정이십니까? 소문으로는 이번 경기를 포기하고 리그에 집중한다던데요.”
어차피 질 테니 후보선수를 내보내서 체력보존이라도 해라, 라는 폭언이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노발대발하며 온갖 면박과 도발을 일삼았을 소하.
하지만 이번에는 만발한 웃음꽃을 유지하며 화사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후후후. 선발진은 무척 재미있을 거예요. 이게 말이죠, 잔뜩 기대하셔도 되거든요. 자신해요.”
“비장의 수를 준비했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엄요오.”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말을 길게 늘인 소하는 이윽고 검지를 뻗으며 자신감 있게 외쳤다.
“전! 민주적으로 선발명단은 꾸렸습니다! 정말, 21세기에 어울리지 않습니까?! 하하핫!”
철혈의 독재자인 소하의 입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민주적’이 기어코 나왔다.
민주적.
세상에 이토록 소하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어디 또 있을까.
소하의 어머님도 알았고, 포츠머스의 선수단과 보드진들도 알았으며, 앞에 모인 기자들도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었다.
이 때문에,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는 충격과 공포로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혹자는 ‘우리를 놀리는 거 아니냐’면서 분개했지만, 결단코 아니었다.
다음 날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 나온 소하와 포츠머스의 선발명단은 정말 충격적이었고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했기 때문이다.
[GK: 아론 람스데일.
LB: 앤디 로버트슨.
CB: 데클렌 라이스.
CB: 칼빈 필립스.
RB: 조쉬 킹.
DMC: 마이클 반즈.
MC: 니콜로 바렐라.
MC: 도봉산.
LW: 마리오 발로텔리.
ST: 존 말로리.
RW: 잭 해리슨.]
눈 씻고 봐도 근본이 보이지 않는 무지막지한 선발명단으로 또 한 번 논란을 만들어낸 소하였다.
***
기자회견이 열리기 10시간 전.
조금 일찍 이탈리아의 로마에 도착한 포츠머스는 임시 훈련장에 모여 묵묵히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바이에른 뮌헨에 안타까운 패배.
토트넘에 경험해보지 못한 치욕적인 패배.
이 둘이 시너지를 일으켜 선수단에 얼음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
“후우.”
“큼큼.”
항상 활기차던 포츠머스의 훈련이었거늘. 모두 우중충한 얼굴로 말없이 개인 훈련에만 매진 중이다.
이건 뭐, 훈련하는 선수가 아닌 상갓집에 참석한 조문객이 따로 없다.
-···.
언제까지고 계속 지속될 것만 같은 묵직한 침묵. 미묘한 압박감에 절로 숨이 막힐 때쯤,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은 소음이 정적을 깬다.
-빰빠빠빰빠빠빰빰빠라빰빰!
포츠머스의 선수들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성인 남자들이라면 제대한 지 십 년이 지나도 경기를 일으킨다는 그 음악!
바로, 대한민국 육군의 기상곡이었다.
그리고 이 지옥의 연주를 내뿜는 라디오를 들고 나타난 사람은 역시나, 소하였다.
“자자! 내가 왔다!”
유달리 기운차게 등장한 소하. 뭐가 그리도 신났는지,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옹기종기 모인 선수들에게 ‘문워크’를 선보이며 다가갔다.
“···.”
“무, 무슨···.”
“가, 감독님?”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소하의 밑바닥을 모조리 봤다고 자부했었거늘. 다 개소리였음이 여실히 증명되자 선수들은 몸이 바싹 굳어버렸다.
“어떠냐? 마이클 자크손이 물개박수를 보낼만한 환상적인 스텝 아니냐?”
“···.”
“···.”
당연히도 선수들에게는 어떠한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은 소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박수.”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소하. 천하에 다시없을 악독한 독재자의 모습에 선수들은 마지못해 굴복한다.
-짝. 짝짝. 짝짝짝.
손이 정말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생존본능이 발현된 결과였다.
“좋아. 좋아. 진작 이랬어야지.”
영혼이 한 톨도 담기지 않은 박수였지만 소하는 크게 만족한다.
“···.”
선수들은 그저 오늘따라 광증이 더욱 심하다고 두려워할 뿐.
그냥 이대로 침묵을 유지한다면 금방 끝날 폭풍이었다.
그러나 소하의 왼손에 들린 정체불명의 봉지에 델리 알리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만다.
“저···. 감독님 들고 계신 봉지는 뭐예요?”
‘그’ 조쉬 킹도 가만히 숨도 쉬지 않고 있었거늘. 의외의 복병이 튀어나오자 선수들의 따가운 시선이 알리에게 쏠렸다.
물론, 관심을 보인 델리 알리에게 소하는 크게 치하했다.
“좋은 관찰력이다! 훌륭해!”
좋은 관찰력은 개뿔. 가장 멀리 있던 페트르 체흐도 소하가 등장하자마자 발견한 봉지였다.
그저 봤음에도 보지 않은 척했을 뿐이었지.
“자자, 모두가 궁금해할 이 봉지 속의 종이들은 너희들이 무척 반길 거다.”
줄줄이 쏟아지는 소하의 호객에 선수들은 귀가 쫑긋거렸다.
솔직히 미친놈이 무서워서 모른 척한 것이지,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이야···. 바로 민주적인 구단으로 변하기 위한 초석이다!”
터져 나온 폭탄 발언과 함께 동시에 무너져내리는 선수들의 상식이었다.
“??”
“!!”
“?!”
“??!!”
불과 1분 전까지만 해도 손뼉을 치라고 협박하던 독재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절대 아니었기에 선수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단체로 석화 마법이라도 걸린 걸까.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연장자의 뚝심을 발휘한 페트르 체흐가 간신히 질문을 던진다.
“그···게 뭐길래···?”
항상 점잖던 체흐의 말이 짧아졌다.
그러든지 말든지 소하는 그의 질문을 무척 반기며 설명을 시작했고, 선수들은 금방 이해했다.
검은 봉지에 든 종이들은 일종의 ‘투표용지’였다.
“내일 선발진은 민주적으로 이 설문지에 투표해서 뽑기로 하겠다.”
“···?!”
“!!”
요컨대, 포지션별로 내일 경기에 선발할 동료들의 이름에 체크를 하라는 뜻이었고, 가장 많은 득표수를 얻은 선수를 선발로 뽑겠다는 이야기였다.
“단, 본인에게는 투표하진 못할 거다. 애초에 이 설문지는 개인별로 따로 제작한 거라 본인 이름은 없을 거야.”
누구보다 승부에 진지한 소하였고, 이를 가장 잘 아는 선수들이었기에 도통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워한다.
이건 동네 축구에서도 하지 않을 장난 아니던가. 중요한 챔피언스 리그에서 하기엔 상식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저, 전 투, 투표하지 않겠습니다!”
버럭! 은 아니었고 소심하게 칼빈 필립스가 거부의 의사를 내비쳤다.
“이유는?”
뚱한 표정으로 묻는 소하의 표정에 칼빈 필립스는 용기를 쥐어짜서 답한다.
“미, 민주시민은 투표하지 않을 궈, 권리도 있기 때문입니다.”
썩 좋지 않은 민주시민의 권리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폭정이었으니까.
암만 포장해도 폭군이었으니까.
민주시민 운운하니까 민주시민의 권리로 맞받아친 칼빈 필립스가 대견스러울 지경이었다.
허나, 소하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야기였다.
“뭐? 투표란 민주시민의 기본권리인데, 이걸 포기하겠다고?!”
“···.”
“즉, 민주시민임을 포기하겠다는 뜻이군! 맞지?”
“그, 그건 아니···.”
“좋아. 민주시민의 권리를 포기한 칼빈 필립스에게 선발에 들어갈 자격도 포기했음을 알리노라.”
“무, 무슨 소리세요!”
“이 자식이! 권리는 포기하면서 혜택을 누리려는 수작질이냐?!”
정말 지독한 궤변이었다.
언제부터 민주시민의 권리와 선발명단이 동일 선상에 놓인 지 모를 일이었다.
즉,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건 다시는 없을 지독한 독재였다.
“아, 알겠어요. 투, 투표하겠어요.”
결국 항복 선언을 한 칼빈 필립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경기에 나서고 싶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저, 저기 감독님!”
칼빈 필립스가 뒤로 물러나자마자 조쉬 킹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래. 킹아. 뭐가 궁금하니?”
“꼭 실력순으로 써야 하나요?”
조쉬 킹 다운 질문이었다.
중요한 경기가 걸린 투표라면 당연히 실력순 아니겠는가.
하지만 소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평소 마음에 드는 사람을 써도 돼.”
“오! 그러니까 즉, 인기투표라는 거군요?!”
“좋은 해석이다.”
무슨 생각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소하의 계략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인기투표’라는 조쉬 킹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혼란스러웠던 포츠머스 선수들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오, 이거 꽤 재밌겠는데?’
‘실력은 몰라도 내가 인기는 제일 많지 않을까? 그동안 밥을 사준 게 몇 번인데.’
‘요가맨들은 날 뽑겠군.’
‘낚시 회원들은 당연히 나겠지?’
‘아무리 봐도 나지.’
어린 선수들은 물론, 가장 연장자인 페트르 체흐까지 아론 람스데일을 흘겨보며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그 스승에 그 제자들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선수들이었다.
심지어, 이번에 새로 영입된 선수들마저도 마찬가지였다.
[선발을 얻어낼 의외의 기회!]
예상치 못한 기회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존선수들은 물론, 같은 신입생들에게도 갈망의 눈빛을 서로 보낸다.
‘후후후.’
이 모습에 소하는 고개를 돌린 채 사악한 웃음을 지을 뿐.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만점이었다.
‘봐봐, 초상집 분위기에서 어느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었잖아?’
과정이 어떻든 일단 대단히 바뀐 훈련장의 분위기.
이것이야말로 소하가 팀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한 계획의 ‘첫 단추’였으며 세상이 놀란 선발명단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었다.
< 209화. 17-18시즌 챔피언스 리그. (8) > 끝
ⓒ 블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