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17-18시즌 챔피언스 리그. (7) >
후반 70분 경기는 양 팀의 연이은 교체로 다시 한번 뒤흔들렸다.
포츠머스는 잭 해리슨과 마리오 발로텔리를, 바이에른 뮌헨은 킹슬리 코망과 아르투로 비달을 내보낸 상황.
후보선수의 클래스부터 차이가 상당히 나는 두 팀이었다.
먼저, 양 팀의 두 번째 교체 카드는 각기 다르지만 큰 그림은 비슷했다.
‘한 방’을 노리는 포츠머스는 강력한 중거리슛능력을 가진 마리오 발로텔리를 선택했고,
‘지구전’을 노리는 바이에른 뮌헨은 엄청난 활동량을 보여주는 아르투로 비달을 선택했다.
교체한 포지션은 모두 달랐지만 각기 그리던 그림을 마저 완성하기 위함은 똑같은 양 팀.
그리고 교체의 효과를 먼저 본 팀은 소하의 포츠머스였다.
-터어어엉!
엄청난 충격을 받은 바이에른 뮌헨의 골대가 강하게 흔들렸다.
마리오 발로텔리의 26m에서 뿜어진 중거리 슛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상단 포스트 바를 후려친 결과였다.
[아깝습니다! 엄청난 중거리 슛이었는데요! 정말 운이 따르지 않는 포츠머스입니다!]
[전 그대로 골망을 가르는 줄 알았어요! 이제 골킥을 준비하는···. 아, 코너킥입니다! 이게 뭔가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경기장의 거대 스크린에서는 리플레이가 재생되었다.
엄청난 힘을 품고 묵직하게 날아가는 마리오 발로텔리의 슛.
이를 막아내기 위해 온몸과 팔을 뻗는 바이에른 뮌헨의 마누엘 노이어 골키퍼.
-톡.
거대 스크린은 아슬아슬하게 중지 끝자락에 걸리며 슛의 궤도가 위로 틀어지는 광경을 똑똑히 보여줬다.
[아! 이건, 슈퍼 세이브였군요! 손가락으로 건드리지 않았다면 골이었네요!]
[정말 대단한 골키퍼입니다. 이말밖에 나오지 않아요.]
“와···. 미쳤다. 막은 거였어?”
“체흐도 대단하지만 노이어도 장난 아니야. 0-0인데 이렇게 꿀잼인 경기가 있어도 되는 건가?”
“미치겠다. 처음엔 칭찬이 나왔는데 이제는 슬슬 욕이 나오려고 해.”
장내 아나운서와 해설, 그리고 서포터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세대 ‘넘버 원’의 자리를 허투루 자치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이런 씨발! 그만 막아!”
소하의 입에서도 기어코 험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나오는 기회마다 환상적인 선방으로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다니.
이제는 존경이고 나발이고 천하에 다시없을 원수로 보일 지경이었다.
[자, 코너킥은 잭 해리슨이 준비합니다. 모처럼의 코너킥 기회를 잭 해리슨이 잡았군요. 성소하 감독의 계획일까요? 운일까요?]
[글쎄요? 하여튼 좋은 기회임은 분명합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의문!
운인가, 계획인가!
소하는 이러한 의문에 가볍게 코웃음 쳤을 뿐이다.
“흥. 당연히 계획이지. 어디서 감히 내 앞에서 운을 운운해? 운이 있었다면 내가 바이에른이랑 경기를 하지 않았겠지.”
투덜투덜.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는 소하.
감히 자신의 앞에서 운을 언급하는 장내 아나운서가 그냥 미웠다.
하여튼, 소하의 반응처럼 모조리 계획이었다.
잭 해리슨은 팀 내에서 마이클 반즈와 함께 데드볼 스페셜 리스트라는 지위를 가진 선수 아니던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의 능력은 종합적으로 프리미어 리그에서 B급 선수였지만, 데드볼 능력만큼은 SSR급 선수로 유명했다.
컴퓨터로 계산한 듯한 정확하고 날카로운 킥은 그가 준주전급으로 경기에 나오는 가장 큰 이유였다.
“해줘라. 해리슨아.”
잭 해리슨의 왼발에 믿음을 보내주는 소하. 이런 마음을 전해 받았는지, 좌측 코너에서 코너킥을 준비하는 잭 해리슨의 표정 또한 진지하기 짝이 없다.
-팡!
이윽고 터져 나온 잭 해리슨의 날카로운 왼발 코너킥!
엔드라인의 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며 자석에라도 끌린 듯, 순식간에 페널티 에어리어 중앙으로 휘어져 들어간다.
얼른 보면 직각으로 꺾여 들어가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됐습니다!’
킥을 마친 잭 해리슨은 속으로 그답지 않게 쾌재를 내질렀다.
보통 선수들은 수천, 수만, 수십만의 킥을 해왔기에 골로 이어지는 킥에는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하기야, 아무리 평소에 젊잖던 잭 해리슨이라도 이번 킥은 자화자찬해도 인정일만큼 대단한 수준이었다.
인생 킥이랄까. 장례식에 틀어도 충분했다.
-슈와악.
잭 해리슨의 인생 코너킥은 물리법칙을 무시한 듯 꺾여 들어가 펄쩍 뛰어오른 한 남자의 머리에 정확히 충돌했다.
그 남자는 포츠머스가 사랑해 마지않는 포츠머스의 전설이자 주장, 케빈 도슨.
우월한 서전트 점프로 그를 마크하던 마츠 후멜스보다 반 뼘 정도 높이 날아올랐다.
-팍!
소하가 눈여겨봤던 놀라운 신체 능력으로 공중에서 균형을 유지한 케빈 도슨은 그대로 골대 왼쪽 모서리로 머리를 내려찍었다.
-철썩!
당연히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 거라고 생각한 마누엘 노이어 골키퍼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고, 골망을 시원하게 흔들었다.
[골입니다아아아아! 포츠머스의 심장, 케빈 도슨이 멋진 헤더 골로 선제골을 따냈습니다!]
[드디어 후반 75분여 만에 첫 번째 골이 터져 나왔습니다! 앞서가는 포츠머스! 또다시 기적을 부르는 것인가요!]
“와아아아아아아!!!”
“케빈 도스으으으은!”
“해냈다! 해냈다고오오오!”
경기장은 순식간에 아나운서와 서포터들의 비명과 같은 환호로 가득 찼다.
“으아아아아!”
남성미를 물씬 풍기며 고대의 전사 같은 포효를 내지르는 케빈 도슨!
어째서 영국에서 알아주는 여배우가 한눈에 반했는지 얼추 이해가 가는 멋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었다.
[케빈 도슨이 유니폼의 새겨진 포츠머스의 엠블럼에 키스하는군요!]
[포츠머스의 서포터들은 정말 자랑스러울 겁니다. 요즘 세상에 저런 충성심을 가진 선수가 몇이나 있을까요?!]
케빈 도슨이 엠블럼 키스 셀레브레이션까지 선보이자 프래튼 파크는 미친 듯한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좋아!”
“됐어요! 됐다고요!”
주먹을 불끈 쥐며 온몸을 부르르 떠는 소하와 잭 밀러. 정말 힘든 싸움이었지만, 이제야 끝이 보이는 듯하다.
“자자! 정렬해.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란 말이야!”
속마음과는 다르게 흥분한 선수들을 진정시키며 냉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소하!
‘아직 15분이나 남았다. 정말···. 길고 긴 15분이 될 거다.’
15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하지만 소하의 생각처럼 바이에른 뮌헨에는 긴 시간이었다.
***
기적적으로 선제골을 달성한 포츠머스.
소하는 15분이나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결단을 내려야 했고 곧바로 계획을 이행했다.
“바렐라. 네가 나가서 중원에 활기를 불어넣어라. 전진보다는 최대한 볼을 지켜야 한다는 걸 잊지 말고.”
니콜로 바렐라를 투입하며 포츠머스는 순식간에 4백에서 3백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데클렌 라이스를 중앙수비수로,
중앙 미드필더였던 칼빈 필립스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델리 알리를 빼주며 니콜로 바렐라를 수비형 미드필더와 중앙 미드필더 사이의 어딘가로.
쉽게 말해 한 골을 지키기 위해 눌러앉았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맞춰 제법 높은 위치였던 양 윙백들도 주저앉아 5백으로 만들었고, 이는 양 윙포워드와 원톱인 마리오 발로텔리도 마찬가지였었다.
포츠머스의 평소 모습과는 매우 다른 아주 수비적인 진용이었다.
‘어차피 한 골 정도는 헌납해도 괜찮다. 패배만 하지 않으면 된다.’
지옥의 조, B조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애당초 패배가 확실한 팀이 무승부라도 거둔다면 대성공 아니던가.
아무리 수비 전술에 익숙하지 않은 포츠머스 일지라도 2골은 내주지 않을 거란 판단이었다.
물론, 체력적으로 더 여유가 있었다면 오히려 더욱 공격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실점한 바이에른 뮌헨은 모하메드 살라가 무서워도 라인을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체력이 받쳐줄 때의 이야기였을 뿐. 가뜩이나 지친 선수단 상태에 적용할 수단이 아니었다.
요컨대, 굉장히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며 현실적인 판단.
다만, 완벽하다고 해도 될법한 소하의 계획에는 한가지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바로, 공간의 연주자 토마스 뮐러의 존재를 너무 가벼이 여겼다는 점이었다.
‘보인다.’
토마스 뮐러.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월드 클래스였지만 이번 경기에는 존재감이 거의 뽐내지 못하며 명성을 제대로 구겼다.
포츠머스가 그가 공간을 연주할 틈을 주지 않을 만큼 견고했기 때문.
하지만 공격적인 전술에서 수비적으로 전환하는 포츠머스의 작은 틈 속에서 그는 기어코 길을 찾아내었다.
포메이션을 변경하며 생긴 찰나의 시간과 공간.
종이 한 장 지나가기도 힘들 법한 이 틈을 토마스 뮐러는 미꾸라지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파앙!
이에 맞춰 딱 떨어지는 킹슬리 코망의 깔끔한 크로스!
“!!”
“?!”
포츠머스의 수비수들이 토마스 밀러를 신형을 발견한 순간은, 이미 그가 몸을 날리며 머리에 공을 대고 있을 때쯤이었다.
-철썩.
페트르 체흐가 팔을 쭉 뻗어봤지만, 공을 조금 건드렸을 뿐. 골망을 가르는 것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골입니다! 바이에른 뮌헨이 3분 만에 동점 골을 뽑아냈습니다!]
[토마스 뮐러, 80분 내내 잠잠하더니 기어코 한 건 해냈습니다!]
뜨거웠던 프래튼 파크에 찬물을 끼얹는 동점 골이었다.
그리고 토마스 뮐러가 뿌린 찬물은 단순히 서포터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잠시나마 희망을 보았던 포츠머스 선수들에게는 더욱더 큰 효과를 가져왔다.
흔들흔들.
흔들리는 두 눈동자와 그보다 더 흔들리는 평정심.
수년의 시간 동안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빠르게 따라잡힌 적은 처음이었던지라 파장이 장난 아니다.
“괜찮아! 아직 할 수 있다!”
멀리서 소하의 격려가 프래튼 파크를 쩌렁쩌렁하게 울렸지만 이미 완전히 흔들린 포츠머스 선수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쇄효과.
정신이 흔들리자, 정신이 붙들고 있던 체력적인 한계가 순식간에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철썩!
결국, 후반 87분.
오늘따라 유달리 쌩쌩하던 아르연 로벤이 특유의 플레이를 성공시키며 역전 골을 뽑아내기에 이르렀다.
[아···. 포츠머스가 이렇게 무너집니다.]
[정말 잘 싸웠는데, 결국 사소한 실수와 체력적인 한계에 쓰러지고 마는군요.]
매우 아쉬워하는 장내 아나운서와 해설이었다. 중립을 지켜야 했지만, 영국인인 그들로서는 포츠머스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삑! 삑! 삑!
이윽고 경기 종료를 알리는 매정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고 소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후우···. 내 실수다.”
체력적 한계에 처한 상황에서도 최강,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최고의 모습을 선수들을 어찌 욕할 수 있으리.
그저, 무리한 포메이션 변화를 추구했던 자신의 선택이 원망스러울 뿐인 소하였다.
***
“선수들은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을 상대로 호각 이상을 보여줬어요. 다만, 제가 유프 하이켄스 감독에게 패배했을 뿐이죠. 오늘의 패배는 오롯이 저의 잘못입니다.”
소하는 경기가 끝난 후 이어진 기자회견장에서 잘못을 순순히 시인했다.
사실이기도 했거니와 아쉬운 패배에 굉장히 흔들린 선수들의 사기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어진 토트넘과의 프리미어 리그 7라운드에서 소하의 포츠머스는 역사상 최악의 참사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삑! 삑! 삑!
[경기 종료. 포츠머스가 토트넘에게 5-0 대패를 당합니다!]
[4년 3개월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성소하 사단의 참패에요!]
5-0.
단 한 번도 4골 이상 차이로 져본 적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5골이나 실점한 적이 없었던 소하의 포츠머스에게 큰 충격을 선사했다.
“허···. 허허.”
이정재의 해트트릭을 바라보며 허탈한 헛웃음을 내뱉었던 소하.
불과 얼마 전까지는 바이에른 뮌헨을 꺾어버릴 기세였거늘. 왜 이렇게 변했는지 어안이 벙벙하다.
“트,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선수들의 사기를 다시금 끌어올리기 위해 소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바로 시도하기에는 시간은 너무나도 부족했다.
9월 27일.
9월의 마지막 일정이자 AS로마의 홈으로 찾아가야 하는 챔피언스 리그 조별 3차전이 바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 208화. 17-18시즌 챔피언스 리그. (7)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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