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험로. (4) >
포츠머스의 한 개인 병실. 따스한 여름 햇살이 훈훈하게 내리쬐며 굉장히 편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실연의 아픔마저도 금방 치료해줄 것만 같은 포근함.
다만, 이곳을 찾은 중년 남자, 잭 밀러의 마음만큼은 치료해주기 어려웠나 보다.
아직도 썩은 토마토 같은 몰골을 한 잭 밀러를 소하가 반긴다.
“오. 밀러 아저씨. 어서 오세요.”
겨우 2일 쉬었거늘.
전화기도 빼앗긴 채 쉬는 것에 전념한 덕분인지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른다.
“···얼굴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감독님.”
“그러게요. 몇 년 만에 축구를 잊고 쉬어보는지 모르겠어요.”
탈옥을 시도한 사람답지 않게 입원 생활에 굉장히 만족해하는 소하였다.
하긴, 축구에 미쳐 살아온 지 어언 40년이 넘었다.
회귀 후의 5년과 그전의 35년.
다섯 살 남짓부터 시작된 휴식 없는 레이스는 알게 모르게 소하의 몸과 마음을 많이 갉아먹었나 보다.
“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랄까···. 하여튼 제 건강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그래서 아저씨는 어떤 선수를 제외하고 싶으신가요?”
“···어, 어떻게···.”
“뻔하잖아요. 전권을 받았음에도 죽상으로 절 찾아올만한 일은 몇 개 없죠.”
모처럼 나온 소하의 뛰어난 통찰력 덕분에 밀러는 더욱더 압박을 받았다.
‘저런 분의 빈자리를 메꿔야 한다니···.’
눈을 질끈 감는 밀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미리 생각해둔 선수들의 이름은 내뱉는다.
“프레디 스톤, 존 말로리, 방주호, 커너 러셀···. 입니다.”
밀러는 힘겹게 말을 마쳤다.
방주호를 제외하고선 모두가 포츠머스 1기의 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단장지애.
자식을 잃은 슬픔은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조금 과장했을지도 몰랐지만 지금 밀러의 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흡사 조강지처를 잃은 남편의 모습이랄까. 매우 비통한 표정이다.
하지만, 소하는 방긋 웃으며 밀러의 대답을 크게 반겼다.
“정확히 실력순으로 자른 명단이네요.”
“그렇습니다···. 결국 프로의 세계에서는 실력이 최우선 아니겠습니까? 사심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훌륭하시네요.”
밀러의 결단에 진심을 담아 칭찬의 말을 건네는 소하. 정을 잊고 사람을 끊어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선발 명단 짜는 거부터가 비슷한 부류니까. 어쩔 수 없는 직업의 업이야.’
그런 의미에서 밀러는 제법 감독다운 역할을 한 셈이었다.
“···감독님도 이 명단에 동의하시는 겁니까?”
“어느 정도는요.”
“어느 정도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력순으로 자른다는 뜻에 동의하는 거예요.”
즉, 풀이는 좋았으나 답은 틀렸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밀러는 재빨리 소하의 의견을 들고 싶었지만 소하가 한발 빨랐다.
“알랑 생막시맹, 아다마 트라오레, 프레디 스톤, 방주호. 이 넷을 빼세요.”
“···네?!”
밀러는 깜짝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프레디 스톤과 방주호는 이해가 됐지만 알랑 생막시맹과 아다마 트라오레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러셀과 말로리를 명단에 포함하는지 궁금하신 거죠?”
“그렇습니다. 둘의 실력은 이제 확연히 떨어지지 않습니까.”
커너 러셀과 존 말로리.
커너 러셀은 지난 시즌 선발 출장 횟수가 10경기도 되지 않았고,
존 말로리는 리그에서의 선발이 아예 없는 전력 외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선수였다.
이런 둘을 꿈의 무대인 챔피언스 리그에 데리고 가겠다니.
오랜 세월 동안 소하 곁을 지켜온 밀러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판단이었다.
굳이 이해하겠다면, ‘정’ 때문이겠지만, 소하가 큰일을 앞두고 정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속을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난해해지는 소하의 결정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애들 챙겨주려고 정에 연연한 건 아니니까요.”
“그, 그 정도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말했듯이 전 매우 냉정하게 실력순으로 뽑았을 뿐이에요.”
“···무슨?!”
더욱 혼란스러워하는 밀러.
아무리 생각해봐도 커너 러셀과 존 말로리보다 알랑 생막시맹과 아다마 트라오레의 실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다마 트라오레는 소하마저 포기한 돌머리였지만, 덕분에 얻게 된 엄청난 돌파력은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다.
게다가, 알랑 생막시맹은 첫 번째 훈련 때 감탄을 금치 못할 수준의 재능을 가진 원석이었다.
이미 거의 완성된 드리블.
이를 바쳐주는 엄청난 속도.
아직 이기적이고 경험이 부족하지만 모든 단점을 포용하더라도 가진 장점이 워낙에 특출했다.
밀러에게는 조카 같은 선수들이지만, 커너 러셀과 존 말로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요.”
밀러의 속마음을 알아챈 소하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이어진 소하의 설명에 밀러는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선수단 전체를 두고 실력을 매겼잖아요. 전 포지션별로 나눈 것뿐이에요. 그럼 이해가 가시겠죠?”
“아···!!”
밀러는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
덕분에 한결 밝아진 밀러의 표정을 바라보며 소하는 입술을 움직인다.
“먼저, 왼쪽 풀백을 봐보죠. 앤디 로버트슨, 로빈 고젠스, 방주호. 이 셋 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선수는 방주호죠.”
“아다마 트라오레도 마찬가지군요. 오른쪽 풀백이나 오른쪽 윙어 중에서는 3순위이니까요.”
“정확해요.”
“그리고···. 왼쪽 윙포워드에는 조쉬 킹과 도봉산이 있으니 알랑 생막시맹의 자리도 없군요···.”
“정답! 분류상 조쉬 킹을 공격수 자리에 놨지만, 엄밀히 말하면 왼쪽 윙포워드라고 봐야죠. 제가 말했잖아요. 실력순이라고요.”
소하의 말처럼 굉장히 냉정하게 실력순으로 자른 명단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럼 어째서 존 말로리는 살아남은 거고 프레디 스톤은 탈락입니까?”
“이건 다른 관점에서 경쟁한 거예요.”
“어떤···?”
“바로, 공격 쪽 멀티 플레이어 자리 말이에요.”
“그렇군요!”
정말 지독하게 냉정한 분석이었다.
존 말로리와 프레디 스톤은 모두 좌·우, 중앙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공격 포지션을 뛸 수 있는 선수들.
그리고 토너먼트에서의 멀티 플레이어란 ‘히든카드’였기에 필수적인 존재였기에 둘 중 하나를 골라버린 소하였다.
“커너 러셀이 조금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수비 전문’이라는 타이틀은 보다 강팀들과 싸워야 하는 우리에게는 필수적이죠.”
“그렇죠!”
“결국 우리는 약자이고, 이를 극복하기에는 미드필더 조합을 다양하게 가져가야 해요. 이 때문에 미드필더의 숫자는 그대로 유지한 거예요.”
“허···. 정말 대단하십니다.”
밀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명단 제외를 당한 선수들도 이해할 만큼 합리적인 선택 아닌가!
정말 보면 볼수록 소하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지는 밀러였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어요.”
“무슨···?”
전과는 다르게 소하는 잠시 망설이다 한숨을 내뱉는다.
“이래저래 명단 제외당한 애들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렇죠. 아무리 합리적이더라도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맞아요. 그러니까 밀러 아저씨가 힘 좀 내주세요. 애들이 잘 따르잖아요?”
눈을 찡긋거리며 지독한 부탁을 하는 소하를 바라보던 밀러는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달래보죠.”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부탁을 받았지만 전보다는 훨씬 밝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밀러였다.
***
상당히 논란이 된 챔피언스 리그 명단 발표는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물론, 선수들이 실망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못했다.
그저, ‘다음 기회’를 노리는 방향으로 선수들의 실망감을 무마시킨 밀러의 공이 컸다.
그간 후덕한 인덕을 쌓아온 밀러의 업이 좋은 방향으로 보답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여튼, 작지만 큰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한 밀러 사단.
이제 A 매치데이가 끝나고 진짜 문제를 헤쳐나갈 시간이 다가왔다.
프리미어 리그 4라운드의 상대, 레스터 시티를 홈에서 맞이하며 밀러는 처음으로 기자회견의 시간을 가졌다.
“하, 하하. 안녕하십니까.”
어색한 웃음으로 기자들을 반기는 밀러. 평소 후줄근한 운동복이 아닌 말쑥한 정장을 입어서인지 제법 사람이 달라 보인다.
하지만 기자들의 밀러의 외관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성소하 감독의 부재는 어떤 식으로 헤쳐나갈 생각이십니까?”
“현상 유지를 하실 겁니까?”
“돌발 상황에 대한 다양한 대응 대책은 충분히 준비하셨습니까?”
“성 감독의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선발진은 성소하 감독의 지시로 정한 겁니까?”
무수히 쇄도하는 거침없는 질문!
밀러는 순간, 눈앞이 고장 난 텔레비전처럼 아득해졌지만, 꾸역꾸역 버텨냈다.
“기존에 지향하던 방향으로 팀을 유지할 겁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감독님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수억분의 1의 상황을 대비해서 휴식을 취할 뿐입니다.”
“선발은 코치진들과 고심해서 가장 몸 상태가 좋은 선수를 뽑았습니다.”
처음에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을 더듬었지만, 마지막에는 제법 감독답게 마쳤다.
‘감독님은 어떻게 했더라···.’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소하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을 더듬은 덕분이었다.
이래저래 자리를 비웠음에도 ‘잔상’만으로도 팀을 지켜주는 소하였다.
하지만, 경기장 내부는 잔상만으로는 수호하기 힘들었다.
-삑! 삑! 삑!
[경기 종료! 포츠머스가 홈에서 레스터 시티와 간신히 무승부를 거둡니다!]
[예기치 못한 선제골에 크게 흔들린 포츠머스였습니다.]
레스터 시티와의 진땀 나는 무승부!
경기 초반, ‘제이미 바디’의 아무렇게나 때린 슛이 행운의 굴절로 그대로 골망을 갈랐고 포츠머스는 힘든 싸움을 이어나갔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소하의 부재는 더욱 크게 다가왔지만, 선수들의 분투로 후반 추가시간에 극적인 동점 골을 달성.
기적적으로 무승부를 거두었다.
많은 사람이 예상했던 데로 국가대표팀이 즐비한 선수단의 힘이 드러난 경기였다.
“수석코치님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어느 정도 실수를 하셔도 좋습니다.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우리는 아저씨 생각보다 훨씬 세다고요. 모처럼의 기회인데 화끈하게 해보세요!”
엉망진창인 지휘를 선보이고 좌절한 밀러에게 선수들이 나서서 위로할 정도였다.
“이, 이 녀석들···.”
그렁그렁.
두툼한 볼살을 떨며 눈가에 물기를 만들어낸 밀러. 상당히 감동하였다.
‘그래. 우리 팀은 강하다. 나간 놈이 사령탑이라도 강호 레스터 시티와 무승부를 거두는 팀이야! 해보자!’
감동과 함께 되찾은 자신감!
주눅이 잔뜩 들었던 밀러는 사라지고 4년 2개월 전, 감독의 자리를 노리던 밀러로 돌아왔다.
그래서일까.
4일 뒤에 이어진 프리미어 리그 5라운드, 스완시 시티와의 경기에서 3-1 승리를 거두기에 이른다.
사흘 밤낮을 지새워가며 최적의 선발을 꾸린 밀러의 공이었다.
[포츠머스가 개막 이후 무패로 질주를 시작했습니다!]
[성소하 감독의 부재를 선수들과 코치진, 보드진들이 끈끈하게 메꾸고 있어요. 정말 멋진 팀입니다!]
[지난 시즌의 성적은 기적이 아니라 실력임을 증명합니다!]
걱정스러운 말을 쏟아내던 비평가들이 모두 박수부대에 합류해버렸다.
이는 서포터들도 마찬가지.
이제 곧 다가올 포츠머스의 역사상 첫 챔피언스 리그 조별 경기에 작은 희망을 품기에 이르렀다.
***
-조별 리그 1차전 상대는 파리 생제르맹.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네이마르, 음바페를 어떻게 막지?
-밀러 수석코치는 잘해주고 있으니까 최대한 무승부를 노려보자.
-우린 할 수 있다!
-언제나 우리 팀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팀이었지.
딸칵. 딸칵.
늦은 밤, 클럽하우스에서는 밀러가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열심히 마우스를 놀렸다.
그도 사람인지라 대중들의 평가가 어떤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소하는 별로 추천하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호평 일색이었기에 결과는 꽤 만족스럽다.
하지만 정작 대단한 지지를 받은 밀러의 표정은 영 좋지 않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는 밀러. 내일이면 이틀 뒤에 열리는 파리 생제르맹과의 경기를 위해 파리로 향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구단의 역사상 첫 챔피언스 리그를 내가 이끌 수 있을까?”
암만 서포터들의 지지를 눈으로 확인했다고 해도 이건 도저히 자신감을 가지기 힘들었다.
아니, 그것보다 이 영광스럽고 역사적인 자리에 소하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신이 있다면 정말 심술궂은 존재일 거야···.”
밀러는 모처럼 이런 불합리함을 선사한 신에게 불평을 쏟아냈다.
좋지 않은 운은 좋은 감독으로 등가 교환했다고 치더라고 이건 좀 아니지 않냐는 거였다.
“듣지도 않으시겠지만 제발 적당히 좀 해주십시오···.”
컴컴한 클럽하우스의 천장에 대고 중얼거리는 밀러.
착잡하기 그지없는 그의 중얼거림은 공허하게 흩어진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신에 닿은 걸까.
기적적으로 중얼거림에 대한 응답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에요. 해도 너무하죠.”
이 발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소하였다.
“가, 감독님! 어, 어떻게.”
매우 놀라는 밀러였다. 소하는 분명 감금과 다름없는 요양 중이었을 터. 어떻게 이 야밤에 클럽하우스에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후후.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제가 빠질 순 없죠. 탈옥했어요.”
당연하게도 몰래 빠져나온 것이었다.
“아니, 자물쇠로 잠가두지 않았습니까? 맨날 도망치셔서.”
“오늘은 열려있더라고요.”
“···아···.”
밀러는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병실 자물쇠의 보유자는 소하의 어머니였으니까.
‘하긴,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지···.’
집에서 자고 있을 딸내미들을 떠올리며 함박웃음을 짓는 밀러. 소하 또한 밀러의 미소에 진한 미소로 화답하며 호쾌하게 외친다.
“명품 샵 방문···. 이 아니라 네이마르를 꺾으러 한번 가보자고요!”
약간 불순한 목표도 숨어있었지만, 이로써 다시 한번 기적을 써 내릴 준비를 마친 소하와 포츠머스였다.
< 201화. 험로.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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