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휴식과 준비. (4) >
2년 만의 돌아온 대한민국.
소하의 바람대로 도착하자마자 몰려드는 수많은 인파를 피하긴 했으나 고작 하루의 휴식시간을 벌었을 뿐이었다.
다음 날부터는 어마어마한 대중에 관심에 소하의 어머니마저도 시큰둥하게 한 마디 던졌다.
“너 빨리 분가해라.”
“···.”
소하는 딱히 반론을 펼치지 못했다. 본가 앞에서 진을 진 대규모의 기자무리는 절로 현기증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마침 며느릿감도 데려왔으니까 이참에 바로 식 올리고 나가면 되겠네.”
“···며느릿감이 아니라 에이전트라니까요. 그리고 저 집 살 돈 없어요.”
진절머리를 치는 소하. 그와는 정반대로 뒤에서 모자의 이야기를 듣던 에밀리아 존슨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호호홋. 어머니도 참.’
며느릿감이라니.
며느릿감이라니!
일단 최소한 소하의 어머니에게 합격점을 받았단 소리 아니던가.
이어진 소하의 에이전트 운운은 아무런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하여튼, 좋아 죽는 에밀리아 존슨은 그렇다 치더라도 소하의 어머니는 표정이 조금 굳는다.
“돈이 없어? 너··· 많이 벌잖니.”
소하의 주급은 대략 5,000만 원.
일 년 전에 2년 재계약을 맺으며 대폭 상향된 주급이다.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꿈에도 못 꿀 엄청난 금액이다. 연봉도 아니고 월급도 아닌 주급이 5,000만 원이라니. 엄청난 금액이다.
시급으로 치자면 시간당 30만 원이다.
아마 국내의 월급쟁이 중에서 소하만큼 버는 사람은 없을 거다.
한 달 월급으로 가장 싼 페라리를 구매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30대!
이런 그가 돈이 없다고 분가를 못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로서는 속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다 투자하는 데 썼다니까요. 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이에요.”
“···어이쿠 자랑이다. 자랑.”
“그래도 조만간 집 한 채는 사야겠네요. 이 조용한 동네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도 예의가 아니죠.”
“그걸 이제 알았니? 근데 돈 없다면서. 엄마가 좀 보태주리?”
“···.”
한 달에 보너스까지 합쳐서 3억 원을 벌어 재끼는 아들이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아기로 보이나 보다.
물론, 소하는 정중히 거절했다. 어머니의 돈은 어머니의 남은 반백 년의 여생을 편히 보내는 데에 오롯이 쓰여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됐거든요. 아, 저 조만간 챔피언스 리그 진출 보너스 들어오거든요. 잘은 모르는데, 한 몇십억쯤 될걸요? 그럼 세금 떼도 아파트 하나 정도는 살 수 있겠죠.”
“그럼, 잘됐네.”
“그리고 조만간 재계약도 할 거 같아요. 한 두 배 인상 정도 봐주려고요.”
“호호. 참 너는 포츠머스를 너무 좋아한다니까. 그렇다 해도 너무 손해만 보면 안 된다는 걸 잊으면 안 돼.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가 된단다.”
“그럼요. 잘 알고 말고요.”
죽이 아주 잘 맞는 모자지간이다.
다만, 이를 바라보던 에밀리아 존슨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
주급을 두 배나 인상하는 재계약을 굉장한 호의로 여기는 모습이 너무 우악스럽기 때문일까?
하긴, 여기서 소하의 주급이 두 배 인상되면 주당 1억 원이다.
이 정도면 돈 많기로 유명한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금액.
아직 프리미어 리그 2년 차에 불과한 포츠머스에는 부담스러울지도 모르는 주급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밀리아 존슨의 생각은 달랐다.
‘역시 포츠머스에 대한 사랑만큼은 최고라니까. 존경받아 마땅해.’
오히려 크게 칭찬하는 그녀였다.
단순히 소하에게 콩깍지가 씌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 세계의 명문구단들이 본격적으로 성소하 감독님에게 접촉 중인데도 남으려고 하시다니. 역시 대단해.’
그렇다. 그랬던 것이었다.
에밀리아 존슨이 손에 들고 있는 신문만 봐도 1면을 소하의 향후 행보에 대해서 대서특필한 상황이다.
[아르센 벵거 감독, 은퇴가 가까워지며 후계자로 성소하 감독을 지목.]
[이적시장의 대어는 선수가 아닌 감독.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 성소하에게 초대형 클럽들이 접촉을 시도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6위로 마무리한 조제 무리뉴 감독 대신 성소하 감독을 원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 알렉스 퍼거슨 경. ‘성소하를 사령탑으로 앉혀야 한다.’]
[맨체스터 시티, 이대로 펩 과르디올라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지, 성소하를 데려올지 딜레마에 빠졌다.]
[독일의 명문, 도르트문트. 성소하 감독에게 구애.]
[안첼로티 감독을 경질한 바이에른 뮌헨. 차기 사령탑으로 성소하 감독을 낙점했다.]
명문구단의 열화와 같은 러브콜!
심지어 뜬소문이 아니라 실제로 소하의 에이전트에게 진지하게 문의 중인 사항이었다.
그리고 이런 구단의 감독으로 간다면 감독으로서 몇억 원의 주급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례로 이적설의 한 축인 맨체스터 시티의 펩 과르디올라 감독은 주급만 4억 원을 넘게 받는다.
만약 소하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면 비슷한 수준의 급여 정도는 받을 터.
소하가 포츠머스에 요구할 주급 2배 인상은 그리 과한 조건이 절대 아니었다.
‘역시 돈보단 사랑이구나. 또 반해버렸어. 아아.’
다시 한번 콩깍지가 제대로 씌어버린 에밀리아 존슨. 눈동자마저 하트모양으로 변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웅성. 웅성.
밖에서 일대 소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이니?”
한마음 한뜻이 되어 소하에게 질문을 던지는 두 여성. 보통 이런 일이 생기면 소하가 범인이었기에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음···.”
소하는 잠시 생각이 나지 않는지 턱을 매만지며 기억을 헤집어본다.
그러다 간신히 떠올렸는지 깜짝 놀라며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간다.
“아! 맞다. 오늘 청와대에서 점심 먹기로 했었지?!”
“···.”
“···.”
두 여성은 할 말을 잃었다. 청와대에서 점심을 먹는다면 국가의 수장인 대통령과의 오찬 약속이 있단 말 아니던가.
이런 중요한 일을 말도 해주지 않았을뿐더러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좀만 기다려 달라고 하세요! 금방 씻고 나올 테니까! 머리만 감으면 돼요!”
동네 카페에 간다고 준비하는 꼴과 다름없는 모습에 두 여성의 한숨은 조금 깊어졌다.
***
청와대까지 방문한 소하.
본격적인 한국 일정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찾아온 건 역시나 광고주들.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중인 소하는 광고업계의 뜨거운 블루칩이었다.
“10억에 아파트 광고 하나만···.”
“20억. 자동차 광고 하나 가시죠.”
“30억 플러스 알파입니다. 게다가 골프채 광고라면 감독님의 품격과 어울리지 않을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의 광고모델 제안이 범람했다.
S급 남자배우가 CF 한 작품에 10억 원 안팎이라는 점을 볼 때 소하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스포츠업계에서는 필살기와 다름없는 입지라 단위 자체가 달랐다.
잘 혼합된 혼혈 특유의 뛰어난 외모.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
더군다나 감독이라는 특별한 위치는 다양한 계층을 공략하기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더군다나 골프는 관심 있는 계층의 구매력이 상상을 초월하는지라 파격적인 제안까지 나와버렸다.
“감독님. 이걸로 하시죠!”
“존슨 양이 대충 마음에 드는 거로 해줘요. 난 몸만 갈 테니까.”
“호호. 알겠어요. 골프를 하는 감독님이 멋질 거 같았는데, 잘됐네요.”
“···.”
휴가 기간에 한 달여 간 소하의 담당이 된 에밀리아 존슨은 마냥 행복해하며 사심 섞인 계약을 진행했다.
그렇다고 그녀의 사심이 소하에게 마이너스 요소가 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녀야말로 어떤 의미로서는 소하의 진짜배기 최고의 팬.
세상천지를 뒤져봐도 그녀만큼 소하가 어느 광고에 잘 어울리는지 잘 판단할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소하는 이미지에 걸맞은 광고를 거침없이 촬영하며 인기가 나날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
이외에도 각종 예능이나 특집방송, 강연에도 나가면서 어마어마한 양의 공적 업무를 차례차례 분쇄해나가는 데 성공.
순식간에 지난 1년간 감독으로서 벌어들인 수입보다 많은 수입을 거두기에 이르렀다.
“후후후. 이러다가 비트코인 대박이 터지지 않아도 포츠머스를 사버리겠군.”
물론, 조금. 아니, 상당히 무리였지만 그만큼 많이 벌어들였다는 소리였다.
역시나 사람은 일단 유명해지면 벌어들이는 액수가 차원이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소하가 벌어들인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이득뿐만이 아니었다.
무형의 이득이지만 어떨 땐 돈보다도 중요한 인맥에도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저기, 감독님. 이번에 2002년 월드컵 선수들 모이는 자리에 와 주실 수 있나요?”
“축협 임원들이 무척 뵙고 싶어 합니다. 제발 10분이라도, 아니. 1분이라고 얼굴을 보여주셨으면···.”
“아는 연예인 형이 제발 한 번만 자리를 가지고 싶다고 조르셔서요. 진짜 유명한 배우이신데. 그 있잖아요, 바리깡으로 혼자서 머리 깎는···.”
“가수 겸 배우까지 하는 분이 엄청 관심이 있어 하더라고요. 전에 감독님께서 보고 펑펑 우셨던 너의 아저씨 주연 말이에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얼굴을 아는 셀럽들이 소하와의 만남을 원했다.
그야말로 셀럽들의 셀럽!
연예인들의 연예인!
나름 유명하다고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던 사람들이 소하 앞에서는 일반인으로 변해버렸다.
딱히 이해가 가지 않을 수준은 아니었다. 소하는 의도치는 않았지만, 국내에서는 얼굴을 보기 무척 힘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SNS는 인생의 낭비’라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명언을 맹신하는 종자라 SNS도 하지 않는 소하다.
덕분에 신비주의자 컨셉까지 생겨서 모두가 한 번쯤 만나고 싶어 했고 소하는 자비롭게도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언젠간 은퇴할 테고, 한국에서 살 텐데 외톨이로 살기엔 인생은 너무 길잖아?’
혼혈이란 특성과 집요한 꿈 때문에 학창 시절에 깊게 사귄 친구도 적은 소하였기에 이참에 인맥을 쌓아놓기로 작정했다.
이것은 청와대로의 초청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아무런 관심도 없는 소하는 그저 인맥을 원했을 뿐이었다.
‘언젠간 한국에서 살 건데 최고 권력자의 부탁을 거절하기엔 좀 그렇잖아?’
정치엔 관심이 없지만 여생을 위해서 정치적인 선택을 한 소하였다.
하여튼, 이번에도 굉장히 바쁜 휴가를 보낸 소하. 어느덧 17-18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
포츠머스로 돌아가기 하루 전.
에밀리아 존슨은 모처럼 평화롭고 여유로운 저녁을 보내는 중이다.
소하의 본가 근처의 호수공원에서 가지는 짤막한 산책 시간. 문화가 전혀 다른 외국이었지만 그 평화로움은 다르지 않았기에 깊은 평안함을 얻는다.
이럴 때 곁에 소하가 있었다면 제법 분위기가 살았겠지만, 그는 이미 지치고 지쳐 곯아떨어져 본가에서 퍼질러 자는 상태.
대신 그녀의 옆은 소하의 어머니가 함께해주고 있었다.
“좋네요. 한국의 공원도.”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 그래도 에밀리아가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네.”
“제가 괜히 한국어를 배웠겠어요?”
“하긴, 나보다 잘하는 거 같아.”
“호호. 설마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하의 어머니와 에밀리아 존슨. 지난 한 달간 상당히 사이가 가까워져 얼른 보면 모녀 사이 같기도 하다.
“지난 한 달간 우리 못난 아들 뒷바라지해 줘서 고마워.”
소하의 어머니는 에밀리아 존슨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한 달간의 바쁜 일정은 엉망이 됐을 거다.
“뭘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그리고 저도 덕분에 용돈 많이 벌었어요.”
좋아한다는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있었지만, 용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은 담백한 사실이었다.
소하는 경제 관념이 희박한 편이다.
즉, 손도 크다는 말이다.
휴가 기간에 고생한다는 의미로 수수료를 20%나 챙겨주었기에 에밀리아 존슨은 본의 아니게 외화벌이를 잔뜩 해버렸다.
“사실, 제가 포츠머스에서 4년 동안 일한 것보다 요 한 달 동안 번 게 더 많답니다. 호호호!”
좋아 죽는 에밀리아 존슨이었다.
한 달 내내 소하와 달라붙어 생활한 것도 크나큰 선물이었는데 현찰도 두둑이 벌어 버리다니. 최고의 휴가였다.
하지만 에밀리아 존슨의 속마음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꽤 심란했다.
‘한 달이나 같이 살았는데 관심이 없어 보여. 난 여자로 보이지 않는 걸까···.’
소하가 이성으로서 자신을 봐주지 않는 것 같아 상당히 상심했다.
암만 목석같다고 해도 이성과 한 달이나 시간 대부분을 같이 보냈으면 무언가 반응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갑은 두둑해졌지만, 마음은 공허한 에밀리아 존슨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소하의 어머니는 그녀의 어깨를 보드랍게 감싸줬다.
“내 못난 아들놈은 그저 다른 곳에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그놈의 꿈이 뭔지. 거기에 미쳐 있을 뿐이야.”
“···그런가요···.”
“그럼. 그리고 녀석의 어머니로서 단언컨대 소하는 에밀리아한테 관심이 있어.”
“정말요?”
“그렇다니깐. 소하가 그동안 어떤 여자를 만나고 다닌 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 소개한 여자는 에밀리아가 처음이야.”
“···!!”
처음이란 말에 에밀리아 존슨의 두 눈동자에는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처음이란 특별하다는 뜻 아니던가.
별거 아닐지 몰라도 짝사랑하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머니의 감으로서는 분명 어느 정도 마음에 두고 있음이 분명해. 마침 에밀리아는 소하가 말했던 이상형에 가깝고.”
“네?!”
“정말이야. 십 년 전인가? 자기는 잘 챙겨주고 생활력 좋은 여자가 좋다고 했거든. 지도 아는 거지. 자신의 단점을 말이야.”
동물이란 본능적으로 자신의 단점을 메꿔줄 반려를 찾는 법.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에밀리아 존슨은 훌륭하게 자격을 갖췄다.
“물론, 내감이 틀렸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일단은 기다릴 수밖에 없어. 나 또한 말이지.”
“···어머니도요?”
“그래. 소하가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진짜 자기 인생을 살길 바라거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는 소하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줄 수밖에 없어.”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
그로 인해 소하가 품은 꿈에 대한 갈망은 소하의 어머니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모는 언제나 자식들이 자신의 그림자를 벗어나 혼자서 당당히 서길 바라는 존재들.
이 때문에 소하의 꿈이 이루어지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바라는 소하의 어머니였다.
“···어려울 건 없네요. 그동안 계속해왔던 것이니까요.”
“그렇지. 잘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담담히 미소를 주고받는 에밀리아 존슨과 소하의 어머니. 어느덧 은은한 주황빛과 석류꽃 같은 붉은빛이 섞인 노을이 그녀들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 193화. 휴식과 준비.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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