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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천재 감독-192화 (192/306)

< 192화. 휴식과 준비. (3) >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는 말이 있듯이 소하의 일당은 바로 짐을 싸고 한국행을 준비했다.

“이미 일등석 세 자리는 모조리 예약해뒀으니까 빨리 준비해요! 우리는 오늘 한국으로 간다!”

“알았어요!”

신이 난 에밀리아 존슨은 번개 같은 속도로 순식간에 여행 준비를 마치었다.

두 개의 거대한 여행용 가방을 20분 만에 완비한 에밀리아 존슨의 능력은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엿볼 수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

캐리어를 질질 끌며 등장한 에밀리아 존슨은 당차게 외친다.

“자! 출발하죠!”

신대륙으로 떠나는 콜럼버스라도 이 열정에 비하자면 별거 아닐 거다.

“좋은 기세야.”

“음. 훌륭한 군인의 자질이 돋보인다.”

극찬을 아끼지 않는 소하와 김용한. 끼리끼리 모여서 논다는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가볼까.”

한국원정대의 놀라운 행동력!

서로 만난 지 두 시간 만에 한 달여 간의 한국행의 첫 발걸음을 떼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호쾌하다.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고작 세 걸음 만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끼이이익.

난데없이 등장한 검은 고급 세단.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검은 정장들.

갑작스럽게 등장한 불청객들은 소하의 일당들을 가로막았다.

“뭐지?”

“뭔가?”

“뭐예요?”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눈썹을 한데 모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세계 최고의 감독 중 하나.

신장 2m, 몸무게 130kg의 근육 괴물.

그냥 착해 빼진 귀여운 여직원.

뭐, 마지막은 제외하더라도 유명인사 두 명이 싸늘한 눈빛을 쏘아 보내자 압박감이 장난 아니다.

“···.”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는 검은 정장의 괴한들. 그래도 물러서지는 않는다.

“정녕 물리적인 해결을 원하는 건가?”

김용한이 한발 나서며 조용히 읊조렸다. 남들보다 머리 두 개는 큰 그가 움직이자 흡사 폭풍이 움직이는듯한 착각마저 든다.

-꿀꺽.

일촉즉발의 상황.

기분 좋은 휴가길을 수상한 괴한들이 가로막자 단단히 화가 난 김용한이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가 보네요.”

때마침 다행스럽게도 차갑지만 아름다운 목소리가 상황을 반전시켰다.

동시에 검은 정장들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하가 일전에 한 번 말을 섞었던 여성이었다.

“어? 그 뭐냐···. 로라 맥닐이던가? 그 구단주 영감님 딸내미.”

일 년 전에 잠깐, 그것도 별로 좋지 않은 만남이었기에 이름을 까먹어 버린 소하였다.

“···당신은 여전히 얼빠졌네요. 라우라 맥닐입니다. 이번에는 꼭 기억해주시길 바랄게요.”

“···뭐, 비슷하구먼. 근데 무슨 일이래요? 우리 갈 길이 바쁘거든요?”

“정말 바쁜 것 같더군요. 당신의 소재를 찾느라 상당히 고생했어요. 어찌나 열심히 돌아다니던지 그대로 놓치는 줄 알았다니까요.”

소하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내뱉는 라우라 맥닐. 예나 지금이나 한 톨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다.

“저기요. 저 그리 인내심이 큰 사람이 아닌데요.”

부아가 치민 소하. 돈줄의 딸내미라고 많이 봐줬지만,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진정한 남녀평등을 주창하는 소하 본연의 모습이 튀어나오려고 한다.

“한국으로 간다던데, 제가 도와드리죠.”

“···네?”

난데없는 라우라 맥닐의 제안에 소하는 폭발하던 화가 멈추었다.

“제 전용기를 빌려드리겠다는 이야기에요. 원래는 할 이야기가 있지만, 성소하 씨의 일정을 엉망으로 만드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전용기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자?”

“바로 그거예요.”

상당히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한국으로 날아가는 전용기 안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소하와 라우라 맥닐 모두를 만족시키는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전용기는 인천공항이 아닌 김포공항에만 터미널이 있지. 사람들을 피할 절호의 기회다.’

출발 시각도, 도착 시각도 새어 나갈 리가 없고 공항도 다른지라 최고의 방법이었다.

애당초 소하는 이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실행하지 못했던 방법이기도 했다.

‘전용기가 어디 동네 택시는 아니니까.’

수백억에서 수천억짜리 전용기를 어떻게 산단 말인가. 대여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비트코인에 대부분의 주급을 넣는 소하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불가능했다.

“뭐, 좋습니다.”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저희 직원들은 그저 제 명령에 따라 어떻게든 당신들을 붙잡은 것이니 화를 풀길 바라요.”

“그럼요.”

“그럼 준비한 차에 타시길.”

자기 할 말을 마친 라우라 맥닐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금 고급 세단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괜찮겠냐?”

그런 맥닐을 바라보던 김용한이 소하의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무턱대고 따라가도 괜찮겠냐는 질문이라 생각한 소하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스파이 영화라도 찍는 줄 아냐? 걱정하지 말라고.”

“···아니 그게 아니다. 정황상 내가 길을 뚫어줄 이유가 없어진 거 아닌가?”

“···그렇지.”

“괜한 걱정이겠지만, 주방 리모델링 건은 이미 끝난 거라고 생각하겠다.”

“···.”

꾸우욱.

소하의 어깨를 짚은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는 김용한. 너무나도 명백한 유형의 압박에 소하는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었다.

***

소하와 일행들이 탑승한 전용기는 보잉의 에어버스같이 거대한 비행기는 아니었다.

“오. 걸프스트림의 G650이군.”

감탄을 금치 못하는 김용한. 이쪽 계통에 제법 지식을 소유했나 보다.

“뭐야. 아는 비행기야?”

“프라모델로 소유 중이다.”

“아, 맞다. 너 그런 거 조립하는 취미였지? 근데 별로 크지도 않은 게 싸구려 같은데. 맥닐 가문도 끗발 떨어졌나 봐.”

“···.”

할 말을 잃은 김용한. 에어버스처럼 거대한 비행기는 아니었지만, 미화로 7천만 달러짜리 비행기였다.

한화로 800억에 가깝고 이것저것 부가 금액을 합치면 천억에 육박하는 엄청난 몸값을 자랑했거늘. 무식한 게 죄였다.

“이거 일론 머스크가 타고 다니는 비행기다.”

“아, 그 전기 박이?”

“···참으로 신랄한 비판이군.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가?”

“아니. 그냥 아무 생각 없는데. 그냥 관심 좀 그만 끌고 빨리 화성 식민지화나 해줬으면 해. 죽기 전에 화성 땅이나 한번 밟아보자.”

“그러냐···.”

두런두런 잡담하며 비행기에 오르는 소하와 김용한. 그들의 뒤에는 에밀리아 존슨이 심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뒤를 따른다.

‘라우라 맥닐···? 가, 강력한 경쟁자야.’

라우라 맥닐의 등장에 대단한 경각심을 느끼는 중인 에밀리아 존슨이었다.

***

이래저래 한국으로 떠나는 최고급 비행기에 탑승한 소하와 일행들. 고급스러운 실내장식을 즐기며 휴가를 만끽할 때쯤.

소하는 라우라 맥닐의 요청에 개인실로 향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직진으로 들이박는 소하. 같은 공간에서 오래 보기에는 썩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빨리 일을 끝마치고 싶어 한다.

“환영할만한 태도네요. 저도 이 자리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거든요.”

“···아이고. 그러셨군요?”

소하가 대놓고 이죽거렸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게다가 곧이어 터져 나온 라우라의 발언은 이죽거릴 마음마저 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전 수년 내로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겁니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이런 폭탄선언을 하다니. 소하의 기준으로서도 파격적이었다.

‘얘도 계속 보다 보니까 진짜 미친년 중에서도 상급이야. 썩씨딩 유 파더(Succeeding you, father!)를 나에게 말한 거야? 지금? 뭔 유명 게임의 리치킹도 아니고···.’

소하는 뇌가 정지했다.

미래에서 온 소하가 아는 리처드 맥닐은 앞으로도 십 년은 끄떡없이 건강한 노인네다.

그런 그의 뒤를 잇는다는 발언은 반역을 꿈꾼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진짜 큰일이다. 대놓고 아버지 자리를 먹겠다는 년이랑 엮이다니. 똥 밟았다.’

소하는 전용기라는 유혹에 홀라당 넘어 가버린 자신이 미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음···? 표정이 좋지 않네요?”

“···좋겠습니까?”

“흐음. 그것참 놀랍군요. 전 당신이 제 아버지를 그렇게나 걱정할 줄 몰랐거든요. 좋아하시겠네요.”

“음? 그게 무슨?”

라우라 맥닐의 말투가 조금 미묘하여지자 소하는 더욱 혼란에 빠졌고 이윽고 오해였음이 밝혀진다.

“보기보다 상당히 정보력이 뛰어나군요. 다시 봤어요. 맞아요. 아버지께서는 건강 문제로 은퇴를 고려하시는 중이거든요.”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는 오해의 현장이었다. 물론, 소하는 더욱 난감해한다.

‘이런 씁. 일단 반역은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그 노친네가 몸이 안 좋다고? 어째서? 멀쩡했는데?’

과거로 돌아온 지 어언 5년 차.

최대한 축구계에만 영향력을 발휘하며 미래를 보존하려고 했지만 거대한 세계의 뒤틀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아버지께서 은퇴하시면 살아있는 유일한 자식인 제가 뒤를 이을 거예요. 물론, 여러 잡음이 뒤따르겠지만 그리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니에요.”

“···그렇겠죠.”

혈족이 운영하는 대기업, 재벌이 거의 없는 영국이지만 맥닐의 기업은 아쉽게도 재벌에 가까웠다.

게다가 라우라 맥닐은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임에도 상당한 능력을 인정받은 기업인.

그녀의 상속을 막을 존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구단주님은 무슨 병을···?”

“그건 직접 물어보세요.”

역시나. 이 망할 부녀지간은 뭐 하나 속이 시원하게 말해주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쪽이라도 알아봐야 한다. 아니, 사실은 이쪽이 진짜다.

“그럼 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인지는 말해주실 수 있나요?”

“그걸 위해서 초대한 거예요.”

잠시 고급 샴페인으로 목을 축인 라우라 맥닐은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하고 차갑게 선고한다.

“전 아버지의 뒤를 잇자마자 포츠머스를 매각할 생각이에요. 아니, 이건 이미 결정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변하지 않는 미래에요.”

“···.”

“최소한 성소하 씨에게는 미리 말해두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라우라 맥닐의 음색이 그침과 동시에 소하는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난데없는 구단 매각이라니.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며 안정적으로 프리미어 리그에 안착한 포츠머스에는 더할 나위 없는 악재였다.

‘석유자본을 뿜어대는 구단주가 올지도 모른다. 그건 좋아. 하지만, 예전 리버풀의 조지 질레트와 톰 힉스 같은 놈들이 구단주가 될지도 모르지.’

조지 질레트와 톰 힉스.

흔히들 ‘질힉’이라고 불리는 개망나니 구단주다. 만에 하나 이 작자들 같은 구단주가 온다면 포츠머스는 파멸이었다. 아마도 소하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을 거다.

이래저래 확률은 반반이다.

하지만 현상 유지도 좋은 상황에서 굳이 위험부담을 끌어안을 필요는 없었다.

정말 큰 일을 앞둔 소하와 포츠머스 FC에는 최악의 사건이었다.

“후계자의 입장은 잘 들었네요. 하나만 묻죠. 왜 매각하려는 겁니까?”

소하의 의문은 지극히 당연했다.

포츠머스는 리처드 맥닐이 투자한 사업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 만큼 대박이 난 사업이었다.

한화로 단돈 30억짜리 구단이 지금은 3,000억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닌 구단으로 성장한 상태.

심지어 구단 가치가 오르는 속도는 가파른 절벽과 다름없어, 맥닐의 입장으로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다를 바 없었다.

‘대가리에 총알이 박히지 않는 이상 포츠머스를 팔아버릴 구단주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대박 난 사업이지만 장래는 더더욱 밝다.

첫 시즌에 챔피언스 리그 진출 달성.

20대 초반의 대형유망주가 수두룩하게 빽빽한 황금빛 선수단.

아직 30대 초반에 불과한 세계 최고의 지휘탑.

수년 내로 구단 가치가 수조 원에 달하리란 사실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세상천지를 전부 뒤져도 제정신 박힌 기업인이라면 절대 매각하지 않을 사업체였거늘.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제가 숫자에는 약하지만 멀쩡한 기업인이라면 포츠머스를 매각하는 행위는 바보나 할법한데요.”

“맞아요.”

소하의 직설적인 화법에도 불구하고 라우라 맥닐은 순순히 긍정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결정은 손익을 제외하고 내린 결정이에요.”

“마치, 개인적인 이유라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네. 정확히 봤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저와 아버지의 개인사에요.”

“···후우.”

북극의 빙하보다 차가운 라우라 맥닐의 눈동자에 잠시나마 불꽃이 피어올랐고 이를 목격한 소하는 빠르게 설득을 포기했다.

‘얼음 마녀 같은 여자가 저렇게 격정적인 모습을 보이다니. 텄다. 텄어.’

물론, 어떤 개인사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무척 궁금하긴 했지만, 어차피 말해주지 않을 테니까.

들리지 않을 대답을 기다리느니 현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뭐,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1~2년 내로 꿈을 이룬 뒤 차라리 내가 사버리자. 오히려 잘됐네.’

쉽게 생각하며 투지를 불태우는 소하.

그는 어려울수록 더 뛰어난 결과물을 만드는 인간이었다.

다만 한 가지 난관은 존재했다.

‘왜 비트코인은 이렇게 오르지 않는 거야? 제기랄.’

아직도 4년 전과 비교해서 10%밖에 오르지 않은 비트코인이 그저 얄궂은 소하였다.

< 192화. 휴식과 준비.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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