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우리의 목표는 생존입니다. (9) >
16-17시즌 프리미어 리그는 술술 잘 흘러갔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맨체스터 시티와 콘테 감독의 첼시가 선두를 다투며 앞서 나갔으며,
그 밑을 리버풀, 토트넘, 아스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포츠머스가 따라붙고 있었다.
익숙한 빅6의 위용이었으나 뭔가 이상하면서 어색한 이름이 끼어있다.
바로 보았다. 바로, 포츠머스의 대약진이 눈에 띄는 시즌이었다.
토트넘까지 2-0으로 잡아내며 지옥의 3연전을 1승 1무 1패로 마감한 포츠머스.
총 8경기를 치르고 5승 1무 2패, 승점 16점으로 3위를 유지하며 본격적인 전반기의 리그 경주를 시작했다.
대단한 시작이었다.
모두가 포츠머스의 활약상에 지난 시즌 레스터 시티의 신화를 떠올릴 정도였다.
이는 낙관적으로 보지 않던 전문가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포츠머스는 그들이 절대 약팀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명했다.]
[리버풀, 맨체스터 시티, 토트넘과 호각을 겨룬 포츠머스는 단순한 승격팀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성소하 감독은 생존이 목표라고 했지만, 포츠머스는 그 이상을 노려볼 실력을 갖춘 팀이다.]
[우승은 솔직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대한 유로파리그까지는 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UEFA 유로파리그까지 언급하는 전문가들마저 속출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유로파리그.
이는 소하가 한번 노렸던 유럽대항전이다. 3부리그에 있었을 적, 노려봤다가 리그컵 결승전에서 첼시에게 아쉽게 패배한 쓰라린 과거가 있었다.
물론, 챔피언스 리그보다는 격이 매우 낮은 대회다.
하지만, 명색이 유럽대항전인 만큼 많은 선수가 뛰고 싶어 하며 또 그만큼 중소구단들의 꿈이기도 한 리그다.
“감독님, 감독님께서는 시즌을 앞두고 생존이 목표라고 말씀하시면서 뒤에는 일말의 여지를 주셨는데요, 이제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9라운드, 웨스트 브로미치와의 홈경기도 1-0으로 승리한 소하에게 기자들이 물었다.
“음. 글쎄요. 전 아직도 생존을 1순위 목표로 삼고 있어요.”
“하지만 이번 경기까지 승리로 거두며 3위를 굳건히 유지하셨습니다. 1위 첼시와도 승점 차이가 3점밖에 나지 않아요. 전반기가 절반, 리그가 25%나 지난 시점에도 이런 성적이면 더 높을 곳을 바라봐도 되지 않을까요?”
“···.”
소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들이 뭔데 목표를 마음대로 정하는 건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저들은 저들의 일을 최대한 열심히 하는 중이었을 뿐.
그렇다면 이쪽도 이쪽 일을 해줘야 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프리미어 리그는 만만치 않은 대회에요. 아차 하는 순간 생존을 위한 싸움을 진행하게 될 겁니다.”
소하는 신중하게 답변했다.
덕분에 많은 기자가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소하는 뻔뻔하게도 기자회견을 본인이 이끌고 나간다.
“자, 다음 질문은 뭔가요? 축구를 너무 잘해서 질문이 없나요?”
정말 가증스러울 정도의 뻔뻔함!
자꾸 귀찮은 질문을 하는 기자들에게 한 대 먹여주고 싶기도 했고 진심이기도 하다.
솔직히 더 큰 목표를 잡고 있다는 기자들의 호들갑은 반은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은 시즌 초반.
지금부터 선수들에게, 혹은 서포터들에게 헛바람을 넣을 순 없는 노릇이다.
‘이미 난 전적이 있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도 아닌 소하의 목표다.
어디 아무개가 ‘나 이번에 유로 리그 갈 것임’이라고 하면 콧방귀도 뀌지 않을 거다.
허나, 소하는 그간 말이 성립되지 않는 허황한 목표를 내뱉고 이를 완벽히 이룬 감독!
말의 무게감이 달랐다.
만약 소하가 진짜 더 높은 곳을 원한다면 사람들은 그럴 거라고 분명히 믿을 터. 그날부터 온갖 소설이 판을 칠 거다.
이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사기 관리에 썩 좋지 않다.
‘리그는 길다. 따라서 적절하게 목표를 유동적으로 바꿔가며 가져가야 해.’
앞으로 승점 20점. 정확히 20점 더 얻어낼 수 있다면. 그때야말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목표를 제시할 생각인 소하였다.
***
소하가 말한 ‘생존’과는 어울리지 않게 포츠머스의 맹렬한 돌풍은 10월 내내 이어졌다.
10라운드, 에버튼의 홈구장, ‘구디슨 파크’로 떠나 난타전 끝에 4-3,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는 데 성공. 작금의 돌풍은 보통 바람이 아니라고 선포했다.
“정말, 뭐랄까. 감독이 아닌 한 사람의 축구애호가로서는 최고의 경기였다고 생각해요.”
에버튼전을 마치고 나서의 기자회견장에서 소하는 멋쩍게 웃으며 짧은 코멘트를 남겼다.
하지만 이건 외부의 시선에 신경을 쓴 겉치레였을 뿐. 선수들에게는 혹독한 채찍질을 선물했다.
“암 걸리는 경기였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께서 몇 번은 관뚜껑 열고 나오실 만큼 수비력이 처참했다.”
“···.”
“특히나 찰스 말로리. 넌 지난 4년간 봤던 모습 중에 제일 좋지 않았어.”
“···크흠.”
소하의 거침없는 지적에 찰스 말로리는 코를 벌름거리며 불편해했다.
그렇다 해도 대놓고 불만은 표출하지는 않았다.
벌써 공개적으로 지적을 한 소하보다 엉망이었던 자기 자신에게 화가 엄청나게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제기랄. 슬슬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월의 풍화.
그저 얄궂기만 하다.
찰스 말로리, 33세.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할 노장이었다. 수비수라는 자리의 평균 나이가 많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팀의 스타일에 따라 다른 법이다.
라인을 내리고 수비적으로 하는 팀에게는 아직 괜찮은 수비수였지만, 포츠머스처럼 라인을 끌어올려 기동력이 필요한 팀에게는 약점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다.
‘끝이 다가온다.’
문뜩 포츠머스의 생활이 끝에 다다랐다는 느낌을 받은 찰스 말로리. 그럼에도 투지는 잃지 않는다.
‘감독이 지적했다. 즉, 나에게 아직 기대를 한다는 거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버텨다오. 내 몸아.’
입술을 질끈 깨물며 분노를 투지로 승화시키는 찰스 말로리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활활 불타올랐다.
***
11라운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 프래튼 파크를 찾은 웨스트햄을 상대로 아쉽게도 비겨버렸다.
최종 스코어는 2-2.
홈에서라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던 소하였기에 기자회견장에서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정말 아쉽습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였어요. 그저 ‘디미트리 파예트’ 선수가 너무나도 뛰어났네요.”
디미트리 파예트.
15-16시즌 미친 활약을 했던 선수다.
시즌 12골-12도움이라는 엄청난 활약에 힘입어 29세의 나이임에도 대형 클럽 이적설을 만들기까지 했다.
이 선수에게 프리킥으로만 두 골을 내리 실점한 사실은 소하도, 선수들에게도 패배의 책임이 없다는 증거였다.
“···그냥, 길 가다 벼락 맞았다고 생각하자. 쟤 킥이 너무 좋다.”
“···맞아요.”
“어이가 없어서.”
소하의 위로에 선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자리에서 페트르 체흐를 뚫어내고 프리킥으로 두 골을 넣는 선수를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다음에 만난다면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하는 숙제까지 생겼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충성심이 바닥인 선수라 겨울에 팀을 떠난다는 거지. 제발 빨리 가버려라.’
1년 반 만에 향수병이 걸렸다며 후다닥 사라지는 디미트리 파예트. 그가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오래 프리미어 리그에 머물렀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는 일도 제법 재밌는 일이었다.
하여튼, 아쉬운 무승부 이후로 만난 12라운드 상대는 스완시 시티였다.
하얀 바탕의 검은 백조 모양이 상징인 이 팀은 국내에서 상당히 유명한 구단이다.
“한성용 선수가 뛰는 곳이지.”
꽤 탐나는 선수다. 아니, 선수였다. 대한민국 국가대표의 여지 없는 핵심이자 뛰어난 패스 능력을 갖춘 선수였으니까.
“하지만 너무 민첩성이 떨어져. 수비 능력도 별로고. 도봉산처럼 몇 년 일찍 영입했으면 어떻게든 바꿔봤겠지만···.”
벌써 한성용의 나이는 27세. 신체적인 약점을 훈련으로 극복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만약, 2년 전, 도봉산과 함께 영입했다면 가능성이라도 있었지만 말이다.
“너무 비쌌어. 프리미어 리그의 주전 미드필더를 3부리그 팀이 영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더군다나 포츠머스에는 패스가 일가견인 선수가 수두룩하다. 굳이 발전 가능성이 없는 비슷한 유형의 선수를 또 영입하기엔 돈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운명이 엇갈렸다···. 이 말로밖에 설명이 불가능하겠군.”
괜히 똥폼을 잡으며 그럴싸한 말을 읊조리는 소하. 경기는 무난하게 포츠머스의 3-0 승리로 끝났다.
포츠머스가 규격 외의 팀이기도 했지만, 스완지 시티의 이번 시즌 경기력은 썩 좋지 않았기에 거둔 쾌속의 진격이었다.
***
13라운드의 상대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소하가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았던 그 클럽과의 경기가 다가온 것이었다.
1위를 달리는 콘테의 첼시일까?
혹은 디펜딩 챔피언인 아스널?
설마, 흔들리는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쉽게도 이들은 어려운 상대였지,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는 아니었다.
“드디어 왔군. 축구3의 시간이.”
소하는 눈을 샐쭉하게 뜨며 다음팀 상대에 대한 공포를 감추지 못했다.
축구3.
한때 대한민국의 축구 커뮤니티에서 유행했던 축구의 종류 중 하나였다.
이들이 말하는 축구는 총 3가지였다.
첫 번째로 축구1, 혹은 축구.
이것은 우리가 아는 오리지널 축구다.
11명씩 총 22명이 승리를 위해 발을 이용해 플레이하는 구기 종목.
두 번째로 축구2가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축구1과 똑같은 규칙을 가졌지만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다.
“승패와는 관계없이 볼 점유율, 드리블 성공, 드리블 횟수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
즉, 악성 바르셀로나 서포터들이 만들어낸 축구의 파생이었다.
그렇다면 축구3이란 무엇일까.
축구3이란, 축구2를 맞받아치기 위해 나온 흉측한 돌연변이였다.
“거친 몸싸움과 폭력적인 행위를 즐기는 미친 축구.”
그렇다. 축구3이란 축구의 탈을 쓴 격투기였다!
“매우 불행한 일은 스토크 시티는 축구3의 일인자라는 거지.”
찰리 아담.
별명은 ‘찰 장군.’
찰 장군을 필두로 한 스토크 시티의 거친 축구는 수많은 부상자를 만들어냈고, 악명이 장난 아니었다.
“공 말고 사람을 드리블하는 선수지···. 정말 무서운 독종이야.”
모처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떠는 소하. 혹시라도 중요한 선수가 다친다면 엄청난 문제였다.
“제발 아무 일 없길.”
소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냉수 한잔 떠 놓고 천지신명에게 빌고 또 빌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스토크 시티와의 일전이 다가왔다.
스토크 시티의 홈구장 브리타니아 스타디움. 아니, Bet365 스타디움에는 축구에 미친 나라답게 만석을 달성했다.
그나저나 참으로 없어 보이는 경기장 이름이다. Bet365라니. 마치 배팅 사이트 홍보물 같지 않은가.
하지만 슬프게도 사실이었다. 결국 스포츠는 자본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 스포츠 베팅 사이트인 Bet365에서 경기장의 명명권을 사버린 결과였다.
하여튼, 스토크 시티는 여타 다른 프리미어 리그의 팀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역사가 깊은 구단이다.
무려 1863년부터 역사가 시작된 ‘남자의 팀’이었다.
별명은 남자의 팀.
선이 굵은 긴 패스 축구.
공이 아닌 몸으로 대화하는 축구.
강력한 신체조건을 가진 선수들이 즐비한 구단.
이 세 가지가 합쳐져 만들어진 좋기도 하며 나쁘기도 한 별명이었다.
“남자의 팀은 지랄. 악당의 팀이라고 바꿔라, 자식들아.”
여지없이 툴툴거리는 소하. 선수 담그는 게 뭐가 자랑이라고 저렇게 떠벌리는 건지 모를 일이다.
더군다나 스토크 시티의 서포터즈, ‘노티 포티’는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훌리건 중 하나였다.
“개새끼들. 애런 램지의 다리를 담그고 나서 ‘그는 절름발이로 걷네’라는 노래를 부르던 개또라이 새끼들이지.”
소하는 스토크 시티의 서포터석을 표독한 눈빛으로 흘겨봤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팀이다.
그렇기에 소하는 이번 경기를 위해 비장의 한 수를 준비했다.
“남자의 팀? 그래 어디 한 번 해봐. 난 여자의 팀이 되어줄 테니까.”
소하의 썩은 미소는 한층 짙어졌다.
< 178화. 우리의 목표는 생존입니다. (9)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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