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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천재 감독-170화 (170/306)

< 170화. 우리의 목표는 생존입니다. (1) >

2016년 인터내셔널 챔피언스 컵, ICC는 성황리에 끝났다.

참가한 팀당 총 3경기씩 모두 치른 후인 포츠머스의 성적은 1승 2패.

패가 더 많았지만, 최약체인 포츠머스로서는 나름 쏠쏠한 결과였다.

레알 마드리드에 2-1 석패.

바이에른 뮌헨에 1-1 무승부 후에 승부차기 패배.

AC밀란을 상대로 3-1 승리.

상대가 아직 ‘진심 모드’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훌륭한 성과임은 부정하기 힘들었다.

이번 ICC를 통해서 포츠머스의 주가는 당연히 치솟아 올랐다.

-아직은 하부리그용. 1부리그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봐야 한다.

-포츠머스는 거품이 끼었다. 누가 들어보면 1부리그 우승이라도 한팀인 줄 알겠다.

-과대포장의 진수.

등등. 포츠머스의 너무나 빠른 비상에 불편한 심정을 감지거나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잉글랜드 내의 비평가들.

이들은 이번 기회에 태도를 180도 돌렸다.

-포츠머스는 잉글랜드를 대표할 구단으로 진화할 잠재력이 존재한다.

-축구 명가의 자존심을 제대로 보여줬다. 이것이야말로 150년에 다다르는 축구 DNA였다.

-세계 그 어떤 나라도 4부리그에서 이런 팀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

국뽕과 포츠머스 뽕을 한 사발 거하게 들이켜버렸다. 소하에게는 그저 어이없을 뿐이지만.

‘씨발. 지들이 뭐 도와준 것처럼 뽕을 빠네? 나 참 어이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소하. 이래저래 잉글랜드도 코리안 김칫국물 드링킹에 밀리지 않는 민족이었다.

그리고 포츠머스만 재미를 본 것은 아니었다. ICC 주최 측에서도 포츠머스 덕분에 굉장히 성황리에 대회를 마쳤기에 매우 고마워했다.

“감사합니다. 성 감독님.”

“뭘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저희의 요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할 뿐이에요.”

“그럼 다음 대회에도···.”

“후후···. 불러만 주십쇼.”

비열한 미소를 짓는 주최 측과 소하. 어쩐지 죽이 매우 잘 맞아 자주 얼굴을 맞댈 미래가 보인다.

하여튼 이래저래 다사다난한 전지훈련을 마친 포츠머스. 이제 그들을 기다리는 건 팀의 운명을 건 진검승부.

그렇다. 시간은 벌써 프리미어 리그 개막이 코앞, 2주일 후로 다가온 7월의 마지막 주였다.

***

때는 한 달 전, 6월 마지막 주.

잉글랜드 내의 모든 리그가 종료되었고 모든 팬들이 다음 시즌, 즉 16-17시즌의 일정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이것은 당연히 포츠머스시와 포츠머스 FC의 클럽 하우스도 마찬가지.

경기 일정.

이것은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강팀이든 약팀이든 경기 일정에 따라 긴 레이스의 최종점이 좌지우지됐으니까.

만약, 시즌 초반부터 강팀과 연달아 경기한다면.

만약, 박싱데이에 원정경기가 잔뜩 몰려있다면.

굳이 보지 않아도 험난한 순감임을 훤히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모처럼 우르르 몰려들어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인 클럽하우스 일동. 소하와 밀러는 물론, 프런트 핵심 인물들과 몇몇 선수들의 얼굴들이 보인다.

“흐음. 초반에는 강팀을 피하는 게 좋겠죠. 그렇지 않나요?”

신입사원 티는 저 멀리 사라지고 어엿한 팀장의 위엄을 내뿜는 에밀리아 존슨이 일반론을 꺼냈다.

“글쎄요. 강팀의 경기력이 올라오지 않았을 때 이변을 만드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르죠.”

소하가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호호. 역시 감독님다운 발상이시네요.”

“일장일단이 있는 거죠.”

“그럼 가장 좋지 않은 경우의 수는요?”

“흐음···. 아시잖아요? 재수 없는 소리는 이런 자리에서 하지 않는 우리 팀의 전통이요.”

“아! 그렇죠?”

생글생글 웃는 에밀리아 존슨과 무덤덤한 소하. 이 모습을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밀러가 한숨을 내쉰다.

“어휴. 저렇게 눈치가 없는 인간이 어떻게 천재 감독 소리를 들을까.”

척 봐도 에밀리아 존슨의 눈에서는 하트가 쏟아졌거늘. 이런 쪽으로 무신경한 건지, 아니면 에밀리아 존슨에게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님 둘 다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엥?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리 소하가 잔뜩 집중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욕하는 걸 못 들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귀신같이 반응했다.

밀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제대로 듣지 못한 듯했지만 말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았거든요.”

“아닌데. 반고리관이 찌릿찌릿한 게 분명 제 욕을 한 건데.”

“그거 귀지가 가득 들어찬 겁니다. 후딱 가서 파고 오시죠?”

“아니거든요. 제가 이래 보여도 꽤 청결한 사람이라고요. 흐음. 이상한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다시금 시선을 텔레비전으로 돌리는 소하. 이쪽 방면에서는 귀신같은 눈치를 지닌 그의 모습에 밀러의 한숨은 더욱 짙어졌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존슨 양도 격의 차이를 느껴서 더 다가가지는 못하고 있는 눈치인데. 이거 어쩌면 좋으려나.’

밀러의 생각처럼 에밀리아 존슨에게는 벽이 너무 많았다.

사내 연애부터 시작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소하의 명성까지.

일개 홍보부 팀장이 적극적으로 다가서기에는 에밀리아 존슨은 너무나도 겸손한 처자였다.

물론, 소하가 들었다면 뭔 헛소리냐고 일축했겠지만 말이다. 원하는 건 쟁취하기 위해 도전한다. 이것이 바로 소하의 철학이었으니까.

‘흠. 아무리 봐도 둘이 잘 어울리는데 말이야. 저 성질 더러운 노총각에게는 존슨 양이 딱 맞는데.’

아직도 혼자인 조카를 바라보는 삼촌의 눈빛을 품은 밀러.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외모는 당연히 최상급.

심지어 동안이다.

거기에 엄청난 부와 앞으로는 비교도 안 될 부를 손에 쥘 거다.

명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만약. 만약 정말로. 트레블을 달성한다면 ‘기사’ 작위를 받을지도 몰랐으니까.

그 ‘서’ 알렉스 퍼거슨 ‘경’처럼 말이다.

요컨대, 결혼하고자 하면 오늘 저녁에도 바로 할 수 있단 소리다.

그런데도 결혼은커녕 만나는 여자마저 없다. 그렇다면 한 가지 경우의 수밖에 남지 않는다.

“설마, 동성애자는 아니겠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생각을 내뱉어버린 밀러. 당연히도 소하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이번엔 확실히 들었어요. 이실직고하시죠.”

“무, 무슨 소리입니까?”

시치미를 뚝 떼보는 밀러였지만 이렇게 화들짝 놀라서는 옆집 유치원생도 속지 않을 거다.

“5, 4, 3···.”

별다른 말은 없이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하는 소하. 저 숫자가 1이 된다면 어떤 재앙이 떨어질지 몰랐기에 밀러는 백기를 들고 만다.

“아, 알았어요. 알았어.”

“2···.”

“머, 멈추세요. 그 뭐냐, 왜 감독님은 여자친구가 없는지 궁금해서 그런 겁니다.”

“네? 지금 이 시국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어요? 팀의 1년 농사 일정이 나오는 이 순간에?!”

버럭 소리 지르는 소하. 매우 논리 정연한 정론이었기에 밀러는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장난이에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호오. 그, 그렇다면 다행 입습죠. 근데, 진짜 동성애자는 아니시죠?”

“왜요? 그러면 안 돼요?”

장난기 가득 어린 미소와 함께 되묻는 소하. 그에 반해 밀러는 매우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간신히 대답한다.

“뭐···. 안될 건 없지만···요.”

“이야. 밀러 아저씨 다시 봤네요. 꼰대인 줄 알았는데 신세대였어!”

“···.”

“근데 너무 하시네요. 제가 어딜 봐서 그렇게 보인 거예요? 이 신이 내린 빛이 나는 외모는 오롯이 여성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라고요.”

“···우욱···.”

순간, 텔레비전 앞에 모인 일동들은 동시에 속이 뒤틀리며 구토감이 엄습했다.

“봉투···. 봉투 가져와요.”

“아, 좋은 거 먹었는데 이게 뭔 일이야. 에잉. 일정은 안 봐도 재수 없게 나오겠네.”

“김치, 코리안 푸드, 김치 가져와. 느글거려서 못 살겠으니까.”

이 소란 중에 오직 한 사람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다행이네요. 그렇고 말고요.”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뻔했다.

“···반응이 좀 실망스럽네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하여튼 때 되면 알아서 만날 테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시고 일정 발표나 보자고요.”

“···.”

정말 대단한 마이페이스다. 더욱 무서운 건 진심이 보였다는 것.

그리고 의외로 밀러는 왜 소하가 여자를 만나지 않는지 알 것만 같았다.

‘축구 말고는 아예 다른 일에 관심이 아예 없구나···. 지금은 말이야.’

헛소리를 늘어놓는 와중에도 텔레비전 화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저 집중력! 그의 관심사는 오롯이 포츠머스였고 축구였음을 눈치챈 밀러였다.

‘음···. 힘내세요. 존슨 양.’

밀러는 마음속으로 에밀리아 존슨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고, 곧이어 일정이 발표되었다.

[이제 프리미어 리그 일정이 공개됩니다!]

두근두근.

모두의 심장박동 소리가 동시에 빨라졌고 진득하니 깔렸던 웃음기는 순식간에 증발했다.

[참 재미있는 개막전이 나왔습니다! 개막전에 무려, ‘사우스코스트 더비’가 성립되었습니다!]

드디어 발표된 16-17시즌 프리미어 리그 일정표. 놀랍게도 포츠머스의 개막전 상대는 철천지원수 ‘사우스햄튼 FC’ 였다.

이에 소하는 자지러지는듯한 비명을 내지른다.

“안 돼에에에에에에!”

바닥에 드러누워 마구 몸을 흔드는 소하. 광인이 따로 없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가 갈만한 일이다. 그가 앞서 말했던 ‘가장 좋지 않은 개막전 상대’는 바로 사우스 햄튼과의 더비경기였으니까.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어!”

소하는 절규를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이건 마녀의 힘으로 잘나가는 자신을 음해하는 신의 음모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지, 진정하세요.”

사람들이 말려보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물론, 이 모습도 다정하게 바라보던 에밀리아 존슨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더비경기를 이렇게 싫어하시는 건가요?”

“그건 말입니다요···.”

광인으로 변한 소하 대신 밀러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일동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소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밀러에게 집중한다.

“일전에 감독님이 말씀하신 걸 그대로 말할게요.”

“뜸 들이는 것도 배우셨나요?”

“···큼큼. 그 뭐냐···. ‘더비경기는 매우 치열하므로 번아웃이 올 가능성이 커요. 그리고 부상의 위험이 매우 큰 경기이고 만약 진다면 단순한 패배로 끝나지 않기에 너무나도 위험하죠.’라고 하셨습니다.”

밀러의 설명에 일동들은 대번에 이해했다. 이렇게 들으니 정말 큰 일임이 실감 난다.

“후우. 우리 팀의 뽑기 운은 항상 좋지 않죠···. 어쩌겠어요.”

길게 한숨을 내쉬는 에밀리아 존슨의 말에 좌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저, 최고의 감독을 준 대신 최악의 운을 선물한 신에게 조금 섭섭해했을 뿐이었다.

***

여러 의미로 최악의 개막전 상대를 만나게 된 포츠머스.

리그 시작을 앞두고 대대적인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례행사 중 하나였다.

시즌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언론과 서포터들에게 알려줬어야 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중요한 자리였지만 소하의 복장은 매우 편하다.

하와이언 셔츠에 반바지.

얼핏 보면 여름휴가를 나온 관광객 같지만, 사람들은 그러려니 한다.

부임 첫해를 제외하고선 항상 저런 차림이었으니까.

“···이번 시즌에도 굉장히···. 뭐랄까, 해변 냄새가 나는 옷을 입고 오셨군요?”

덕분에 첫 질문은 축구와는 동떨어진 질문이었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옷이에요.”

“어떤···?”

“딱 보면 휴가나 온 기분이 물씬 들지 않습니까? 바로 그거에요. 전 이번 시즌을 서포터들에게 휴가 나온 듯한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드릴 거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거죠.”

“아하! 나름대로 큰 의미를 가진 복장이셨군요?”

“바로 그거예요.”

씨익 웃는 소하. 사실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그냥 편해서 입는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이 속내를 아는 자들은 극히 소수였을 뿐이었다.

“비시즌을 굉장히 바쁘게 보내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십니까?”

“흐음. 굉장히 포괄적인 질문이군요.”

“그렇다면 먼저 이적시장으로 압축해서 보자면요?”

“100점 만점 중에 100점입니다. 사실 제가 포츠머스의 감독을 하면서 그렇게 돈을 써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거든요.”

“그렇죠. 덕분에 서포터들의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더 기대하셔도 좋아요. 이적생들의 잠재성은 겉보기보다 훨씬 뛰어나거든요.”

호언장담하는 소하!

하는 행태에 비해서 기자회견은 중도적으로 진행하는 소하였거늘. 얼마나 좋은 선수들인지 여실히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시즌 목표는 무엇입니까? 다들 기대가 큰데요.”

기자의 말처럼 포츠머스의 기대감은 매우 커졌다. ICC에서 보여준 놀라운 행보는 강등 걱정은커녕, 중위권에 안착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심어줬으니까.

더군다나 소하는 매 시즌 믿기 어려울 만큼 높은 시즌 목표를 말하던 인물.

혹시, 유로파 진출을 노린다고 할지도 몰랐다.

‘만약 유로파 진출 같은 폭탄선언이 나온다면 바로 특종이야. 일주일 내내 화제가 될걸?’

잔뜩 기대하는 기자들. 특종 메이커 소하에게 거는 기대감이 매우 크다.

하지만 소하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기대감을 부숴버렸다.

“우리의 목표는 생존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것은 즉, 프리미어 리그가 얼마나 어려운 리그인지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소하의 발언은 허황한 꿈에 빠져 터무니없이 높은 기대를 한 기자들과 서포터들에게 찬물을 끼얹은 격이기도 했다.

“···.”

순식간에 싸늘해진 기자회견장의 분위기. 축제 분위기에서 최후의 사투를 남겨둔 전장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흐음. 노리긴 한 건데···. 너무 경직됐군. 조금 풀어줘 볼까?’

당연히도 철저한 계산 아래에서 발언한 거다. 너무 들뜬 외부의 평가는 선수단의 분위기에 악영향을 끼쳤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너무 경직된 것도 좋지 않다. 일단 꿈에도 그리던 프리미어 리그로의 복귀 아니던가. 이래저래 모두가 적당히 즐겨줘야 흥이 나는 법이다.

“뭐···. 일단은요. 하하.”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며 분위기를 조금 풀어주는 소하.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웃음 속에는 생존, 그 이상을 노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 170화. 우리의 목표는 생존입니다. (1)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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