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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천재 감독-159화 (159/306)

< 159화. 3년 계획. (3) >

라우라 맥닐을 따라 소하가 도착한 장소는 전의 고급 레스토랑은 아니었다.

좀 더 한 시간 남짓 북쪽으로 달려 런던에 진입. 도착한 곳은 윔블던이었다.

“오. 부자 동네.”

런던의 부촌이라 하면 풀럼, 첼시, 켄싱턴, 해머스미스, 웨스트민스터, 메이페어 같은 템스강 북쪽 자치구를 떠올린다.

물론, 런던과 영국의 중심지라 정확한 사실이었지만 윔블던도 만만찮은 부자 동네였다.

도심지의 번잡함에 질린 부자들이 넓은 정원이 딸린 주택에서 살기 위해 잔뜩 몰려든 곳이니까.

동나이 대비 상위 1%의 소하도 이곳에 살 엄두를 내지도 못할 정도의 고가 주택이 즐비하다.

그리고 리무진이 멈춘 주택은 이 윔블던에서도 눈에 띄게 거대한 저택.

‘여기 엄청난 부자가 살고 있소’라고 외치는듯한 웅장한 외관에 소하는 직감했다.

‘여기가 바로 영감탱이의 집이구만. 와. 진짜 부자는 클래스가 다르네.’

소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웅장한 저택에 비해서는 자신이 머무는 포츠머스의 고급 주택도 고시원 단칸방처럼 보였으니까.

“맥닐 씨. 댁도 여기 살아요?”

소하는 드넓은 정원을 졸졸 따라 걸으며 물었다.

“아니요. 여기는 아버지 혼자 사세요.”

한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변하는 라우라 맥닐.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냉랭했지만 소하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음···? 방금은 조금 분노가 느껴진 거 같은데. 집에서 쫓겨났나? 하긴 이런 멋진 집에서 쫓겨났으면 화가 날 만하지.’

별 관심이 없는지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소하. 그렇게 연신 두리번거리며 저택의 곳곳을 구경하다 보니 문뜩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조금 쓸쓸해 보이는 저택이네.’

수많은 경비원.

바쁘게 돌아다니는 가정부.

멋진 수목들과 화려한 고급 차들.

결코 외로움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지만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강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에이. 지랄도 병이지. 이렇게 사는데 뭔 놈의 외로움이야.’

고개를 세차게 내젓는 소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영국에서 손꼽히는 거부 리처드 맥닐에게 외로움이라니.

엎어져서 똥을 흩뿌려도 사람이 잔뜩 모일 사람이지 않은가. 소하는 승격을 달성한 여운이 아직 남아 생긴 개소리라고 치부해버렸다.

“···?”

혼자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생쇼를 하는 소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라우라 맥닐.

작은 한숨과 함께 소하가 제정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안내를 마친다.

“여기예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와. 문도 고오급이네요. 같이 들어가시지는 않나 봐요?”

“난 그럴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어요.”

“네? 왜···.”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미 라우라 맥닐은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긴 상태였다.

뿔이 난 소하는 슬며시 그녀의 등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려주고선 노크를 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내방 허락이 떨어진다.

“들어오게나.”

중후하면서도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

모처럼 듣는 리처드 맥닐의 목소리에 소하는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어젖혔다.

***

모처럼 독대를 진행하는 소하와 리처드 맥닐. 근 1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둘은 말없이 자연스럽게 차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침묵을 즐겼다.

그렇게 침묵이 내려앉은 대저택의 고급 서재. 이 침묵을 깨기 위해 포문을 연 건 초대자이자 저택의 주인인 리처드 맥닐이었다.

“자네는 이래서 좋아. 침묵의 소중함을 알거든. 보기 드문 젊은이야.”

“뭘요. 구단주님도 맨날 카메라 앞에 서보세요. 이런 침묵은 언제라도 환영일걸요?”

“허헛. 그것도 그렇겠군.”

소하의 청산유수 같은 대꾸에 너털웃음을 흘리는 리처드 맥닐. 작은 미소와 함께 먼저 축하의 말을 건넨다.

“먼저 승격을 축하하네. 모처럼 매우 놀랐다네. 자네가 정말로 그 허언을 현실로 만들 줄은 몰랐거든.”

“말했잖아요. 전 해낼 거라고.”

밥 먹고 양치질을 마친 듯한 태연함에 리처드 맥닐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말을 하는 것과 내뱉은 말을 지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지. 이것만으로 찬사를 받기엔 충분하다네.”

“···.”

거듭되는 리처드 맥닐의 찬사에 소하는 입에 머금은 차를 차마 삼키지 못했다.

‘뭐지? 이 영감이 도대체 뭔 수작이지? 아무 이유 없이 비행기를 태워줄 노친네가 아닌데···.’

선의에는 둔감해도 악의에는 누구보다 민감한 소하! 그의 경험상 아무 이유 없이 얼굴에 금칠해줄 위인이 아니었다.

특히 리처드 맥닐이란 거인은.

때문에 소하는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역공을 시작했다.

“저보다는 구단주님이 칭찬받아야죠. 단돈 30억으로 최고의 성과를 낸 사업으로 길이길이 기억될 테니까요.”

단돈 30억.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액수였지만 리처드 맥닐에게는 푼돈이긴 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월급 300만 원을 받는 직장인이 300원짜리 껌 하나 산 거니까.

그리고 포츠머스의 구단 가치는 현재 1,400억 정도. 50배의 엄청난 이윤을 거둔 대박 난 사업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나?”

“당연한 거 아닌가요?”

소하는 어이가 없었다.

1,400원도 아니고 1,400억이다 1,400억.

30조가 넘는 자산을 가진 리처드 맥닐에게도 1400억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물론, 이윤을 남긴다면 크게 성공한 사업이었겠지.”

“···그 말은?”

소하는 얼굴을 굳힌 채 빠르게 되물었다. 언뜻 들어보면 이윤을 남기기 위해 포츠머스를 인수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난 이 구단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인수한 것이 아니라네.”

“···축구를 좋아하시지는 않아 보이던데요. 종종 너튜브에서 후원은 하시긴 한다지만요.”

“큼큼. 그런 사실은 없네. 그리고 자네 생각이 맞네. 난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 포츠머스란 구단도 잘 모른다네.”

“그럼 왜···?”

투자도 아니고 취미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망해가는 구단을 사드린 거란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건 말해줄 수 없네. 내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는 정도만 알면 된다네. 아직은 말이지.”

“그러니까···. 요컨대···. 구단을 매각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소리죠?”

“정확하네. 굳이 사고 싶다면 60억 파운드 정도는 들고 와야 할걸세. 물론, 협상테이블에 앉는 값일 뿐이라네.”

“···.”

60억 파운드.

한화로 10조.

상상도 되지 않는 엄청난 금액이다. 신사임당이 그려진 오만 원짜리 뭉치로 단칸방을 가득 채워도 남지 않을까?

즉, 리처드 맥닐은 선언한 거다.

관에 못 박히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절대 구단을 팔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좆됐네.’

소하는 리처드 맥닐의 확언에 인상을 잔뜩 구겼다.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일단, 오르지 않는 비트코인 가격은 둘째치더라도 말이지···.’

비트코인은 언젠가는 오를 거다.

과거였다면 현시점에 팍팍 올라야 정상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오른다고 해도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비트코인으로 수십 배, 수백 배의 이윤을 얻는다고 치더라고 팔아주질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

‘제기랄.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이 할아범이 노망이 났나.’

소하는 진지하게 리처드 맥닐의 관자놀이에 매그넘이라도 들이박고 협박해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한다.

물론, 터무니없는 망상일 뿐. 깊은 한숨을 한차례 내쉰 소하는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일단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야. 애초에 역으로 본전만 까먹는 이쪽 코인 판이니까.’

언젠간 이루어야 할 일이지만 당장 총알이 없다. 총알도 없는데 권총 한 자루 들고 불곰을 잡으러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뭐···. 큼. 다, 다행이네요. 제법 벌었다고 구단 매각하고 사라지시면 큰 낭패였으니까요.”

“자네는 나에 대한 믿음이 없구만. 허헛. 걱정하지 말게나. 내 마지막 숨이 내뱉어질 때까지는 계속 보게 될 테니.”

“···예예. 오래오래 사십쇼. 그나저나 딸내미한테 절 보내신 이유가 뭡니까?”

소하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능글맞게 웃는 리처드 맥닐을 애써 외면하는 소하. 계속 듣다간 화병 날 것 같아 주제를 바꾸었다.

“자네의 생각이 듣고 싶군.”

“흐음. 글쎄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젊고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를 소중한 딸과 이어주기 위해서?”

이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소하의 뻔뻔함은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리처드 맥닐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런 이런···. 차를 마시는 중에 개가 짖는 소리를 이리 우렁차게 들을 줄은 몰랐다네.”

“···너, 너무하시네요.”

“물론, 자네가 겉보기에는 완벽한 사윗감이라는 데에는 부정하지 않는다네. 다만···.”

“다만?”

소하는 다급하게 찻잔을 비우며 리처드 맥닐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네는 너무 뛰어나서 문제라네.”

“네?”

이건 또 뭔 개소리란 말인가.

더욱 구겨진 소하의 얼굴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리처드 맥닐은 말을 이었다.

“인간의 이치를 조금 벗어난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남자가 자네 아닌가. 인간의 이치로 이해할 수 없는 남자에게 내 소중한 딸아이를 줄 순 없지.”

“···.”

“사람이란 아무리 뛰어나도 어느 정도 결함이 있기 마련이지. 신은 공평하니까. 하지만 자네는 아니야. 자네는 결함이 없어. 무서울 정도로 뛰어나며 인격적으로도 훌륭하지. 그뿐이겠는가? 나이를 뛰어넘는 경험까지 갖추었다네. 이치를 벗어난 것이지.”

“어, 억측이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

서재에는 두 번째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의 침묵은 평화로웠던 첫 번째와는 정반대. 무겁고 음습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 침묵을 깨뜨린 인물은 리처드 맥닐이었다.

“딸아이가 원했던 거라네.”

“···왜요?”

“그건 나도 모른다네. 정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게나.”

“말해줄까요?”

질문을 하긴 했지만 소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산부인과 대신 냉동탑차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믿을 차가운 여자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리가 없었으니까.

“전혀. 자네도 알 텐데?”

“역시는 역시군요.”

“···그럼 사설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세나.”

“좋네요. 시간은 금이니까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소하. 제법 어려운 전투가 벌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자네가 날 찾으려던 이유가 내가 자네를 찾은 이유는 같을 거라 생각된다네.”

“그럴까요?”

“그전에 자네가 말한 새로운 3년 계획이란 무엇인가?”

리처드 맥닐의 선제공격!

꽤 날카로웠지만, 이쪽 부분에서의 준비는 철저히 한 덕분에 소하는 거침없이 받아친다.

“구단 내의 ‘눈’에 들어보시죠.”

“내 수족도 알아내지 못했기에 내가 직접 물어보는 것이라네. 자네 선수들이 입이 무겁다고 칭찬을 하더군.”

“하하하. 역시 제 제자들이죠. 그 스승의 그 제자랄까.”

“···.”

“뭐, 어차피 구단주님께는 말하려고 했으니 더 숨길 이유는 없겠죠. 전 3년 내로 트레블을 달성할 겁니다. 여차하면 전관 우승도 노릴 거고요.”

소하가 거침없이 3년 계획의 목표를 밝히자 리처드 맥닐의 얼굴에도 놀라움이란 감정이 피어났다.

“허허. 자네다운 계획이군. 처음 계획보다 훨씬 어려워 보이네만?”

“그래서 구단주님을 찾은 거죠.”

“역시 자네하고는 말하기가 참 편해. 자네 같은 인재가 둘만 내 곁에 있었으면 편히 은퇴할 텐데 말이야.”

멋들어진 하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웃음을 짓는 리처드 맥닐.

소하를 무척 탐내는 눈빛이다.

“좋네. 자네의 3년 계획의 결말이 매우 궁금해졌네. 어느 정도의 금액을 원하고 있는가?”

“그건···.”

소하가 미리 생각해둔 금액을 빠르게 답변하려 하자 리처드 맥닐이 말을 가로막는다.

“잠깐. 잘 생각하게. 지난번처럼 더 적게 불러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말이지.”

“···.”

3년 전.

100만 파운드를 받을 기회를 걷어찼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씁. 일단 3천만 파운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더 불러도 되겠는데?’

3,000만 파운드!

약 500억의 거금이다.

이 정도면 소하의 지식을 토대로 쟁쟁한 선수들을 모조리 긁어올 수 있을 터.

하지만 리처드 맥닐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노인네의 눈빛을 보아하니 3,000만 보다 더 보고 있음이 확실해. 그럼 따블로 가볼까?’

6,000만 파운드.

천억에 가까운 엄청난 금액이다. 이 금액이면 3년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대폭 오른다.

‘아니지. 아니야. 일단 협상은 최대치로 때려보는 것. 따따블로 간다.’

기어코 마음을 정한 소하.

배 깔고 드러누워서 따따블을 불러보기로 작심하고 입을 연다.

“9,000만 파운드. 여기서부터 협상을 시작해···.”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뻔뻔하고 무리한 금액이었는지 살짝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말을 다 마치지는 못한다.

“좋네.”

“네?”

조쉬 킹의 아들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멍청한 표정을 짓는 소하.

잘못 들은 거라고 믿어보지만, 아직 난청이 올 나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리처드 맥닐은 다시 한번 똑똑히 선언해준다.

“좋다고 했네. 자네도 성장했군. 사내다운 금액이었어.”

“···하···. 하하. 그, 그렇죠. 다 위대한 구단주님의 영향을 톡톡히 받은 결과물 아니겠습니까. 하하핫.”

아직 얼떨떨하지만 본능적으로 최대한 딸랑이를 흔들어보는 소하. 이 남자, 평범한 직장인이었어도 승진행 고속 열차를 탔을 인재가 분명했다.

< 159화. 3년 계획.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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