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158화 (158/306)

< 158화. 3년 계획. (2) >

다음 날, 포츠머스시에서는 대대적인 축하 행사가 열렸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환호성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놀아대기 시작했다.

조금 과장 보태서 이웃사촌이자 불구대천의 원수인 사우스햄튼까지 환호성이 들릴 정도의 대축제!

때맞춰 포츠머스를 찾아온 관광객들에게는 최고의 여행이었다.

신이 난 포츠머스 시민들의 인심이 매우 커졌으니까.

“오늘! 점심은 공짜다!”

“오늘 하루만 관광지 무료 개방입니다.”

“아니, 형씨 뭐해? 영어 못 한다고? 괜찮아. 이리 와서 술이나 마시자고. 내가 살 테니까.”

“마시고 취해보자!”

때아닌 엄청난 호의에 최고의 기억을 남기는 관광객들. 그중에서도 한국인 관광객은 VIP였다.

“한국인은 숙박료 무료. 대신 한국인인 거는 내가 검사함.”

“사우스 코리아? 나,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이리 와봐. 내가 아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코리안 할인 중.”

“뭐야? 한국인이잖아? 이봐 내가 관광지 안내해 줄게.”

“사랑해요. 사우스 코리아!”

특별대우를 받는 한국인 관광객들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쏟아지는 호의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와···. 여긴 천국이야.”

소문보다 훨씬 좋았다.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포츠머스는 상당히 유명한 관광지로 변한 지 오래다.

[죽기 직전에 가봐야 할 유럽 도시 10곳.]

여행잡지나 너튜브, 혹은 개인 홈페이지에 항상 윗줄에 꼽히던 곳이었으니까.

그래도 소문난 잔치에 먹거리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 기대하지 않았지만, 포츠머스는 소문만큼 정말 좋은 관광지였다.

아름다운 해안.

북적거리는 부두.

친 한국적인 분위기.

그리고 포츠머스 FC.

이 네 가지는 절묘하게 어우러져 1분 1초가 즐거웠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바로, 친 한국적인 관광지라는 것.

“무슨···. 중국어 안내판도 없고 일본어 안내판도 없는데 한국어 안내판은 있네. 이게 무슨 일이야?”

“심지어 대다수 주민이 간단한 한국어 정도는 기본으로 하더라고. 딱 태극기를 보면 바로 ‘아녕하세요우’가 나오던데?”

“그냥 한국인인 걸 아는 순간 엄청나게 잘해주더라고. 유럽 여행을 제법 다녔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최고였어.”

호평 일색!

서구권에서는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존재하는지도 잘 몰랐기에 알아봐 준다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감동이었다.

포츠머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하는 포츠머스의 신.

신의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당연한 접대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후후후. 이것이 바로 진정한 국위선양 아닐까? 그러니까 나 군대 면제 좀.”

소하가 거들먹거렸음은 당연했다.

이미 민방위에 접어든 주제에 면제 운운하는 꼴이 참 가관이다.

하여튼 포츠머스 시민들은 물론, 관광객들까지 신명 나게 즐긴 포츠머스의 승격 행진.

그 막바지에 선수들과 소하가 푸른색 오픈버스에 올라타 모습을 드러내자 분위기는 절정에 치달았다.

“성소하! 성소하!”

“성소하를 국회로!”

“조쉬 킹이다!”

“케빈 도슨! 저랑 결혼해줘요!”

“반즈다···! 세계에서 축구를 제일 잘하는 낚시꾼!”

“저게 잭 해리슨이야? NASA에서 비밀리에 만들었다는 안드로이드라던데.”

어지간한 스타는 명함도 들이밀지 못할 대단한 인기! 엄청난 함성이 터져, 포츠머스시에 지진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하하! 찬양하라!”

양팔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우쭐거리는 소하. 이게 조쉬 킹인지 소하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구경꾼들은 오히려 더욱 신났다.

애써 근엄한척하는 모습보다 같이 즐기는 모습이 더욱 좋았으니까.

이렇게 포츠머스의 승격 퍼레이드는 성황리에 끝났고 여름 내내 이어질 포츠머스시의 축제는 이제 시작이었다.

***

“그런고로 잘 쉬다 와라. 제정신이 머리통에 박혀있는 녀석이라면 휴가 중에도 몸 관리에 신경을 쓸 거라 믿는다.”

“넷!”

“한 달 뒤에 봬요!”

“푹 쉬세요. 감독님도!”

다음 날, 소하는 선수들을 훈련장에 한데 모아 휴가를 명했다.

다른 구단에는 없는 소하의 포츠머스가 가진 특유의 문화였다.

“만남과 헤어짐은 항상 함께해야 하는 법이지. 점호 같은 느낌이랄까.”

떠나는 선수들의 등을 바라보는 소하.

이내 맑은 바다 공기를 한껏 마시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소하도 휴가를 떠나려 하는 것일까?

아니다. 소하는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지만 이번 시즌 휴가는 반납했다.

“큰 도전을 앞두고 준비할 게 너무 많아. 어휴. 내 팔자야.”

준비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새로운 선수의 영입, 이적 예산 편성, 상대 팀 분석 등등.

이걸 한 달 정도 쉬고 와서 부랴부랴 하기에는 ‘도전자’로서의 포츠머스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뭐, 추가수당은 넉넉히 받으니까. 이참에 돈이 확 땡겨보자.”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

소하가 물욕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돈의 소중함은 절대 잊지 않았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어.’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개소리는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한 농간이라고 생각하는 소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는 유급휴가를 가져볼까나. 하하핫.”

휴가를 반납한 대가로 상당량의 추가수당을 받게 된 소하가 제일 먼저 작심한 건 농땡이.

정말 그다운 시작이었다.

‘하루는 좀 쉬어야지. 그렇고말고.’

뒹굴뒹굴.

감독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클럽하우스에서 가장 비싸고 편한 고급 의자에 몸을 파묻은 소하.

오전 내내 어떻게 농땡이를 부릴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든다.

물론, 소하에게 행복한 농땡이란 세상이 어떻게든 막아버리는 일이었다.

-똑똑똑.

예고에 없는 노크 소리에 소하의 표정은 차갑게 굳었다.

‘뭐지···? 이 시간에 아무도 찾지 말라고 단단히 엄포 놓았는데.’

휴가가 삭제된 직원들에게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 절대 찾지 말라고 공지해뒀거늘. 우렁차게 울리는 노크에 절로 심기가 뒤틀렸다.

단단히 경을 칠 거라고 작심하는 소하.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마음을 접는다.

명석한 머리가 그럴싸한 가설을 빠르게 완성했기 때문이다.

‘아니지. 아니야···. 우리 구단의 일반 직원 중에 내 말을 무시할 사람은 없어. 그렇다면 구단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상당히 그럴싸한 결론에 도달했고, 정답이었다.

-덜컥.

내방을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문은 열렸고 난생처음 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여자였다.

“···누구쇼?”

자연스레 불량해진 소하의 목소리.

남녀 평등주의자인 소하가 여자라고 서글서글하게 맞이해 줄 리가 없었다.

이런 예의도 없는 불청객에게는 말이다.

“···.”

영국 슬럼가의 양아치가 따로 없었지만, 불청객은 아무런 반응조차 없다. 그저 뻔뻔하게 소하를 빤히 주시했을 뿐.

‘뭐야? 저년은. 허락도 없이 내 스위트 룸에 기어들어 와서 야리기 시작하네. 오늘 한 푸닥거리 해야 하나?’

손에 찬 시계를 풀어제끼며 똑같이 노려보기 시작한 소하. 아무리 봐도 물리적인 예절 주입이 필요한 처자가 분명했다.

‘그나저나 더럽게 예쁘네.’

불청객과 때아닌 눈싸움을 시작한 소하는 드디어 눈에 들어온 상대의 미모에 상당히 놀랐다.

저 정도 외모라면 케빈 도슨의 부인, 나탈리 도슨과도 비견될 정도다.

‘애쉬블론드라니. 오스트리아 쪽 혈통인가? 아님 염색인가? 하여튼 더럽게 이쁘긴 한데 더럽게 차가운 눈이네.’

나탈리 도슨과 비견될 빼어난 미모였지만 분위기가 너무 차가웠다.

‘나탈리를 20년 정도 북해 빙하에 냉동시키면 저렇게 변할 거 같은데.’

나탈리 도슨과 불청객 모두에게 예의 없는 상상을 하는 소하.

그렇게 망상의 나래가 이어질 찰나. 불청객의 입술이 열렸다.

“당신이 성소하입니까?”

분위기보다도 훨씬 차가운 목소리.

덕분에 망상의 나래에 빠진 소하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내가 먼저 물어봤을 텐데···.”

“내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요. 난 그저 말을 전하고 당신을 데려오는 일을 할 뿐이니까요.”

“남의 사무실에 허락도 없이 들어왔으면 이름은 까줘야지.”

“···그것도 그렇네요. 좋아요. 난 라우라 맥닐이에요.”

라우라 맥닐이라. 소하로서는 익숙하면서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흥. 내가 그래서 이름을 알 필요가 없다고 한 거예요. 알아도 모르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래도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는 지칭할 수 없잖아요. 맥닐 씨. 어? 잠깐. 맥닐?”

뚱하게 비꼬던 소하는 맥닐이란 성이 입에 착 감기자 상당히 놀라워했다.

맥닐이란 성은 바로, 그 구단주 영감의 성이었으니까.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 하던데 역시 소문은 믿을만한 게 못되네요.”

“···.”

“그래도 이젠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도 대강 상황을 파악했겠지요?”

“···.”

“아버지께서 부르십니다.”

“···.”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소하는 이때 두 번이나 매우 놀랐다.

첫 번째는 구단주 영감에게 저렇게 젊은 딸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두 번째는 자신을 불렀다는데 놀랐다.

‘왜 딸을 시켜서 날 부르는 거야?’

구단주가 감독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것은 놀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굳이 딸을 불러 말을 전하고 초청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큼큼.”

잠시 헛기침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소하. 아직은 정보가 없었기에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렇다면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그 영감탱···이 아니라. 구단주님이 왜 부르시는데요?”

“난 몰라요.”

“왜 라우라 맥닐 씨가 직접 와서 말을 전하는 거죠?”

“난 몰라요.”

“에이 썅. 나 안가!”

기어코 울화가 터진 소하가 버럭 고함치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예상했다는 듯 라우라 맥닐은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린다.

“그럼 아버지께서 전할 말씀을 말해드리죠. ‘자네는 반골 기질이 있어 내 딸을 따라나서지 않겠다고 하겠지. 하지만 말일세. 어차피 자네는 날 찾아올 예정 아니었나? 시간 버리지 말고 얌전히 따라오게나.’라고 전하라고 하셨어요.”

“···.”

소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반항은 멈춘 채 순순히 라우라 맥닐의 뒤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 맥닐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새로운 3년 계획을 위해서라면 돈, 즉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

“···.”

“···.”

소하를 마중 나온 고급 리무진 안에는 때아닌 한파가 몰려왔다. 시승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고급스러운 실내장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그저 더럽게 비싼 냉동탑차 같은 느낌이랄까. 길고 긴 어색하고 차가운 분위기에 질려버린 소하가 결국 먼저 행동을 시작했다.

“저기요. 통성명은 됐으니까 이야기나 좀 하죠.”

“···.”

“몇 살이세요? 나랑 비슷한 거 같은데. 이야 영감님. 아니, 구단주님 힘도 좋아. 자식을 늦게 보셨네. 좋은 거 있으면 나도 좀 주지.”

“···.”

“아니, 잘못한 건 댁인데 왜 내가 싹싹 기어야 하지? 에라 모르겠다. 여기 와인 먹어도 되죠? 아니지. 먹을게요.”

온갖 헛소리를 늘어놓아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태도에 소하도 포기해버렸다.

굳이 매달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의 소하는 좋다는 사람만 만나고 다녀도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벌컥벌컥벌컥.

리무진 안에 배치된 고급 와인을 병나발 부는 소하. 참으로 개백정이 따로 없다.

세상천지에 이토록 ‘고급’이란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또 없을 거다.

“크아! 죽이네.”

소하는 시원하게 원샷을 때리고 소매로 입을 훔쳤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방금 마신 와인은 또 마시고 싶을 만큼 뛰어난 맛이었다.

“한 병 더 마셔도 돼요? 아니지. 마실게요.”

거침없이 한 병 더 까려는 소하. 그러자, 인제야 라우라 맥닐이 반응한다.

“···대단하군요. 내 평생 와인을 그렇게 마시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한 번 더 마시면 익숙해질 거예요. 두 번째니깐.”

“그 와인의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계시나요?”

“뭐, 몇백 파운드 정도 하겠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호쾌하게 병뚜껑을 따버리는 소하. 하지만 이어진 라우라의 목소리에 몸이 굳는다.

“2만5천 파운드짜리를 10초 만에 마시는 광경을 또 보고 싶진 않네요.”

2만 오천 파운드.

한화로 4,000만 원.

엄청난 액수다.

물론, 소하에게는 그리 부담되지는 않는다. 그도 상당한 주급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서민 감각이 대단한 소하로서는 충격적인 가격이었다.

“뭐요? 싯팔 뭔 금가루라도 녹여놨나?”

“···풉.”

깜짝 놀라는 소하의 오두방정에 그 차갑던 라우라마저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수십조의 재산을 가진 집안의 자제인 그녀로서는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어? 방금 웃었죠?”

“···난 웃지 않았어요.”

시치미를 뚝 떼는 라우라 맥닐.

그렇다고 포기할 소하가 아니었다.

“웃었는데.”

“아니에요.”

“그럼 방귀 소린가?”

“···그, 그건 더 아니에요!”

뺘악!

시조새가 이 땅에 부활한 소리를 내며 극히 부정하는 라우라 맥닐. 자기도 모르게 소하의 페이스에 말려버린 자신이 원망스럽다.

“그럼 뭘까요?”

그리고 소하는 약점을 잡으면 절대 놓치지 않는 비열한 사냥꾼. 집요하게 약점을 후벼 파기 시작한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소하는 물고 늘어졌고, 차갑기 그지없던 분위기는 어느새 상당히 풀어져 있었다.

< 158화. 3년 계획.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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