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3년 계획. (1) >
-삑! 삑! 삐이익!
플레이오프 결승전의 끝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웸블리 스타디움에 울려 퍼졌다.
아니, 울려 퍼지려다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사라졌다.
“와아아아아아!!!!”
“승격이다! 승격이다!”
“으아아아아!”
“해냈어! 해냈다고! 우리 팀이 기어코 프리미어 리그로 돌아갔다고!”
“흡, 흐읍···. 내, 내가 우리 포츠머스 된다고 말했··· 어흐흑!”
관중들의 천둥 같은 함성과 울음소리에 호루라기 소리는 묻혀버렸다.
이뿐만이겠는가?
기쁨이 폭발해 이성의 끈을 놓고 경기장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갔다
“가자! 드가자!”
“에라 모르겠다!”
“으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경기장 안으로 난입하는 포츠머스의 서포터들.
물론, 하면 안 되는 행위라는 사실은 충분히 잘 알았다.
하지만 인간이란 원래 나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행하는 존재 아니던가.
이성이 날아가 버린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기쁨을 마음껏 포효하며 공감하는 것이었다.
“···됐다. 비켜서라.”
“후우. 이해해줘야지.”
“좀 떨어져서 사고가 안 나게 예의주시 정도만 해라.”
결국 말리던 안전요원들도 두 손을 들고 말리기를 포기했다.
이성을 완전히 잃은 와중에도 나름대로 질서정연하게 경기장으로 들어갔으니까.
게다가 선수들 또한 달려드는 관중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으니 강경하게 막기에도 애매했다.
뭐, 훗날 협회에서 구단 측에 징계를 내리겠지만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포츠머스의 스태프진은 물론, 소하까지도 말이다.
“해냈어! 해냈어!”
“젠장! 우린 이제 프리미어 선수다!”
“흑···. 흑흑.”
선수들은 이미 몰려든 관중들에게 파묻혀 울부짖느라 정신이 없었고 밀러는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말···. 해냈구나. 정말 해냈어. 3년 만에···. 3년 만에···. 드디어 해냈어.’
가슴속에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진정하고 싶었지만, 온갖 과거의 기억이 눈가를 자극해 도저히 불가능하다.
3년 전, 애송이가 말 같지도 않은 내기를 권했을 때의 기억.
3년 전, 그 내기에서 패배하고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던 기억.
3년 전, 애송이가 3년 계획을 읊자 어이없어했던 기억.
그때만 해도 그저 초심자의 행운과 철없음이라고 생각했거늘.
하지만 이후 밀러는 점점 소하에게 빠져들었다. 특유의 과감함, 천재성, 신이 내린 안목, 뛰어난 장악력은 ‘혹시?’라는 기대감을 품게 했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갔다.
3년간 수없이 많았던 사건·사고들과 승리의 행진들.
그 기억 속에서 점점 소하와 같은 꿈을 꾸게 되었고 진심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
그래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을 이렇게 성공할 줄 몰랐다.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 길이 정답이라고 확신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아직도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게 꿈이었으면.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잠에서 깨지 않아도 좋을 텐데.
-툭툭.
한참을 흐느끼던 밀러는 다정하게 어깨를 두들기는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누가 어깨를 두들겼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왜 여기서 혼자 궁상떨고 계세요. 우리도 저 인파 속으로 들어가서 환호나 하자고요.”
당연히 소하였다.
밀러는 슬쩍 고개를 돌려 소하의 얼굴을 바라봤다.
소하의 눈가에도 작은 이슬이 맺혀있었지만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는 여전해 그의 마음을 진정시켜줬다.
“···가, 감독님.”
어찌 저리도 의연한지.
게임에서도 불가능한 위업을 달성했으면서도 어찌 저리도 침착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밀러는 한 가지 확신을 뒀다.
눈앞의 젊은 감독과 함께라면 그 어떠한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말이다.
“좋습니다. 오늘 어디 한번 제대로 즐겨보자고요!”
얼굴의 주름을 잔뜩 구기며 환하게 웃는 밀러. 그는 주저 없이 소하의 등 뒤를 따라 웸블리 스타디움에 펼쳐진 포츠머스의 앞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
한참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서포터들과 승격의 기쁨을 누린 소하와 선수들.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히자 슬슬 침착함을 되찾고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일정이 수두룩 남았기 때문에 더 오래 웸블리에 머무를 순 없었으니까.
선수들은 라커룸으로 돌아가 포츠머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으며 소하는 싱글싱글 웃으며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장에 소하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후벼팠다.
-짝짝짝짝!
“성소하! 성소하! 성소하!”
“축하합니다!”
“기적의 주인공!”
“대단합니다. 당신은 역사를 써 내렸습니다!”
모든 기자가 소하가 모습을 비치자마자 기립박수를 시작한 것이었다.
포츠머스의 기자들은 물론, 브라이턴의 기자들과 각종 대형 신문사의 기자들까지.
날고 긴다는 기자들이 한데 모여 한 사람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큼큼. 이거 예상외의 축한데···.”
생각지도 못한 기립박수에 조금 당황한 소하. 그답지 않게 뺨을 조금 발그스름하게 붉힌 채 천천히 마이크를 잡는다.
“감사해요. 여러분들의 관심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를 맞이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이번 승리를 여러분들께도 바칠게요.”
모처럼 겸손하게 기자들의 기립박수에 화답하는 소하. 이런 자리에서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만이자 방종이었다.
기자들 또한 소하의 반응에 대만족.
한참을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손뼉을 치던 기자들은 본격적으로 질문에 들어간다.
“축하합니다! 역사를 만들어내셨습니다. 3년 연속 프로리그 승격이라니!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이를 달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침을 튀기며 질문하는 첫 번째 기자. 명찰을 보아하니 포츠머스 쪽 언론사는 아니었지만,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사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단 한 번도 없었던 대기록이 만들어진 순간이기 때문이다.
축구계 종사자라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 영원히 기록될 역사의 한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했으니까.
“평상시 같았으면 제가 잘났기 때문이라고 말했겠죠. 하지만 오늘은 달라요. 저를 도와준 스태프와 프런트는 물론이고 잘할 때나 못할 때나 응원을 아끼지 않은 서포터들의 도움 덕분이라고 말할게요. 그리고 성격 더러운 감독을 잘 따라준 훌륭한 선수들에게 찬사를 보낼게요.”
소하는 침착한 어조로 모범적인 답변을 마무리 지었다. 너무 틀에 박힌 대답이 아닐까 싶지만, 진심이었을 뿐.
사실 이 답변 말고는 어떠한 답변도 떠오르지 않았고 떠올릴 수도 없었다.
“포츠머스가 09-10시즌에 강등당한 뒤 6년 만에 프리미어 리그로 복귀합니다. 아···. 근데 하하, 죄송합니다. 제 입으로 내뱉었어도 말도 안 되는 행보로군요.”
다음 질문을 넘겨받은 남자 기자는 질문을 하다가 말고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09-10시즌 프리미어 리그에서 강등.
10-11시즌 챔피언십 리그에서 잔류.
11-12시즌 챔피언십 리그에서 강등.
12-13시즌 리그1에서 강등.
이렇게 4번의 큰 실패 후에,
13-14시즌 리그2에서 우승 및 승격.
14-15시즌 리그1에서 우승 및 승격.
15-16시즌 챔피언십 리그 3위, 승격.
이게 말이 되지 않았다.
이 미친 급상승세는 그저 마법이라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은 일이었다.
“후후. 크게 숨을 내쉬면 좀 마음이 가라앉으실 거예요. 저도 그렇게 한참을 하고서 기자회견장에 나온 겁니다.”
소하가 기자의 마음을 헤아려 재치 있게 조언해주자 기자회견장에는 작은 웃음이 퍼졌다.
덕분에 침착함을 되찾은 기자는 질문을 마저 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큼큼.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확실히 한결 나아지는군요. 결국 프리미어 리그에 도전하게 되셨습니다.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기분이라···. 당연히 존나 좋죠.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하하.”
자기도 모르게 F 단어를 내뱉은 소하. 물론, 기자들은 소하의 실수를 바라보며 좋아죽는다.
소하가 워낙에 미디어 핸들링에 통달한 터라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 실수는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었다. 얼마나 기쁜지 너무나도 잘 표현해준 실수였기 때문.
“정말 기쁘신가 보군요. 하긴 제삼자인 저도 아직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당사자는 오죽할까요. 선수들도 마찬가지입니까?”
“당연하죠. 하부리그 선수들이 필생의 목표로 삼는 프리미어 리그에 데뷔하게 되었으니까요.”
“자신감이 대단하겠습니다.”
“물론이에요. 제 선수들은 하루라도 빨리 프리미어 리그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뽐내고 싶어 하죠.”
소하의 말처럼 포츠머스의 선수들은 잔뜩 흥분했으며 고양감으로 가득 찼다.
한시라도 빨리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고 싶어 몸이 아주 제대로 달아오른 상태.
심지어 몇몇 선수들은 휴가마저 반납하고 합숙 훈련을 하면 안 되겠냐고 진지하게 물을 정도였다.
휴식은 정말 중요했기에 한마디로 거절한 소하였지만 하부리그 선수들에게 프리미어 리그가 어떤 리그인지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이후 이어진 질문들도 거의 축하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그렇게 언론과 감독의 친목회가 끝나갈 시간이 되자 마지막 질문이 쇄도했다.
“감독님은 불가능해 보였던 3년 계획에 완벽하게 성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3년 계획과 비슷한 무언가를 준비하셨습니까?”
소하의 3년 계획은 이미 전설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한 판타지 소설이었기에 영원히 회자될 것임은 부정할 사람이 없었다.
때문에, 다음번 3년 계획이 있을까? 라는 의문이 따라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년 계획이라···. 기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또 다른 3년 계획을 세우고 있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소하의 반문에 질문을 던진 기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요. 이미 3년 계획만으로도 인간의 범주가 아니에요. 그 이후의 계획까지 세우기에는 너무 멀고 프리미어 리그는 너무 어려운 리그죠.”
기자의 대답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정석이었다.
유럽 변두리의 1부리그도 아니고 축구종가의 1부리그인 프리미어 리그 아니던가.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리그에서 또다시 기적 같은 3년 계획을 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소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석적인 대답이지만 아쉽게도 틀렸네요. 정답이 아니었어요.”
“···?!”
눈을 부릅뜨는 장내의 기자들.
소하의 부정은 3년 계획이 또 있다는 말과 같은 뜻 아니던가!
정수리 끝에 벼락이라도 내리꽂힌 듯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전 또 다른 3년 계획이 있어요. 물론, 이 계획은 3년 전에 계획한 거죠.”
놀란 기자들의 반응을 마음껏 음미하며 폭탄선언을 하는 소하.
이날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진 않았지만, 유럽 축구계에 거대한 파문을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
“다들 고생했다.”
소하는 결승전 당일의 모든 공식 일정을 마치고 선수들에게 칭찬을 날렸다.
언뜻 보면 너무 무신경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소하의 스타일이었고 선수들은 오히려 만족한다.
“휴. 또 감독님이 혓바닥 길게 내지르면서 온갖 미사여구 내뱉으셨으면 실망했을 뻔.”
“저게 감독님이지.”
“우린 아직 할 게 많이 남아 있잖아요?”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그 누구보다 기쁨에 울부짖었음에도 감정이 가라앉자 더 먼 곳을 바라보는 향상심!
이것이야말로 소하가 바라고 바라던 팀의 정신이었다.
“아니 지엄한 하늘 같은 감독님한테 혓바닥이 뭐냐. 이 새끼야. 확 뚝배기 반으로 쪼개버릴라.”
표정을 와락 구기며 툴툴거리는 소하. 살기 대신 장난기가 가득했기에 선수들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뚜, 뚝배기가 뭐예요? 푸흡.”
“한국말로 머리라는 뜻이래. 넌 이제 뒤졌다는 뜻이야.”
“저거 사전에는··· 당연히 없는 단어겠지?”
“감독님 단어 선택을 신중히 하셔야 합니다. 말이란 사람의 품위와 품격을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승격의 흥분이 가시지 않아 얼굴에는 홍조가 어렸지만, 말은 청산유수였다.
“시끄럽고 내일 정규일정이나 잘 치를 준비나 해라.”
정규일정이란 딱히 별거 없었다.
우승과 승격퍼레이드가 남아있었을 뿐. 포츠머스시에서 거대한 축제가 벌어질 거다.
“자 그럼 슬슬 버스에···.”
슬슬 버스에 올라타자고 제안하려던 소하. 하지만 선수들이 묵묵히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말을 바꾼다.
“뭘 그렇게 야려? 그렇게 잘생겼냐?”
“···.”
순간 구토가 쏠린다는 시늉을 하는 선수들. 미리 합이라도 맞춰둔 듯한 행태다. 하지만 장난도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케빈 도슨이 대표로 나와 묻는다.
“감독님.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뭘?”
“감독님의 진정한 계획을요. 항상 꿈을 이야기하셨지만 목표를 말씀해 주시진 않으셨습니다.”
“···.”
“냇이 뭔갈 아는 눈치였지만 직접 들으라고 말해주지 않더군요. 그리고, 조금 전 기자회견에서 언급하신 3년 계획이 구체적인 목표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이제 저희는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감독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실 거라고 믿습니다.”
진중하게 말을 마친 케빈 도슨. 어느새 그의 등 뒤에는 선수들이 늘어서서 열정적인 눈빛을 쏘아 보낸다.
“···들어도 괜찮겠냐?”
짐짓 고민하던 소하는 천천히 진심을 물었다. 물론 선수들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무조건 예스.
어떻게든 이 시간, 이 순간에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팽팽하다.
“후우. 그럼 어쩔 수 없지.”
소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조금은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제자들의 마음을 져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난, 3년 내로 트레블을 달성할 거다.”
드디어 선수들 앞에 공개된 소하의 진정한 목표!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엄청난 계획에 선수들은 그만 말을 잃고 말았음은 당연했다.
< 157화. 3년 계획. (1)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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