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플레이오프. (5) >
결승전 당일.
영국 축구의 성지이자 중심인 웸블리 스타디움에 푸른 바다가 내려왔다.
오늘 결승전의 주인공들이 모두 푸른색을 상징으로 삼은 팀들이었으니까.
포츠머스와 브라이턴.
브라이턴과 포츠머스.
상징적인 색을 제외하더라도 상당히 공통점이 많은 팀이다.
잉글랜드 남쪽 해안가에 위치.
런던 근교.
대표적인 관광지.
1부보다는 2~4부에서 훨씬 오래 보낸 영세구단.
등등 상당히 닮은 점이 많다.
하지만, 전혀 다른 부분도 상당하다.
정치적으로는 영국 남부의 성향에 맞게 보수당 우세인 포츠머스와는 다르게 브라이턴은 노동당, 녹색당 강세지역이다.
괜히 ‘영국의 게이 수도’라고 불리는 게 아닌지라 성 소수자 인구가 상당한 편이다.
보수 강세인 포츠머스에서는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문화다.
그리고 같은 푸른색일지라도 포츠머스는 좀 더 채도가 높고 브라이턴은 낮았다.
게다가 브라이턴은 푸른색뿐만이 아니라 상징인 갈매기의 하얀색까지 섞인 팀.
닮아 보이면서도 사뭇 다른 두 팀이 기어코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와아아아아! 포츠머스! 포츠머스!
-가자아아아! 브라이턴! 브라이턴!
웸블리 스타디움을 가득 메우는 양 팀들의 함성. 경기가 시작하기 한 시간이나 남았음에도 기운이 참 좋다.
같으면서도 달랐지만, 하나만큼은 완벽히 일치했으니까.
그것은 바로, 승격에 대한 열망.
이것만은 누구 하나 한 치도 밀리지 않을 만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이 마음에 걸맞게 팀의 수준도 엇비슷했다. 다소 포츠머스의 우위가 예상됐지만 말이다.
-포츠머스의 근소 우위가 예상된다. 리그 내에서 상대 전적이 포츠머스가 우세하기 때문이다.
-브라이턴은 포츠머스에게 리그에서 더블을 당했다. 홈에서도 지고 원정에서도 진 브라이턴이지만 그때와는 실력이 많이 달라져 기대된다.
-정점을 찍고 내려온 포츠머스와 정점에 도착한 브라이턴. 둘의 승부는 붙어봐야 알 것이다.
전문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객관적이며 옳았다. 전반기 초반, 후반기 초반에 만난 두 팀은 모두 포츠머스가 승리했지만 결국 순위는 3위와 4위 아니던가.
승점 차이도 3점 차이밖에 나지 않아 박빙의 승부가 예상됐다. 그야말로 승격을 가르는 플레이오프 결승전에 걸맞은 두 팀이다.
-포츠머스···. 포츠머스···.
-브라이턴···. 브라이턴···.
점점 소리가 줄어드는 함성.
웸블리 스타디움의 빈자리가 점점 줄어들수록 함성은 점점 작아져만 간다.
이제 시작이 코앞에 다가왔으니까. 온몸을 휘감는 은밀하고 농후한 긴장감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관중들은 이내 주먹을 꽉 쥔 채 호루라기 소리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
포츠머스의 선발진은 어떠한 승부수도 던지지 않은 기본적인 선발이었다.
비슷한 수준의 팀과 대결에서는 기묘한 수를 잘 던지지 않는 소하의 성향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였다.
[GK: 셰이 기븐.
LB: 앤디 로버트슨.
CB: 케빈 도슨.
CB: 찰스 말로리.
RB: 매튜 다이스.
DM: 데클란 라이스.
CM: 칼빈 필립스.
CM: 델리 알리.
LW: 도봉산.
RW: 잭 해리슨.
ST: 조쉬 킹.
Sub: 아론 람스데일. 아담 웹스터. 아다마 트라오레. 마이클 반즈. 스티븐 데커. 프레디 스톤. 마리오 발로텔리. 존 말로리. 에링 홀란드.]
평범해 보이는 선발이지만 의외로 소하는 고심을 많이 했다.
전술적인 측면 때문이 아니다.
그저 선수의 마음 때문이었다.
“미안하다. 선발은 아쉽게 됐다.”
마리오 발로텔리에게 직접 선발 제외 통보를 전한 소하. 솔직히 미안했다.
그는 이번 시즌의 일등 공신 중 한 명이었으니까.
이런 무자비한 처사는 개망나니로 유명한 발로텔리가 큰 불만을 품을지도 몰라 직접 사과한 거다.
하지만, 발로텔리는 의외로 의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난 아직 손님이니까. 집주인들에게 마무리를 맡겨보는 게 손님 된 도리지.”
“···사람이 다 됐구나?”
“헤이! 날 뭐로 본 거야?”
소하가 얼빵한 표정으로 감탄하자 발로텔리는 길길이 성화를 냈다.
그래도 너무 놀랍지 않은가. 자기밖에 모르던 개망나니가 소하의 마음을 이리도 잘 알아차리다니.
그리고 마음의 문제도 바로 이것이었다. 3년간 뼈를 깎는 노력을 한 선수 중에서 경기에 뛸 사람을 따로 선별해야 했으니까.
‘모두가 다 뛰고 싶어 하지.’
3년.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 시간을 이 자리를 뛰기 위해서 분골쇄신한 선수들 아닌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유해진을 제외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꼈던 소하였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브라이턴은 4-4-2 포메이션 이었다.
선발진은,
[GK: 데이비드 스톡데일.
LB: 솔리 마치.
CB: 루이스 덩크.
CB: 코너 골드슨.
RB: 브루노.
LM: 제이미 머피.
CM: 리암 로세니어.
CM: 비람 카얄.
RM: 안토니 녹카트.
ST: 토머 헤메드.
ST: 바비 자모라.
Sub: 니키 마엔파. 우베 후네마이어. 가에탕 봉. 스티븐 시드웰. 데일 스티븐스. 리치 토웰. 이리 스칼락. 샘 발독. 바히드 함보.]
포츠머스와 마찬가지로 리그 내내 뛰어난 활약을 펼치었던 선수들 위주로 내보냈다.
해외 축구를 자주 찾아본다면 2020년대에도 제법 이름을 날린 선수들이 보인다.
대표적으로는 루이스 덩크와 안토니 녹카트, 솔리 마치 정도.
루이스 덩크, 브라이턴의 성골유스이자 훗날 잠시나마 잉글랜드 국가대표까지 승선하는 좋은 수비수다.
그리고 프랑스산 왼발, 안토니 녹카트는 굉장한 기술을 가진 위협적인 선수였고 솔리 마치는 22년에도 브라이턴에서 뛰는 다재다능한 선수로 유명했다.
여기에 16-17시즌 시즌에 승격을 이루어내는 ‘크리스 휴튼’ 감독이 이끄는 중. 결코 만만히 여겨서는 안 될 팀이었다.
게다가 평범해 보이는 브라이턴의 선발이었지만 조금 독특한 부분도 보인다.
바로, 샐리 마치의 왼쪽 풀백기용.
[브라이턴이 재미있는 왼쪽 기용을 가지고 왔습니다. 샐리 마치의 왼쪽 풀백기용이라니. 분명히 노림수가 있군요.]
[맞습니다. 좋은 왼발을 가진 윙어를 윙백으로 쓴다는 건 특별히 준비한 전략이 있다는 거죠.]
제대로 짚어주는 장내 아나운서와 해설. 먼 미래에는 다재다능한 멀티 자원으로 이름을 떨치는 솔리 마치였지만 아직은 조금 일렀다.
크리스 휴튼 감독이 선수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위협적인 감독이라는 증거!
이에 소하 또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제법인걸? 솔리 마치의 다재다능함을 수년이나 일찍 알아보고 사용하다니. 조심해야겠어.”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소하의 눈에는 두려움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이 자리야말로 꿈에도 그리던 자리였으니까.
전생에서도 딱 한 번 맛보았던 이 자리. 당시에는 실패하고 경질까지 당했지만, 이번에는 성공할 거라 단단히 마음먹은 그였다.
***
경기 시작 10분 전.
결승전을 앞두고 소하와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마지막 이야기를 나눈다.
“요 며칠간 상대 선수에 특징에 대해서는 전부 암기했을 거라고 믿는다.”
“당연하죠.”
“전 이제 저 자신보다 상대가 잘 보여요. 이게 동양에서 말하던 모라이체? 인가요?”
개소리까지 줄줄 내뱉는 걸 보아하니 전날의 긴장은 모조리 떨쳐버린 지 오래인 듯 보인다.
“모라이체가 아니라 ‘물아일체’라고 하는 거다. 여기에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피식 웃어 보이는 소하.
실력은 몰라도 한국어 솜씨는 유럽에서 제일 뛰어난 팀이지 않겠냐는 생각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뭐, 뭐야. 감독님이 웃었어!”
“방금은 썩은 미소가 아니었는데.”
“와. 결승전이라서 그런지 제정신을 놓으셨나?”
소하의 미소에 호들갑을 떠는 포츠머스의 선수들. 호들갑을 떨 만하긴 했다.
공적인 자리에서 소하는 선수들에게 좀처럼 미소를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보통은 화내거나, 욕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잔소리하거나. 미소와는 억만 광년 떨어진 모습만 보여줬다.
하지만 선수들이 소하를 좋아하는 이유는 꽤 많았다.
능력도 능력이었고 승리를 향한 지독한 집념은 존경스러웠으며 개인 면담에서는 누구보다 자신들을 신경 쓰고 있단 사실을 은연중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면 선수들의 폭발적인 성장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선수들이 잘 알고 있었다.
“시, 시끄러워 새끼들아. 방금 이빨 보인 놈들 다 기억해뒀다. 지면 보인 이빨 수만큼 줄빠따 휘두를 생각이니까 각오하고 있어라.”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소하. 농담이긴 했지만, 살짝 진심이 섞여서 선수들은 찔끔거렸다.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명했지만 다시 한번 말하겠다. 브라이턴은 우리 팀의 후방 빌드업을 방해할 거다. 이걸 잘 풀어나가야 해.”
포츠머스의 4-3-3.
브라이턴의 4-4-2.
단순하게 포메이션으로만 비교하자면 4-3-3이 4-4-2를 완벽히 카운터 친다.
하지만 어떻게 운영하냐에 따라서 4-4-2 포메이션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
이는 진화한 중앙 공격수의 역할 때문.
압박형 포워드라는 새로운 개념 덕분에 빌드업에 강점을 지닌 4-3-3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소하가 늘 말하던 수적 우위 때문이다.
중앙의 3대2 싸움에서 공격수 두 명이 합류하며 3대4 싸움으로 변해버렸으니까.
조금이지만 계속 변하는 축구의 전술은 ‘공은 둥글다’라는 여지없는 증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인다.”
전술적 지시사항을 모두 전달한 소하. 짐짓 진지한 태도로 선수들을 훑어보며 입술을 뗀다.
“이겨라.”
많은 말은 필요 없다.
그리고 선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네!”
선발이든 아니든.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우렁차게 답변하는 포츠머스의 선수들.
이 자리에서 승리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
-삐익!
기어코 울려버린 결승전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
동전 던지기로 선공은 포츠머스였다.
시작하자마자 앞으로 나가기보다는 천천히 뒤로 공을 돌려보는 포츠머스.
매우 공격적인 포츠머스였지만 기본적인 토대는 후방에서부터 시작이었다.
[포츠머스가 천천히 공을 주고받으며 기어를 올리는 모습입니다.]
[브라이턴이 이때 싶어 적극적으로 후방 빌드업을 방해하기 위해 왕성한 활동량을 가져가는군요.]
감독에게 전술적 지시를 제대로 받은 듯, 브라이턴은 거침없이 공을 따라다니며 빌드업을 방해한다.
“포츠머스는 강하다. 그리고 이 강함에는 리그 최고의 미드필더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 휴튼 감독의 확언!
상당히 정확했다.
세간에서는 도봉산-조쉬 킹-잭 해리슨으로 이어지는 공격진을 핵심으로 봤지만, 미드필더의 지원이 없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공격진용이 매섭긴 하지만 공을 잡지도 못하게 하면 녹슨 창일 뿐이다.”
윙어인 솔리 마치의 풀백기용도 여기서 착안한 것이다.
미드필더 라인에 익숙한 선수를 이용해 조금 더 중앙에 압박을 넣기 위함이었다.
포츠머스를 상대하기 위해 아주 제대로 준비한 브라이턴의 크리스 휴튼 감독.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너무 뻔하잖아요.”
소하는 이미 미래에 더욱 진보된 4-4-2 전술을 맞본 감독.
이 정도쯤은 새롭기보다는 익숙한 수준이었다.
덕분에 솔리 마치의 기용 또한 단순한 공격 강화가 아닌 압박을 위한 점임을 바로 알아 차려버렸다.
“요컨대 인버티드 윙백의 초기형이랄까. 제법이긴 해. 하지만 풀백이 중원 싸움을 도와준다는 이야기는 측면이 빈다는 뜻이기도 하지.”
상대가 소하인지라 나름대로 준비한 약점을 완전히 노출해버린 브라이턴.
생사가 갈린 진검승부에서 약점이 노출됐다면 결과는 뻔했다.
“뒤져야지. 가라!”
버럭 외치며 손가락으로 약점을 가리키는 소하. 이에 맞춰 포츠머스의 선수들은 사정없이 약점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갈게요!”
후방 빌드업을 위해 많이 내려온 칼빈 필립스가 기습적인 장거리 패스를 내지른다.
목표는 당연하게도 브라이턴의 왼쪽, 즉 포츠머스의 오른쪽이었다.
-뻥!
쭉쭉 뻗어가는 칼빈 필립스의 장거리 패스. 허둥지둥 처리한 패스가 아니라 이미 준비하고 있던 패스인지라 빠르고 정확하다.
“좋은 패스입니다. 필립스.”
패스에 맞춰 순식간에 쇄도한 부주장, 잭 해리슨은 칼빈 필립스의 패스에 감탄하며 쉽게 공을 잡고 질주를 시작.
순식간에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까지 도착했다.
“흐음.”
찰나에 시간 동안 경기장을 스캔해보는 잭 해리슨. 마침, 반대쪽 측면에서 도봉산이 좋은 자리로 뛰어가는 중이다.
“보였습니다!”
골로 향하는 길에 대한 탐색을 마친 잭 해리슨. 주저 없이 도봉산을 향해 낮고 강한 크로스를 내지른다.
수비수 한 명의 머리를 지나 뚝 떨어지는 잭 해리슨의 날카로운 크로스!
엄청난 기술이었고 도봉산의 발밑에 정확히 떨어진다.
“···저도 보였습니다!”
도봉산도 잭 해리슨과 같은 길을 봤다. 슛하기에는 너무 좋지 않은 각도에 크로스를 준 이유는 뻔했으니까.
“당연히 있겠죠.”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은 채 잭 해리슨의 크로스를 다이렉트로 뒤로 툭, 보내는 도봉산.
얼핏 보면 트래핑 미스 아닐까 싶지만 매우 훌륭한 원터치 패스였다.
도봉산 급의 기술을 가진 선수가 아니라면 시도도 하지 못할.
그리고 도봉산의 센스있는 원터치 패스는 가야 할 길에 정확히 도착했다.
“바로 이거죠! 내가 간다, 프리미어 리그! 천재 델리 알리 님을 기다리도록!”
자신만만을 넘어 오만한 발언을 지껄이는 델리 알리가 그 길의 종착역이었다.
-휘릭.
순간 중앙으로 한번 짧게 치고 들어가 그대로 파 포스트 모서리 상단을 노리는 슛을 내지른 델리 알리.
발목에 전해지는 느낌은 굳이 공을 더 볼 필요가 없었다.
-철썩.
우아한 곡선을 가르며 그대로 골망을 갈라버렸다.
“으아아아!”
포효를 내지르며 이미 미쳐 날뛰는 서포터석으로 달려가는 델리 알리!
[골입니다! 골! 전반 3분 만에 포츠머스가 선제골을 달성합니다!]
[어, 엄청난 골이었습니다. 골대 근처에서 골이 만들어지기까지 5번의 터치밖에 하지 않았어요!]
놀라 자지러질만한 멋진 골이자 포츠머스가 승격에 한 발 내딛는 역사적인 골이었다.
< 155화. 플레이오프. (5)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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