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플레이오프. (4) >
드디어 그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5월 29일.
장소는 영국 축구의 성지이자 중심인 웸블리 스타디움.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기 위한 최후의 결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3년 전, 포츠머스가 이 자리에 서게 될 줄 아무도 몰랐다.
법정관리를 받으며 구단이 존망의 갈림길에 선 순간이었으니까.
3년 전,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청년이 3년 계획을 야심 차게 외쳤을 때만 해도 그저 쇼맨십인 줄만 알았다.
그는 선수 출신도 아니었으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20대 풋내기였으니까.
하지만 푸른 눈을 한 동양 혼혈은 기적을 써 내려갔고 기어코 위대한 계획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여러 악재가 겹치며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지만, 포츠머스가 플레이오프 결승전에 온 것만으로도 세상이 놀랄 일.]
[성소하 감독의 3년 계획. 용의 눈을 멋들어지게 그릴 수 있을 것인가.]
[재만 남은 구단을 3년 만에 이 자리까지 올린 성소하 감독은 이미 포츠머스의 전설.]
[이제 한 걸음만 남았다! 모든 포츠머스 시민들의 소원은 오직 한가지. 프리미어 리그로의 복귀!]
[고요한 포츠머스시. 긴장감으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리는 환자가 급증!]
포츠머스에서는 매일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기사의 내용처럼 포츠머스시는 긴장의 끈이 빠짝 조여진 상태.
불안증세에 시달리느라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엄청난 긴장감.
엄청난 압박감!
그저 지켜볼 뿐인데도 이 정도인데, 선수들은 오죽하겠는가. 항상 활기차던 포츠머스의 클럽하우스에도 적막이 내려앉았다.
포츠머스의 클럽 하우스는 마치, 새벽 시간 짙은 안개가 낀 공동묘지 같은 분위기다.
훈련장도 거의 비슷한 상황.
항상 웃는 소리가 가득하던 훈련장에도 잔잔한 침묵이 깔려있다.
“아! 오줌 마려워!”
고요한 적막을 깨는 오두방정이 소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매우 당연하게도 이 호들갑의 주인공은 조쉬 킹.
결승전을 앞둔 간단한 훈련을 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화장실을 찾는다.
이번이 벌써 5번째.
오줌 만드는 기계가 따로 없다.
“쯧쯧. 연례행사네. 큰 경기만 다가오면 항상 저렇게 화장실을 간다니까.”
“쫄보야. 쫄보.”
혀를 차는 두 친구, 델리 알리와 칼빈 필립스. 조쉬 킹과는 다르게 이 둘은 매우 침착해 보인다.
오히려 한시라도 빨리 내일 경기를 뛰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너희들이 이상한 거야. 하여튼 불알만 커가지곤.”
“···.”
“···.”
쉰 소리를 하며 후다닥 또 사라지는 조쉬 킹. 절친한 친구들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 이번만큼은 조쉬 킹이 아닌, 델리 알리와 칼빈 필립스가 이상한 경우였으니까.
“···저도 갔다 와야겠습니다.”
항상 침착하던 케빈 도슨도 화장실행.
리그컵 결승전 때도 하지 않았던 긴장을 잔뜩 해버렸다.
“후···. 주, 주장 같이 가죠.”
“나도 가야겠다. 조쉬 킹이 자꾸 가니까 나도 전염돼버렸어.”
“이참에 나도 가볼까.”
줄줄이 따라나서는 포츠머스의 선수들.
프리미어 리그라는 꿈의 무대가 한 경기 만에 결정되는지라 압박감이 상당한 모양이다.
심지어 수십만 포츠머스 팬들의 마음마저 짊어졌으니. 어지간한 강심장을 가진 인간이 아닌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긴 힘들었다.
“흠. 한심합니다. 이렇게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잘하던 플레이도 하지 못할 텐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인간에서 살짝 벗어난 잭 해리슨도 델리 알리와 칼빈 필립스와 같은 부류였다.
비엔나소시지처럼 화장실을 줄줄이 따라가는 동료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까요. 부주장.”
“주장감은 부주장 아닐까요?”
포츠머스의 두 핵심이자 빛나는 유망주들은 잭 해리슨의 말에 열렬히 호응했다.
“과찬입니다. 그럼, 분명 감독님께서는 이 장면을 어디선가 몰래 보고 계실 터. 내일 선발을 위해 훈련을 마저 끝내도록 합시다.”
“알겠어요. 물론, 우린 당연히 선발이겠지만요.”
“감독님이 그랬어요. 큰일은 대범하고 대담한 사람이 하는 거라고요. 내일 경기는 우리의 시간이에요.”
간덩이가 큰 사람끼리 잘 논다.
“그럼 저도 같이하도록 하죠.”
여기에 의외의 인물이 합류했다.
포츠머스 최약의 멘탈을 가졌었던 도봉산이었다.
“어? 도봉산도 별로 긴장하지 않았나 봐?”
“봉산 형도 제법 사내다워졌네요.”
델리 알리와 칼빈 필립스는 매우 반겼고 잭 해리슨마저도 모처럼 미소까지 짓는다.
“도봉산 씨. 마음의 짐을 내려두셨군요. 좋습니다. 내일 힘을 합쳐 브라이턴의 측면을 뚫어내 봅시다.”
“바라던 바입니다.”
의기투합하는 포츠머스의 양쪽 날개들.
서로 패스를 주고받는 일은 적겠지만 그들이 분발한다면 경기는 한결 쉬워질 거다.
편안한 표정으로 훈련을 마저 진행하는 도봉산과 그 일당들.
당연하게도 그 모습을 풀숲에서 몰래 훔쳐보고 있던 소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좋아. 좋아. 케어가 필요 없는 녀석들이 제법 되는군. 이 정도면 내가 손쓸 일은 별로 없겠어.”
조쉬 킹이야 어차피 경기에 들어가면 다 잊어버릴 단순한 친구라 그리 걱정되지 않는다.
케빈 도슨도 마찬가지.
어차피 경기에 들어서면 ‘빙벽’이란 별명에 어울리는 플레이를 보일 거다.
포츠머스의 주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머지는 저 녀석들의 태연함에 알아서 감화되겠지.”
조금 긴장하더라도 정신 무장면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포츠머스의 선수들이다.
막상 해야 할 일이 닥치면 누구보다 의젓하게 대처할 거라고 굳게 믿는 소하였다.
“그나저나···. 잭 해리슨. 저거, 저거, 내가 훔쳐보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벌써 소문이 났나? 하여튼 무서운 놈이야.”
인간 같지 않은 제자가 조금은 무서워진 소하. 훔쳐보던 풀숲에서 기어 나와 하늘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뱉는다.
“후유···. 그럼 나도 마음을 가다듬어 볼까. 나도 인간인지라 조금 긴장되는데. 이게 얼마 만이지.”
모처럼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회귀 이후 처음 긴장이란 미지의 두려움과 마주치자 재밌기까지 하다.
그래도, 제자들도 이겨낸 긴장과 압박에 그가 질 순 없는 법.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
다소 가볍고 한산한 선수단의 분위기에 비해 포츠머스의 프런트는 그 어느 때보다 바빴다.
“사, 살려줘···.”
“주, 죽을 거 같아요···. 팀장님.”
“3일째 집에 못 갔어···. 그렇다면 사실 이곳이 내 집이 아닐까? 그래. 난 지금 3일째 휴가를 온 거야···.”
정신을 놓아버린 포츠머스의 프런트 직원들. 과한 업무 덕분에 눈그늘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홍보부 팀장인 에밀리아 존슨도 마찬가지. 그녀 또한 눈 밑에 검은 그림자를 잔뜩 드리운 채 정신없이 업무에 매진하는 중이다.
홍보팀이 하는 일은 말 그대로 홍보.
내일 치러질 경기에 대한 홍보는 물론이요, 결과에 따라 각기 다른 홍보도 어느 정도 미리 준비해야만 했다.
게다가 관리팀과 힘을 합쳐 승격퍼레이드까지 준비하는지라 눈코 뜰 새 없다.
“팀장님, 내일 만약에 지면···.”
신입사원 하나가 결코 입에 담아선 안 될 단어를 꺼내버렸다.
온화하고 다정다감하기로 평판이 자자한 에밀리아 존슨마저도 좌시하지 않는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욧!”
언제 흐느적거렸냐는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일갈하는 에밀리아 존슨.
갑작스러운 고성에 주변의 시선이 쏠렸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 그 단어는 절대 사용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법칙을 선배에게 배우지 않았나요?”
“죄, 죄송합니다.”
“진다···가 아니지. 하여튼 우리는 그냥 준비만 하는 거예요. 어차피 사용할 일도 없겠지만요.”
결승전을 앞두고 패배를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건 포츠머스뿐만이 아니었다.
미신이긴 했지만, 부정적인 생각과 말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 않던가.
최대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포츠머스가 바라고 바라던 꿈이 한 치 앞으로 다가온 때였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신입사원.
그 착하던 팀장이 이토록 화를 내자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그 모습을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던 에밀리아 존슨은 이내, 표정을 풀고 한숨을 내쉰다.
“후우. 큼큼. 제가 조금 날카로웠네요.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않을 거라고 믿을게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가보도록 하세요.”
“네!”
신입사원은 에밀리아 존슨의 사과에 다시금 기운을 차리고 업무로 돌아갔다.
“후우.”
자리로 돌아간 신입사원에게 시선을 거두며 한숨을 내쉬는 에밀리아 존슨. 화를 냈던 자신이 급격하게 후회된다.
‘조금 참았어야 했는데.’
그녀답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미소를 잃지 않았었거늘. 그만큼 업무의 피로도 피로지만 승격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큰지 엿볼 수 있었다
게다가 사실, 깐깐하기로 소문난 니엘 비숍같은 사람에게 실수했다면 이렇게 가볍게 끝나지도 않았을 거다.
에밀리아 존슨이었기에 쓴소리 한 번으로 끝난 것뿐. 아니었다면 정말 온종일 욕을 얻어먹었을 거다.
‘하아. 옆에서 보는 나도 이런데 선수들은 어떨까. 그리고 감독님은···.’
문뜩 창밖을 바라보며 소하의 얼굴을 떠올리는 그녀. 그렇게 얼마간 소하가 긴장한 얼굴을 상상해보려다 이내 포기하고 피식 웃음을 내뱉는다.
“후후. 감독님이 긴장이라니. 전혀 상상되질 않네.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지.”
다시금 투지를 불사르며 업무에 매진하는 에밀리아 존슨. 너무 높이 날아올라 닿을 수는 없겠지만, 연모하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닮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였다.
***
“흐음.”
포츠머스의 프런트에서 심한 압박과 긴장 때문에 한숨을 짓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가장 복잡한 감정을 한숨으로 내뱉는 사람은 CEO, 브라이언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그저, 그저 감독 한 명. 그것도 방패막이용으로 잠깐 쓰고 버릴 패였거늘.
그 한 명의 힘으로 3년 만에 프리미어 리그 승격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처음부터 협조적으로 손을 맞잡아줬다면. 이렇게 갈등의 골이 깊어지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니지. 아니야. 처음부터 그는 날 싫어했다. 아니, 거의 증오에 가까웠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젓는 브라이언. 솔직히 그도 처음부터 소화와 척질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소하의 이유 모를 적개심은 너무나도 빤히 보였다.
그래서 가소로웠고 그래서 꼴 보기 싫었으며 그래서 반대쪽에 서버렸다.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가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낸 격이었으니까.
‘누구나 다 나처럼 했을 거다. 주워온 똥개가 주인의 밥상을 노린다면 백이면 백 나처럼 행동할 테지.’
브라이언의 입장에서는 소하는 주인의 밥그릇을 노리는 사냥개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소하는 처음부터 겨우 사냥개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은 너무나도 커져 버려 밥그릇은 물론, 집마저 차지할 기세다.
그것도 매우 절대적인 힘으로. 이제는 막아설 수조차 없다.
‘남은 길은 두 가지다. 꼬리를 말고 발밑을 기던가, 내가 떠나던가.’
내부 권력투쟁은 이미 끝났다. 온갖 수작을 다 써봤지만 소하의 3년 계획이 완성된다면 독으로 돌아올 일만 남았다.
‘꼬리를 만다고 성소하가 날 받아줄까? 전혀 아니지. 그는 그렇게 물렁물렁한 인간이 아니다.’
정적인 만큼 브라이언은 소하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렇다면 남은 길을 떠나야 한다는 건데···.’
물론, 떠나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어찌 됐든 외부에서는 소하를 알아보고 파격적인 선임을 한 공로가 매우 크다고 평가했으니까.
다른 구단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난 떠날 수 없다. 내가 이 구단에 묶인 이유가 있으니까.’
그가 구단을 한번 말아먹었음에도 자리를 유지한 이유도 같았다.
바로, 구단주와의 개인적인 계약.
“후우우우···.”
깊은 한숨을 내쉬는 브라이언. 결국 그는 소하나 구단주의 손에 운명을 맡기기로 마음먹고 내일 있을 결승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 154화. 플레이오프.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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