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15-16시즌 챔피언십 리그 후반기. (5) >
소하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든지 말든지 시간은 술술 잘만 흘러갔다.
그간 두 경기나 치른 포츠머스.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인지라 자연스럽게 성적은 개판이 되었다.
더비 카운티 전 1:3 패배.
로더햄 유나이티드 전 0:1 패배.
순식간에 4실점이나 하며 내리 2연패를 달성해버렸다.
이미 마음이 떠난 재커리 뱅크스가 태업이라는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그저 챔피언십 리그의 승격을 도전하는 팀의 골키퍼로서는 부족했을 뿐.
“골키퍼의 소중함을 모처럼 느끼는군···. 내가 어리석었어.”
골키퍼 자리에 대한 전력 강화를 소홀히 했던 것에 심심찮은 반성의 시간을 가지는 소하.
조금 많이 안일했다. 워낙에 말콤 우드가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주었으니까.
그만큼 골키퍼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팀을 지탱해주는 역할이었다.
기본적인 선방 능력부터 수비라인 조정, 후방 빌드업에도 관여하는 최후방 필드 플레이어로 진화한 포지션이었으니까.
“20년대의 리버풀이 괜히 강팀으로 변모한 것이 아니지.”
훌륭한 골키퍼와 최고의 수비진.
이를 통한 후방안정화는 자연스럽게 공격 강화까지 이어졌으니까.
포츠머스는 골키퍼를 잃었고 이 말은 후방에 불안정화가 진행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후방이 불안해지자 공격력도 감소했으며 전체적인 팀의 포지션도 무너져버렸다.
“이뿐만이면 예상 범위 안이지만, 더욱 좋지 않은 건 팀의 사기 저하다.”
만약, 말콤 우드가 팀 내에서 신망이 없는 선수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큰형으로서 어린 팀의 중심을 잡아주던 선수였던지라 상상 이상으로 팀이 흔들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솥밥 먹으며 웃고 울던 절친한 지인이 눈앞에서 다리가 두 동강이 나는 모습을 목격한 거니까. 그것도 은연중에 믿고 따르던 ‘어른’이 말이다.
게다가 이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도봉산의 폼 저하였다.
이제는 극복해왔다고 생각했던 부상의 트라우마. 똑같은 부상의 장면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목격해버리자 트라우마가 도져버렸다.
“한마디로 아주 좆됐다는 거지.”
각성하기 전처럼 몸을 사리는 도봉산의 플레이를 바라보며 소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콤 우드야말로 팀의 핵심이자 핵심이었어.’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을뿐더러 현대 축구에 어울리는 골키퍼 스타일을 가진 뛰어난 선수였다.
10년. 딱 10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스위퍼 골키퍼’로서 주목받았을 텐데 말이다.
‘하여튼 더는 고민할 시간이 없어.’
그렇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승격은 저 하늘의 별처럼 손에 쥐지 못할 테니까.
소하는 3위로 떨어진 리그 순위표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이내, 안토니오 그린을 불러들였다.
***
안토니오 그린은 소하의 부름에 솜털을 곤두세우며 바짝 긴장했다.
팀이 안정화된 이후로는 정규 면담을 제외한다면 따로 부르지 않던 소하였거늘. 도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시지?’
두근두근. 모처럼 세차게 뛰는 심장.
어렸을 적 담임선생님에게 따로 불려가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확실한 건 매우 좋은 일이거나 매우 나쁜 일이라는 건데.’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부르지 않은 자신의 보스였으니까. 극과 극의 갈림길이 눈 앞에 펼쳐지는 착각이 든다.
‘나쁜 일일 확률이 80%쯤···. 불안하다 불안해!’
경험상 보통 소하가 부른다면 나쁜 일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체 뭘 잘못한 걸까. 걸음을 옮기며 심각한 표정으로 과거를 머릿속에서 되감아 본다.
마치 주마등을 경험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먼젓번에 감독님께서 탕비실의 초코바 가져가는 걸 비품 담당에게 몰래 말해줘서 그런가?’
비품 횡령은 죄질이 나빴으니까.
케빈 도슨과 잭 해리슨의 영향으로 착한 어른이 된 안토니오 그린이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아니야···. 꼭 비밀을 지켜준다고 했으니까. 사람을 믿어야지. 그렇다면 역시 그건가?!’
문뜩 스쳐 지나가는 지난날의 과오.
사흘 전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권유에 술을 마셨던 일이 들켰음이 분명했다.
‘이거다, 이거. 큰일 났군. 감독님은 시즌 중에 알코올 섭취를 누구보다 싫어하시는 분인데···.’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죽어버린 안토니오 그린. 2m의 가까운 그가 어린아이처럼 겁에 질려 어깨를 움츠린다.
“하···. 오랜만에 불호령을 듣겠군.”
안토니오 그린은 감독 사무실 앞에 도착해 한참을 한숨을 쉰다.
그러다 드디어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천천히 문을 여는 데 성공.
잔뜩 기가 죽어 눈을 내리깐 채 꾸벅 폴더인사를 작렬한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최대한 씩씩하게!
누구보다 명랑하게!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소하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자,
“어구. 어서 와. 이리 와서 앉으렴.”
지성이면 감청이라고 하지 않던가.
안토니오 그린은 모르는 숙어였지만 소하가 매우 밝은 모습으로 반겼다.
‘됐어!’
마음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는 안토니오 그린. 하지만 아직 방심하기엔 이르다.
소하의 화전 양면 전술은 악명이 자자했으니까.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남자였다.
“네. 감독님.”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소하는 생글거리며 스윽 찻잔을 건넨다.
“자 일단 목이나 축여.”
“오오. 이것은···!”
안토니오 그린은 깜짝 놀랐다. 이것은 3년 차에 접어들었음에도 먹어본 사람이 구단주를 포함해 열 명도 되지 않는다는 전설의 차 아니던가!
공산품이 아닌 소하 개인의 조합법으로 우려낸 전설을 만나게 되자 안토니오 그린은 더더욱 경계심을 올렸다.
‘이걸 받을 만큼 잘한 짓을 한 적이 없으니까···!’
잘한 일이 없는데 해트트릭을 박아도 주지 않는 차를 준다? 90% 이상의 확률로 독약이란 이야기였다.
“전설의 ‘블루 임페리얼 티’를 건네주시다니. 잘 마시겠습니다.”
“그래그래. 원한다면 계속 타 줄게.”
“···으윽···.”
안토니오 그린은 소하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한 착각을 받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살아 있는 부처’ 상태!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그 성격 더러운 감독이 할아버지처럼 자상스럽다니. 아무리 봐도 이것은 마지막 권고였다.
-다 알고 있으니 순순히 말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안토니오 그린에는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죄, 죄송합니다! 3일 전에 음주한 것은 무조건 제 잘못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다는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소하의 자상함에 고개를 떨구며 고백해버린 안토니오 그린.
순간, 솜털이 곤두선다.
찌릿찌릿.
엄청난 살기였다.
1초 전까지만 해도 로또 용지를 도둑맞아도 웃을 것만 같던 사람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랬구나?”
“아, 알고 계신 거 아니었나요?”
“내가 어떻게 그걸 알겠니?”
“···.”
전혀 모르겠다는 소하의 말투에 안토니오 그린은 진심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허공에 삽질하고 있었음을.
절로 현기증이 난다.
하지만 소하는 그러든지 말든지 차를 홀짝이며 본론으로 들어간다.
“뭐···. 음주는 다음에 처벌하도록 하고,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하자.”
“···네.”
꿀꺽. 드디어 시작된 본론에 안토니오 그린은 자세를 잡고 귀를 활짝 열었다.
“일단 미리 말하지 않은 점 사과하마. 2주일 전 너에게 이적 제안이 왔다.”
“네?!”
깜짝 놀라는 안토니오 그린.
워낙 비밀스럽게 잠깐 이야기가 오갔던 일이라 선수 본인이 몰랐던 일이었다.
“상대는 풀럼. 득점 순위 2위인 로스 맥코맥의 짝을 찾고 있지. 빅&스몰 조합을 이용해 제대로 해볼 작정인 모양이야.”
로스 맥코맥.
현 15~16시즌, 챔피언십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공격수다.
이번 시즌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풀럼FC로 1,100만 파운드라는, 상당한 거액으로 팀을 옮겼고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는 중이다.
제법 괜찮은 공격수인 로스 맥코맨의 단점은 작은 신장.
175cm 정도라 공중볼에 취약하다.
일반인이라면 그리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상대가 180cm 중 후반부터 190cm대의 거구들인지라 답이 없다.
“···그러니까···. 절 주전으로 사용하고 싶다고 한 건가요?”
“그래. 완벽히 주전으로 사용할 예정이야. 무려 네 이적료로 50만 파운드나 제시했으니까. 게다가 풀럼의 공격진은 맥코맥 말고는 다 평균 이하라서 강등권 근처에서 노는 형국이지.”
“···가,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 제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안토니오 그린. 중의적인 질문이었다.
자신의 거처를 어떻게 할 것인지와 정말 풀럼에서 주전을 확보할 수 있을지 물어본 것.
물론, 당연하게도 그린의 질문이 내포한 속뜻을 알아차린 소하는 천천히 답변해준다.
“먼저, 네가 정말 풀럼에서 주전을 확보할 수 있는지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줄게.”
“알겠습니다.”
“냉정히 잘라 말해서···.”
부정적인 단어로 소하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안토니오 그린은 꽤 상심했다.
나름대로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까.
단순히 키만 크다는 평을 잠재우기 위해 정말 노력했으니까.
이런 그가 강등권 근처인 풀럼에서도 주전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것도 존경하는 소하에게 듣는다면 자신감이 맨틀을 향해 떨어질 거다.
“씹가능이지. 난 빈말 같은 건 시간 아까워서 안 하는 사람이야. 너 정도면 풀럼 따위에서는 닥치고 주전이야. 왜냐? 넌 내 제자니까.”
“···!!”
심드렁하고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소하. 솔직히 본인의 자화자찬이 더 많았지만, 안토니오 그린은 마냥 행복했다.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말투는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새끼. 좋아하긴.”
“당연히 좋죠. 감독님에게 칭찬을 받은 건데요. 하하.”
“웃지 마. 정드니까. 하여튼 그래서 넌 어쩔 건데.”
“···.”
봄날의 화사함도 잠시. 곧바로 안토니오 그린에게 북해의 차디찬 냉풍이 불어닥쳤다.
어쩔 거냐. 이것은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있었다. 이 말은 즉, 자신이 이적을 원한다면 보내주겠다는 뜻임을 바로 알아들었으니까.
‘감독님은 판매 의사가 없었으면 넌 못 가라고 하셨겠지. 아니, 애초에 말도 꺼내지 않으셨을 거야.’
심각한 고민에 빠지는 안토니오 그린.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난제에 마음이 어지럽다.
‘난···. 이 팀이 좋다.’
안토니오 그린은 포츠머스가 좋았다. 각양각색의 톡톡 튀는 젊은 재능들과 같은 꿈을 가졌다는 사실은 그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니던 자신을 괜찮은 선수로 만들어준 소하도 너무나 존경했다.
삼촌 같은 수석코치 잭 밀러도 너무나 좋았으며, 매일 아침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든 프런트의 직원들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이곳은 단순한 직장이 아니었다.
제2의 집이었다.
이제는 오히려 클럽하우스에서 더욱 마음이 편할 정도다.
‘하지만···. 언젠가는 떠나야 하겠지.’
이별은 축구선수라면 언제나 품고 있어야 한다. 선수의 이동이 가장 많은 스포츠였으니까.
그리고 안토니오 그린은 머지않아 이별을 맞이할 거란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녀석들과 비교해서 내 실력과 재능은 너무 차이가 크게 나니까.’
하루가 다르게 앞서나가는 동료들.
이를 악물고 쫓아가 봐도 거리는 더욱더 벌어질 뿐이었다.
뒤에서 혼자 남겨진다면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는 세계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감독님이 날 남겨두시는 건 아직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필요가치가 떨어진다면 주저함이 없이 날 내치시겠지.’
무자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서로가 프로였을 뿐. 오히려 정 때문에 계속 곁에 둔다면 안토니오 그린은 실망할 거다.
‘아직. 그래도. 녀석들의 등 뒤가 보일 때 헤어지는 게 않을까? 적어도 내 작별 인사는 들을 수가 있을 테니···.’
너무 멀리 떨어진다면 작별 인사마저 들리지 않을 터.
안토니오 그린은 순간, 떠날 수 있을 때 떠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충동에 휩싸였다.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다. 분명 10분 전까지만 해도 절대 떠날 생각이 없었거늘.
이제는 도무지 길을 정할 수가 없었다.
“흐음···.”
안토니오 그린의 얼굴에 수심이 잔뜩 끼자 소하 또한 한숨이 나왔다.
그도 어찌할지 몰랐기에 안토니오 그린의 마음을 떠본 것이었으니까.
“그래. 나도 모르겠다. 너도 알겠지만 언젠간 우리는 헤어져야 해. 그게 반년 뒤일지도 모르지.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막연히 서로 알고 있던 이별의 계기가 지금일 거라는 생각이 말이야.”
“···.”
“잘 선택해라. 알다시피 팀 내 상황이 좋지 않아. 네가 결정을 해줘야 내가 다른 방법을 쓸 수 있다.”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3일 내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런 일을 하루아침에 결정할 수는 없는 법. 당연한 요구였고 소하의 예측 범위이기도 했다.
“그래. 그럼 나가봐라.”
“네, 감독님.”
굳은 표정으로 감독 사무실을 나가는 안토니오 그린. 소하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정말 감독이란 엿 같은 일이야. 그래도 우선 할 일은 해야겠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많은 것을 짊어졌다는 건 두 번째 인생에서도 압박감이 과중했다.
하지만 소하의 말처럼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그게 관리자였으니까.
‘어떻게 되든 골키퍼의 영입은 필수. 일단 점찍어둔 선수와 접촉을 해보자.’
돈은 어차피 구할 거니까.
소하가 원하는 선수는 20년대에 꽤 유명한 골키퍼다.
바로, 아론 람스데일.
훗날 아스널의 주전 골키퍼로서 맹활약하는 선수였다.
< 147화. 15-16시즌 챔피언십 리그 후반기. (5)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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