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15-16시즌 이적 시장. (6) >
이적 대책위원회가 부드럽게 종료된 후. 유해진은 조심스럽게 소하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뻣뻣한 유해진에 비해 소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다. 어떻게 보면 유해진은 배신자 아니던가.
겉으로만 보자면 회사에 꽂아준 라인의 상대편에 들어간 거다. 이적행위를 한 유해진에게 이토록 부드럽다니. 소하를 안다면 의외일지도 모른다.
“뭘 그리 미안해하고 있어요.”
“···그, 죄, 죄송···.”
“어허. 죄송하다고 하지 마세요.”
소하는 정성스레 내린 차를 유해진에게 건네며 말을 잇는다.
“이러라고 단장 자리에 선임한 거니까요. 조금 빨랐지만 말이에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죠. 언젠간 은 무조건 해야 할 일이었죠. 잘하셨어요”
소하는 오히려 유해진을 크게 칭찬했다. 겉치레나 농담이 아니다. 진심이다.
‘만약 내 뒤에서 딸랑이만 흔드는 사람이었다면, 편하긴 했어도 실망했겠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걸어가는 태도는 유능한 사람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요컨대 유해진은 브라이언의 편에 선 것이 아니었다.
단지, 포츠머스의 정상적이지 않은 업무 분담을 개선하기 위함이었을 뿐.
오로지 팀을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었고 이것은 소하가 바라는 바였다.
유능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시기였으니까.
“계속 그렇게 해주세요. 잘하고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유해진이 단순히 자신의 의지를 갖추고 일을 하는 것만이 요점이 아니다.
‘저쪽에서 뭘 하는지, 제대로 지켜봐 줄 사람도 필요했으니까.’
유해진이 상대 쪽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브라이언파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다.
‘혹은 브라이언이 이 사실을 알고 일을 진행했을지도 모르지.’
만약, 유해진이 없었다면? 소하는 쉽사리 브라이언의 제안을 승낙하지 않았을 거다.
“하여튼, 제 요구 조건은 제대로 지켜주셔야 합니다.”
“젊은 나이, 중앙과 측면 공격수를 겸임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 훌륭한 재능. 이 세 가지 조건에 모두 만족하는 선수를 잘 찾아보겠습니다.”
유해진은 결연한 자세로 소하가 내밀었던 요구 조건을 상기했다.
대충 봐도 상당히 어려운 조건이다.
‘단순히 중앙 공격수만 가능한 선수는 필요 없어.’
전에도 말했듯, 조쉬 킹만 부상에서 돌아오면 강력한 공격진이다.
즉, 조쉬 킹이 돌아오더라도 좌우 윙포워드로 활용할 선수가 아니라면 잉여 선수가 돼 버린다.
결국 미래는 조쉬 킹과 에링 홀란드가 공격을 이끌 테니까.
‘과연 어떤 선수를 데려올까. 임대든 이적이든 잘해보라고.’
마음속으로 유해진을 응원하는 소하.
유해진이 훌륭한 성과를 내야지만 단기적으로든, 장기적으로든 포츠머스의 앞날이 밝았다.
***
모처럼 소하를 상대로 승리를 가져간 브라이언. 곧 구단의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성소하 감독의 폭언은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한 도 넘은 비난에는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성소하 감독의 의견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지나치게 거친 태클에 사과 한마디 없는 중국팀의 모습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너무 선을 넘은 비판에는 사죄를.
그럼에도 성소하 감독의 의견을 지지하는 모범적인 공식 발표였다.
[때문에, 우리 구단은 팀의 보물인 성소하 감독의 건강을 위해 이적 시장의 권한을 조금 나눠가지게 되었음을 알립니다.]
구렁이 담을 넘어가듯 가장 중요한 의제를 슬쩍 언급하기에 이른다.
이에, 포츠머스 팬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음은 당연했다.
-프런트가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 봐. 만약 성 감독을 같이 비난했다면 시위를 할 작정이었어.
-거대자본에 굴하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던 바지.
-걱정하지 마! ‘아편 전쟁’은 이미 한번 승리로 장식해봤으니까.
-그래, 성 감독을 지키기 위해서는 프런트가 짐을 나눠 들어줘야 해. 좋은 선택이야.
-드디어 성소하 감독의 밑구멍만 닦던 프런트가 제대로 일하는구나.
브라이언의 묘수가 제대로 먹혔다.
성소하라는 빛에 가려 언급되지도 않던 프런트가 조명받는 상황이 이르다니. 굉장한 정치력이었다.
“재수가 없는 새끼지만 능력은 정말 뛰어난 대머리 새끼야.”
소하의 냉정한 평가.
사이가 껄끄럽지만 칭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 사건에서 브라이언의 선택지는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감독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하를 버리고 중국을 지지한다? 바로 옷 벗고 가발회사에 취직해야 한다.
구단 내외로 완전히 민심을 잃을 테니까. 중립 팬들마저도 욕을 서슴지 않을 거다.
즉, 이래저래 소하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나 남은 카드로 상당한 마술쇼를 보여줬어.’
뻔한 선택을 최대한의 이익으로 돌리는 솜씨. 보고 있던 소하도 혀를 내두를만한 재주였다.
“···.”
이런 대단한 쇼를 보여준 브라이언. 그는 엄청난 성과를 냈음에도 표정은 썩 좋지 않다.
‘기회이자 위기다.’
2년 내내 바라왔던 목표에 근접했지만, 실상은 위기와 다름없었다.
‘여기서 제대로 된 선수를 데려오지 못한다면···?’
애써 잡은 기회가 날아감은 물론, 지금의 열렬한 지지를 보내주는 서포터들도 등을 돌릴 거다.
-역시, 우리 팀의 프런트는 안돼.
-그냥 성 감독의 똥구멍이나 닦아주는 게 제일 잘 어울려.
-한번 구단을 말아먹은 새끼들이 뭘 할 줄 알겠어.
-역시는 역시 역시군.
-어휴. 브라이언이 대머리 새꺄, 니가 데려온 선수랑 옷 벗고 나가라!
안 봐도 비디오였다.
어찌 보면 이번 노림수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것도 잡는 쪽이 훨씬 더 날카로운, 위험부담이 더 큰 방법.
‘어쩔 수 없었다.’
브라이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 말고는 성소하라는 거대한 벽을 넘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만큼 소하는 포츠머스의 살아있는 신이었다. 어지간한 수로는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지고한 위치였다.
‘신과 동등해지려면 신의 시련을 겪어야 하는 법이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단단히 각오를 다지는 브라이언. 어떻게든 간신히 잡은 동아줄을 타고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겠다는 각오다.
‘외줄 타기라···. 막상 해보니 정말 어렵군. 그리고···. 정말 대단해.’
브라이언은 소하를 떠올리며 순순히 인정했다. 옆에서 바라봤던 소하는 이런 외줄 타기를 2년 내내 하지 않았던가.
막상 해보니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는 도박 수를 숨을 쉬듯이 하는 소하의 간이 얼마나 큰지 궁금해질 정도다.
‘그래도 해봐야겠지···.’
한숨을 크게 내쉬는 브라이언.
하지만 브라이언은 몰랐다.
지금의 그가 겪는 고뇌 따위는 소하가 걸었던 가시밭길에 비하면 꽃길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
축구계에는 ‘B급 선수 여럿보다 A급 선수 하나가 낫다.’라는 격언이 존재한다.
요컨대, 애매한 선수 여럿보다는 확실하게 잘하는 선수가 팀에 더욱 도움이 된다는 뜻.
그런 의미에서 훗날 나름대로 대단한 명성을 구가하는 바르셀로나 유소년팀 출신, ‘아다마 트라오레’는 굉장히 매력적인 선수였다.
“아주 마음에 드는 선수야. 내 철학에 어울린달까. 무조건 데려와야 해요!”
아다마 트라오레의 선수 리포터를 보며 군침을 흘리는 소하. 그의 눈에는 정말 매력적인 선수였다.
엄청난 속도.
황소 같은 힘.
두려움을 모르는 과감함.
힘과 속도를 중요시하는 소하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선수는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요···. 감독님. 이 선수는 윙 아닙니까? 데이터로 보자면 윙백이나 풀백을 맡아본 적이 없는 선수예요.”
들뜬 소하와 다르게, 잭 밀러 수석코치는 데이터를 들이밀며 조금 우려를 표했다.
물론, 밀러도 아다마 트라오레에 대해선 상당히 좋게 평가했다. 아니, 애초에 포츠머스의 현 상태에 비해 과한 명성과 실력을 가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선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오른쪽 윙백을 데려와야 하지 않은가. 생뚱맞은 포지션을 찾고 있는 소하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맞아요.”
“네?”
“한 번도 윙백을 서본 선수가 아니죠.”
“···.”
“그리고 수비력도 정말 악몽이죠.”
“···그런데 왜···?”
밀러의 물음에 소하는 솔직하게 답변하지 못했다. ‘미래를 아니까요’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훗날 울버햄프턴에서 윙백으로 상당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지.’
누버지, 그렁그렁한 눈빛을 가진 누누 산투 감독의 지휘 아래서 상당한 솜씨를 보여줬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어.’
아다마 트라오레의 포지션 변경은 초창기에는 대단한 충격을 남겼지만, 결국은 폐지되었다.
이유는 하나. 기본적인 수비력이 너무나도 처참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격이 중요한 윙백일지라도 수비수로 분류되는 포지션이다.
이런 자리에서 수비력이 처참하다면 팀의 균형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다.
“제가 윙백으로 키울 거니까요. 그는 훌륭한 윙백이 될 수 있어요.”
소하의 자신만만한 선언. 말 한번 섞어보지 않은 선수를 자기 멋대로 키우겠다는 그다운 발상이었다.
“···뭐···. 일단은 알겠습니다.”
밀러도 딱히 태클을 걸진 않는다. 소하가 저러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말도 되지 않는 개소리를 항상 현실로 만들었던지라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지경까지 왔다.
“그런데, 중요한 건 말이죠, 감독님. 아다마 트라오레가 우리 팀에 올까요? 무려 ‘바르셀로나’의 ‘라 마시아’ 출신이라고요!”
어지간한 클럽보다 훨씬 큰 명성을 가진 유소년 육성기관, ‘라 마시아’.
일단 이 육성기관에서 이름 좀 알려졌다면 전 세계가 주목하는 유망주라는 이야기였다.
아직 챔피언십 리그에 불과한 포츠머스가 세계적인 유망주를 영입하기엔 큰 무리가 따랐다.
“그건 그렇죠. 하지만, 이미 아다마 트라오레는 바르셀로나에서 자리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어요.”
“네?! 그건 어디서 들으신 정보입니까?”
깜짝 놀라는 밀러. 바르셀로나 내부 정보 같은 고급정보를 도대체 어디서 얻은 건지 모를 일이다.
“큼큼. 중요한 건 출처가 어디인지가 아니라 가능성이 생겼다는 사실이죠.”
“사실은··· 맞죠?”
“당연하죠. 이건 대충 겉으로만 봐도 쉽게 추론할 수 있어요.”
“말씀해보시죠.”
밀러의 추궁에 소하는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서 의문을 풀어준다.
“아다마 트라오레의 스타일 때문이에요.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에 절대 어울리지 않죠. 게다가···. 아시겠지만, 이 친구도 ‘조쉬 킹’과라 바르셀로나에서 좋아할 유형이 아니에요.”
“호오···.”
“이제 아다마의 나이는 곧 20세가 되요. 1군으로 승격하느냐, 다른 팀으로 팔리느냐의 갈림길에 선 거죠. 그리고 물론, 팀에 맞지 않는 선수를 승격시키진 않겠죠?”
“우와. 신묘하십니다. 듣고 보니 다 맞아떨어집니다!”
밀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침을 튀겼다. 사방팔방 날리는 침 세례에 소하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밀러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좋습니다! 어디 한번 해보죠! 허허 ‘라 마시아’ 출신이라니. 이 소식을 들으면 서포터들이 얼마나 기뻐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일단 바르셀로나 쪽에 이야기 정도는 넣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무엇을 하실 겁니까?”
“그야···. 뭐, 뻔하죠.”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는 소하.
마치 멀리 떠날 사람의 모습이다.
“스페인으로 직접 가서 이 매력적인 선수를 꼬셔봐야죠.”
“···역시 그렇군요.”
작게 한숨을 내쉬는 밀러. 아직 팀의 명성으로는 A급 선수를 데려오지 못해, 감독이 직접 나서야 하는 이 상황이 탐탁지 않았으니까.
말 그대로 소하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그럼, 통역이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소하의 거절에 밀러는 깜짝 놀란다.
“네? 감독님 스페인어도 하십니까? 이야. 정말 능력의 끝이 없···.”
“응? 저 스페인어 못하는데요.”
뚱하게 답변한 소하는 싱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대신 우리 팀 체력코치 좀 데려갈게요. 이 친구가 스페인어 좀 치거든요.”
“정말입니까? 와···. 전 그 친구가 영어를 아니, 말을 하는 것도 매우 신기했는데 말이죠.”
밀러는 지상 최강의 생물을 떠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보기보다 인텔리한 친구라니까요?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까지 4개 국어 능력자예요. 그리고 이번 영입 작전의 핵심이기도 하죠.”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소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밀러도 이내 영입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 132화. 15-16시즌 이적 시장. (6)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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