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15-16시즌 이적 시장. (3) >
“···.”
소하는 모처럼 당혹감을 느꼈다. 그간 다사다난한 2년을 지내며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얻었다고 생각했거늘. 너무나도 식견이 짧았던 오판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 내가 카메라 앞에서 정신을 놓을 뻔하다니···.’
중국팀과의 경기전 기자회견.
기자회견이란 이제 숨 쉬듯이 하는 일이라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자리였다.
어디까지나 오늘 전까지는 말이다.
“···어, 저 감독님? 이건 통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러운 일일 통역관의 속삭임. 중국어를 모르는 소하로서는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일단은 평소처럼 요구한다.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다 통역해주세요. 괜히 오해하긴 싫으니까.”
“아···. 네.”
소하의 시원시원한 부탁에 통역관은 거침없이 통역을 시작했다.
“일단, 다음 월드컵 때 중국이 16강에 진출한다면 한국을 뛰어넘었다고 보십니까?”
“···.”
시작부터 말문이 막혔다. 현재 시점은 2015년 7월. 2014년 월드컵이 끝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3년이나 남아 예선도 시작하질 않았거늘. 어질어질하다.
그리고 소하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2018, 2022 월드컵 모두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데. 축구 더럽게 못 하는 나라잖아.’
그렇다 해도 미래를 모르고 현시점에서만 평가하자면, 중국축구의 장래는 밝은 편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축구에 투자하는 중이니까.
13억의 인구수.
수십조 단위의 엄청난 투자금.
이 둘이 만난다면 아시아 축구를 점령할 거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16강 한번 가는 거로 한국축구를 넘어섰다니···. 우리나라는 4강까지 간 나라라고?’
속된 말로 짬바가 달랐다. 어딜 감히 본선 진출을 겨우 한 번 성공한 나라가 본선 진출을 밥 먹듯이 하고 4강까지 올라갔던 나라와 비비려는 것이란 말인가.
‘김칫국을 무슨 드럼통으로 마시네. 그래도 굳이 팩트 폭격을 할 필요는 없겠지.’
돈을 벌기 위해 재롱떨러 온 상황에서 사실을 말할 순 없는 법. 게다가 구단의 프런트가 신신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감독님 제발 얌전히 지나가 주십시오. 중국 시장만 얻는다면 우리 구단은 엄청난 이익을 얻을 겁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실지라도 돈을 생각하면서 꾹 참아 주십시오.
-감독님은 자타공인 프로 아닙니까. 믿겠습니다. ‘돈’ 하나만 생각합시다.
등등. 엄청난 신신당부와 잔소리를 듣고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소하.
평소 솔직 과감한 모습은 숨긴 채 적당히 립서비스를 날려주자고 마음먹는다.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언젠간 아시아의 축구 맹주인 대한민국을 뛰어넘는 날도 오겠죠.”
두리뭉실하기 짝이 없는 답변. 그래도 긍정적인 뜻이 담겨있어 중국 기자들은 크게 만족하며 다음으로 넘어간다.
“포츠머스 다음으로 중국국가대표팀의 감독 자리를 맡을 생각이 있으십니까?”
“···.”
당황의 연속이었다. 아직 대한민국 국가대표 감독도 경험한 적이 없는 소하였으니까.
게다가 국가대표 감독직을 맡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게 어느 나라가 됐든 간에 말이다.
‘종목이 달라. 종목이.’
똑같은 감독 아니냐 하겠지만, 클럽 감독과 대표팀감독은 성질이 아주 달랐다.
‘클럽 감독이 RTS와 RPG 게임이라면, 국가대표 감독은 격투 게임이지’
혹은 주식과 코인 판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다 떠나서 대한민국 국가대표를 했으면 했지, 중국국가대표를 먼저 맡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한국인이자 영국인인 소하로서는 매우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시 한번 거짓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넘어간다.
“전 아직은 부족한 감독이기 때문에 한 나라의 국가대표를 맡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한 10년 뒤에 다시 물어봐 주시면 좋겠네요. 제가 스스로 자격을 갖췄을 때 말이에요.”
아주 작은 여지를 남겨주는 훌륭한 소하의 미디어 핸들링이 빛을 발했다.
이 모습에 지켜보던 포츠머스의 관계자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하면 잘하는 감독님이셔.’
‘성질은 괴팍하시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정말 뛰어나신 분이지.’
‘언론 상대하는 법은 타고나셨다니까.’
부정도, 긍정도 하지는 않지만 듣는 사람이 행복 회로를 태울만한 교묘한 화술!
다른 능력은 몰라도 이 능력만큼은 소하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믿을 수 없었다. 경험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었으니까.
‘쓰레기팀에서 10년이나 감독질 하다 보면 이 정도는 쉽지.’
동나이 때의 사람들보다 10년이나 많은 경험이 제대로 빛을 발했다.
덕분에 중국 특유의 어질어질한 기자회견을 부드럽게 시작한 소하.
하지만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중국인 선수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푸른색 유니폼보다는 붉은색 유니폼으로 바꾸는 것이 시장공략에 좋을 거란 의견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 경기에서 중국팀이 이긴다면 중국이 가장 강하다는 뜻이라 봐도 좋습니까?”
“이립에 달했음에도 가정이 없는데, 감독으로서 부족한 거 아닙니까? 한 가정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한 팀을 맡기엔 너무 무거워 보입니다.”
“감독님은 동양, 서양의 혼혈이신데, 서양 여자가 좋습니까? 동양 여자가 좋습니까?”
수준 이하의 질문들이 매섭게 쇄도했다.
통역하던 통역관도.
이것을 통역 받은 소하도.
옆에서 지켜보던 포츠머스 관계자들도.
자기 시간을 대부분 중국 측에 빼앗긴 국내 기자들도.
할 말을 잃는다. 이게 21세기, 국제화 시대에서 나올 질문이란 사실 자체가 믿기 힘들 지경.
소하를 제외하고선 모두가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인상을 찌푸릴 정도다.
‘···하 참.’
오직 소하만이 썩은 미소를 유지했을 뿐. 그야말로 연기의 신이 따로 없다. 전에 그가 농담 삼아 했던 말처럼 연기 쪽으로 나가도 대성할 소지가 다분해 보인다.
‘참자. 참자. 몽키스패너로 두개골을 빠개버리고 싶지만 참아줘야지.’
물론, 속으로는 극히 분노한 상태다. 그래도 돈을 벌러 온 입장으로서 애써 참아내는 소하.
대단한 인내심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인격적인 성장이라도 이룬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인내심 같은 1차원적인 인성 때문이 아니었다. 소하는 원래 이랬다.
‘다 내 꿈을 위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위해서는 중국을 이용하는 법이 가장 좋았으니까.
그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참아내는 것일 뿐. 평소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원래 개미 오줌만큼 있었던 인내심이 언제 바닥을 드러낼지 모르는 상황이란 말이다.
‘후후. 선만 넘지 마라. 선만.’
천사 같은 악마의 미소를 지으며 더러운 질문에도 무난하게 기자회견을 이어가는 소하. 그저, 눈앞에 파리 떼들이 자신의 역린을 건드리지만 않길 바라고 또 바랐다.
‘건드린다면 참을 수 없을 테니까.’
싸늘하고 딱딱하게 굳은 눈동자는 무언의 경고였다.
***
-삐익!
드디어 포츠머스의 마지막 투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상대는 중국의 1위 팀.
중국이란 스티커를 떼고 보자면, 매우 강팀이었다.
‘유럽에서 한가락 했던 선수들이 셋이나 있으니까.’
유럽의 강팀들이 탐을 냈던 뛰어난 선수들로 공격진을 구성한 중국 팀.
엄청난 이적료와 연봉을 자랑하는 선수들답게 제법 매서운 실력을 뽐낸다.
[굉장히 매서운 중국의 스리톱입니다. ‘수억 원’의 ‘주급’을 자랑하는 선수들답네요.]
[한때 저들은 유럽의 뜨거운 감자였던 선수들입니다. 클래스는 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해설과 아나운서의 말처럼 보통 선수들이 아니었다. 모든 클럽이 돈을 싸 들고 구애를 펼쳤던 특급 선수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딱 그 수준이야.’
전반 중반, 0-0으로 상당한 접전을 펼치는 중이었지만 소하는 자신만만했다.
고전 중임에도 일말의 패배도 고려하지 않는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어차피 큰물에서 성장하기보다는 돈의 유혹에 중국이란 작은 우물에 들어간 작은 개구리일 뿐이지.’
물론, 프로선수가 돈을 좇는 걸 비판할 순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실력 향상’을 위해서라면 선택하지 말았어야 할 길이었다.
수준 낮은 리그에서 수준이 높은 선수로 성장할 순 없는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항상 위를 바라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마음가짐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지.’
작은 차이지만 그 영향은 엄청나게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이 작은 차이는 프로의 세계에서는 A급 선수와 B급 선수를 나누는 결정적인 요소이기도 했다.
“보여줘라!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현실에 안주한 녀석들의 콧대를 부러뜨려 버려!”
버럭 소리치는 소하.
상암을 가득 채운 관중들의 소리를 혼자서 씹어 삼키는 엄청난 박력이다.
“···네!”
소하의 박력 있는 명령에 눈빛을 번뜩이는 포츠머스의 선수들. 호통 한 번에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진다.
실로 대단한 선수단 장악 능력이다. 그야말로 한 종교의 신이 계시를 내린 것과도 같은 효과다.
이는 여지없이 경기장 내에서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드디어 포츠머스가 본격으로 해보려고 작정한 거 같습니다! 중국팀이 공을 잡을 시간도 없이 몰아치네요.]
[과한 일정에 조금 몸이 무거워 보였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전방 압박으로 상대를 마구 두들깁니다! 그렇죠! 축구는 세 명이 하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전방의 세 명이 위협적이라면 그들에게 가는 공을 막아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공을 받지 못하는 공격수라면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것을 해낼 가장 좋은 방법은 포츠머스의 특기인 전방 압박이었다.
미드필더-수비진의 공간에서 공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현대축구의 기초!
“흥. 이제 파악했다.”
그렇다고 중국팀의 스리톱에 완전히 패배를 선언한 것도 아니다.
초반에는 조금 고전했지만 이젠 코웃음을 치며 경합에서 점점 승리를 가져가는 포츠머스의 수비진들.
이로써 나름대로 비등했던 경기는 완전히 포츠머스로 넘어간다. 슬슬 골을 넣어 완벽하게 숨통을 끊어 놓아야 할 때.
어김없이 포츠머스의 선수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철썩!
왼쪽 윙포워드로 출전한 도봉산이 처형인으로 등장. 특유의 현란한 개인기로 측면수비를 부수고 멋진 감아차기로 선제골을 기록한다.
[골입니다! 골! 도봉산의 엄청난 원맨쇼! 상대의 수비진을 중국산 아이스크림으로 만드는 멋진 발놀림이었습니다.]
[하하, 20대 초에 프리미어 리그를 놀라게 했던 그 도봉산이 여러분 앞에 부활했습니다!]
기량이 날로 ‘정상화’ 중인 도봉산.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만, 그때 그 시절을 보는 것만 같다.
다시금 ‘공한증’을 떠올리게 하는 멋진 한국 선수 도봉산의 선제골. 이것은 또 다른 기회이기도 했다.
‘팀의 결속력이 약할수록 선제골에 취약하다.’
선제 실점을 당하는 순간 서로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더더욱 약점을 노출할 터. 기회였다.
그리고 또다시 포츠머스의 선수들을 이를 놓치지 않았다.
실점을 당하며 벌어진 미드필더 진과 수비진의 사이. 일반인들에게는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이를 놓칠 마이클 반즈가 아니었다.
“당황했네요오.”
여유로운 미소와는 정반대인 치명적인 정도로 날카로운 공간패스를 시도. 상대 수비와 속도 경합 중인 조쉬 킹의 진로 앞으로 정확히 공이 떨어진다.
“나이스! 월척급 패스에요!”
호쾌하게 공을 자기 소유로 만든 조쉬 킹. 포츠머스의 공식 득점 루트가 다시금 펼쳐졌다.
‘누군가의 공간패스-조쉬 킹의 마무리’ 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조합!
잉글랜드의 수많은 팀이 당한 이 루트를 흔들린 중국팀이 막을 순 없었다.
-쾅!
조쉬 킹의 강슛이 불을 뿜으며 추가 득점에 성공하는 포츠머스.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는 전반전이었다.
***
전반전을 2-0으로 앞선 포츠머스는 후반전을 교체 없이 맞이했다.
너무 이른 교체는 중국의 민심을 자극할지도 몰랐으니까.
‘압박 강도는 내렸지만, 큰일은 없겠지.’
더는 중국팀의 스리톱도 무섭지 않았기에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다만, 중국팀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대비가 미비했을 뿐.
-삐익!
후반전 시작 후 8번째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 이 소리는 8번째 중국의 반칙이었다는 뜻이었다.
[또다시 반칙입니다. 너무 거친 플레이입니다. 이러다가 포츠머스의 선수들이 다칠지도 몰라요.]
[아니, 이게 구두 경고로 끝나다니요? 공이 아닌 발목을 제대로 노리고 들어간 태클 아닙니까!]
분개하는 해설과 아나운서, 그리고 관중들. 어처구니없는 판정이었다.
한국축구의 성지 상암에서 이런 편파 판정이 나오다니.
“···.”
소하도 할 말을 잃었다. 8번의 반칙 중 최소한 3장의 옐로카드는 나와야 했으니까.
‘이게···. 그 시발 말로만 듣던 소림축구인가?’
거칠어도 너무 거칠었다. 전반에도 팔꿈치를 쓰는 등, 썩 좋은 매너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무공을 보여줄 줄 몰랐다. 그것도 단순한 이벤트 경기에서 말이다.
‘이러다가 애들 잡겠다. 전원 교체를···.’
황당함을 애써 잊은 채 재빨리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소하. 하지만 조금 늦었다.
-삐익.
후반전 9번째 호루라기 소리.
동시에 울려 퍼지는 고통에 찬 비명.
“으아악!”
그 비명의 주인공은 팀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인 조쉬 킹이었다.
< 129화. 15-16시즌 이적 시장. (3) > 끝
ⓒ 블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