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전지 훈련. (4) >
투어 경기의 일정은 부산-전북-서울 순이었다.
그 후 서울에서 일본팀과 중국팀과의 경기까지. 2주일 동안 5경기를 치르는 상당히 빡빡한 일정이다. 날짜만 보자면 3일에 한 번꼴인 강행군.
프리시즌인데 너무 무리한 일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이벤트성 친선경기에 불과할뿐더러 둔해진 경기 감각을 올리기에는 딱 적당했다.
“그리고 어차피 늘 그래왔듯 잉글랜드 하부리그의 경기 일정은 빡빡하니까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단순히 돈을 벌라고 온 게 아닙니다. 팀을 향상하기 위해 온 거죠.”
부산에 입성한 포츠머스의 투어 경기 첫 기자회견.
소하는 늘 그랬듯 시원시원하게 질문과 답변을 진행했고 기자들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랩톱을 두들긴다.
“대관령에서의 훈련을 끝내고 하신 말씀이 논란인데요, 수준 차이를 보여주겠다고 하셨는데, 이건 너무 국내리그를 무시하는 발언 아닙니까?”
며칠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뜨거운 소하의 거친 발언!
맞는 말이라는 것이 주류의견이긴 했지만, 부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한국인이 국내리그를 무시하고 코쟁이들의 리그를 고평가하는 이유가?”
“1부리그면 몰라도 이건 선 넘은 발언이지. 요즘 잘나간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수준 차이를 논하기 전에 자기들 수준을 먼저 알아야 할 듯.”
이해가 가는 반응이긴 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인간이란 자기가 사랑하는 무언가가 공격받는다면 발끈하기 마련이었으니까.
“포츠머스는 알아야 해. 세계적인 팀도 국내리그와의 친선경기에서 종종 졌다는 사실을 말이야.”
한 국내 축구 애호가의 일침.
사실이긴 하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몇몇 거대 축구 구단이 한국을 방문해 패배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과연 최선을 다했을까? 라는 의문에는 아무도 확답을 하지 못했다.
“그거야 내일 있을 경기를 보시면 아실 거예요. 이래저래 프로 스포츠란 결과가 모든 것을 증명해주는 거니까요.”
소하는 싱글 웃으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의견이 다를 순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이끄는 포츠머스는 국내리그의 어떤 팀보다 강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제 증명만 하면 끝이었다.
***
경기 당일.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은 오랜만에 인파가 북적거린다.
2001년 아시안 게임 주 경기장을 목적으로 개장한 53,769석의 거대한 종합 운동장.
대한민국의 축구 역사 속에서도 상당히 상징적인 장소이다.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은 2002년 월드컵 때 국가대표 사상 최초의 본선 승리를 달성한 경기장입니다.”
경기장 안내직원의 말처럼 그 유명한 폴란드전의 승리가 바로 이곳에서 펼쳐졌다.
을용타의 날카로운 크로스를 ‘황새’라는 별명을 가진 전설, 황성홍이 발리슛으로 연결, 환상적인 골을 만들어냈으며,
또 다른 전설이자, 훗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유성철의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슛으로 역사적인 2-0 승리를 쟁취했던 신화적인 장소이다.
본선 첫 승리.
정말 역사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말은 즉, 이전까지 대한민국의 축구 수준은 월드컵에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는 말이었으니까.
이날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의 축구 역사는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승만 해도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팀에서 적어도 16강을 가야 하는 팀으로 기대치가 높아졌으니까. 기대치가 높아졌다는 건 어느 정도 발전을 이뤘다는 거고.’
2002 월드컵을 생중계로 봤던 소하는 당시를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국가대표 감독직에 지원서를 넣을 욕망이 생길 정도다.
이렇게 위대한 역사의 시작이었던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
하지만, 아쉽게도 그 기적의 날 이후로 점점 잊히기 시작했다.
2004년 독일과의 친선경기에서 승리를 장식하며 다시금 이름을 알렸지만, 어디까지나 반짝이었을 뿐.
전 국민은 물론, 부산시민들에게도 잊힌 장소가 되었다. 아니, 애물단지가 되었다.
이유는 너무나도 큰 운영비. 거대한 종합 운동장은 시에 막대한 재정적인 부담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연간 운영비가 100억이 넘는데, 수익은 30%에도 미치지 못할 수준이었으니까.
때문에, 정계와 언론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야구장으로 개장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부산하면 당연히 ‘야구’ 아니겠는가.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이자 축구가 범접할 수 없는 수익성을 가진 스포츠다.
더군다나 나란히 붙어있는 사직구장의 노후화 문제까지 대두되어 상당히 신빙성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사직구장을 재건축하기로 결정.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은 사직구장의 공사 기간에만 잠깐 쓰일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여튼, 이웃사촌인 사직구장에 비해서 먼지만 풀풀 날리던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
오늘은 어울리지 않게 모처럼 그 사직구장을 뛰어넘는 인파가 몰려들어 활기를 띤다.
만약 경기장에 인격이 있다면, ‘내, 내가 드디어 사직이 보다 인기가 많아···.’하고 눈물을 글썽거릴지도 몰랐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과연 어떨까?”
“여기 축구장 오랜만에 오네.”
물론, 이 엄청난 인파는 소하와 포츠머스를 보기 위해 몰려든 관중들이다.
어찌나 초유의 관심을 끌었던지, 부산시민 말고도 전국각지에서 포츠머스의 경기를 보러온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미친···. 매진을 달성하다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53,000여 석의 좌석이 모조리 매진. 티켓관리소는 두 눈을 의심할 지경에 처할 정도였다. A매치가 있는 날에도 매진은 달성하질 못했으니까.
이는 경기를 주최한 협회 측에서도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상상 이상의 인기로군요.”
“흥행은 예상했지만 이건 상정 이상입니다.”
“과, 광고 단가를 더 받았어야 했나?”
그들의 계산 실수는 아니었다. 다만, 투어 일정에 앞서 한 달의 휴가 기간 내내 미디어에 나온 소하의 영향력이 상상 이상이었을 뿐.
‘내가 괜히 뭐 빠지게 일을 한 것이 아니라고.’
배부른 소리지만, 소하는 돈보다는 휴식을 사랑하는 남자. 돈보다 중요한 가치를 포기하고 열심히 미디어에 나온 이유였다.
물론, 짭짤한 금전도 대만족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몇몇 축구관계자들은 달콤한 꿈에 빠지기도 한다.
“월드컵 본선 첫 승을 거두었던 역사적인 장소. 이곳에서 다시금 축구붐이 일어나는 건가?”
“2002년도의 재림인가?”
“축구가 야구를 이기는 날이 올지도···.”
물론, 너무 멀리 간 망상이다. 이미 대한민국은 야구가 왕이었으니까. 월드컵에서 우승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역전하기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점점 줄어드는 인구수는 국내 축구에 대한 어두운 미래만 제시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다시금 전 국민이 월드컵도 아닌데 축구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국내 축구에 종사하는 모든 관계자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
“이겨라.”
경기 시작 전 라커룸. 소하는 깔끔하게 한마디만 했다.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단 세글자에 수많은 뜻이 함축되어있었으니까.
선수들도 매우 익숙한 소하의 라커룸 대화에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반론은 없···지는 않았다.
“감독님! 정말 괜찮나요?”
불협화음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그 선수, 조쉬 킹. 해맑게 웃는 걸 보아하니 부정적인 생각을 품진 않았나 보다.
“뭔데?”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되묻는 소하. 개소리를 지껄인다면 크게 경을 칠 거라는 협박이 담겨있는 어조다.
“히익.”
소하의 악의라면 소하의 어머니보다 잘 아는 조쉬 킹. 강렬한 살의를 느끼고 어깨를 움츠렸지만 용기 있게 달려든다.
“그···. 뭐냐. 그래도 감독님이 진정한 모국으로 생각하시는 나라인데 박살을 내버려도 되냐는 거죠.”
“뭔 헛소리냐?”
“예, 예의랄까. 또, 뭐냐···. 너무 싱거우면 흥행에도 문제가···.”
“···.”
눈을 가늘게 뜨는 소하. 조쉬 킹은 말은 요컨대, 이러저러한 사정을 생각하면 조금 봐줘야 하지 않겠냐는 거다. 이래저래 하늘 같은 감독이 사랑하는 나라의 팀이었으니까.
“승부에 예의가 어디 있어. 이 자식아. 그냥 최대한 부숴버리라고! 그리고 넌 오늘 두 골 이상 넣지 못하면 리그 5경기 선발제외야.”
“네?!”
괜히 깝죽댔다가 지옥 난이도의 임무를 받아버린 조쉬 킹. 화들짝 놀라며 이의를 제기한다.
“왜요! 너무해요!”
“괘씸죄야.”
소하는 일언지하로 조쉬 킹을 내치며 시선을 다른 선수들에게 돌린다.
“너희들도 똑똑히 명심해라. 거듭 말하지만,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최대한 작살을 내버려. 상대가 첼시라고 생각하란 말이야! 알겠어?”
소하의 으름장. 이에, 선수들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심이 가득한 명령이었지만, 그들은 알았으니까.
‘승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폐관 수련으로 일말의 자만마저 버려버린 포츠머스의 선수들. 어떤 목적의 경기인지는 선수인 그들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선수라면 그 어떤 경기라도 전력을 다해 이기면 될 뿐. 다른 무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이래저래 해발 800m의 산골에서 정신 무장만큼은 제대로 한 포츠머스였다.
***
의욕이 활활 타오는 포츠머스의 라커룸. 이와 어울리게 부산의 라커룸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
군말이 없이 눈을 번뜩이는 부산의 선수들. 감독의 지시를 듣는 태도와 눈빛이 진지하기 짝이 없다.
이벤트 경기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만한 진중함이다. 생사투를 앞둔 결투사 같은 모습이랄까.
얼핏 보면 소하의 국내리그 무시 발언에 화가 난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게 수순에 어울렸으니까.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좋은 모습을 보이면 성소하 감독님의 눈에 들지도 몰라.’
‘해외 유명 구단의 스카우트들도 잔뜩 경기를 관람하러 왔다. 날 뽐낼 기회야.’
‘선수 인생을 바꿀 절호의 기회야. 사력을 다해 뛴다.’
대한민국은 부정할 수 없는 축구 변경지역. 이런 썩 좋지 않은 환경에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경기를 뛴다는 건 또 다른 기회의 장이었다.
실제로 부산 선수들의 생각처럼 전 세계의 유명 스카우트들이 부산을, 대한민국을 방문한 상황이다.
지금은 유럽축구의 이적시장이 진행되는 중이었으니까.
물론, 국내리그의 선수를 보러온 것이 아니라 포츠머스의 선수들을 보러온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포츠머스를 상대로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거나 이긴다면?’
이벤트성 경기일지라도 부산 선수들의 주가는 상한가를 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정말로 잘 풀린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유럽진출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런 속사정 때문에 리그 일시 중지라는, 어찌 보면 과한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기도 했다.
경기를 하지 않는 팀들에게는 매우 아쉬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여기까지. 따로 할 말은 없다. 모두 의욕은 충분한 거 같으니까.”
전술 설명을 마치는 부산의 감독. 애써 침착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 또한 심장이 두근거리긴 마찬가지다.
‘성소하라. 전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천재는 과연 어떨까?’
서른의 나이로 유럽 축구계를 뒤흔드는 젊은 천재! 자신보다 열 살 이상 어린 감독이었지만 존경심마저 피어올랐다.
‘이 불모지에서···. 혼자 힘으로 저 자리까지 가다니.’
축구계를 알면 알수록 소하의 위대함은 피부로 와닿았다.
‘그리고···. 그를 이긴다면···?’
부산의 감독도 사람은 사람이다.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승부욕은 훨씬 큰 존재.
게다가 그를 이겼을 시에 얻는 명예란, 숫자로는 계산하지 못할 터. 묘한 흥분을 애써 감추며 마음을 다잡는다.
지금은 일단 경기에 집중할 시간이었으니까. 이 이후의 일은 말 그대로 나중의 일이다.
승산은 충분했다. 자신도, 선수들도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었으니까.
***
-삐익!
드디어 시작된 포츠머스의 투어 경기 1차전.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환호를 내지른다.
“포츠머스! 포츠머스!”
“성소하! 성소하!”
포츠머스에서 9,000KM나 떨어진 부산에서 프래튼 파크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포츠머스만 응원받는 건 아니다.
“부산! 부산!”
“둘 다 이겨라!”
부산 팬과 중립 팬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다. 사실, 팬을 나누기에도 미묘하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모두가 즐거워하는 대축제의 장이었으니까.
‘그냥 좋다.’
‘신나는구만!’
‘축제다!’
큰 이벤트에 마냥 신이 날 뿐이다. 단지 한 가지 바란다면 기대만큼 재미있는 경기가 펼쳐지길 바라는 정도다.
소하는 관중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자고로 그야말로 최고의 엔터테이너 아니던가. 축제의 장에서 거대한 캠프파이어에 불을 지피는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아! 이게 뭔가요? 포츠머스가 전혀 다른 전술을 준비해왔습니다.]
[겉보기에는 4-4-2 포메이션입니다. 투톱··· 전술이 확실해 보이는데요?!]
몇 번의 경기에서 보여주긴 했지만 단 한 번도 메인 전술로 쓰지 않았던 4-4-2 포메이션의 등장.
이것만으로도 축제의 불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지기 시작했다.
< 126화. 전지 훈련.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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