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전지 훈련. (1) >
거대한 첫걸음을 시작한 소하.
대중들에게는 환호가 나오는 일이었지만, 소하 개인에게는 불행하게도 이것은 귀찮음의 시작이자 전조였을 뿐이었다.
“광고 좀 나와주시면···.”
“예능 어떠세요?”
“저희 쪽 강연에도 한 번 나와주시면···.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높으신 분들께서 한번 뵙고 싶다고···.”
폭주하는 구애!
1년 전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양상이다. 그때는 잘라 말해 잔챙이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큰 물고기들만 한가득하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행복에 겨운 비명을 내지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상황. 톱스타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사태에 대한 소하의 감상평은 매우 거칠고 짧았으며 신경질적이었다.
“씨발. 좆됐네.”
씹어 삼키는 듯한 거친 음색.
바쁠 줄 알았다. 그래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대로 모든 요청을 수락한다면 내년 이맘때까지 일을 해야 할 판이다.
‘이거 어쩌지? 그냥 선착순으로 3주 분량만 받으면 되나?’
남은 휴가는 4주. 일주일은 놀아야 하니까, 대충 3주 분량만 받으려고 작심하는 소하.
이쪽 생태를 잘 모르기도 했으며 그렇다고 일일이 따져가며 고르기엔 너무 귀찮았다.
이렇게 범인이라면 천재일우의 기회를 소하답게 대충 허투루 날리려는 찰나.
구원의 동아줄이 소하의 눈앞에 내려왔다.
“쉽게 말해 에이전트나 매니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불쑥 소하를 찾아온 말끔한 정장을 입은 여성과 일당들.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겼지만, 그들은 확실히 계약 건을 대신 처리해주는 사람들이었다.
신생 매니지먼트라던가 뭐라나. 에이전트 일과 함께 연예계 매니저 일도 도맡아주는 회사였다.
“매니저라는 거죠?”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죠?”
“우리 회사의 제1 투자자께서 따로 부탁하신 겁니다. 한 달 정도만 도와주면 된다더군요.”
“투자자라면···?”
“현성오일의 기회조정실장 이준석 님입니다. 감독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자신을 유소영이라 소개한 에이전트의 이름에선 놀랍게도 이준석의 이름이 나왔다.
물론, 소하와 그는 꽤 친분이 있는 편이긴 하다. 대부분은 이준석의 일방통행이었지만 말이다.
[성 감독님 주무세요?]
[성 감독님 바쁘신가 보군요. 다음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성 감독님 이번에 괜찮음 음식점을 찾았는데요.]
[성 감독님···?]
[성 감독님!]
하루에 몇 통씩 날아오는 재벌 3세의 까톡 메시지! 성화에 못 이겨 종종 답톡을 해주긴 했지만 소하로서는 귀찮기 짝이 없었다.
‘뭐···. 재벌 냄새 한 번 더 맡고 싶긴 하지만 말이야. 너무 질척거려.’
여자의 관심도 귀찮아하는 소하가 암만 재벌이라도 남자의 관심이 달가워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번엔 꽤 고맙군.’
흡족한 미소를 짓는 소하.
말만 하는 도움보다는 이런 행동으로 보여주는 도움이 크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효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웠고.
“저희는 성 감독님에게는 어떠한 비용도 청구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네···?”
귀찮음에서 조금은 해방되었다고 좋아하던 소하는 순식간에 죽상이 되었다.
조건이라니? 조건이라니?!
‘역시 기업인의 피는 못 속이는군.’
재벌답지 않게 사람 냄새가 나는 이준석이지만 기업인의 피는 속이지 못했다.
기업인의 기본자세는 ‘주고받기.’
자선사업가도 아닌데 아무 대가도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부류가 아니었다.
아무리 호감을 느낀 소하가 대상일지라도 말이다.
“현성차 광고가 들어오신 거 알고 계시죠?”
“아니요.”
“···큼큼. 하여튼 그 광고를 우선으로 출연하셔야 하는 게 조건입니다.”
조금 당황한 유소영.
현성차라는 국내를 대표하는 기업에서 건넨 광고 제의를 해맑은 표정으로 모른다고 하는 소하가 제정신인가 싶다.
“뭐 그러세요. 별거 아니네요. 이야. 성소하, 너 이 자식. 성공하긴 했구나? 자동차 광고도 찍네!”
“···.”
유소영은 뒤늦게 좋아하는 소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왠지, 굉장히 힘든 한 달이 될 거란 불길함 예감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
불길한 예상과는 정반대로 소하는 꽤 훌륭한 고용주였다.
소하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무 귀찮을 땐 고분고분한 꼭두각시처럼 말만 잘 들으면 귀찮음이 덜해진다.”
귀찮음을 덜 방법에 대해서 통달한 경지에 오른 소하.
그의 생각은 옳았다. 아무 생각 없이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니 정말로 귀찮음이 덜어졌으니까.
이는 소하와 유소영 모두에게도 좋은 생각이었다.
유소영이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소하가 편했고, 소하는 유능한 유소영의 지시 덕에 뇌를 비울 수 있어서 피곤함을 덜었으니까.
그렇다고 여러 방송과 광고에 대충 임한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난 프로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유소영은 그 말을 듣고선 입술을 삐죽이며 어이없어했지만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실제로 그가 나가는 광고나 프로그램은 시청률을 폭발적으로 끌어냈으며 연일 인기와 화제를 모았으니까.
다만 이동할 때는 나무늘보가 따로 없었다. 어찌나 투덜거리며 옴짝달싹하지 않던지. 한 달 가까이 곁에서 보필한 유소영은 성소하의 성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수준이 되었다.
하여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기묘하고도 급작스러운 조우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기 시작.
별 탈 없이 훌륭하게 일정을 주파하며 소하의 명성은 이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경지까지 왔다.
‘꽤 재미있었어.’
어느덧 다가온 마지막 광고 촬영. 소하는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국민 MC도 만나보고···. 생각보다 앞니가 덜 튀어나왔던데.’
워킹맨에 출연까지 한 소하. 국민 MC의 얼굴을 떠올리며 즐거워한다.
‘천성임 씨는 진짜 예뻤지···. 얼굴에서 빛이 나더라.’
배우는 배우였다. 나탈리 도슨의 소개로 만나봤던 잉글랜드의 미녀는 물론, 어머니의 성화로 만난 한국의 미녀들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가진 미녀였다.
‘괜히 얼굴 팔아먹는 직업이 아니었어. 여신이랄까···.’
눈빛이 몽롱해지는 소하. 암만 혼혈에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 할지라도 소하의 취향은 엄연히 한국형 외모. 이런 와중에 외모로서는 찬사가 끊이지 않는 천성임의 미모는 모처럼 그를 들뜨게 했다.
‘더 놀라운 건, 전에는 한 번 만나보기도 힘들었던 사람들이 날 우러러본다는 거야.’
그렇다. 소하가 놀란 건 단순히 미녀 배우의 외모만이 아니었다. 그들처럼 명성이 국내를 넘어 아시아에 퍼진 스타들이 자신을 ‘스타’로 여기며 환호성을 내지르는 모습이 놀랍고도 어색했다.
이제야 자신이 쌓은 이름값을 피부로 톡톡히 느낀 소하.
여타 장르 소설에서 나오는 달라진 사람들의 시선에 괴리감을 느껴 인간 불신을 겪는 경우가 우려된다.
하지만, 소하는 소하였다.
‘역시 사람은 유명해지고 봐야 해. 그런 말도 있잖아, 일단 똥을 싸라. 그럼 유명해져서 박수를 받을 테니. 맞나? 하여튼. 지금의 나와 당시의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니까. 당연히 다른 반응이어야 하지. 오로지 한결같으신 울 엄마가 특별하신 분일 뿐.’
속이 좁을 때는 한없이 좁으며 넓을 때는 대인군자가 따로 없는 그다운 감상이었다.
“휴.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짧고도 긴 3주였네요.”
소하는 마지막 촬영을 마치며 대기하던 유소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뭘요···.”
그리고 마지막 날만을 그토록 바라던 유소영은 묘한 얼굴로 손을 마주 잡는다.
많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표정이다.
한 구제 불능의 인간을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었다는 성취감.
같은 인간이 맞나 싶은 모습에 질려버린 회의감.
그래도 어떻게든 자신에 말을 잘 따라와 줬다는 고마움.
등등. 복합적인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누나,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죠! 오늘은 제가 쏠게요. 말만 하세요. 특A급 암송아지 코스도 가능!”
유소영의 양손을 잡고 마구 흔들며 호기롭게 외치는 소하. 밝게 웃는 그의 얼굴에 빛이 나는 듯한 착각이 든다.
두근. 두근.
그 모습에 유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며 얼굴을 붉힌다.
뭐랄까. 사랑보단 모성애랄까.
여하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 때문에 당황한 유소영은 새침하게 손을 뺀다.
“흐, 흥. 알겠어요. 저, 전 많이 먹으니까 각오 단단히 하시라고요!”
유소영 32세. 자칭 타칭 커리어 우먼으로서 초식녀로 살아온 지 수년.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에게도 봄날이 찾아왔다는 거다. 비록, 보릿고개일 확률이 매우 높았지만 말이다.
***
소하는 바쁜 한 달을 일정을 마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어차피 전지훈련 겸 한국 투어 때문에 한국으로 다시 와야 했지만, 팀을 이끄는 감독으로서 변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이제 사적으로 휴가를 위해 입국한 소하가 아니라,
포츠머스라는 떠오르는 팀을 이끄는 위풍당당 감독으로서 공적으로 입국해야 할 시간이 왔다는 뜻이다.
그렇게 열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다시 도착한 잉글랜드. 딱히 반가움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일 년 중 11개월은 질리도록 보는 풍경이었으니까.
‘가슴이 뛰는 건 역시 한국을 방문할 때지. 암, 그렇고말고.’
토종한국인 같은 속마음을 지껄이며 오랜만에 선수들 앞에 선 소하.
때깔이 번드르르한 제자들을 바라보니 갑자기 속이 뒤틀린다.
‘이 새끼들이. 하늘 같은 스승은 개고생하고 왔는데 말이야···. 제자라는 놈들은 얼마나 잘 지냈는지 기름기 좔좔 흐르네. 안 되겠어. 정신교육으로 이번 시즌을 시작해야겠어.’
모처럼 만난 터라 희희낙락 떠들던 선수들은 불행하게도 소하의 심사를 읽지 못했다.
분명, 시즌 중이었다면 눈치를 챙기고 대처를 했을 텐데. 선수들에게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이 새끼들아. 오늘부터 바로 러닝 시작이다. 선착순 2명. 오늘 어디 한번 토할 때까지 뛰어보자!”
소매를 걷어붙이며 벼락같은 호통을 내지르는 소하. 갑작스러운 천둥이 내리꽂히자 선수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네?!”
“자, 잠깐만요!”
“노, 농담이시죠?”
농담일 리가 있겠나. 당연히 순도 100% 진담이다.
그리고, 선수 중에서는 제법 눈치가 빠른 친구들이 있었다.
‘진짜다.’
‘뛰자. 뛰면 산다.’
소하에게 자주 당하는 조쉬 킹과 델리 알리가 그 주인공들. 소하의 호통에 가장 빠르게 제정신을 차린 그들은 군말 없이 전력 질주를 시작한다.
“눈치 하나만큼은 제법 쓸만한 녀석들이란 말이야···.”
그 모습에 흡족한 듯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는 소하.
선수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새로운 시즌을 앞둔 소하의 농담 섞인 환영식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야! 야! 거기서 이 치사한 새끼들아!”
“진짜 의리 없게 자기들만 뛰네!”
“야이, 배신자 새끼들아! 말은 해줬어야지!”
저 멀리 앞서간 조쉬 킹과 델리 알리에게 욕을 퍼부으며 러닝을 시작하는 선수들. 왜 소하가 뿔이 났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배신자들의 뒷모습이 증오스러웠을 뿐.
과연, 포츠머스다운 새로운 시즌의 시작이었다.
***
7월이 찾아왔다.
소하 개인적으로는 무척 바빴던 한 달이었지만 축구 애호가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한 달이 지나갔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이미 유럽 축구는 이적시장이 열리며 매일 축구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는 중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남자의 등장으로 떠들썩했던 6월을 보낸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축구가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어서? 아니다. 절대 아니다. 아직 한국의 해외 축구팬들은 그 정도 규모가 아니다.
하지만 해외 축구가 아닌 어느 한 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드디어 공개된 포츠머스의 한국 투어 일정. 포츠머스의 첫 상대는 서울.]
[서울, 부산, 전북을 상대하는 포츠머스. 과연 그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최소한 국내리그 최상위권 수준으로 평가하는 게 옳다.]
[계속 몰아치는 한반도의 축구 열풍.]
신이 나서 떠드는 언론들. 물론 이것은 표면적인 반응이었을 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소수지만 없지는 않았다.
“아니, 그깟 2부리그 팀이 뭐라고 우리나라 리그 일정까지 조정하면서 귀빈 대접을 해줘?”
“참나. 프리미어리그 팀이라면 말이라도 안 해. 어이가 없어서.”
“돈에 환장한 녀석들이야.”
국내 축구팬들에 한해서는 굉장히 볼멘소리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한참 재미있게 진행되고 있던 리그를 일주일이나 중지시킨다는 건 여러모로 파격적이었으니까. 당연히 예상되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약속한 날짜가 점점 다가오자 비판을 퍼붓던 소수의 팬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며 기대된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었다.
‘과연···. 우리 팀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프리미어리그로의 승격 1순위 후보라는 포츠머스를 상대로 내가 응원하는 팀은 얼마나 잘 싸울까?’
‘비록 2부리그 팀이지만 유럽에서도 가장 관심받는 클럽 중 하나야. 기대된다.’
‘확실히 구단 재정적인 면으로는 큰 도움이 되겠지.’
‘그래도···. 보통 다른 구단이면 한국을 거쳐 가는 수준으로 취급했을 텐데. 진심으로 한국을 신경 써준다는 점은 고맙긴 해.’
점점 기우는 속마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포츠머스와 축협의 전략이 제대로 통했다.
결국 시간은 약이란 말이 옳았다는 걸 증명한 이번 사건.
이제는 포츠머스가 입국하는 날만 기다리면 되었다.
< 123화. 전지 훈련. (1)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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