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122화 (122/306)

< 122화. 인기 스타. (4) >

이후 이어진 소하의 선 자리는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관심이라고는 개미 콧구멍만큼도 없는 소하의 태도와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가려는 여성들의 치열한 끈질김.

결국 같은 결말이 기다렸지만 놀랍게도 여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쁜 남자의 매력!’

‘지금은 가진 것이 없어도 금방 버는 사람이니까.’

‘놓칠 순 없어.’

당시에는 애매하게 헤어졌지만, 꾸준히 연락하며 소하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메신저 안 읽고 무시하는 비율이 무척 높은 소하였지만 말이다.

***

그렇게 어머니의 등쌀에 못 이겨 원치도 않던 여자들과 만났던 소하.

이제 쉬려고 해도 쉴 수 없는 지경에 부닥쳤다.

뜨뜻한 이불속에 들어가 에어컨 펑펑 틀고 쉬고 싶다는 그를 세상이 가만두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돈이나 벌자.’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상황. 소하는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생각을 누구보다 강하게 가진 인물. 본격적으로 귀찮음을 떨치고 제대로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작된 소하의 ‘공적’인 업무의 첫 시작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행보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백 명 중에서 백 명 모두가 의구심을 품을 만큼 예상외였다.

“안녕하세요. 잉글랜드 남쪽의 해산물 냄새 풀풀 풍기는 작은 구단을 지휘하고 있는 성소하라고 해요.”

소하가 깔끔한 정장을 빼입은 것도 놀라웠고, 그가 선 자리가 한 대학교의 대강당이란 사실 또한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 소하의 첫 행보는 놀랍게도 국내에서 체육계 대학으로 가장 유명한 고구려 대학교의 강의였다.

이 무척 놀라운 행보에는 포츠머스의 담당인 유해진의 입김이 많이 닿아있었다.

“감독님. 한국은 선수 외의 다른 방식으로 축구계 인재들을 키울 방법이 전무 합니다. 무척 실례되는 부탁이지만, 선구자로서 꿈나무들에게 조언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독님이라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축구행정가를 꿈꾸는 유해진 다운 부탁이었다. 그는 선수만 키워서는 절대 축구 강국이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인물.

‘진정한 축구인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선수는 물론, 스태프, 행정가들까지 인재가 많아야 한다.’

옳은 생각이었다. 한쪽 가지만 자라서는 훌륭한 나무가 될 순 없었으니까.

오히려 한국같이 기반이 허약한 나라에서 유해진이나 이정재 같은 선수들이 나오는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

다만 소하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그냥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런가요?”

뚱한 소하의 반문. 유해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한국축구의 미래에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포츠머스일 뿐이었으니까.

이 사실을 모르는 유해진은 애써 소하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다, 당연합니다! 지도자 육성의 불모지에서 감독님 같은 존재는 가뭄 속에서 내린 한줄기 봄비 같습니다. 몇 마디 해주신다면 감독과 스태프의 꿈을, 행정가의 꿈을 꾸는 꿈나무들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평소 조용하기 짝이 없던 유해진이었건만.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그가 얼마나 간절한지 엿볼 수 있었다.

‘흐음. 글쎄. 내가 도움이 될 거 같진 않은데.’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빠진 소하. 유해진의 생각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난··· 다 외국에서 배웠는걸. 굳이 말하자면 국적만 한국인이고 지도방식은 유럽 스타일이라고.’

소하가 축구에 대해서 한국에서 배운 건 한글로 축구를 어떻게 쓰는지 정도였을 뿐. 나머지 모든 능력은 독일과 잉글랜드, 이탈리아를 전전하며 배운 거다.

요컨대, 한국의 시스템으로는 절대 최고급 감독이 나올 수 없다는 견해였다.

‘굳이 한국적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나? K-감독? 별론데.’

게다가 굳이 한국적인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시스템이란 하루 이틀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공짜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엄청난 시간과 자금이 필요한 일이라는 뜻.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축구는 유럽의 주도하에 진화했고, 유럽으로 배움의 길을 떠나는 것이 어려운 시대도 아니었으니까.

‘새롭게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시스템을 잘 이용하는 것이 좋지.’

물론, 이것은 소하가 특별한 경우였다. 엄청난 스타 선수였던 잉글랜드 국적의 아버지를 뒀으며 본인도 외국에서 오랜 생활을 했기에 당연히 알았던 길이었을 뿐.

한국은 소하에게 간단하고도 당연한 일조차도 정보가 부족한 실태였다.

“하지만 감독님. 국내에서는 유럽으로 배움의 길을 어떻게 떠나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도 극히 드뭅니다. 전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감독님이 걸으신 길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거죠.”

“···.”

“전···. 선출입니다. 그것도 큼큼,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스타 출신이죠. 어렸을 때부터 착실히 엘리트 축구선수로 자라 왔던 터라 이런 부분은 잘 모를뿐더러 알아보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감독님은 다르죠.”

“···.”

“어렸을 때부터 오로지 감독이란 꿈을 품은 채 가장 낮은 진흙밭에서부터 시작하셨지 않습니까. 감독님과 같은 처지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그저 평범한 일상 이야기라도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애걸복걸하는 유해진.

소하가 평소 같은 뚱한 표정으로 일관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1년간 같이 지내본 결과 눈앞의 젊은 감독은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소하는 의외로 긍정적으로 유해진의 부탁을 고려하는 중이다.

‘뭐, 유해진이랑 잘 지내는 건 여러모로 좋으니까. 감독이라면 단장이랑 잘 지내야지. 게다가 단장으로 와달라는 내 부탁도 들어줬으니. 온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

대의명분 따윈 개나 주고 개인적인, 사적인 은원관계를 청산하기로 마음먹은 소하. 이런 뒷사정으로 어울리지도 않은 강단에 서게 된 것이었다.

단지 재밌는 사실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만, 그 걸음 하나하나가 어느새 한국 축구계의 중심이 됐다는 아이러니함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잉글랜드 남쪽 바닷가 동네의 촌놈이 뭐라고 이렇게들 많이 봐주시러 오다니···. 영광스럽네요.”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운을 뗀 소하. 정말 엄청난 숫자가 소하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좌석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만석이었고 좌석 사이사이마다 서서 보는 사람들 덕에 대강당은 빈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통령이라도 방문한 줄 알 거다.

“하하하.”

“와아! 성소하!”

“잘생겼다.”

소하의 농담에 환호로 보답하는 사람들. 소하가 팔굽혀펴기만 해도 좋아 자지러질 기세다.

그나저나 상당히 놀라운 모습이다.

머리털 나고 처음 서보는 강단이었지만 능수능란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마치, 전문 강사 같다.

‘뭐···. 기자들 앞에 서는 거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지.’

감독이란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미디어와 부대껴야 하는 운명을 지닌 직업.

기자들이 누구던가.

어떻게든 잡아먹을 건더기를 찾기 위해 눈을 불을 켠 존재들 아닌가.

한마디로 육식동물들이었다.

그에 반해 소하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하는 오늘의 청자들은 그저 초식동물에 불과했다.

거대한 포식자들 앞에 서다가 작고 앙증맞은 토끼 앞에 섰는데, 무서울 리가 있겠는가. 그저 엄마 품처럼 편안할 뿐이었다.

“큼큼, 먼저 이 자리에 서도록 도와주신 유해진 단장과 대학 총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어···. 그리고 강의료는 전액 한국 스포츠발전에 기부할 거예요. 이러면 제 이미지가 좋아진다고 쓰여있네요.”

그래도 소하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남자. 자기도 모르게 미리 준비해둔 대본에 적힌 부록까지 읽어버렸다.

“···.”

할 말을 잃은 유해진과 관계자들.

참고만 하라고 써준 걸 고대로 읽어버릴 줄 꿈에도 몰랐다.

급속히 썰렁해진 강당. 하지만 소하는 만만찮은 사람이었다.

“많은 분이 강단에 처음 서보는 저를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해 주신 걸 읽어버렸네요. 뭐, 제가 이미지가 좋아진다고 좋을 게 있진 않을 거 같지만요. 하하. 그래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한국 스포츠를 위해 강연료는 말 그대로 모두 기부할 거예요. 저 돈 많이 벌 거든요.”

유쾌하게 포장하는 소하. 반응은 매우 좋았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하도록 하죠. 먼저, 솔직히 제가 여러분들 같은 우수한 인재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사람은 되지 않아요.”

싱글 웃으며 본심을 꺼내는 소하.

그의 말처럼 소하 본인은 제자들을 제외하고서 남을 가르칠 만큼 자신을 고평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시다시피 전 고작 고졸이에요. 가방끈이 짧죠. 심지어 수학 포기자이기도 하죠. 덧셈 뺄셈을 넘어가는 사칙연산은 계산기 없으면 어려워하는 멍청이예요. 이런 부족한 사람이 그 치열한 입시를 뚫고서 명문대학교에 입학한 수재들을 가르친다는 건 언어도단이죠. 안 그래요?”

소하의 물음에 잠시 웃음기를 머금는 청중들. 그들에겐 색다른 시작이었다. 적어도 자신들 앞에서 서서 무언갈 가르치려 드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부풀리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무언갈 가르치려 하거나 교훈을 줄 생각은 파리똥만큼도 없어요. 그럴 만큼 뻔뻔하지는 못하거든요. 때문에, 저는 그저 제 20대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요. 별로 유별난 건 없는, 제가 망해가는 구단의 감독이 되기까지의 지루한 이야기일 거예요. 그러니 졸 사람은 빨리 나가주세요. 자는 거 보면 마음 아플 거 같거든요? 제 선수 중에서도 조는 사람은 없었어요!”

짐짓 무거워질 뻔한 분위기를 소하는 과장된 너스레로 다시 한번 풀어준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안 자요, 안자!”

다시 한번 청중들의 폭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작된 소하의 평범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큰 영감을 주게 되었다.

물론, 이번 강연을 준비한 유해진과 수많은 관계자가 매우 만족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

[성소하 감독의 평범한 20대 남자의 이야기. 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하게 만들었다.]

[평범한 자서전 같은 이야기였지만 비선출로서 축구계 관계자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놀랍도록 자세했다. 새로운 나침판을 제시한 성소하 감독. 그가 불러일으킨 변화의 바람!]

[한국 축구계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명강연. 몸이 아닌 머리로서 스포츠에 종사할 마음가짐과 방법을 제시하다.]

[하루라도 빨리 그의 자서전이 나왔으면 좋겠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해서 잠들지 못하겠으니까.]

소하의 깜짝 강연은 대호평과 함께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비록 새로운 시스템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짧은 3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감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모조리 함축되어있었으니까.

사실 그동안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이 소하와 비슷한 방식으로 외국 축구계에 종사 중이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미비했기에 정보량 자체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아니, 알고도 포기할 만큼 썩 좋은 인식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 고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고생 중이었으니까.

요컨대, ‘스타’가 없었다.

적어도 이 길을 걸으면 ‘누군가처럼’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장래성이 없었다.

꽤 속물적인 이야기였지만 어쩔 수 없다. 어린 친구들이 꿈을 품기 위해서는 빛나는 무언가가 필요했으니까.

이런 와중에 혜성처럼 등장한 소하라는 별은 판도를 완전히 뒤집기에 이르렀다.

“엄마! 나도 저 아저씨처럼 축구 감독이 되고 싶어!”

“한번 도전해볼까?”

“스카우트 같은 직업도 멋있는 거 같아. 내 눈으로 숨겨진 보석을 찾을 수 있는 거잖아.”

축구를 꿈꾼다면 ‘선수’만을 바라왔던 꿈나무들. 하지만, 소하의 등장과 그의 강연은 기존의 습관을 완전히 깨부수고 새로운 씨앗을 뿌린 격이었다.

“후후후.”

이번 결과에 흡족한 미소를 짓는 한 남자, 유해진. 처음에는 목표 달성이 매우 힘들어 보였지만, 완벽한 대성공으로 마무리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비록··· 지금은 크게 눈에 띄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근시일 내로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을 거다. 다만, 그가 바라던 대로 씨앗은 뿌려졌다.

근 십 년 내로 선수 외에 다른 축구계 인재가 부쩍 늘어날 테니까. 그야말로 완벽한 목표 달성.

이 이상 더 바랄 게 없는 수준이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한 사람이야.’

소하를 바라보며 감탄을 멈추지 못하는 유해진. 능력의 끝이 보이질 않았다.

‘내가 바라는 바를 정확히 알아차리고 가장 완벽하게 문제를 풀어냈어. 정녕 나와 같은 사람이 맞나?’

너무나도 뛰어났기에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유해진은 몰랐다. 소하는 그리 복잡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헤헤. 비선출로서 감독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늘겠군. 어디 한번 내 고생을 경험해보라고. 불철주야···. 고생 한번 쌔빠지게 쳐보면 현실을 깨닫겠지.’

그저, 험난한 여정을 겪게 될 꿈나무들을 상상하며 썩은 미소를 한껏 짓는다.

‘물론···. 그걸 이겨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과연 나올까?’

악동같이 눈빛을 빛내는 소하. 그가 뿌린 고생의 씨앗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십수 년 뒤에서야 알게 될 거다.

< 122화. 인기 스타. (4) > 끝

ⓒ 블라님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