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인기 스타. (3) >
대한민국 국민은 딱 십 년만 행복하다.
태어나고 나서 딱 10살까지.
나이가 두 자릿수가 되고서 앞의 숫자가 변할 때마다 거대한 장벽과 맞서 싸웠어야 했으니까.
10대 때는 대입.
20대 때는 취업, 남자는 군대까지.
그리고 이것을 이겨낸 30줄이 되면 ‘결혼’이란 미증유의 공포가 덮친다.
결혼이라.
결론만 말하자면 가장 두려운 일이다.
인생을 100년으로 봤을 때 30%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완벽한 타인과 남은 70%의 인생을 함께 보내야 하는 일 아닌가.
여태껏 살아온 날의 두 배에 가까운 시간을 육체와 영혼이 함께할 동반자를 찾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오, 모든 가정을 꾸린 자들에게 그 용기에 대한 찬사를 보내니.
하여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나도 그 미증유의 공포가 공격을 시작했다는 거다.
***
“소하야, 봐봐. 이 처자 참 참하지 않니? 아나운서래. 아나운서.”
“···.”
“그럼 이 여자애는 어때? 서울대 나왔고 집안도 좋더라. 얼굴도 미인이고.”
“···.”
“마음에 안 드니? 하긴 넌 가방끈 긴 여자는 예전부터 별로 안 좋아했지. 그렇다면 이 애는 어때? 뜨진 못했지만 걸그룹 출신이라고 하더라. 기럭지가 무슨 인형 같지 않니?”
“···.”
“별로야? 그럼 이 처자는 어때? 축구 쪽 인터뷰를 하는 중이래. 너랑 직업 궁합이 찰떡이야. 대화가 끊이지 않을 거야.”
“···으아아아아! 그만 해요!”
난 어머니가 내 머리맡에 주욱 깔아둔 아리따운 처자들의 사진을 내팽개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발. 제발 잠 좀 잡시다. 엄마, 아들이 모처럼 쉬려고 하는데 꼭 이러고 싶어요?”
“응. 그러고 싶어. 그럼 이번에는 이 여자애는 어때?”
“···.”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거다. 정말 강했다. 조금 다른 의미일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하여튼, 감독이란 직업은 생각보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가 보다.
일 년에 몇 번 보지도 못하는 어머니에게 중매쟁이들이 저렇게 다녀갔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솔직히, 감독이란 운동선수 출신이 은퇴 후에 할 거 없을 때 하는 느낌이 강하지 않나? 내 편견일지는 모르지만.
“근데 뭔 요즘 시대에 중매쟁이들이 그렇게 많이 다녀갔데요?”
“글쎄? 아직도 상류층에는 이런 게 많나 보지. 그럼 이번에는···.”
“안 해요.”
“안 돼. 넌 해야 해.”
“왜요?”
잔뜩 불만을 담아 외치자 친절한 우리 어머니께서는 매우 자상한 말씀으로 대꾸하신다.
“나도 중매쟁이들 집에 찾아오는 거 귀찮거든. 빨리 가버리라고.”
“···.”
“네가 쉬지 않고 TV에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부터 어떻게 알고 왔는지 찾아오더라. 이 엄마, 귀찮아서 죽을 거 같아.”
“뭔가···. 결혼이란 건 좀 더 무거운 거 아니었나요?”
오히려 내가 정상적인 답변을 내놓자 어머니는 코웃음을 치신다.
“뭐래. 결혼이란 건 자기 마음이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뭔 선무당 사람 잡는 소리예요?”
“너도 언젠간 알게 될 거야. 영혼이 끌린다는 느낌이 팍하고 꽂히거든.”
“···.”
나이를 잊게 할 만한 쾌활함이 가득한 어머니의 발언. 그 모습에 난 조금 가슴이 아팠다.
분명히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이야기였을 테니까.
그나저나, 말씀하시는 거랑 행동하시는 게 정반대잖아?
“아니, 잠깐만요. 말은 그렇게 하시는 분이 왜 절 강제로 내보내려고 하시는데요.”
“내가 귀찮으니까!”
“···.”
“농담이고, 하든 말든 일단 좀 여자를 만나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너 슬슬 홀아비 냄새도 나니깐.”
“···.”
킁킁. 홀아비 냄새라니? 내가 얼마나 청결에 신경을··· 쓰진 않는구나.
“하여튼, 엄마 체면을 위해서라도 몇 명만 만나봐. 그것도 싫으면 색싯감이나 여자친구라도 데려오던지!”
“후우. 알겠어요. 알겠어.”
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또 부모 이기는 자식도 드물지 않은가.
하나밖에 없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 저렇게 부탁하는데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겠지.
게다가···. 어머니도 분명 외로우신 거다. 벌써 과부로 산 지 20년이 넘었고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아들은 맨날 해외에 나가 있으니까.
내가 가정을 차리면 손주라도 보시면서 외로움을 지우실 거 같다. 혹은 마누라가 야무져서 어머니와 잘 지낼지도 모르고.
“딱 세 명만 만나 볼게요. 저도 여기까지가 최대한 양보한 거예요.”
마지못해 승낙하자 어머니는 매우 좋아하신다.
“잘 생각했어. 누구로 할래?”
“대충 아무나 엄마 마음에 든 사람으로 골라주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여자도 만나본 놈이 잘 만나는 거예요. 저 같은 놈이 여자를 뭘 알겠어요? 엄마가 더 잘 알겠지.”
“···흐음. 꽤 그럴싸한 소리구나?”
음흉한 웃음을 짓는 어머니.
뭔가 재미있는 장난을 떠올린 듯한 악동 같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데요?”
“뭘?”
“아니, 뭔가를 알아차렸다는 듯한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보여서요.”
“기분 탓이란다. 그냥, 아들이 마음속에 담아둔 여자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어서.”
“말 그대로 기분 탓이네요. 제 여자친구는 축구공밖에 없거든요?”
“···흐흥.”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어머니는 콧노래를 부르며 대꾸도 없이 등을 돌리신다.
거참 참으로 찜찜한 반응일세. 내가 마음에 둔 여자가 있다고? 설마. 어머니도 나이가 드시더니 감이 많이 떨어지셨나 보다.
만나는 여자라곤 홍보부의 에밀리아 씨밖에 없는데.
뭐, 괜찮은 처자이긴 하지. 일 잘하고, 의욕 넘치고, 쾌활하고, 종종 귀여우니까. 같이 있으면 시간이 잘 가지. 말도 잘 통하니까.
다만, 술을 좀 자주 마시는지 얼굴이 항상 불그스름한 게 흠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럼, 어머니 소원이나 들어줄 준비나 해볼까.
***
한 달여 간의 휴가를 맞이한 소하.
세간의 모든 관심은 소하가 휴가 기간에 무엇을 할지 쏠려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된 소하의 첫걸음. 그것은 모두의 예상을 비웃는 듯, 놀랍게도 선을 보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한 고급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서 만난 한 쌍의 남녀.
요즘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초신성이자 포츠머스의 감독인 성소하.
스포츠 아나운서로서 젊은 커뮤니티에 상당한 인지도를 쌓은 윤지영이 그 주인공이었다.
일단 겉으로만 보기에는 선남선녀가 따로 없다.
먼저, 소하는 두말할 것도 없이 미남이다. 이런 범국민적인 인기를 얻은 것도 그의 잘난 외모가 큰 부분이었으니까.
‘외모지상주의는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만약 소하가 왜소하고 잘난 얼굴이 아니었다면 암만 뛰어난 감독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인기를 얻진 못했을 거다.
그리고, 이런 소하와 자리를 가지게 된 윤지영도 만만치 않다. 자고로 스포츠 아나운서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하지 않고서는 하기 힘들일 아니던가.
이렇게 겉모습만은 번지르르한 한 쌍의 커플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전 곧 31살이 되는 성소하에요. 직업은 아시죠? 보잘것없는 축구팀을 이끄는 감독이에요.”
뚱한 소하의 자기소개.
매우 성의 없는 소개였지만, 상대인 윤지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꽃이 핀다.
“호호. 듣던 대로 독특하시네요. 재미있어요. 전 28살인 윤지영이에요. 마찬가지로 제 직업은 알고 계시죠?”
“그럼요.”
스포츠 아나운서.
윤지영에게는 불행하게도 소하는 이 직업에 상당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대충 인지도 좀 알린 뒤에 돈 잘 버는 스포츠 스타를 꼬시려는 직업이지.’
매우 극단적으로 치우친 안 좋은 편견! 어쩔 수 없었다. 수하가 본 스포츠 아나운서는 한 명도 빠짐없이 저런 빌드를 탔으니까.
‘봐봐. 윤지영 씨도 마찬가지잖아.’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소하도 굳이 따지자면 ‘스포츠 스타’였으니까.
보통 스타도 아니다. 차기 세계 최고의 감독이 유력한 인물이다.
세계 최고급 감독들이 받는 연봉은 1,000만 파운드가 넘는다.
한화로 200억에 가까운 엄청난 금액!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기본급에 불과하다.
각종 수당에 광고료까지 합친다면 그 두 배는 버는 것이 최고급 감독의 수입이다.
요컨대, 한국 국적의 스포츠 스타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엄청난 수입이 보장되어있단 말이다.
과연, 중매쟁이들이 부리나케 뛰어다닐 만했다.
“아! 그런데, 30세라고요? 제가 알기로는 올해로 32살 아니었나요?”
윤지영의 의문. 당연한 오류였다. 소하는 언제나 만 나이로 말해왔으며 한국 나이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전 한국 나이를 굉장히 불필요한 문화의 잔재라고 생각하거든요? 태어난 날은 모두 다른데, 한낱 한시에 나이를 같이 먹는 문화라니. 말 같지도 않잖아요. 뭔 칼라로 이어진 외계 종족도 아니고.”
“···.”
그냥 해본 말이었거늘. 거품을 물고 진지하게 달라붙는 소하의 모습은 어이가 없다.
‘듣던 거보다 훨씬 괴짜네.’
조금은 당황한 윤지영. 하지만 그녀가 누구던가. 카메라 앞에 서는 직업 아니던가. 속내를 감추며 연기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저도 만 나이로 소개했어요.”
“오. 제법 주변머리가 있으시군요.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분이셨군요?!”
매우 반색하는 소하. 굉장히 좋아한다. 모처럼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한 반가움이다.
때문에, 처음의 시큰둥함으로 난관이 예상되었던 선 자리는 상당히 좋은 분위기로 흘러간다.
‘제법 말이 통하는 여자로군.’
‘조금 괴짜이긴 한데 그게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여.’
소하는 그저 여자의 연기력에 껌뻑 넘어가 버린 지 오래였고, 윤지영도 제법 소하를 마음에 들어 한다.
애당초 감독이란 직업은 언변이 제법 뛰어나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여자를 아예 모르는 소하였지만 혓바닥만큼은 청산유수다. 그의 뛰어난 미디어 핸들링은 모두가 인정하지 않던가.
자고로 첫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모와 언변이었다.
게다가 소하가 조금 괴짜이긴 하더라도 그 정도는 윤지영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엄청난 명성.
짐작조차 어려울 재산.
뛰어난 외모.
이 세 가지를 완벽히 충족하는 남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조금 요상한 성격 따위는 그저 매력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가진 남자였다.
“후후후.”
“호호호.”
웃음꽃이 남발하는 두 남녀.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슬슬 윤지영이 속내를 드러낸다.
“그나저나 소하 씨는 결혼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어느샌가 바뀐 소하에 대한 호칭!
성 감독님에서 소하 씨로 부드럽게 바뀌었고 소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결혼이요? 글쎄요. 그러는 윤지영 씨는 관심이 있으신가요? 이런 자리에 나온 걸 보니 관심이 있으신 거 같긴 한데.”
“···관심이야 있죠. 언제나 제 꿈은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거였거든요.”
“호오. 그러시길 바라요.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셨으니까요.”
소하의 아무 생각 없는 대답!
하지만 이것은 윤지영에게는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다.
‘호호. 자기 정도면 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이잖아? 숙맥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나 보네.’
놀라운 번역기능이었다.
소하의 시큰둥한 대답을 이렇게 변환시키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네. 일단···.’
눈빛을 번뜩이는 윤지영. 본격적으로 미래를 꿈꾸기 전에 소하가 가진 것을 알아보기로 한다.
결혼이란, 낭만적이지만 가장 현실적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저는 조금 속물적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 재산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에이, 속물적이라뇨. 결혼은 현실이잖아요. 오히려 ‘난 사랑만 필요해’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 무서운 법이에요.”
“그렇죠? 호호. 역시 소하 씨랑은 잘 맞는 거 같아요.”
“하하. 그러게요. 하지만 결혼 상대로는 썩 맞진 않네요.”
“네?!”
소하의 뚱딴지같은 답변에 매우 당황하는 윤지영. 갑작스러운 변화구에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전 가진 재산이 별로 없거든요. 어찌나 가난한지. 어휴. 이 일도 할 게 못 되어요.”
“···그, 그렇군요.”
소하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번 돈은 충분하지만 모조리 비트코인에 넣어버렸으니까.
심지어, 이쪽 세계는 슬슬 올랐을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떨어져서 대단한 손해를 봤다.
‘시발 거.’
대손해로 인해 다시금 탕비실을 털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몰랐다. 오직 한 사람. 에밀리아 존슨만 소하의 협박에 공범이 되었을 뿐.
“차도 10년이나 탄 현성차를 끈다니까요. 어휴. 먹고살기 힘들어요.”
“···.”
점점 짜게 식는 윤지영의 마음.
분명, 어마어마한 자산가라도 들었거늘. 저렇게 돈이 없다는 건 굉장히 돈을 헤프게 쓴다는 뜻 아니던가.
사실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커피값 정도는 낼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하!”
그러든지 말든지 계속 떠드는 소하. 이미 많이 식어버린 윤지영의 마음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애초에 관심도 없었으니까.
< 121화. 인기 스타.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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