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인기 스타. (2) >
“하하. 어서 오십시오.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지요.”
“얼굴이 더 훤해지신 거 같습니다.”
1년 만에 보는 매우 달갑지 않은 얼굴들.
축구협회 사무총장 김승희와 이사회의 박종팔이 나를 매우 반긴다.
여지없이 날 납치한 파렴치한 씹새끼들이지만, 전보다는 낫다.
그때는 자리에 앉아서 밑에 사람 기다리는듯한 태도였지만, 지금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굽신거리니까.
누가 봐도 귀빈을 대접하는 모습이다. 황금빛 꽃가루까지 흩날려줬으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더 풀렸을 텐데. 아직 날 잘 모르나 보다.
“자자, 여기가 알아주는 불고기백반 집입니다. 감칠맛이 아주 제대로죠.”
“느글느글한 외국 요리만 먹다 보면 한국의 음식이 확 땅기는 법이죠. 마음에 드십니까?”
장소도 정반대다.
전에는 정치인들이 꼬탄주나 만들면서 놀 법한 고급스러운 요정이었다면, 지금은 서민들이 찾을 법한 돼지고기 불고기 백반집이다.
이것도 상당한 가산점이다. 일식도 좋아하긴 하지만 지금은 군침이 싹 도는 음식을 먹고 싶었으니까.
1년 전과는 다르게 매우 신경을 써준 모습이긴 하다. 이제야 좀 말을 섞을 준비가 되었나 보다.
“뭐···. 나쁘진 않네요. 제법 눈치가 생겼어요.”
“···.”
“···.”
시건방진 내 대꾸에 표정 관리가 조금 무너지는 늙은 너구리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로서는 상당히 누그러진 태도다.
1년 전과 같은 레퍼토리였다면 이 아저씨들이 재롱 피우든 말든지 바로 자리를 떴을 테니까.
서머솔트 킥과 롤링썬더의 연계기로 둘 중 한 명의 턱주가리가 부서지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제법 신경을 써주셨으니 오늘은 조금 어울려주도록 해볼까요?”
조금 심한 태도 아니냐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목줄을 쥐고 있는 건 나다.
나에게 원하는 게 있으니 저 뻣뻣한 목과 허리를 굽신거리는 거다.
요컨대, 내가 갑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이 너구리들은 조금이라도 풀어주면 기어오르는 종자들이다.
평생 남을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한 오만한 인간들이니까.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와서 탭댄스를 출 거다.
“하···. 하하. 마,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려.”
“저, 저희가 성 감독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지난번의 무례는 잊어주시지요.”
썩은 미소를 지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꼴이 참으로 우습다.
아직 미소 연습은 더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럼 일단 밥부터 시키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뭔지는 몰라도 이 불고기백반 냄새는 진국이긴 하네요.”
“하하! 성 감독의 화통함은 여전하시군요!”
“이 집은 다른 음식을 안 팔아요. 오로지 불고기백반입니다. 원하시면 곱빼기로 시키세요!”
역시, 맛집은 한 우물만 파는 곳이 진국이지. 맛집이라 홍보하면서 이것저것 해물 잡탕 같은 메뉴판을 보면 나가고 싶어지니까.
“이모 여기 불고기백반 3인분 주세요!”
“네에! 외국인인데 한국말 잘하시네!”
“···.”
뭐, 눈알이 퍼런색이니까. 외국인은 아니지만 그러려니 하자.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아.
얼마 뒤, 홀 이모가 불고기백반 접시 세 개를 가져왔다.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군침이 싹 돈다, 돌아.
“이야. 맛있어 보이네요. 잘 먹겠···. 잠깐. 왜 제가 시킨 음식을 댁들 앞으로 옮기는 거죠?”
“네···?”
“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너구리들.
나야말로 어리둥절하다. 내가 먹을 3인분을 왜 자기들 앞으로 가져간단 말인가?
“저, 저희 거까지 3인분 시킨 거 아니었습니까?”
“뭔 헛소리에요. 제가 먹을 양만큼 시킨 건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먹은 건 제가 낼 거니까요.”
암만 눈치가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선은 그어놔야겠지. 괜히 이런 거 얻어먹고 나중에 체할지도 모른다.
“그, 그렇습니까? 그럼 저, 저희도 음식을 주문해야겠군요.”
“차, 참으로 도, 독특한 성격이시군요.”
뭐가 독특해. 당연한 건데.
서둘러 너구리들은 불고기백반 1인분씩 주문한다. 난 또, 안 먹는 줄 알았지. 이런 서민 음식은 저런 귀한 분들은 안 먹는 거 아니었어?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난 허겁지겁 고추장 불고기백반을 먹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와, 그나저나 진짜 맛있긴 하다. 그래 이거지. 흰쌀밥에 뻘건 고기볶음. 이거 없이 어떻게 살까.
“워, 원하는 거라뇨.”
“아이참. 좋은 맛집 소개해주시고선 아마추어같이 이러실 거예요? 그럼 그냥 밥만 먹고 가요?”
“···아, 아닙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하자 곧바로 너구리들은 속내를 토해내기 시작한다.
“저···. 그게 말입니다. 지휘하고 계신 포츠머스의···. 전지훈련과 투어 장소는 어디로 정하셨습니까?”
박종팔이 커다란 안경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어렵게 서두를 뗐다.
“호오. 과연 그걸 노리고 계셨군요?”
난 듣자마자 바로 감이 왔다. 아마도 한국으로 투어 겸 전지 훈련을 오라는 거겠지. 뻔한 이야기다.
돈은 넉넉하게 벌리겠다만 글쎄?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으니까 일단 거절해보자.
“더워서 싫은데요.”
“···.”
“···.”
진심이다. 한국의 7월은 너무 덥다. 8월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너무 덥다.
돈도 좋지만, 구단의 가장 가치가 큰 자원은 다른 무엇도 아닌 ‘선수’.
이 자원들이 열사병이라도 걸려서 컨디션을 말아먹는다면 그깟 지폐 다발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조금 덥기야 하겠지만, 영국과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맞습니다. 7월 정도는 아직 선선한 편이죠. 허헛.”
“···.”
지랄한다. 지랄을. 지구온난화 때문에 나날이 더워지는 판국에 뭔 개소리를 이렇게 할까.
“좋아요, 뭐 더운 날씨에도 적응할 필요는 있죠. 근데, 투어라 하면, 국내리그 팀이랑 친선경기를 가진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지금 국내리그는 한참 시즌 중이잖아요.”
“···.”
아니, 이 사람들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유럽 리그는 6~7월에 쉬고 8월에 시작이지만, 국내리그는 3월부터 11월 초까지라고.
아주 짧은 편에다가 경기 기간도 긴 편이다. 뭐, 이유는 뻔하다. 참가팀이 12개 팀밖에 없으니까.
솔직히 20개 팀이 넘는 잉글랜드의 하부리그가 이상한 거다. 축구의 미친 나라답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왜요?”
“구단 간 합의가 다 끝난 상황입니다. 포츠머스의 의사만 있다면 한 주 정도는 휴식기를 하자고 이야기를 맞춰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팀과 경기를 할 수 없을 텐데요.”
“그래서 성 감독의 선택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선택이라···. 원하는 팀을 고르라는 거겠죠. 근데, 이거 우리 측 프런트와 이야기가 된 거예요?”
다 좋다 이거야. 근데 이건 감독 나부랭이가 아닌 우리 프런트의 경영진과 협상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질문의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너구리들.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는 눈치다.
“응?”
“어···. 못 들으셨습니까?”
“뭘요.”
“이미 프런트와는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감독님의 인가만 있다면 빠르게 진행될 겁니다.”
“···.”
씨발. 뭔가 존나 찝찝했는데 망할 새끼들이 또 뒷공작을 펼쳤구만.
또또, 혈압 오르게 하네.
잠깐. 내 허락이 없으면 영국과 한국의 너구리들이 몰래 꾸민 수작질이 물거품이 된다는 거잖아?
이거 앞뒤 가리지 않고 그냥 끝장내고 싶은데. 그래, 그냥 무시하자. 지들 딴엔 나름대로 신경 써준답시고 나에게 결정 권한을 준거지만 이건 선을 넘었지.
“이번 투어로 상당한 수익을 얻을 거라고 봅니다. 중계권과 광고, 입장 수익까지 생각하면 수십억 단위일 겁니다.”
“여기에, 성 감독님의 작은 수고만 더한다면 수입은 더더욱 오르겠죠.”
쫑긋.
수십억이란 액수에 귀가 쫑긋거렸다. 어차피 해야 할 전지훈련인데, 돈을 쓰기는커녕 돈을 번다고? 그것도 수십억이나?
“수십억···?!”
“그렇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요. 뭔 프리미어 리그 팀도 아닌데 수십억은 개뿔.”
조금 흔들렸지만, 냉정을 되찾자 개소리가 분명해 보인다.
국내리그는 정말 가난하다. 괜히 특급선수들을 중국에 팔아버리는 게 아니다. 수십억이면 몇몇 구단들에는 수년간의 이적 자금과도 맞먹을 터.
이제 갓 챔피언십으로 승격한 잉글랜드 2부리그 팀과 국내리그의 팀이 친선경기를 해봤자 얼마나 벌겠냐 이거다.
“저, 정말입니다. 이미 광고가 줄을 섰어요! 수락만 하신다면 저희와 포츠머스의 관계자들이 두 팔 걷어붙이고 최고의 수익을 낼 작정입니다.”
“허헛. 외국에 나가 계시느라 국내에서 성 감독님의 위치를 잘 모르시나 보군요. 감독님은 뭐랄까···. 스타 중의 스타입니다!”
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인기가 많아졌다는 건 대충 알긴 하지만 스타 중에서도 스타라니? 너무 과장한 거 아닌가.
“지금 한국은 제2의 2002년 월드컵입니다! 그간 ‘플레이어’로서 해외에 명성을 날린 선수는 종종 나왔지만, 감독은 처음이니까요.”
“어지간한 연예인들도 감독님과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소원이라고 할 정도라고요!”
“그리고 아직 논의 중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관심을 보이는 팀이 있습니다. 기꺼이 원정을 와준다고 할 정도예요!”
“동아시아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고 계십니다. 한국, 중국, 일본의 모든 광고를 싹쓸이하면 수십억 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너구리들의 달콤한 속삭임.
솔직히 매우 매력적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두둑한 돈주머니를 챙길 수 있을 테니까.
“흐음. 그건 좀 구미가 당기긴 하는데. 몇 팀을 골라야 하죠?”
“일단 세팀이면 됩니다. 나머지 두 팀은 중국과 일본의 팀으로 정하면 되니까요.”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지만 이미 상당히 진척됐나 보다.
“그런데요, 국내리그 팀과의 친선경기면 흥행이 될 거라는 말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은···. 좀 관심도가 떨어지지 않나요? 어차피 제 팀은 잉글랜드 팀이잖아요.”
“허헛. 그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십니다.”
너털웃음을 흘리는 박종팔. 모처럼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잇는다.
“포츠머스는 단순한 잉글랜드 팀이 아닙니다. 엄연히 한국팀이라고요.”
“그렇죠. 즉, 이것은 단순한 클럽 간의 경쟁이 아닌 한중전과 한일전이 될 거라는 말입니다.”
둘이 아주 그냥. 북 치고 장구 치고, 추임새까지 넣으며 호흡이 죽여준다.
“그만큼 포츠머스는 국민구단으로서 자리 잡은 겁니다. 단장도 한국인, 선수도 한국인, 그리고 팀을 이끄는 감독마저 한국인인데, 당연히 한국팀이죠.”
“아주 제대로 국가 간의 경쟁전이 될 겁니다.”
한중전과 한일전이라.
흥행은 보증된 경기긴 하다.
근데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한중전이라니. 아편전쟁이 더 어울리는 거 같은데.
“돈 냄새가 나긴 하네요. 그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일단 한발 물러서자. 난 아직 귀국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다고! 가뜩이나 쉬지도 못해서 머리도 굴러가지 않는다.
“그럼···. 죄송하지만, 만약 한다고 하신다면 어떤 국내리그 팀과 경기하고 싶습니까?”
“이해해주십시오. 그···. 결정이 늦는다면 일정에 큰 차질이. 큼큼.”
이 정도야 생각할 필요도 없지.
게다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와주는데 사람 된 도리로서 너구리들에게 약간의 자비 정도는 베풀어줘야겠다.
“서울, 부산. 전북.”
난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주르륵 팀을 나열했다.
“큼큼. 어째서 이런 선택을 하신 건지···.”
빠르게 나온 답변에 놀라는 너구리들. 이유야 간단하다.
“홈경기장이 큰 순서대로 한 건데요.”
“···.”
“울산과··· 전북은 비슷한 규모 아닙니까.”
“전북이 더 강팀이잖아요. 어차피 입장객 수는 비슷하다면 강팀이랑 하는 게 여러모로 좋죠.”
아주 쉬운 선택이다.
기왕 돈을 벌기로 한 거 관중동원력이 큰 구장을 가진 팀을 골라야 인지상정 아니겠나.
서울은 서울 월드컵경기장을 사용하므로 66,000석이다. 가장 크기 때문에 무조건 일 순위.
부산은 2015년까지는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을 사용하는 터라 53,000석이나 된다.
여기에 울산과 전북이 약 43,000석으로 비슷한데, 전북이 더 잘하는 팀이라 고르기 편했다.
게다가 수도권과 전라도, 경상도를 모두 돌아주는 완벽한 균형 아닌가. 역시 난 진짜 천재일지도?
“그···. 명문 팀 수원은 어찌합니까?”
“경기장도 큰데요.”
당연한 의문이 따라왔다. 국내리그를 논할 때 수원을 빼놓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난 생각이 다 있었다.
“같은 파란색이라 싫어요.”
“···.”
“···.”
아주, 매우 단호한 대답.
협상의 여지는 없다.
“그럼 일단 그렇게들 알고 계시고 전 이제 가봐야겠네요. 3일 내로 결정 내리고 연락드릴게요.”
3인분을 후딱 해치우고 빠르게 작별을 고했다. 일단 집에 가서 잠 좀 푹 잔 다음에 브라이언 그 대머리 새끼한테 전화 좀 해야겠어.
“저희는···. 음식이 지금 나왔···.”
“아, 아닙니다. 이야기는 끝났으니 쉬셔야겠죠.”
떨떠름한 표정을 짓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이야기는 끝났고 내 식사도 끝났는데. 난 밥 먹는 속도가 빠르다고.
그나저나 참 웃기다. 한국의 여름을 뒤흔들 엄청난 이벤트에 대한 논의가 이런 코딱지만 한 불백집에서 이루어지다니.
그래도, 꽤 만족스럽다.
적어도 음흉한 새끼들이 뒷수작 부리는 고급스러운 장소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축구는 서민의 스포츠니깐.
‘그럼 집에 가서 푸욱 쉬어볼까.’
내 작은 바람. 딱히 문제는 없어 보인다. 집은 언제나 내 안식처였으니까.
그러나 이 생각은 또다시 오판이었다.
< 120화. 인기 스타.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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