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리그컵 결승전. (7) >
첼시가 앞서나가기 시작한 리그컵 결승전 전반전.
냉탕과 온탕처럼 완전히 달라진 양 팀의 분위기와는 달리 그들만의 경기를 진행하는 선수들이 있다.
흡사, 모 협곡 게임의 탑 라인이랄까.
경기 결과는 안중에도 없다.
그 선수들은 바로,
존 말로리.
존 테리.
이름은 똑같지만 선수로서, 사람으로서는 극과 극의 대척점에 서 있는 둘이다.
존 테리.
웨스트햄 유망주 시절부터 줄곧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으며 첼시라는 거대한 클럽과 잉글랜드 국가대표의 전설적인 수비수로 자리를 잡은 선수다.
실력 면으로는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공고한 경지에 올라있다.
그에 반해 존 말로리.
단 한 번도 주목을 받은 적이 없으며 하부리그를 전전하는 모래사장의 모래알같이 흔한 공격수.
선수로서 비교하자면 존 테리와 존 말로리는 비교조차 성립이 되질 않는다.
재밌게도 인격적으로도 정반대다.
먼저, 존 테리는 사생활이나 인성 문제로 큰 문제를 줄줄이 터뜨렸다.
9.11 테러 모욕 사건.
인종차별.
국가대표 동료인 웨인 브리지의 아내와 저지른 불륜 스캔들.
굵직한 내용만 추려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게 만든다. 여기에 위의 사건들보다는 강도가 약한 자잘한 것들을 보면,
장애인 주차장에 주차, 뺑소니, 노상 방뇨, 미성년자 성추행, 도박.
등등. 경기장 내에서 멋진 주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다.
축구를 하지 않았으면 그저 흔하디흔한 잡범으로 인생을 이어나갈 인성이다.
하지만, 존 말로리는 선수로서는 별로일지라도 인격적으로는 비교조차 어렵다.
존 테리가 받는 주급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한 주급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기부를 해왔으며, 동료들과의 우정도 두텁고 모범적이었으니까.
경기장 내외로 아주 인성이 좋은 선수라고 칭찬이 자자하다.
이토록 모든 것이 정반대인 두 선수.
이들은 전반 35분 내내 그들만의 진검승부를 펼치는 중이었다.
물론, 승자는 존 테리.
애당초 미스 매치업이었다.
비록 30대 중반을 넘어가며 육체적인 능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경험만은 엄청난 존 테리. 그에게 축구 지능으로 승부 보는 존 말로리는 한 끼 간식거리였으니까. 원숭이가 사람에게 도구를 쓴다고 자랑하는 격이다.
‘꽤 괜찮은 선수지만 피지컬이 별로 좋지 않군.’
조소를 머금는 존 테리.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간 피지컬 괴물이라고 평가받는 조쉬 킹을 상대할 거라고 생각했거늘. 조금 허탈할 정도다.
‘조쉬 킹이라는 녀석이 제법 몸 좀 쓴다고 하던데. 아쉬워. 한 수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존 테리야말로 힘 좋은 흑인 공격수와 가장 연이 깊은 수비수 아니던가.
그와 한솥밥을 먹은 피지컬 괴물 중에는 디디에 드로그바, 로멜루 루카쿠까지 있었으니까.
요컨대, 신체 능력이 강점인 선수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나저나 참 꿋꿋하군.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존 테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대결을 시도하는 존 말로리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 패턴은 벌써 네 번째···인데. 학습 능력이 없는 건가?’
이미 세 번이나 보여준 존 말로리의 더미 런. 처음에야 제법 영리한 움직임이구나 하고 감탄했지만, 똑같은 방법을 네 번이나 보여주는 모습에 절로 비웃음이 나왔다.
‘그냥 감독이 시킨 대로만 움직이는 멍청이였군.’
20년에 가까운 선수 생활 동안 감독이 지시한 것만 수행하는 멍청이들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봐온 존 테리. 별다른 감흥조차 없다.
‘진짜 일류가 되려면 감독의 지시를 자신의 능력으로 진화시켜야 하는 법. 뭐, 하부리그 선수가 그러면 그렇지.’
그저 오만하게 존 말로리를 내려다볼 뿐이다. 그래도 방심하는 마음 따위는 없다. 선수로서 그는 완벽했으니까.
상대가 누구든 최고, 최선의 경기력으로 막아내는 것. 그것이, 비록 존 테리의 인성이 파탄 났을지라도 전설적 인물로 이름을 알릴 수 있게 해준 이유였다.
하지만.
존 테리는 알아차렸어야 했다. 경기장 밖, 벤치에서 자신의 모습을 1분 1초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새기는 선수가 있단 사실을 말이다.
***
전반 39분.
선제골을 헌납한 포츠머스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보통, 약팀이 강팀을 상대로 잘 버티다가 실점하는 순간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말이다.
[일단 포츠머스의 끈기는 정말 놀랍습니다. 선제골을 실점했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전혀 없는 모습이거든요.]
[0-0 상황과 똑같은 표정이에요. 상당히 재밌네요. 보통 실점을 당하면 따라잡으려고 더욱 앞으로 나가다가 추가 실점을 당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베테랑 해설의 입에서도 칭찬이 쏟아져 나온다.
3부리그의 침착함이라고는 볼 수 없는 포츠머스의 늠름한 모습!
겉으로 보기에 무척 훌륭한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전반전은 버린다. 1실점. 최대 2실점까지는 허용해도 좋다. 내 예상으론 1실점 정도 할 거라 보지만 말이야. 하여튼, 우리는 계획대로 밀고 나가기만 해.’
이미 알고 있었기에 대처가 유연한 것이었을 뿐. 반전 영화도 스포일러를 당하고 보면 감흥이 덜한 법이었다.
‘만약 3골 먹히면요?’
포츠머스 선수들의 질문.
이에 소하는 시니컬하게 답변했다.
‘줄빠따 맞아야지.’
‘···.’
‘농담이고, 그땐 뭐, 이길 수가 없지. 퍼거슨 감독님이 돌아오셔도 뒤집을 수 없어. 고로, 이기고 싶으면 3실점은 하지 마라. 꼬우면 니들이 감독하던지.’
‘···.’
최대 2실점까지 허용한 소하.
때문에, 전반 40분까지 한 골 차이밖에 나지 않는 상황은 소하나, 포츠머스 선수들에게는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뭐야? 왜 이렇게 침착해?’
‘아···. 좀 더 달아나서 쉬고 싶은데.’
‘실점한 걸 까먹었나?’
‘이상하다. 이상해.’
첼시의 선수들이 조금 당황하기 시작.
견고하던 방패가 작은 흔들림을 가지며 틈을 보인다.
특히나 전반전의 후반기에 접어들며 체력의 한계를 맹렬히 느끼는 오스카가 포츠머스의 침착함에 제대로 휘말린다.
“뭐 하는 거야! 한 골 더 넣고 경기를 끝내버리자고!”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 득달같이 포츠머스 선수들에게 달려드는 오스카.
어떻게든 공을 빼앗아내서 소유권을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소유권을 회복한다면, 공격을 시작해 골을 넣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것은 명백한 오버히트였다.
“어엇?!”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오스카.
-콰당.
공을 잡은 스티븐 데커에게 달려가던 오스카는 그만 제풀에 지쳐 넘어져 버렸다.
다리에 경련이 온 것은 아니었고, 그저 순간적으로 힘이 풀려버린 것.
즉, 인 플레이 상황이었다.
‘기회다.’
가뜩이나 중원에서의 수적 우위를 지니고 있던 포츠머스. 오스카가 제풀에 지쳐 넘어지며 너무나도 넓은 공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일단 앞으로!’
이를 놓칠 스티븐 데커가 아니다.
텅텅 비어버린 중원을 힘차게 질주하며 첼시 선수들을 압박한다.
이 묵직한 돌파는 전방의 동료들에게 붙어있는 첼시 선수들을 자신에게 불러오기 위함!
투우사가 빨간 천을 흔들 듯 말이다.
“제기랄.”
첼시로서는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
이대로 저 킥 능력이 좋은 선수를 위험지역까지 오도록 내버려 뒀다간 무슨 사고를 칠지 몰랐다.
노마크 상황에서 가속도가 제대로 붙은 채로 중거리 슛을 때린다면?
아무리 전설적인 골키퍼인 체흐라도 막아낼 수 없을 거다.
“내가 간다.”
델리 알리를 밀착마크 하던 마티치가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스티븐 데커의 진로로 달려갔다.
“알았어!”
동시에 낮은 위치에서 뒷걸음질 치던 게리 케이힐이 델리 알리의 마크를 이어받기 위해 앞으로 전진.
수비가 강점인 첼시다운 매끄러운 수비적 움직임이었지만, 이것이야말로 스티븐 데커가 노리던 상황이었다.
두 눈을 번뜩이며 정말 찰나의 시간 동안 노마크가 된 델리 알리에게 전진패스를 찔러준다.
“해내라! 못하면 퇴근 후에 나랑 요가학원에 다니게 될 거다!”
알리에겐 정말, 사형선고 같은 우격다짐을 날리는 스티븐 데커.
어떻게 해서든 델리 알리를 요가의 본고장인 인도인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히익! 그건 정말 싫네요.”
당연히도 델리 알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거부한다. 소하의 ‘셧다운제’에 게임을 할 시간도 부족하거늘. 요가학원까지 다닌다면 그 좋아하는 게임은 구경도 못할 테니까.
-사락.
스티븐 데커의 협박이 제대로 먹혔는지, 빠르고 강한 패스를 정말 부드럽게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델리 알리.
이것은 개리 케이힐이 수비자세를 잡기 전에 완료되었다. 즉, 전반전 내내 단단한 수비력을 보여주던 개리 케이힐에게 틈이 많이 생겼다는 이야기!
“지나갑니다!”
델리 알리는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구불거리며 매끄러운 스텝 오버를 시도.
십 대다운 유연함을 이용한, 잠깐 문어가 보인 것만 같은 멋진 기술이다.
“아···!”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에 펼쳐진 알리의 스텝 오버는 개리 케이힐의 균형을 완전히 빼앗는 데 성공.
그리고 균형을 잃은 수비수는 델리 알리를 단 1초도 막아둘 수 없었다.
[델리 알리! 알리가 개리 케이힐을 말 그대로 무장해제 시킵니다!]
[완전히 균형을 잃어 비틀거리는 케이힐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델리 알리! 다음 그의 선택지는 무엇일까요!]
순식간에 페널티 박스까지 공을 몰고 들어온 델리 알리.
빠르게 두 눈을 좌우로 돌려 동료들의 위치를 확인한다.
‘···줄 데가 없군.’
존 말로리는 존 테리에게 완전히 막혔다. 커너 러셀은 그보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지만, 공격적인 재능은 영 아닌 선수.
더 멀리에는 오른쪽 윙백인 도봉산이 대각선으로 찔러 들어오고 있었지만 조금 늦었고, 아스필리쿠에타도 너무 가깝다.
‘직접 한다.’
직접 마무리 짓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는 델리 알리.
‘하지만 어떻게?’
페트르 체흐를 완전히 꺾어버릴 슛을 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좁다.
아니, 한 가지 길이 있긴 하지만 교묘하게 존 말로리를 붙잡아둔 존 테리가 그 길을 막고 있다.
‘정말 대단한 선수야.’
감탄이 절로 나온다. 보통 선수였으면 선수 하나 마크하기도 벅찰 텐데 말이다.
‘제길···!’
잠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는 델리 알리.
도무지 방법이 없어 억지로 슛 각을 만들어 보려고 작정했지만, 의외의 인물이 기회를 만들어준다.
“엇?! 뭐 하는 거예요!”
“날 믿어!”
존 말로리가 알리의 진로를 향해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존 테리를 달고서 말이다.
‘젠장. 일단 믿어보자.’
이대로라면 결정적인 상황에서 동료끼리 넘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델리 알리는 믿어보기로 하고 그대로 전진을 멈추지 않는다.
‘···뭐지?!’
이 이상한 상황에서 첼시의 주장인 존 테리는 이번 경기에서 처음으로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일단은 존 말로리를 마크한다.’
묘한 상황이었지만, 결국 존 말로리를 내버려 두지 않기로 한다.
이유는 하나.
‘그간 계속 보여줬던 침투 움직임과 똑같다. 내 눈을 속여 알리에게 패스를 받으려는 거겠지.’
전반전 42분 내내 계속해왔던 존 말로리의 동료 이용하기. 이번에도 같은 수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생각이었지만, 또 어찌 보면 존 말로리란 선수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다.
잘못된 선택에 따른 결과는 참혹했다.
“어?!”
믿음이란 비이성적인 두 선수의 움직임에 그만, 교묘하게 막고 있던 슈팅각을 내준 것.
더군다나 델리 알리와 충돌할 거라 여겨졌던 존 말로리는 속도를 올려 간발의 차이로 알리보다 먼저 충돌지점을 벗어났다.
“안 돼!”
소리쳐보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델리 알리는 진로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다시 말해 슛하기 좋은 중앙지역으로 자리를 바꿨으니까.
게다가 순간적으로 1m도 되지 않은 작은 공간에서 세 명의 선수가 뒤엉킨 터라, 체흐의 반응도 늦어버렸다.
-뻥!
과감하게 파 포스트 상단 모서리를 향해 인스텝 슛을 시도하는 알리!
-촤악!
시원하게 골망을 갈랐다.
반응이 늦어버린 페트르 체흐가 입을 벌린 채 구경만 할 수밖에 없는 교묘한 슛 코스였다.
[골입니다! 골! 전반 43분. 포츠머스가 동점 골을 때려 넣습니다!]
[델리 알리의 멋진 슛! 오스카가 넘어지면서 첼시에게는 큰 악재가 날아왔습니다!]
“으아아아아!”
폭발적인 웸블리의 함성을 잡아먹기라도 할 기세로 포효하는 델리 알리!
순식간에 코너 플래그까지 달려가 웸블리를 찾은 관중들에게 손을 뻗는 그의 모습은 야성미가 물씬 풍긴다.
“···.”
망연자실한 첼시 선수들.
고작 3부리그 팀에게 동점 골을 얻어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다.
“···제기랄.”
특히나 잘못된 판단으로 결정적인 기회를 헌납한 존 테리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쉰다. 화가 단단히 난 얼굴이다.
“···평생 들러리 역할을 하기로 맹세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해줘야죠. 하하.”
“···.”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앞을 지나가는 존 말로리가 밉살맞기 짝이 없었지만, 존 테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전반 43분. 포츠머스의 동점 골.
한껏 달아오른 웸블리 스타디움은 남은 시간은 별다른 일 없이, 후반전을 맞이할 준비에 들어갔다.
< 112화. 리그컵 결승전. (7)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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