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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천재 감독-109화 (109/306)

< 109화. 리그컵 결승전. (4) >

소하는 그 후로도 온종일 최후의 선수가 퇴근하기 전까지 선수들을 관찰했다. 장장 여섯 시간에 달하는 미행의 연속. 실로 비글 같은 체력이 아닐 수 없다.

‘재밌으니까.’

개인 면담은 일이라 재미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거늘. 업무를 땡땡이치고 숨어다니는 맛이 일품이다.

그렇다고,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미 상당한 수확물을 얻었으니까.

‘내가 팀을 과소평가했군.’

온종일 뛰어다니며 내린 결론은 ‘매우 긍정적’.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선 모두가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는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어차피 감독님과 함께라면 앞으로 더 높은 곳에서 뛰게 될 거다. 이 정도 무대에서 주장인 내가 흔들려서는 안 돼.”

포츠머스의 주장, 케빈 도슨.

그는 침착하게 주장의 품격을 유지했다. 소하바라기인 그답게 소하를 떠올리며 각오를 다지는 모습은 믿음직스러웠다.

“첼시라···. 오랜만이네.”

당당하게 팀의 에이스로 자리 잡은 도봉산은 ‘볼턴 시절’을 떠올리며 상암동 미친개로 각성한 지 오래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첼시와 자웅을 가르던 그 시절을 떠올라 몸이 달아올라 버린 것.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하는 그가 빨리 찾아온 너무나도 좋은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으니까.

“어차피 똑같은 한 경기일 뿐입니다.”

잭 해리슨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인 로봇 같은 성격으로 큰 경기에 대한 압박감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종종 열정이 필요할 때도 차가운지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매우 드문 경우였을 뿐.

프로선수에게 항상 유지되는 침착함이란 신이 선물한 축복이자 재능이었다.

“···.”

언제나 묵묵한 팀의 엔진, 커너 러셀.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평소와 같은 태도로 훈련하는 모습은 소하에게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흐음. 몸이 가볍군!”

놀랍게도 이번 시즌 단 한 번의 부상도 없었던 유리 몸, 스티븐 데커.

요가 마니아가 된 그는 몸이 개운한지 허리를 과격하게 흔들며 상태를 확인한다.

그 모습에 소하는 종이로 만든 인형을 반으로 접는듯한 불안함을 느꼈지만, 최소한 몸 상태가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수확을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팀에서 이상한 자리를 차지한 선수, 마이클 반즈.

축구를 부업 취급하는 그였지만 묘하게도 일정 부분 팀의 정신적 기둥이 되는 선수다.

그가 가진 특유의 느긋함은, 흔들리는 선수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요소였으니까.

“우승 보너스가 얼마였더라? 받으면 최고급 낚싯대 세트를 사야겠어.”

제사보단 제사밥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한 발언. 다른 감독들이었다면 바로 주저 없이 방출 명단에 이름을 올렸겠지만 소하는 아니었다.

‘바로 저거지. 이미 우승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저 초연함과 뻔뻔함. 아주 훌륭해. 최고의 모습이야.’

몰래 지켜보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꽉 끌어안았을 기세다. 매우 만족한 소하가 선발명단에 그를 올렸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

‘꽤 재미있는 선발명단이 나왔군.’

이렇게 온종일 선수들의 심리상태를 관찰하며 기어코 선발명단을 완성한 소하. 비상식인으로 유명한 그가 봐도 비상식적인 선발명단이 나왔다.

이미 지쳐 떨어져 나간 밀러도 없겠다, 한껏 썩은 미소를 지는 모습이 사악하기 그지없다.

‘이거면 해볼 만하지.’

소하는 이길 수 없는 상대의 앞에 섰음에도 승부욕에 활활 타오른다.

축구공은 언제나 둥글었으며 어디로 튈지 몰랐으니까.

그리고, 소하는 축구공이 튈 방향을 정하는 사람이었다.

***

2월 17일.

드디어 수많은 사람이 기대하던 그 날에 도착했다.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날이었지만, 의외로 포츠머스시는 조용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여러 이유로 경기장에 가지 못한 포츠머스 시민들이 생업을 멈추고 TV 앞에 섰기 때문이다.

“아, 오늘 영업 끝났어요.”

“죄송하지만 오늘은 오전까지만 가게를 열어서요. 오후에는 축구 봐야 하거든요.”

“응~ 오늘 연차야~”

“이날을 위해 모든 업무를 끝내놨다.”

도시의 기능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 수준까지 간 포츠머스.

관광도시에 활력이 사라졌지만, 포츠머스 시민들은 마냥 행복하다.

“오늘만은 이해해달라고.”

“117년 만에 첫 결승전이야.”

“이걸 보기 위해 사는 거잖아?”

뭔가 순서가 바뀐 거 같지만 어떠하리. 축구가 종교인 나라에서 응원하는 팀이 결승전에 갔다는 건 신이 이 땅에 내려온 기적과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

이해해줄 수밖에 없다. 아니,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 포츠머스 시민들이었다.

이렇듯 아주 조용해진 포츠머스시였지만, 굉장히 부산스러운 장소도 존재한다.

그곳은 바로, 포츠머스 FC의 클럽하우스. 이제 막 웸블리로 떠날 채비가 끝나고 선수들이 모두 버스에 탑승한 상황이다.

“자, 이제 출발!”

웸블리 스타디움이 위치한 런던은 매우 가까운 거리였기에 아침에 출발해도 충분하다.

종종 멀리 떨어진 팀이라면 전날에 미리 도착해 숙소를 잡지만 그 정도 거리는 절대 아니었으니까.

“힘내라! 최선을 다해줘!”

“너희들은 우리의 자랑이다!”

“폼페이! 폼페이!”

“우리의 꿈을 이뤄줘!”

“너희들은 이미 우리의 꿈을 이뤄줬어! 고맙다!”

이른 아침부터 폼페이 서포터즈 트러스트, 약칭 PST가 클럽하우스로 몰려들어 열렬한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모두가 경기에 한눈팔려 있을 때도, 선수들을 위해 시간을 쪼개는 진정한 팬의 모습에 선수들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잡는다.

‘후우. 믿음에 보답하는 게 사람 된 도리라고 했어.’

‘어려운 상대지만 적어도 모든 것을 내던져보기는 해보자.’

‘우리 팬들은 정말 믿음직해.’

열정적인 팬들의 성원에 제대로 기운을 차린 선수들. 소하도 선수들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싱긋 웃는다.

“그래, 그 마음 항상 잊지 마라. 우리의 존재의의는 팬이야.”

소하가 항상 입에 달고 사는 잔소리가 두둥등장! 선수들은 질린 표정을 짓는다.

“으···. 그 소리 좀 그만해요.”

“진짜 우리 할아버지보다 같은 말을 더 반복하셔.”

“완전 세뇌됐다니깐.”

투덜투덜.

좋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원래의 포츠머스로 돌아와 버린다.

“뭔 헛소리야. 내가 은퇴하기 전까지 계속 말할 건데. 아무튼 가자고.”

“···.”

“···.”

선수들이 품은 마음의 등뼈를 조금 부러뜨린 소하. 그러든지 말든지 마냥 싱글벙글한다. 뭐가 그리도 좋은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지만, 선수들도 안심이 된다.

평소의 소하다운 모습으로 돌아왔으니까. 어제의 조금 이상한 모습은 완전히 털어버린 게 그저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부우웅.

그렇게 두 시간쯤 흘러, 어느새 도착한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 웸블리 스타디움. 그 장엄한 자태에 선수들은 입을 떡 벌린다.

“와. 진짜 크다.”

“네 살 땐가 한번 와보고 처음인데. 막상 보니깐 좀 떨리긴 하네.”

“후우우우.”

이제야 웸블리에서 하는 경기의 무게감이 와닿는지 조금 긴장한다.

그래도 약간의 긴장은 좋은 경기력에 필수 요소. 그리 우려할 상황은 아니다.

“···.”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소하 또한 감상에 젖어든다.

‘···웸블리라. 지난 생에서 10년. 이번 생에서 2년. 감독질 한 지 12년 만에 와보는구나.’

12년. 초등학생에 입학한 꼬맹이가 수능을 보고 곧 성인이 되는 긴 세월이다.

그 긴 세월 만에 처음으로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경기하는 소하. 감정이 요동칠 만도 하다.

하지만, 감회는 잠시였을 뿐.

‘뭐, 더럽게 큰 거 빼고는 별로 다를 거도 없네.’

금세 마음을 다잡는다.

인간을 초월한 듯한 정신력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웸블리보다는 회귀가 훨씬 더 불알 떨리는 일 아닐까.’

이미 훨씬 더 마법 같은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보다 더 놀랄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당장 대륙 크기의 거대한 외계인 모선이 침공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하여튼, 회귀라는 기적 때문에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강철 심장까지 가지게 됐고, 그동안 톡톡히 이득을 본 소하였다.

***

장엄한 웸블리 스타디움의 좌석에 관중들이 모조리 들어찬 놀라운 광경.

이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의 해설을 맡게 된 마틴 타일러와 앨런 스미스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다소 싱거울 거라고 예상되는 결승전에 빈자리를 찾기 힘듭니다!]

[아마 대부분은 포츠머스의 응원자들일 거예요. 그들의 열정과 사랑에 찬사를 보냅니다.]

침을 튀기며 떠드는 마틴 타일러와 앨런 스미스. 축구게임을 해봤다면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축구게임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프랜차이즈의 해설을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객관적으로 보자면 상당히 전력 차이가 나는 팀끼리의 경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쉬운 경기가 될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맞습니다. 포츠머스가 첼시와 비교해 굉장히 전력이 떨어지는 팀이지만 그들에게는 날카로운 무기가 있죠. 바로, 성소하 감독입니다.]

나름대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해설의 입에서 소하의 이름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게, 현재 소하는 적어도 영국 내에서는 가장 주목받는 젊은 감독이었으니까.

얼마 전에 실시한 영국 내 가장 기대되는 젊은 감독에서 1위로 뽑힐 정도다.

[축구계의 조앤 롤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한편의 판타지 소설을 써 내려가고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솔직히 어린이들의 동화를 써도 이렇게 쓰면 너무 과장했다고 욕먹을지도 몰라요.]

이미 소하의 업적은 모두가 인정하는 중이다.

챔피언십 리그로의 승격을 거의 확정 지은 상태였고 팀을 결승전까지 보냈으니까.

이제 단순한 운으로 치부하는 사람은 축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수준까지 왔다.

[굉장히 뛰어난 감독입니다. 정석적인 전술은 물론이고 변칙적인 술수도 잘 사용하는 감독이죠.]

[특히나 공격을 기초로 삼는 그의 시대를 앞서나간 전술은 상위리그 감독들도 눈여겨볼 정도입니다.]

당연한 평가였다. 실제로 10년 뒤에나 쓰일 전술들을 거침없이 사용 중인 소하였으니. 상위리그의 감독들도 대놓고 보지는 않았지만 몰래 참고하는 현황이었다. 이 때문에 원래의 세계보다 전술의 진화에 속도가 붙었고.

[그렇게 본다면, 경기를 감독에게 집중해봐도 굉장히 흥미롭네요. 이미 전설을 써 내린 주제 무리뉴 감독과 떠오르는 샛별, 성소하 감독의 맞대결이니까요.]

[심지어 전술적으로도 굉장히 상극인 대결입니다. 수비의 주제 무리뉴. 공격의 성소하. 창과 방패의 대결이지 않습니까. 물론, 성소하 감독이 훨씬 강한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나올 가능성은 매우 적지만 말이죠.]

입맛을 다시는 마틴 타일러. 창과 방패의 대결은 볼만했지만, 방패와 방패의 대결은 한 사람의 축구인으로서 그리 보고 싶지 않은 경기였다.

하지만, 이것은 소하를 잘 모르고 성급히 판단을 내린 것뿐.

곧이어 전달받은 포츠머스의 선발라인업에 체통을 잃고 소리친다.

[오! 마이 갓!]

[무, 무슨 일입니까!]

[하하! 정말 놀랍군요. 드디어 공개됐습니다. 드디어 첼시와 포츠머스의 선발라인업이 확정되었습니다!]

[아! 정말 놀랍군요. 다들 궁금하실 테니 제가 재빨리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소하! 정말 대단한 감독이에요.]

입이 마르고 닳도록 소하를 칭찬하며 약팀인 포츠머스의 선발라인업부터 공개하는 앨런 스미스.

[GK: 말콤 우드.

CB: 케빈 도슨.

CB: 칼빈 필립스.

CB: 찰스 말로리.

LWB: 잭 해리슨.

RWB: 도봉산.

MC: 마이클 반즈.

MC: 스티븐 데커.

AMC: 델리 알리.

AMC: 커너 러셀.

ST: 존 말로리.

SUB: 재커리 뱅크스, 아담 웹스터, 앤디 로버트슨, 매튜 다이스, 엑토르 베예린, 안토니오 그린, 조쉬 킹.]

놀랄 만도 하다.

3백은 자주 보여줬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윙백 구성부터 시작해 중원 구성까지 처음 보는 조합이다.

심지어, 부동의 주전이었던 조쉬 킹이 선발에서 제외되고 요즘 경쟁에서 완전히 밀린 존 말로리가 선발이라니.

놀라움을 넘어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는 라인업이었다.

[도, 도대체 무슨 전술을 준비한 걸까요? 수십 년간 해설을 해왔지만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네요.]

[저도 지금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조금 시간을 주셔야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성소하 감독이 비장의 한 수를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공격적으로요!]

혀를 내두르며 서둘러 소하가 보여준 선발진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는 앨런 스미스와 마틴 타일러.

도대체 어떤 천재적인 전술일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소하는 그저, 오늘 컨디션이 좋은 녀석들로 줄 세웠다는 사실을 말이다.

< 109화. 리그컵 결승전.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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