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14-15시즌 후반기. (10) >
포츠머스와 선덜랜드의 리그컵 준결승 2차전. 선덜랜드의 홈인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펼쳐지는 경기였지만 포츠머스가 근소 우위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핵심 선수 둘의 부재.
1차전에서의 패배.
이 두 가지 요소는 선덜랜드로서는 굉장히 헤쳐나가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으니까.
‘일단은 공격이다.’
선덜랜드의 감독, 거스 포예트는 우선적으로 ‘공격 앞으로’를 지시. 선덜랜드는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무게중심을 앞으로 둔다.
[선덜랜드가 앞으로 공격합니다! 1차전 때의 수비적인 모습과는 매우 다르군요!]
[1차전을 패배한 상황에서 수비적으로 나온다는 건 결승전에 올라가기 싫다는 이야기죠!]
4-4-2 진형은 그대로 유지한 채 측면 공격을 통한 득점을 노리는 거스 포예트 감독.
그 모습에 경기장을 주시하던 소하는 혀를 찬다.
“쯧쯧. 너무 뻔해. 창의력이 없어. 이게 주입식 교육의 폐해지.”
영국에도 주입식 교육이 빈번한지는 모르겠지만, 한껏 이죽거리는 소하.
솔직히, 너무 뻔한 수작이지 않은가.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선덜랜드의 모습에 여러 가지 계획을 준비한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다.
“놀랍네요. 감독님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
창의력 없는 사람 하나 추가다.
밀러 수석코치가 혀를 내두르며 칭찬하자 소하는 맥이 탁 풀렸다.
역시 ‘천재 감독’의 자질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니, 뭐가 놀라워요. 개 뻔한 건데.”
“그, 그런가요?”
“당연하죠. 핵심 둘이 빠진 이상 과감한 전술 변화를 주지 못할 테니까요. 원래 하던 거도 제대로 못 할 텐데, 다른 방식이 되겠어요?”
“그건 그렇죠.”
“너무 식상한 선택이긴 하지만 그리 나쁘지 않기는 하죠.”
핵심 선수란 팀의 기둥. 기둥이 둘이나 뽑혔는데 리모델링을 할 수가 있겠는가?
완전히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 큰 상황에서 모험하기엔 준결승전이란 무대가 너무나도 무겁다.
결국 원형을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변화를 추구할 수밖에.
“고로, 오늘 핵심 선수는 성범죄자···. 가 아니라 왼쪽 윙인 아담 존슨일 거예요.”
담담하게 단언하는 소하.
그리고 말 떨어지기 무섭게 미래의 성범죄자 아담 존슨이 공을 잡는다.
[선덜랜드 선수들이 아담 존슨에게 공을 몰아주는군요!]
[돌격대장 역할을 제대로 맡았어요. 다행스럽게도 1차전과는 다르게 몸은 가벼워 보이네요.]
가벼운 몸놀림을 선보이는 아담 존슨. 그가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상당한 파괴력을 갖춘 선수가 된다.
준수한 속도.
뛰어난 드리블.
날카로운 왼발.
괜히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프리미어리그에 데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를 대비한 소하의 선택을 받은 선수도 만만치 않다.
[매튜 다이스 대신 오늘 선발 출장한 엑토르 베예린이 아담 존슨을 꽁꽁 묶는군요!]
[아! 속도 싸움이 되질 않아요. 윙어가 윙백보다 속도가 느리다면 돌파가 어렵죠!]
엑토르 베예린.
바르셀로나의 ‘라 마시아’에서 인정받은 재능 중의 재능!
훗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수가 되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다음 시즌에 커리어 하이를 달성하는 초신성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매튜 다이스의 활약에 자극받아 과거보다 훨씬 더 의욕이 충만한 상태.
아담 존슨을 꽁꽁 묶어놓을뿐더러 간간이 파괴적인 오버래핑을 통해 선덜랜드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후후후. 바로 그거지. 미성년자 성매매를 하는 쓰레기 새끼 정도는 엑토르 베예린의 한 끼 간식거리일 뿐.”
비열한 미소를 짓는 소하.
통쾌하다는 속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암만 어린 나이부터 주목받던 아담 존슨일지라도 베예린급 재능은 절대 아니다.
기껏해야 국내에서 주목받던 선수 아닌가. 훗날 채식주의자로 전향하는 엑토르 베예린은 전 세계가 주목하던 선수였다.
쉽게 말해, 가지고 있는 그릇의 용적 자체가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아담 존슨은 속도보다는 기술이 강점인 선수.
기술도 어느 정도 뛰어나고 속도는 비교도 어려울 만큼 뛰어난 베예린과는 최악의 상성이다.
“엑토르 베예린이 아담 존슨을 완전히 가지고 노는데요?”
“당연하죠.”
“녀석을 선발한 이유가 있으셨군요. 허허. 대단하십니다.”
혀를 내두르는 잭 밀러.
상대의 수를 정확히 계산하고 최적의 선수를 내보내는 게 도저히 사람 솜씨가 아닌 것만 같다.
“마치, 미래를 보고 대응 전술을 짜 맞추시는 거 같습니다.”
“···그, 그럴 리가요. 하. 하하.”
그냥 칭찬 삼아 과장한 말인데 매우 당황하는 소하를 바라보며 잭 밀러는 눈썹을 꿈틀거린다.
“엥? 감독님 왜 갑자기 식은땀을···.”
“더, 더워서요.”
“덥다···구요? 지금 1월 말인데요···.”
“전 잉글랜드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인이라고요. 서울은 더럽게 춥단 말이에요. 서울에서 살다 보면 이 정도는 덥게 느껴진다고요. 거기가 얼마나 추운데.”
“···그렇···습니까?”
“시, 시끄러워요! 당신이 서울 가봤어! 가봤냐고!”
강짜를 놓는 소하. 늘 그랬듯 잭 밀러에게는 잘 먹힌다.
“아, 알겠습니다. 왜 성질을 내시고 그러십니까. 허허.”
“흥. 경기에나 집중하죠. 지금까지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지만 언제 불똥이 튈지 모르니까요.”
소하와 잭 밀러는 다시금 경기장에 집중한다.
물론, 경기장에는 특이한 일 따윈 벌어지지 않는다. 그저 경기 초반처럼 지루한 줄다리기가 계속 이어질 뿐.
그래서 소하와 밀러가 잡담할 시간이 생긴 것이다.
[맹공을 퍼붓는 선덜랜드. 하지만 포츠머스의 수비가 너무 끈끈해요.]
[오늘도 여지없이 공격적으로 나올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수비적인 3백을 준비해온 포츠머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수비력도 좋네요.]
수비 전술을 들고 온 소하도 신기했지만, 수비 전술이 잘 먹히는 것이 더 신기한 장내 아나운서와 해설.
이 또한 소하가 그동안 무던히도 노력했던 결실이다.
‘오늘의 수비는 한결 쉽습니다.’
‘맨날 둘이서만 수비하다가 다 같이 수비하니까 너무 날로 경기를 하는 거 같은데···.’
매우 여유로운 케빈 도슨과 찰스 말로리. 평소 같았으면 넓은 뒷공간을 둘이서만 커버하던 그들 아니던가.
하지만, 오늘은 중앙에 아담 웹스터란 든든한 후배도 있을뿐더러 커버할 공간도 좁다.
평상시에 비하면 너무나도 마음의 여유가 넘쳐 다른 선수들의 수비 리딩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라인 맞추십시오! 로보! 뒷공간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꼬맹아! 너무 앞으로 튀어 나가서 감독님이 지시한 압박 범위를 벗어났잖아! 정신 차려!”
각기 다른 방식으로 포츠머스의 수비를 조율하는 두 주전 중앙수비수. 이 때문에 생각보다 수비가 튼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길. 나도 공격에 더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싶은데.’
‘거슬린다. 이 녀석들의 움직임이.’
‘잠깐만 틈을 보여도 물어뜯을 놈들이야. 위험해.’
잔뜩 움츠러든 선덜랜드의 수비도 포츠머스의 안정적인 수비력에 이바지하는 중이다.
보통, 공격 전술에서는 수비진의 높이가 굉장히 중요하다. 수비-중앙-공격 라인의 간격이 촘촘해야 제대로 된 공격 작업이 나오니까.
하지만, 지금의 선덜랜드는 수비진과 중앙-공격진의 거리가 상당히 멀다.
이는, 포츠머스의 공격진인 도봉산-조쉬 킹- 잭 해리슨 때문이다.
1차전에 이들의 뛰어난 실력에 혼쭐이 난 선덜랜드의 수비진은 함부로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던 것.
혹여라도 참지 못하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가,
[역습! 역습입니다! 도봉산을 필두로 포츠머스의 3톱이 선덜랜드의 진형을 헤집습니다!]
[정말 매서운 역습이에요. 도봉산의 돌파, 잭 해리슨의 더미 런. 조쉬 킹의 파괴적인 침투. 이 셋이 합쳐져 거친 하모니를 이룹니다. 선덜랜드는 집중해야 해요! 실점은 순식간이니까요!]
매우 매우 위험한 역습에 혼이 쏙 빠지도록 혼쭐이 났다. 이미 전반전에만 세 차례나 이런 경험을 했던지라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 선덜랜드 수비진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억제력이라는 거지.’
핵미사일의 존재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존재만으로도 전쟁의 억제기가 되지 않던가.
그간 쌓아온 포츠머스의 뛰어난 공격력은 상대 공격의 억제제가 된 상황이었다.
‘슬슬 끝이 보이는군.’
시간은 전반 44분.
곧 전반전 종료를 앞둔 소하의 머릿속에는 결승전이 치러질 잉글랜드의 축구 성지, 웸블리 스타디움이 어른거렸다.
***
별 소득 없이 끝난 전반전.
승리를 확신하며 여유로운 소하와 정반대로 거스 포예트 감독은 애가 탔다.
‘이대론 안 된다.’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도저히 골을 넣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돌격대장을 맡은 아담 존슨은 엑토르 베예린에게 꽁꽁 묶였으며,
번뜩이는 마무리 본능 가진 저메인 데포는 포츠머스의 협력 수비에 존재감이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까.
‘결단이 필요하다. 이래저래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45분뿐이니까.’
마침내 결단을 내린 거스 포예트.
밸런스가 무너져 수비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가 되겠지만 더 공격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후반전.
선덜랜드는 포츠머스의 공격진을 무시한 채 더욱 앞으로 나와 억지로 공격작업을 끼워 맞춘다.
[선덜랜드가 칼을 빼 들었습니다! 한발 물러섰던 수비진은 물론, 미드필더 진까지 적극적으로 박스로 침투하는군요!]
[이제 볼 장 다 봤다는 겁니다!]
뒤를 생각하지 않은 선덜랜드의 공격은 매섭기 짝이 없다. 거센 폭풍 속에 휘청이는 팀의 상황에 소하는 의외로 침착함을 유지한다.
‘한때야. 회광반조라고 볼 수 있지.’
회광반조.
해가 지기 직전에 일시적으로 햇살이 강하게 비추어 하늘이 밝아지는 현상.
혹은,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원기를 되찾는 상태를 비유하는 표현이다.
‘지금의 선덜랜드는 숨통이 끊어지기 전에 하는 마지막 발악. 슬슬, 완전히 명줄을 끊어줄 선수가 나올 텐데.’
침착하게 저승사자를 기다리는 소하.
그리고, 소하의 바람대로 선덜랜드의 목숨을 완전히 끊어줄 저승사자가 등장한다.
[어처구니없는 중거리 슛! 당연히 포츠머스에게 통하진 않습니다. 쉽게 공을 되찾은 포츠머스의 케빈 도슨. 길게 전방을 향해 공을 뿌립니다.]
[훌륭한 패스에요. 정말 수비수 맞나요? 칼 같은 타이밍에 역습을 시도하던 잭 해리슨의 진로에 공이 정확히 떨어집니다!]
케빈 도슨의 장기가 불을 뿜었다.
여기에 미래에서 온 꼰대 로봇, 잭 해리슨은 컴퓨터와 다를 바 없는 정확한 라인 계산으로 오프사이드에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1:1 기회.
그리고 잭 해리슨은 이런 기회에서 절대 실수하지 않는 선수였다.
“끝입니다.”
얼굴에 마취 주사라도 맞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왼발 슛을 시도.
공을 그대로 파 포스트의 골네트로 휘어져 들어간다.
완벽한 감아차기가 아닐 수 없는 멋진 슛!
흡사, 티에리 앙리의 전매특허가 왼발로 펼쳐진 모습이다.
[골입니다! 골! 포츠머스가 기어코 선덜랜드의 숨통을 끊어버립니다!]
[후반 77분. 포츠머스가 드디어 결승전행 티켓을 손에 움켜쥘 결정적인 득점을 기록합니다!]
“와아아아! 잭 해리슨! 잭 해리슨!”
“우리가 결승으로 간다아아아!”
“포츠머스! 포츠머스!”
비명을 지르는 포츠머스의 원정 서포터들. 한겨울임에도 웃통을 벗고 미친 듯이 발광한다.
그에 반해, 선덜랜드의 홈팬들은 고개를 떨구며 숙연해졌다.
그래도 팀이 힘들 때도 응원해야 진짜 팬인 것. 선덜랜드 서포터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마! 아직 20분 남았다! 두 골만 넣으면 돼!”
“힘내라! 너희는 할 수 있어!”
“죽어도 우린 선덜랜드야 더 목소리를 높여!”
더욱더 목소리를 높이는 선덜랜드의 홈팬들과 서포터즈.
과연,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열정을 가진 그들답다.
축구의 신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뜨거움에 미소를 지어줄지도 모르는 일.
‘그럴 순 없지. 경기를 식힌다.’
하지만, 소하는 지극히 차갑게 경기를 운영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냉각제도 있지 않은가.
“마이클 반즈. 나가서 낚시나 하고 와라. 아주 천천히 말이야.”
“하하. 알겠습니다.”
칼빈 필립스와 교체되어 들어온 마이클 반즈. 특유의 느긋함으로 경기의 템포를 극도로 낮춘다.
선덜랜드 팬이라면 속이 뒤집힐 만큼 천천히 경기를 운영하며 결국 20분을 쉽게 보내버리는 포츠머스.
“됐다.”
“됐다고요! 감독님! 결승전 진출이라고요! 우리가 해냈어요!”
경기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포츠머스의 모든 관계자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환성을 내질렀다.
117년 만에 리그컵 결승전 진출!
역사적인 위업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소하는 생각보다 표정이 좋지 않다. 조금 씁쓸한 커피를 머금은 듯한 얼굴.
‘···수고했다. 부디 이번 세계에서는 망하지 말길.’
포츠머스와는 정반대로 초상집 분위기인 선덜랜드를 바라보며 측은한 눈빛을 감추지 못한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을 선덜랜드에게 마음속으로 위로주를 건네는 그였다.
< 104화. 14-15시즌 후반기. (10) > 끝
ⓒ 블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