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14-15시즌 후반기. (7) >
빌어먹을 전반전이 끝났다.
전반전 45분의 결과는 1-1.
경기를 주도했지만 동점이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챔피언스 리그처럼 원정 다득점이 연장전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건 아니었지만, 부담이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대로 끝난다면 우리는 선덜랜드의 홈으로 가서 연장전까지 지를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 떨어질 확률이 많이 올랐다는 이야기. 그런고로 후반전에는 더욱 공격적으로 나서서 승리를 쟁취해야만 한다.
그나저나 허 참. 어이가 없긴 하다.
확실히 프로통산 630경기 241골 넣는 선수는 특별한 구석이 있나 보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날아온 똥 같은 패스를 골까지 연결하다니.
저메인 데포. 당신 때문에 난 망했어.
“후반전 시작하자마자 선수교체를 진행할 예정이다.”
하프타임 라커룸 대화.
생각보다 분위기는 더욱 좋지 않다.
불의의 일격에 당한 덕분에 선수들은 조금 정신이 나가 있었으니까.
일단은 정신을 깨워줘야 하겠군.
“뭘 그렇게 얼이 빠져있어?”
“···.”
“행운의 골을 한 대 얻어맞았다고 쫄기는. 불알 떼라, 치킨들아. 이참에 레이디스 팀으로 바꿀까? 쯧쯧.”
혀를 쯧쯧 차며 놀리자 선수들은 발끈하며 금세 기운을 차린다.
“뭐라고요?!”
“다른 건 다 참아도 겁쟁이라고 하는 건 못 참죠!”
“와. 꼭지 돌게 하시네!”
“이건 성차별적인 발언입니다.”
미국과 러시아만큼은 아니지만, 영국도 꽤 마초 문화가 자리를 잡은 나라. 특히나 직업이 운동선수일수록 이런 경향이 큰 편이어서 노발대발한다.
캬. 효과 좋네.
“하는 짓이 그런데 아니라고 하면 신빙성이 있을까?”
“···자, 잠깐 후반전을 어떻게 해내야 할지 걱정했던 것뿐입니다.”
예리한 팩트 공격에 빈궁한 변명을 줄줄 읊은 미운 내 새끼들. 한 시간 정도는 말로 두들겨 패주고 싶지만, 시간도 없고 목적을 달성했으니 나중으로 미루자.
“그럼 내가 실수했네. 사과할게. 미안.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선수교체를 진행하신다고···.”
“맞다. 선수교체. 선수교체는 아쉽겠지만 마이클 반즈가 내려와 줘야겠다.”
첫 타자는 마이클 반즈. 경기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후반전의 전술 변경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알겠어요. 낚시할 체력이 더 많아지니 나쁠 건 없죠.”
평소처럼 느긋하게 대답하는 마이클 반즈. 말만 듣는다면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꽤 아쉬워하는 기색이다.
이런 큰 경기에서 45분 만에 교체된다는 건 축구선수가 부업인 그로서도 조금 아쉬울 만했으니까.
“이해해줘서 고맙다. 반즈와 바꿔서 경기장에 들어올 사람은 스티븐 데커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팀의 8번 스티븐 데커. 반즈와는 상당히 다른 유형이다.
마이클 반즈가 정적으로 팀의 기어 역할을 맡는다면, 스티븐 데커는 말 그대로 박스에서 박스까지 왔다 갔다 하는 돌격대장이다.
매우 뛰어난 활동량
양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킥.
공격진영으로 올라가기를 좋아하며 매우 동적인 움직임.
이런 스티븐 데커의 전진성과 킥 능력은 후반전의 공세에서 큰 역할을 맡은 거다. 지금은 역동적으로 마구 공격을 해야 할 시점이었으니까.
“알리와 보조를 맞춰 공격적으로 경기에 임해라. 중거리 슛 기회가 오면 주저 말고 때려.”
“명심하겠습니다. SIR.”
묵묵히 듬직한 대답을 하는 스티븐 데커. 군대 마니아인 녀석다운 대답이다.
유리 몸만 아니었으면 앞으로도 핵심 선수로 썼을 텐데 말이야.
지금은 철강왕 상태지만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잔이라 오랫동안 볼 선수가 아닌 것이 아쉽다.
이래저래 무기라는 건 성능보다는 신뢰성이 중요한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필립스는 좀 더 수비적으로 해줘. 스티븐 데커의 공간까지 커버해줘야 해서 바쁠 거야.”
“염려하지 마세요. 충분히 할만하던데요.”
칼립 필립스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전반전 MOM은 녀석 아니던가. 프리미어리그에서 구르고 구른 중견 미드필더인 리 케터몰을 아주 그냥, 가지고 놀았다.
역시 미래의 국가대표.
이대로 무럭무럭 크면 훨씬 더 대단할 선수가 될 거 같다.
“우리의 목표는 골이다.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골 하나만 보면 된다. 알겠냐?”
“넷!”
다시금 투지에 불타오르는 선수들. 그래, 이 녀석들이라면 어떻게든 해줄 거라 믿어 봐도 손해는 아니겠지.
아님···, 말고.
***
-삐익.
리그컵 준결승전의 후반전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프래튼 파크에 울려 퍼졌다.
선수 한 명을 바꾼 포츠머스와는 다르게 교체 없이 똑같은 자세로 경기에 임하는 선덜랜드.
그 결과,
[선덜랜드가 많이 밀립니다. 전방으로 한 명 더 공격에 가담하도록 전술을 수정한 포츠머스에게 맥을 못 차리고 있어요.]
[전반전에도 다소 열세였는데 지금은 숨도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샌드백 신세를 면치 못했다.
얼핏 보면 바람 앞의 등불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황.
하지만 겉보기보다 선덜랜드는 여유로웠다.
‘우린 항상 맞던 팀이니까.’
‘상당히 매서운 공세지만 빅4의 공격에 비교하자면 산들바람 수준이야.’
‘집중력만 잃지 않으면 이대로 경기를 끝낼 수 있다.’
거대한 육식공룡들에게 돌아가면서 맞아봤던 경험!
그리 명예롭게 자랑할만한 경험은 아니지만 큰 도움이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포츠머스의 매서운 공세를 꽁꽁 틀어막으며 질식 수비를 펼친다.
아무리 포츠머스가 리그 수준에 비해 좋은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프리미어리그의 거대 구단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선덜랜드가 아주 제대로 드러누웠습니다. 포츠머스가 도저히 뚫고 갈 방법이 없습니다!]
[3부리그 팀을 상대로 1부리그 팀이 우주 방어를 하는 장면입니다!]
꽤 재미있는 경기다.
하부리그 팀의 공세를 상위리그 팀이 막아내는 경기라니.
보통은 역할이 바뀌는 것이 정석 아니던가. 이 때문에 포츠머스의 홈구장 프래튼 파크는 모처럼 함성 대신 야유로 가득 찬다. 물론, 수비만 하는 선덜랜드를 향한 야유였다.
“우우우! 자존심도 없냐?! 3부리그 팀을 상대로 수비만 하는 게 말이 되냐?”
“쪽팔린 줄 알아!”
“프리미어리그의 수치들!”
“너희가 그래서 강등권인 거야. 그런 식으로 공을 차다 보면 언젠간 3부로 오게 될 거다!”
온갖 폭언 폭설이 쏟아지는 언어폭력의 현장! 솔직히 이 정도 비판이 나올 만은 했다. 엄연히 두 단계나 차이가 나는 리그에 속한 팀들끼리의 승부였으니까.
하지만, 소하의 생각은 달랐다.
‘축구라는 스포츠에서 승리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다. 뭐로 가든 이기면 장땡인 거야. 아마추어도 아니고.’
소하의 승리 지상주의!
물론, 스포츠정신에 벗어난 편법을 배제한 후의 이야기다.
그리고 적어도 약팀을 상태로 하는 수비축구는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 방법이 아니다. 조금, 아니, 많이 부끄러운 행태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관중 중에 예언가가 있나. 3부리그로 강등당하는 걸 제대로 맞추네.’
현자가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선덜랜드가 강등당한 이유를 정확히 파악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여튼, 중요한 건 틈을 만들어야 하는데···.’
슬쩍 시계를 바라보는 소하.
이미 후반전은 1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35분을 그토록 두들겼지만, 좀처럼 문이 열리지 않자 슬슬 속이 탄다.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선덜랜드의 홈경기에서는 굉장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시골집 똥개도 자기 앞마당에서는 짖는 소리가 더 큰 법이었으니까.
‘교체 카드를··· 써야겠군.’
남은 교체 카드는 두 장.
지금까지 교체하지 않았던 이유는 따로 없다. 그냥 교체할 필요가 없었을 뿐. 팀에서 가장 강한 팀을 내보냈으며, 딱히 부진한 선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
정석으로 되지 않는다면 변수를 끌어낼 선수를 투입해야 한다.
‘누굴 쓸까.’
스윽.
소하가 벤츠를 훑어보자 벤치에서 경기장을 바라보던 선수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낸다.
‘경기장에 나가고 싶어요!’
무언의 압박.
하나같이 경기장에 나가 지금의 답답함을 풀어주고 싶어 좀이 쑤신 모양새다.
‘그렇다면···. 좋아. 정파가 먹히지 않았으면 사파로 가야지. 무협지 주인공도 그렇잖아? 명문정파에서 쫓겨난 뒤 기연을 곁들인 마공이나 사파 무공으로 복수하는···.’
슬며시 사악한 미소를 짓는 소하.
이래저래 그는 정파보다는 사파가 좋았다. 굳이 더 자세하게 분류하자면 마교나 혈교가 좋았고.
굉장히 파격적인 취향인 그의 선택은 안토니오 그린과 아담 웹스터였다.
“이번 경기의 경과는 너희 둘의 뚝배기에 달렸다.”
“뚜, 뚝배기요?”
“그게 뭐죠?”
이상한 소하의 한국말에 의문을 가지는 아담 웹스터와 안토니오 그린.
소하는 그런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가리킨다.
“머리말이야. 머리.”
사악하게 웃는 소하.
심술궂은 악동 같은 모습에 두 선수는 한줄기 식은땀을 흘렸다.
***
후반 38분.
드디어 포츠머스가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두 명의 선수교체. 어떻게든 승부를 보겠다는 의지라고 보인다.
하지만,
[안토니오 그린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아담 웹스터도 들어오네요.]
[안토니오 그린의 투입은 이해가 갑니다만 수비수인 아담 웹스터는 조금 이해가 어려운 선택입니다. 지금 포츠머스는 골이 필요할 때 아닙니까?!]
[더욱 공격적인 전술 변경을 위해 유형이 다른 수비수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두고 봐야겠군요.]
장내 아나운서와 해설, 그리고 관중들까지 아담 웹스터의 투입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아! 아담 웹스터를 조쉬 킹과 바꾸어 줍니다. 이게 뭐죠?!]
주전 공격수인 조쉬 킹을 빼고 아담 웹스터를 투입하는 모습에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공격수를 빼고 수비수를 넣는다니.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교체다. 평소 이상한 행동을 일삼는 소하가 아니었다면 노망이 났나 싶은 선택이다.
[혹시 3백으로 변경을 시도하는 것일까요? 저번 경기에서 포츠머스는 3백으로 대승을 거두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델리 알리와 공격수인 안토니오 그린을 교체했으니까요.]
나름대로 상황에 ‘일반적인’ 상황에 어울리는 해설을 하는 장내 아나운서와 해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소하의 밑바닥을 예측할 수준이 아니었다.
터벅터벅.
수비진영이 아닌 조쉬 킹에 자리에 서는 아담 웹스터.
그 옆에 나란히 서는 안토니오 그린.
자리를 바꾸는 도봉산과 잭 해리슨.
이것이 의미하는 건 한 가지 확실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해설 따위는 하나도 맞는 구석이 없었다는 것.
그들로서는 소하를 이해하기엔 내공이 아직 모자랐다.
그래도 축구계에서 구른 시간은 순식간에 소하가 던진 문제의 답을 도출하게 도와줬다.
[아! 이게 뭔가요! 포츠머스가 4-4-2시스템을 시도하려는 듯합니다!]
[맙소사. 4-4-2는 포츠머스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포메이션 아닙니까? 더군다나 수비수인 아담 웹스터를 공격수로 사용하다니요! 하하, 정말 성소하 감독의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습니다!]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소하의 변칙적인 전술.
이에, 부동심을 유지한 채 지휘하던 선덜랜드의 거스 포예트 감독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어난다.
‘뭐, 뭐지? 분명 4-4-2가 확실한데···. 데이터가 없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군. 일단은 지켜보자.’
일단은 현상을 고수하기로 하는 거스 포예트 감독. 두 장신 선수를 이용해 헤더 골을 만들어내겠다는 그림이지만, 막을 만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에게는 웨스 브라운과 존 오셰이라는 공중볼에 강한 수비수가 있었으니까.
‘무리수를 던졌군. 하지만 재미는 있겠어.’
거스 포에트 감독은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파격적일 줄 몰라서 절로 흥이 난다.
[남은 시간은 7분. 과연 성소하 감독이 꺼내든 승부수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줄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요!]
소하가 포츠머스를 맡은 지 1년 6개월. 그동안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4-4-2 전술은 7분 남은 리그컵 준결승전 1차전의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 101화. 14-15시즌 후반기. (7)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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