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9화. 14-15시즌 후반기. (5) >
리그컵 준결승전 경기 당일.
포츠머스의 클럽 버스가 매끈한 자태를 뽐내며 경기장을 향해 미끄러지듯이 들어온다.
포츠머스의 상징인 짙푸른 색 위에 현재 선수들과 감독의 얼굴이 색칠된 멋진 버스.
이 버스의 모습을 발견한 모든 포츠머스의 시민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박수를 보낸다.
“와아! 우리의 영웅들!”
“힘내라! 우린 너희들은 믿는다!”
“조쉬 킹! 넌 차기 잉글랜드 국가대표라고!”
“성소하 감독님! 저랑 결혼해요!”
“끝까지 싸우자!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포츠머스 만세!”
“반즈! 너한테 받은 낚싯대 아직도 잘 쓴다!”
“케빈 도슨 저랑 사귀어주세요!”
그저 네모난 퍼런색의 운송 수단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거늘. 교황이라도 나타난 듯한 반응이다.
하긴, 이런 열광적인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백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약소구단이 된 지 수십 년 동안.
완전히 몰락한 2010년대에.
포츠머스에서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우승하겠다고 외친 감독은 소하 말고는 없었으니까.
심지어 결승전도 아닌, 4강전에서 우승을 하겠다는 포부를 당당하게 밝히다니. 이 무슨 자신감과 패기란 말인가.
포츠머스 팬들이 속옷을 적시며 환희에 온몸을 떨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후후. 다 계획대로군.’
물론, 소하가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진행했을 리는 만무.
나름대로 다양한 계산이 바탕이 된 선포였다.
‘먼저, 선수들의 동기부여.’
일류와 이류를 나누는 기준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경기장에 나서느냐에서부터 시작된다.
비과학적인 정신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정신 무장’이란 스포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심리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감정 없는 축구 로봇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표정 좋고.’
버스 안에서 열렬한 응원의 말을 듣는 선수들의 표정은 비장하기 그지없다.
그 말 많던 조쉬 킹은 입을 꾹 닫은 채 전의로 온몸을 불태우고 있었고,
델리 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침착하던 케빈 도슨과 잭 해리슨은 그들답지 않게 몸이 달아오른 모습이다.
다른 선수들도 대동소이 한 상태.
모두가 한시라도 빨리 경기를 치르고 싶어 죽겠다는 태도다.
어찌 보면, 조금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선수들은 시즌 시작부터 리그컵 우승이 목표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생각만 하는 것과 말을 통해 실체화된 것은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지.’
소하의 강력한 엠바고로 인해 그저 스무 명 남짓만 알고 있었던 ‘우승’이란 목표.
따라서 그리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만천하가 아는 사실.
우승이란 무게감이 눈앞에 제대로 펼쳐지자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린 선수들은 프로 생활 초장기에 무언가를 이룰 수가 있다는 희망을.
선임 선수들은 오랜 프로 생활 끝에 드디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는 각오를.
좋은 영향력은 서로 융합반응을 일으켜 경기력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터. 소하의 노련미 넘치는 사기 관리였다.
‘그리고···. 홈경기의 승리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
홈&어웨이 방식의 토너먼트.
홈경기에서는 무조건 승리를 거두어야 다음 라운드 진출에 매우 유리하다.
게다가 축구는 보통 홈구장에 펼쳐지는 경기에서 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비일비재.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홈 관중들의 열정적인 응원 덕분이다.
12번째의 선수는 서포터라고 하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리고 보다시피 소하는 12번째 선수들의 정신 무장도 완벽히 개조에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화제성.’
조금 인기가 떨어지는 리그컵 경기.
심지어 리버풀과 첼시 같은 팀들이 펼치는 큰 경기가 아닌 약소클럽들끼리의 경기는 찬밥 취급받기 쉽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어림도 없는 말.
이제는 몰락했다고 여겨지던 구단의 창단 117년 만의 첫 리그컵 우승 도전기.
대충 듣기만 해도 흥미가 샘물 솟듯 올라온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약자가 스스로 일어나서 성공하는 이야기를 사랑했으니까.
‘기왕 하는 경기 돈도 잔뜩 벌어둬야지.’
그야말로 멋들어진 일석삼조의 술수!
아무도 눈치채고 있지 못했지만, 이미 리그컵 준결승전 1차전의 상황은 모조리 소하의 통제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
경기 시작 전, 드디어 선발명단이 발표되었다. 먼저, 선덜랜드의 선발명단.
[GK-코스텔 판틸리몬.
LB-파트릭 판안홀트.
CB-존 오셰이.
CB-웨스 브라운.
RB-세바스티안 라르손.
MC-잭 로드웰.
MC-리 케터몰.
ML-아담 존슨.
MR-에마누엘레 자케리니.
ST-저메인 데포.
ST-스티븐 플레처.
SUB: 비토 마노네, 세바스티안 코아테스, 빌리 존슨, 조르디 고메즈, 산티아고 베르히니, 윌 버클리, 코너 위컴.]
정통의 4-4-2를 들고나온 선덜랜드.
상당히 익숙한 이름이 많이 보인다.
최장신 골키퍼로 유명한 코스텔 판틸리몬.
과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던 존 오셰이와 웨스 브라운.
훗날 미성년자 성매매로 교도소로 들어가는 왼발 테크니션 아담 존슨.
유리몸이지만 선덜랜드에서 죽어도 주급은 절대 깎지 않아 팬들의 고혈압을 유도하는 잭 로드웰.
영국축구와 토트넘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프리미어 리그 최다득점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저메인 데포.
나름대로 상당히 강한 스쿼드이다.
존 오셰이와 웨스 브라운이라는 경험 많은 수비진.
득점기계, 저메인 데포와 선덜랜드의 ‘에이스’ 아담 존슨이 이끄는 공격진.
여기에 리 케터몰이라는 4-4-2 전용 중앙 미드필더는 팀의 기어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이름값만 보자면 포츠머스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한 스쿼드.
겉만 본다면 왜 강등권인지 의문이 들지 않기가 힘들다.
이에 맞서는 포츠머스의 선발진은,
[GK-말콤 우드.
LB-앤디 로버트슨.
CB-케빈 도슨.
CB-찰스 말로리.
RB-매튜 다이스.
DM-칼빈 필립스.
MC-델리 알리.
MC-마이클 반즈.
AML-도봉산.
AMR-잭 해리슨.
ST-조쉬 킹.
SUB: 재커리 뱅크스, 데클렌 라이스, 아담 웹스터, 스티븐 데커. 커너 러셀, 존 말로리, 안토니오 그린.]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수들로 꾸렸다.
그동안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선수단 전력을 최대한 보존한 덕이 크다.
선덜랜드와 비교하자면 다소 이름값이 떨어지지만 그리 만만치는 않다.
더욱이 리그1을 조금이라도 챙겨본다면 말이다.
리그2를 제패하고 리그1마저 정복할 기세인 대형 공격수 유망주, 조쉬 킹.
잉글랜드 내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는 중인 천재, 델리 알리.
부활한 코리안 특급, 도봉산.
축구 로봇, 잭 해리슨.
포츠머스의 빙벽, 케빈 도슨.
리그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선덜랜드가 쉽사리 보면 안 되는 선수들이다.
게다가 선수단 나이가 많은 선덜랜드에 비해서 포츠머스는 상당히 젊은 팀.
기동력이나, 체력적인 부분에서는 포츠머스가 근소 우위를 차지한다.
여기에 포츠머스의 홈경기. 선덜랜드의 쉬운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경기가 예상되는 리그컵 준결승전 1차전이었다.
***
“먼저, 여기까지 올라온 너희들에게 찬사를 바친다.”
경기전 라커룸 대화.
소하는 평소답지 않게 칭찬으로 서두를 꺼내었다.
“감독님 뭐 잘못 드셨나요?”
“죽을병이라도 걸리셨나···.”
“그냥 평소처럼 하시죠?”
매우 당연하게도 돌아온 선수들의 냉소.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질겁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새끼들. 너희들은 역시 매가 어울려. 지기만 해봐. 태어난 걸 후회하게 해줄 테니까.”
“···.”
“···.”
싱긋 웃으며 험한 말을 내뱉는 소하.
그처럼 말과 표정이 불균형하면서도 잘 어울리는 사람은 또 없을 거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다시 한번 지침을 상기시켜주마.”
진담 98%, 농담 2%였지만 이래저래 농담이 섞이긴 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늘 공격진은 늘 그랬든 도봉산 위주로 풀어나간다.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통했던 확실한 공격 루트라는 건 너희들도 잘 알겠지?”
솔직히 부활한 도봉산은 리그1에 머물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선수.
그가 있는 포츠머스와 없는 포츠머스는 급이 다른 팀이었다.
“그렇죠.”
“맞는 말인데, 곧 제가 따라잡을 듯.”
모두가 동의한다. 선수들 사이에서도 확고히 자리 잡은 도봉산의 위상이 돋보인다.
“그리고 오늘의 핵심은 수비다. 솔직히 존 오셰이와 웨스 브라운, 이 틀딱들은 우리 팀이라면 어렵지 않게 뚫을 수 있을 거라 믿거든.”
한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영광을 이끌었던 선수들을 노인네 취급하는 소하.
그가 도봉산-델리 알리-조쉬 킹-잭 해리슨으로 이어지는 공격진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엿볼 수 있는 발언이다.
“저메인 데포. 이 선수가 핵심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양발을 이용해 골을 만들어내는 타고난 골잡이야. 예전만큼의 신체 능력은 없지만, DNA에 각인된 골잡이 본능은 무시하지 못할 만큼 위협적이지.”
얼마 전에 조지 알티도어와 스왑딜로 선덜랜드에 합류한 저메인 데포.
포츠머스로서는 처음 상대해보는 진정한 골잡이다.
요전에 만났던 해리 케인은 아직 만개하기 전인 유망주였으니까.
“합류한 지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자력으로 골을 만들어내는 선수야.”
훗날 선덜랜드에서 팀의 득점 중 60%를 담당하는 선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골을 수컹수컹 넣는 미친 능력을 갖췄다는 뜻. 매우 위협적이다.
“케빈 도슨, 찰스 말로리. 너희 둘은 믿는다.”
믿음 가득한 눈으로 두 중앙수비를 바라보는 소하. 이에, 케빈 도슨과 찰스 말로리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각오를 다진다.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긴말할 필요 없다. 경기장에서 아예 지워버리도록 하지.”
믿음직한 두 선수의 듬직한 대답.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소하는 따로 당부의 말을 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좋아. 그럼 이제 가자. 나와 우리를 위해. 우리를 응원해주는 수만 명의 서포터들을 위해. 승리를 가져오자.”
말을 마치고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으로 향하는 소하. 오늘따라 유달리 넓어 보이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선수들도 투지를 불태웠다.
***
언제나 그렇듯 푸른 물결로 가득한 포츠머스의 홈구장 프래튼 파크.
푸른 물결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의 붉은 기운이 심상치 않다.
[오늘 프래튼 파크는 유달리 뜨겁군요! 흡사 푸른색 불꽃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창단 처음으로 리그컵 결승전에 도전하는 자리지 않습니까! 여기에 성소하 감독의 폭탄선언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겠지요!]
장내 아나운서마저도 혀를 내두르게 할 만큼 열광적인 분위기다.
선덜랜드를 응원하러 온 원정 팬들을 숨 막히게 할만한 열기의 폭풍.
하지만, 선덜랜드도 만만치 않은 서포터를 가진 팀이다.
“선덜랜드! 선덜랜드!”
“우리도 지지 말자!”
“선수들에게 우리의 목소리가 닿아야 한다! 더 내질러!”
“우리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어떻게든 이겨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해!”
포츠머스의 홈팬들에게 지지 않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뿜어낸다.
이런 열정적인 팬을 가진 팀이 프런트의 삽질로 망해버린다는 미래가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포츠머스! 포츠머스!”
“선덜랜드! 선덜랜드!”
한시도 끊이지 않는 프래튼 파크의 열정적인 함성. 이윽고 선수들이 자리를 잡으며 경기 시작이 코앞까지 임박한다.
[곧이어 경기가 시작되겠군요! 오늘 포츠머스의 전술은 어떨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전 경기에서 3백을 사용하며 수비적으로 움직일 거라고 예상되었지만, 오늘은 평소 같은 4-3-3으로 나왔군요. 무슨 생각일지 도통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죠. 보통 홈경기에서는 수비적으로 임하는 것이 정석이니까요.]
장내 아나운서의 말처럼, 홈&어웨이 방식의 토너먼트에서는 홈경기는 수비적으로 운영하는 게 이득이다.
이것은 ‘원정 다득점 원칙’ 때문.
홈팀이 홈에서 실점했을 때 겪게 되는 부담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일단, 경기가 시작돼봐야 포츠머스의 전략을 파악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같은 포메이션이라도 다른 전술을 사용하는 성소하 감독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확고한 주력 전술을 가진 팀이 가지는 엄청난 이점이다.
같은 틀 안에서 몇몇 부분을 조금만 손봐줘도 맞춤전술이 탄생하니까.
[그에 반해 선덜랜드는 예측하기 쉽습니다. 평소에 사용하던 4-4-2전술을 들고 왔습니다.]
[성소하 감독이 말했었죠. 동양에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있다고요. 상대적으로 강팀인 선덜랜드는 흔들리지 않고 할 일을 하면 승리를 거두리라 생각할 겁니다.]
[그렇죠. 여기에 며칠 전 영입된 저메인 데포는 새로운 전술과도 다름없는 선수니까요.]
[맞습니다. 다만, 저희도 예측했던 선덜랜드의 전술을 성소하 감독이 모를 리는 없습니다. 분명 대응 전술을 가져올 감독이라 궁금증이 증폭됩니다.]
무난한 선덜랜드의 전술.
이를 소하가 모를 리가 있겠나.
하지만 겉보기에는 별다른 방법을 준비해온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다만 수비적일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승리로 향하는 지름길이며, 알고 막는 건 한결 쉬웠으니까.
[모든 건 경기가 시작돼야 알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경기가 시작될 시간입니다!]
-삑!
장내 아나운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울리는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
그리고 펼쳐지는 포츠머스의 움직임은 모두의 탄성을 자아낸다.
[아! 포츠머스가 강력한 전방 압박을 시작합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공격적인 움직임!]
[우리는 당당하게 공격으로 승리해서 결승전에 가겠다! 라고 외치는 듯한 모습이에요! 과연 성소하 감독!]
한두 점 실점하면 어떠리.
일단 골을 넣고, 넣어서 승리하면 아무 문제 없다.
‘쫄 필요가 있나?’
경기장 내 대형스크린에 비치는 소하의 모습.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099화. 14-15시즌 후반기. (5)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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