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8화. 14-15시즌 후반기. (4) >
선덜랜드.
2015년도에는 계속 중하위권을 유지하며 골골거리는 구단. 과거에는 1부리그에서 6번이나 우승을 한 근본 넘치는 팀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2년 뒤, 16-17시즌에는 EPL에서 강등.
17-18시즌에는 챔피언십 리그에서 강등.
충격의 백투백 강등을 당하며 리그1, 그러니까 우리가 머문 3부리그로 떨어지는 구단이다.
요컨대, 한방에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
이렇듯, 해외 팬 처지에서 보기에는 별 매력이 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한국 팬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팀이다.
답너뛰,
‘답답하면 너희들이 가서 뛰든지’의 용성기 선수가 13-14시즌에 뛰었던 팀이었으니까.
게다가 넷플러스 다큐멘터리인 ‘죽어도 선덜랜드’에서 축구 애호가들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그 구단이기도 해서 인기가 대단하다.
나조차도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완전히 포츠머스에 미친 사람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꼭 한 번쯤 봐보길 추천한다.
그나저나, 참으로 운명이 얄궂다.
내가 사랑하는 포츠머스 같은 운명을 2년 뒤면 맞이하게 될 팀과 리그컵 준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니.
신의 악취미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얄궂다.
곧 있으면 동병상련을 겪을 팀끼리 맞붙이다니.
뭐, ‘자,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 이건가?
하지만 승부는 승부.
비록 포츠머스 다음으로 좋아하는 팀이지만 봐줄 생각은 없다.
아니지, 리그1 팀이 프리미어 리그 팀을 봐주긴 뭘 봐주겠는가.
사력을 다해도 이길까말까 한데.
하여튼, 모든 수단을 모조리 동원해서 결승전에 진출하고야 말겠다.
이것만이 나와 우리 팀의 유일한 활로였으니까.
***
지금까지 단판이었던 리그컵 경기.
하지만 4강전, 즉 준결승전부터는 홈&어웨이 방식으로 두 번 치르게 된다.
두 경기 전부 다 동점일 때는 연장전.
연장전에도 동점일 때는 원정 골 우선.
원정 골마저도 같다면 승부차기에 들어간다.
즉 포츠머스로서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토너먼트 방식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토너먼트는 단판 승이 전부였으니까.
이 말은 소하 또한 외부에서 보기에는 첫 경험이라는 뜻이었다.
“선덜랜드와 포츠머스의 리그컵 준결승전은 선덜랜드의 우위로 예상된다.”
“강등권의 선덜랜드, 리그1 우승 자리를 예약한 포츠머스. 리그 차이는 있지만, 기세가 다르다. 하지만 성소하 감독은 제대로 된 홈&어웨이 토너먼트를 경험한 적이 없다. 이런 중요한 경기에는 경험만큼 소중한 것은 없기에, 선덜랜드의 승리가 확실해 보인다.”
“한 경기를 두 경기만큼 길게 봐야 하는 방식은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천재라고 칭송받는 성소하 감독일지라도 경험의 차이를 극복하기는 힘들 것.”
부정적인 견해를 쏟아내는 축구 평론가들.
사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실에 입각한 팩트였을 뿐. 그만큼 홈&어웨이 방식의 토너먼트는 경험이 중요했으니까.
이는 포츠머스 현지 팬이나 한국의 해외 팬들도 누구나 아는 사실. 이미 체념의 상태에 빠진다.
“후우. 리버풀이나 첼시가 아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쉽지 않을 경기일 거야.”
“3부리그 팀이 준결승전에 진출한 것만 해도 잘한 거지. 비록 질 땐 지더라 박수를 아끼지 않을 거야.”
“포츠머스 수고했다.”
“강등권인 선덜랜드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리그컵에 전력을 다할 거야. 그리고 우리 팀은 ‘아직’ 프리미어 리그 팀의 ‘진심’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지.”
벌써 초상집 분위기.
그래도 소하와 선수들에 대한 찬사는 아끼지 않는다. 애초에 포츠머스가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 그 누가 욕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정도면 매우 바람직한 팬 분위기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야랄 났네. 야랄 났어. 존나 할만한데? 하여튼 파이팅이 없어, 파이팅이. 재수 없게 벌써 진다고 단정 짓네.”
그저 코웃음을 치는 소하.
상당히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다.
“우리 팀의 서포터들이 이렇게 축알못들이라니.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군.”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소하로서는 도대체 왜 선덜랜드 따위에게 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감독님 왜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십니까?”
자신감이 폭발하는 소하의 모습에 잭 밀러 수석코치가 의문을 표했다.
아무리 봐도 소하가 이런 경기에서의 경험이 없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축구계에서 오래 굴러본 경험은 쉽지 않은 경기라고 외쳤거늘.
이 젊은 감독이 두려움 하나 없자 도무지 이해가 어렵다.
“뭐야? 아저씨도 축알못이었어요?”
도끼눈을 뜨며 째려보는 소하.
이럴 때 잘못 건드리면 다시 ‘천재 감독’이라고 놀릴 게 뻔했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큼큼. 저야 감독님을 무조건 믿지요. 그저 순수한 호기심입니다. 하핫.”
“아무리 봐도 축알못 냄새가 풍기는데.”
“아닙니다!”
“흠. 좋아요. 일단, 체급 차이가 별로 나지 않잖아요.”
“네?”
이게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프리미어 리그에서 수년째 생존 중인 팀을 너무 낮게 보는 거 아닐까 싶다.
“까고 말해 ‘생존왕’ 타이틀이 명예로운 건 아니잖아요. 선덜랜드는 지금 챔피언십과 프리미어 리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팀이에요.”
“···그렇죠.”
“그리고 우리는 객관적으로 챔피언십 리그의 중위권 정도 팀이겠죠. 저의 신비로운 지휘와 우리 팀 선수들의 실력을 보자면요.”
“···.”
할 말을 잃은 밀러.
자기 입으로 자신의 지휘가 신비롭다고 자찬하는 사람은 생전 처음 봤다.
그래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어서 상당히 공감된다.
“···그렇게 보면 실력 차는 얼마 나지 않네요.”
“그렇죠. 토트넘 2군이나, 선덜랜드보다 더 막장인 Q.P.R에 비하면 강하겠지만요.”
Q.P.R은 정말 약했다.
팀의 조직력이 완전히 무너져 주전끼리 붙었음에도 포츠머스가 여유롭게 이겼으니까.
콩가루 클럽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선덜랜드는 이래저래 이번 시즌에는 살아남는 팀. 강등당하는 Q.P.R과 비교하기엔 실례가 아닐 수 없다.
“좋습니다. 실력 차이는 얼마 나지 않네요. 그래도 우리가 약세 아닙니까? 감독님도 홈&어웨이 경기에 대한 경험도 없으시고요.”
“후후. 무슨 소릴. 전 경험이 많아요.”
“네···?”
밀러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다.
경험이 많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소하가 정식으로 감독직을 시작한 건 정확히 1년 6개월.
그 시간 동안 밀러가 소하의 곁을 떠난 적은 없었다.
‘아차차.’
수상하다는 표정을 짓는 밀러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하는 오랜만에 식은땀을 흘렸다.
분위기에 취해 과거의 경험을 말해버리다니.
재빨리 수습해야만 한다.
“···큼큼. 그, 뭐냐. 이, 이런 경기를 많이 봤다는 이야기죠.”
“···흐음···. 보는 것과 직접 해보는 건 다를 텐데요.”
소하의 어처구니없는 변명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는 밀러. 오히려 의문을 증폭시켜버렸다.
이럴 땐 한 가지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시끄러워요. 저는 결과로 보여주는 사람이니까요. 조용히 저의 ‘축구 교실’이나 감상하세요.”
아몰랑, 작전.
배를 깔고 드러누워 배짱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이 방법은 잘 통했다.
“아, 알겠습니다.”
비록, 품격이 저쪽 아래까지 떨어지지만 말이다.
***
순식간에 다가오는 리그컵 준결승전.
승점 15점 차이로 리그1 단독 1위를 질주 중인 포츠머스.
리그컵 경기에 집중할 상황을 제대로 만들어놨다.
“일주일 뒤에 다가올 다다음 경기는 리그컵 경기입니다. 오늘의 경기는 다가올 중요한 경기 전에 벌이는 마지막 실전인데요, 실험하실 계획입니까?”
리그1 27라운드.
콜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전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는 이미 리그컵 경기의 기자회견과 다를 게 없었다.
상대인 콜체스터보다 리그컵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올 정도. 평소의 소하였다면 화를 냈을 거다.
콜체스터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예의고 나발이고 밑밥을 깔아 승리를 챙겨야 할 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소하도 다소의 예의는 구석이 치워버리기로 작정한다.
“비밀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실전이니 리그컵 경기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는 없겠죠.”
두루뭉술한 소하의 답변.
실험을 하는 건지 하지 않는 건지 모를, 모호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평소처럼 직설적인 화법이 아닌지라 의심이 잔뜩 가는 발언이기도 했다.
그리고 경기장에도 이상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 오늘 포츠머스의 선발은 조금 독특합니다. 오랜만에 3백을 가지고 왔군요.]
[리그컵 준결승전을 앞두고 여러 가지 전술 실험을 하는듯합니다. 이거, 콜체스터로서는 불편하겠는데요?]
장내 아나운서의 말처럼 소하의 행동은 콜체스터 서포터와 감독에게 큰 불편을 주었다.
“아니, 지금 우릴 실험용 쥐로 취급하는 건가? 건방진 애송이가 나날이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군.”
“싹수없는 새끼!”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실험하다가 줘 터지면 참 기분 좋겠지?”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저 오만방자한 포츠머스의 콧대를 분질러버려!”
길길이 날뛰는 콜체스터 관계자들.
소하는 순식간에 콜체스터 서포터들이 가장 싫어하는 한국인으로 낙점됐다.
이대로 진다면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판을 받을 터. 자충수라는 평가마저 나온다.
물론, 소하에게는 언제나 계획이 존재했다.
[포츠머스의 4-0승! 콜체스터를 홈으로 불러들여 시원하게 농락합니다! 대단한 경기력이었습니다.]
[실험이 아니었나 봅니다. 콜체스터의 약점을 정확히 찌르며 가지고 노는 모습이었습니다.]
4-0, 대승.
터져 나오던 비판을 모조리 잠재우는 압도적인 승리. 거침없이 소하를 헐뜯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모조리 벙어리로 변했다.
“감독님께서 오늘 가져오신 전술이 실험이라는 비판이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네요. 전 단지 콜체스터를 상대할 가장 좋은 전술을 들고 온 겁니다. 억울하네요.”
썩은 미소를 지으며 기자회견에서 울분을 토하는 소하. 연기력이 수준급이다.
사실은 진짜로 실험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찌 소하의 속을 알까. 나날이 실력이 느는 연기에 껌벅 속아 넘어간다.
“···사과하겠습니다.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했습니다. 성소하 감독의 프로의식을 제가 너무 낮게 봤나 봅니다.”
토니 홈스, 콜체스터 감독의 공식적인 사과부터,
“성소하 감독에 대한 폭언과 비판을 공식적으로 사과드립니다.”
콜체스터 서포터즈의 공식적인 사과까지.
아주 제대로 속여넘겼다.
그리고 속지는 않았지만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 등장했으니.
“음? 그저 맞춤 전술이었단 말인가?”
경기를 주시하던 선덜랜드의 감독, 거스 포예트 감독이 그 주인공.
‘리중딱’이란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한국의 리버풀 팬들에게는 천하의 몹쓸 사람이었지만 나름대로 프리미어 리그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감독. 그런 그가 단순한 기만책에 넘어갈 리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된다. 성소하 감독은 기만책을 자주 사용하는 감독이니 휘둘리지 말아야 해.’
하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기도 애매하다.
4-0이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포츠머스의 3백은 꽤 위협적으로 보였으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3백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 두는 것이 좋겠군.’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거스 포예트 감독.
언뜻 보면 소하의 기만책이 실패로 끝난 듯 보이지만 제대로 성공했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다면 대성공이지. 한 가지에 쏟는 집중력과 두 가지에 쏟는 집중력은 무게가 다를 테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눈빛을 빛내는 소하. 아직 1주일이나 남은 경기였지만, 장외 결투가 살벌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
***
1월 21일.
드디어 리그컵 4강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1차전은 포츠머스의 홈경기다.
단단히 준비한 소하와 포츠머스.
경기전 기자회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이번 고비만 넘기면 ‘결승전’이라는 영광의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리그컵이든 뭐든 포츠머스 같은 약소 클럽에게 결승전이란, 일생에 한 번 보기도 힘든 경험.
입으로는 져도 괜찮다고 하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감독님 드디어 리그컵 준결승전입니다. 3부리그 팀이 준결승전에 오른 건 매우 드문 일인데요, 소감이 어떠십니까?”
휴고 어스틴은 상당히 들뜬 기분을 감추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다.
“소감이라···. 아직 소감을 말하기에는 저희가 이룬 게 없네요.”
찬물을 끼얹는 소하. 이제는 적응했다고 자만한 휴고 어스틴은 또다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았다. 오늘 같은 날에도 퉁명스럽게 대꾸할 줄이야. 당황스럽다.
“···네?”
“말 그대로 준결승에 올라왔다는 사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4강 갔다고 우승컵을 주는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은···?”
소하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는 휴고 어스틴.
그러나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한다. 머릿속을 강타하는 듯이 떠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두려웠다. 괜히 말하면 부정을 탈지도 몰랐으니까.
그런 휴고 어스틴의 속을 풀어주려고 작정한 듯, 소하는 덤덤하게 속뜻을 밝힌다.
“인제야 밝히네요. 맞습니다. 이번 시즌 저희 목표는 리그컵 우승이었어요. 저희를 응원해주시는 서포터들에게 구단 역사상 최초로 리그컵 우승 트로피를 선물할 계획이에요. 그걸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어···. 어···?”
드디어 공개한 숨겨왔던 이번 시즌 목표.
충격적인 소하의 발언에 잠시 얼어붙은 기자회견장은 이내, 열광에 빠진다.
“미, 미친.”
“와···. 준결승전까지 그냥 올라온 게 아니라 모두 계획이었구나! 애초에 노리던 거였어!”
“특보야 특보!”
“빨리 1초라도 더 빨리 기사 올려!”
용광로가 따로 없다.
순식간에 소하의 포부가 포츠머스 전체로 퍼졌고, 팬들도 거품을 물며 환호성을 내질렀음은 당연했다.
아주 제대로 불을 지핀 소하.
희대의 방화범이 되었지만 그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 098화. 14-15시즌 후반기.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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