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6화. 14-15시즌 후반기. (2) >
세상의 상식이 벗어난 관리팀장의 말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래서 뭐? 나보고 어쩌라고.
내 월급으로 버스를 사라고?
잠시 공황상태가 왔지만 일단 정신을 차리자 눈알이 뒤집혔다.
“이 대머리 새끼!”
분노가 가득 담긴 일갈과 함께 곧바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가, 감독님! 어디가세요!”
뒤에서 관리팀장의 절규가 들렸지만 무슨 상관이랴. 난 지금 당장 대머리 새끼의 면상에 욕을 박아주고 싶을 뿐.
오랜만에 극대노 상태를 유지한 채 CEO 사무실의 문을 호쾌하게 열어젖혔다.
“야이! 개···!”
“아! 오셨군요. 일단 앉으시지요.”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한 침착한 대응이다.
노크도 없이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왔건만. 너무나도 침착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분노를 삭이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간의 상황.
예상대로 가관이었다.
“···그러니까···. 법정관리 기간 때 기존의 보유했던 버스 두 대를 다 팔았다?”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빈궁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구단 버스는 꽤나 가격이 나가는 물건 아닙니까?”
그렇다. 그냥 버스도 상당한 가격.
여기에 귀한 몸이신 선수들을 모시는 버스라면 옵션이 달랐다. 좌석도 매우 커서 침대와 다를 바 없을 정도랄까.
하여튼, 팔면 돈이 된다는 거다.
“그리고··· 버스 두 대를 팔고 염가에 중고버스를 하나 사서 지금까지 운영했다?”
“상당히 솜씨가 좋은 정비소였습니다. 중고를 새것처럼 정비해주었으니까요. 상당한 이익을 봤습니다.”
“···.”
아이고 자랑이다. 이새끼야.
그러니까 니 말은 지금까지 잘 굴러간 중고 버스를 믿고 새 차를 사지 않고 있었다는 거 아니야.
“그래도 스페어 버스는 하나 구비해뒀어야죠. 언제 퍼질지 모르는데.”
“인정합니다.”
순수히 인정하는 대머리 새끼의 말에 분노가 누그러든다. 근데,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사람 불안하게 만드네.
“솔직히···. 밀월 사건 같은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습니다. 그때 받은 엔진부의 충격이 상당하다고 하더군요.”
“···두 달 전 일인데요?”
“그때는 아무 이상 없다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아쉽게도 전에 이용한 정비소가 아니어서 그런지 실력이 떨어지더군요.”
“···.”
요컨대, 지 잘못은 별로 없다는 이야기다. 개 쌍놈의 새끼. 하여튼 지 잘못은 항상 없어. 이 대머리 쥐새끼.
잠깐 근데,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이 사건을 해결할 사람은 나라고 하지 않았나?
“좋아요.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어요. 근데 그거랑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빨리 나가서 버스나 사러가요. 전국을 뒤져서라도.”
“···큼큼. 이제 본론에 들어갈 시간입니다.”
“네? 지금까지 본론이 아니었다고요?”
“그, 그렇습니다.”
내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헛기침을 연신 날리는 브라이언. 잠시 목을 가다듬던 그는 진정한 ‘본론’을 꺼낸다.
“좀 전에 말했던 법정관리 시절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질질 끌지 말고 요점만.”
“하, 하하. 여, 역시 성격이 급하시군요. 알겠습니다. 법정관리 기간 때 원래 사용하던 구단의 버스를 사 간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지도 알고요.”
“그럼 그 사람한테 웃돈 줘서라도 다시 사 오면 되겠네요. 그럼 수고.”
난 미련 없이 안녕을 고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꼬라지가 딱 보니까 그 사람이 팔지를 않아서 나보고 설득하라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내일 아침에 다 같이 택시 타고 원정경기를 떠나보자고. 이야, 뉴스 1면을 장식하겠구만. 쪽 좀 팔리겠어.
“자, 잠깐만.”
브라이언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지만 냉정하게 돌아섰다.
진짜 택시 탈 각오를 단단히 했기에 어떠한 아쉬움도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거늘.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그, 그 사람은 성 감독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매우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죠.”
“···?”
브라이언의 마지막 말에 그만, 호기심이 생겨버렸다.
뭐? 내가 아는 사람? 나랑 가까운 사이?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근데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망해가는 구단의 버스를 살만한 머저리는 없을 텐데···.
잠깐만, 혹시?
“구, 구단주님입니다. 리처드 맥닐 구단주 말입니다! 그, 그분께서 버스를 받고 싶다면 성 감독님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이대로 성 감독님이 외면하신다면 내일 신문 1면에 구단 망신이 실리게 될겁니다···!”
“···씨발.”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존나게 불안하더라고.
“···.”
난 브라이언을 싸늘하게 내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구단주 영감탱이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눈앞의 쥐새끼에게 빚을 하나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버스 하나 구하지 못하는 구단이라는 사실이 전국, 전 세계에 알려진다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따로 없다.
구단이란 회사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가겠지. 이건 앞으로의 여정에도 썩 좋지는 않다.
선수라는 직원들이 일 못하는 회사에 입사하고 싶겠는가?
‘아, 그 버스도 없어서 택시 태워 보내는 병신구단? 거길 내가 왜 가?’
이런 말이 분명히 나올 거다.
이렇게 된다면 앞으로의 영입 전선에 막대할 차질이 생길 것은 명약관화.
이래저래 내가 나서야 할 듯싶다.
염병할 폐급 구단.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정말로.
“후우···. 알겠어요. 당신 나한테 빚 하나 생긴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그 노친네···가 아니라 구단주님은 어디 계신데요?”
내 질문에 혈색이 돌아온 브라이언이 빙긋 웃으며 답한다.
“항상 만나던 곳···이라고 하면 알 거라고 하시더군요. 구단주님과 사이가 좋으셔서 좋겠습니다. 부럽군요.”
“별로요. 그럼 이건 외근으로 처리해 주세요. 수당까지 붙여서 말이죠.”
“···큼큼. 잘 처리하겠습니다.”
자, 그럼 무슨 꿍꿍이인질 모를 노인네를 상대하러 외근을 나가볼까.
2.
구단주 노인네와 항상 만나던 곳은 뻔하다. 포츠머스의 남쪽에 자리 잡은 바다가 아름답게 보이는 고급 레스토랑.
그나저나 이곳도 꽤 오랜만에 찾은 기분이다. 아니, 기분 정도가 아니라 정말 오랜만이다. 일 년이 넘지 않았나.
“안으로 드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지배인이 멋들어지게 안내를 해준다.
이번에도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린 듯, 안에는 구단주 할배 혼자 느긋하게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을 뿐.
넓고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왠지 모를 삭막함이 느껴진다.
“뭐 보세요? 또 너튜브 보세요?”
인사같지 않은 인사를 하자, 리처드 맥닐 구단주는 옅은 미소를 짓는다.
내가 그리고 반가운 걸까? 하긴 나처럼 일 잘하는 직원이 없···.
“이번 뚱보와 삐쩍이는 역시 재밌군. 둘의 입담이 제법이야.”
“···그거 보고 웃으신 겁니까?”
“당연하지 않겠나? 자네가 재미있는 친구는 아니지 않은가. 허허.”
“예예. 그러시겠죠.”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아무튼 내가 개고생하는 걸 알아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아, 하나 있다. 울 엄마. 빨리 일 끝내고 전화나 해야겠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죠. 버스 내놓으세요.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구단주가 구단 버스 가지고 협박을 하다니. 제 기준으로서도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거든요?”
회귀를 경험한 나로서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쉽사리 버스를 내주지 않는 것도 이해가 어렵고,
애초에 버스를 저 양반이 구매한 사실조차도 비상식의 극한이다.
도대체 왜? 가만 생각해보면 이 할배의 행동에는 상식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다.
망한 구단의 버스를 구매하지 않나,
망한 구단을 인수를 하지 않나,
망한 구단에게 나름대로 지원을 톡톡히 해주질 않나.
이렇게 보면 포츠머스라는 축구 구단에 관심이 많아보이지만, 또 그런 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경험과 이런 버스 협박 같은 행동을 종합하자면 말이다.
거참, 묘한 노친네야.
“언제나 자네는 빠른 걸 좋아하는군. 오랜만에 단둘이 만났는데 시간을 여유롭게 가져보게나.”
“늙으면 성격이 급해진다는 말도 다 헛소리였나 보네요. 구단주님을 본다면 말이죠.”
“다 개인차가 있는 것 아니겠나? 일단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세.”
“뭐, 좋아요.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하니까요.”
급여가 상당히 올랐지만 나는 여전히 가난하다. 대부분의 금액을 비트코인에 집어넣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오르지도 않는 덕에 내 마음마저 배고파졌다. 왜 오르지 않을까? 내가 사서 그런가? 조금 더 존버를 해야 하나?
하여튼, 지금도 공짜 밥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 내가 괜히 탕비실을 터는 게 아니라고.
공짜 밥과 공짜 간식.
이것만큼 맛나는 것도 몇 없지 않은가. 하하.
“식사 나왔습니다.”
오르지 않는 비트코인을 생각하다 보니 곧이어 주르륵 나오는 고급 음식들.
예나 지금이나 보기만 해도 위액이 철철 나오는 자태다.
하지만 난, 1년 반 전의 애송이가 아닌 몸.
예전처럼 호들갑 떨지 않을 정도의 배포가 생겼단 말이다. 촌놈도 아니고 이 정도 음식이 날 오두방정 떨게 할 순 없지.
“허허. 자네도 변했군. 처음에는 눈을 빛내며 허겁지겁 먹어치우던 모습이 귀여웠는데 말이야.”
“커흡. 귀, 귀엽다니요.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올해 들어서 가장 경악스러운 말이네요.”
“내 나이쯤 되면 곧 서른인 자네도 어린아이로 보인다네. 그래서 조금 섭섭하다네. 자네가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말이야. 역시, 사람은 지갑이 두툼해지면 변하는 법이란 말인가.”
“···.”
뭐라는 거야, 이 영감탱이가.
물론, 내가 돈을 많이 벌기는 한다.
솔직히 금수저,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을 제외하면 이 나이에 나만큼 많이 버는 월급쟁이는 없을 거다.
나름 자수성가의 극한이랄까. 그래도 아직 자만 따위는 하지 않는다. 생활도 검소하기 짝이 없었고. 집사인 세바스찬 씨가 제발 옷 좀 사 입으라고 잔소리할 정도다.
이런 나에게 변했다고 하다니.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아니, 이건 모욕이라고!
“허헛. 농담일세. 자네가 물질의 힘에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안다네.”
내 표정이 썩었다는 걸 귀신같이 눈치챈 구단주 할배가 다급히 변명을 했다.
“제법 마음에 드는 변명이긴 하네요.”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더욱 마음에 드네요.”
“그러면 된 거 아니겠나?”
“그렇죠.”
쉰소리를 주고받은 나와 맥닐 할배는 약속이라도 한듯 입을 다물고 음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역시, 이 집 밥이 맛있긴 해.
구단밥이나 집밥은 너무 건강 위주라서 아쉬웠는데 말이야. 여기는 건강을 조금 배제하는 터라 입에 착착 감긴다.
“후우. 잘 먹었습니다. 이게 밥이지.”
순식간에 테이블 위에는 빈 접시만 남았다. 나야, 원래 잘 먹는다 쳐도 구단주 할아범도 만만치 않다.
하기야, 60이 넘은 나이임에도 저 건장한 체구는 대충 먹어서 나올 그것이 아니지.
“나도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였네.”
구단주 할배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나저나 크리스마슨데 저랑 식사를 함께해도 되나요? 가족이랑 보내셔야죠.”
“가족이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구단주 할배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뭐랄까. 그리움과 분노가 뒤섞인,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가족이란, 때론 타인보다도 먼 사이지. 신경 써줘서 고맙지만 자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라네.”
“뭐, 알겠어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가 보다. 하긴, 회귀 전에도 이 양반이 가족과 무엇을 하는 걸 본 적이 없긴 하다.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가족끼리 사이가 좋지 않은 재벌 가문이라는 건가? 파고들면 상당히 재밌을 거 같지만, 남의 사생활은 존중해줘야 하는 법.
지금은 대충 넘어가자.
“그럼, 이제 슬슬 버스를 내놓으시죠?”
밥도 먹었겠다, 이제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해결해야 할 시간이다.
아무리 봐도 쉽사리 줄 거 같지는 않다.
어떻게 구슬려야 할까. 일단 정석을 따라서 강짜를 놔봐야겠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구단 주차장에 주차를 끝냈을 거라네.”
“···네?”
“자네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부’했다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하게나. 허허.”
망할 영감이 날 가지고 놀았군.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토끼춤을 추는 손행자가 따로없었다.
“근데, 왜 버스가지고 협박을 하신 겁니까?”
“소중한 물건이니까.”
“소중한··· 물건이요? 버스가?”
“어떤 물건이든 어떤 사람에게는 소중함이 깃들 수 있는 거라네.”
그건 그렇지. 나로 예를 들면, 과거에 어머니가 사주신 싸구려 차 세트가 보물이니까.
“그럼 이제 다시 구단으로 돌아가 봐야겠네요. 크리스마스 선물··· 잘 받았습니다. 저도 선물을 드려야겠는데요?”
돈 많은 양반이라 물질적인 거는 별로 감흥이 없을 테고···. 뭐, 감독이라면 승리로 보답해야겠지.
아마도 저 할배도 그걸 원하고 있을 거다.
“선물이라···. 좋지.”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
“하지만 난 이미 자네에게 받았다네.”
“네?”
“그만 일어나지. 우리는 서로 바쁜 사람들이 아니었나? 다음에 보게나.”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레스토랑을 빠져나가는 리처드 맥닐 구단주.
그의 눈가에는 왠지 모를 쑥스러움이 어린 듯 보였지만 착각임이 분명했다.
저 양반에게 쑥스러움이라니. 말이 되지가 않지. 그럼 나도 이제, 구단으로 돌아가서 일을 마무리해야겠다.
이래저래 나다운 크리스마스였다.
< 096화. 14-15시즌 후반기.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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